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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그 다운 고백 (75/101)


75화. 그 다운 고백
2022.09.18.



 


- 그걸 왜 저한테서 찾아요.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사이 현조는 수희의 입을 열 미끼를 생각해내야 했다.

알려달란다고 덜컥 말해줄 수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원하는 게 뭡니까.”

현조가 먼저 제시하자 수화기 너머로 흡족한 웃음이 들렸다.


- 면세점에 브랜드 하나 입점하고 싶어요. 그거 따기 너무 힘들어요.

“어떤 브랜드 말입니까.”

- W 백화점만 가지고 있는 유일무이한 브랜드.

“아! 이탈리아 브랜드 레오루카 말입니까?”

- 네. 그리 고가는 아니지만, 매장을 까다롭게 내잖아요. 젊은 층 사이에서 핫한데 욕심나네요.

“의류는 힘들고 잡화 쪽으로 추진해 보죠.”

- 좋아요. 그럼 잘 들으세요.

“준비됐습니다.”

- 여자가 남자를 떠날 때는 한 가지 이유밖에 없어요.

현조가 전화기를 귀에 바짝 붙였다.


“그게 뭐죠?”

-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때.

“…….”

- 이해가 됐나요?

“난 하연을 사랑합니다.”

- 동서가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요? 도련님이 표현이나 제대로 했겠어요? 하연아. 사랑한다, 뭐 이런 말이라도 한 적 있어요? 대답해 보세요.

현조는 말문이 막혔다.


- 야! 현조야! 그냥 고백해!

옆에서 현태의 목소리가 들렸다.

뚝. 현조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현조는 수희의 말에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뒤늦게 깨달은 제 감정에 허우적대느라 정작 하연의 마음은 생각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사랑하지 않은 때가 없었지만 표현한 적 없었기에 하연은 당연히 느끼지 못했을 터.

거기다 사랑하지 말라고 단단히 못 박으며 건넸던 계약서.

사랑한다는 걸 깨닫고 이곳까지 왔을 때 무턱대고 돌아가자고 했으니 하연의 반응이 이해가 됐다.

‘사랑한다’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게 뭐가 그리 힘들다고 해주지 않았을까.

수백 번 수천 번이라도 말해줄 수 있는데. 지금이라도 말해주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하연에게 가고 싶었지만, 밤이 늦었다.

다음 날.

현조는 아침부터 서둘렀다. 하연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성큼성큼,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걸음걸이지만 분명 달랐다. 심장이 간지럽고 자꾸만 웃음이 걸렸다.

상점에서 꽃도 한 다발 샀다. 이번에도 여러 가지 꽃을 섞어서 크게 한 다발을 샀다.

9시쯤에 도착한 현조는 하연을 기다렸다. 문이 열린 건 10분 후쯤이었다.

창으로 현조를 본 하연이 일찍 온 게 불만인 듯 뚱한 얼굴로 나왔다가 손에 들린 꽃을 보고 표정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왜 이리 일찍 왔어요.”

“보고 싶어서.”

“…….”

하연은 상체를 돌리며 시선을 회피했다. 귓불이 붉어진 걸 보고 현조는 작게 웃었다. 부끄러운 건 정말 숨기지 못하는 하연이었다.


“자, 선물.”

다른 건 몰라도 꽃만큼은 하연이 좋아할 것 같았다.


“널 닮아 보이는 꽃으로 다 샀어.”

하연은 꽃다발을 받아 들고 해사하게 웃었다.


“이게 다 날 닮은 꽃이에요?”

“예쁘고, 화사하고, 싱그럽고, 향기롭고.”

“고마워요. 이렇게나 많이.”

하연은 문을 열어주며 들어오라고 했다.


“다들 일찍 나갔어요. 소파에 앉아서 잠깐 기다려요.”

하연은 기분 좋은 얼굴로 꽃을 갈라 끝을 자르고 화병에 담아 놓고, 아침에 만든 샌드위치와 커피를 현조 앞에 내려놓았다.


“좀 들어요. 내가 만들었어요.”

“그래. 고마워.”

“먹고 얼른 나가요. 오늘은 영화 촬영지 갈 거예요.”

“그래.”

하연과 현조가 버스를 타고 내린 곳은 켄우드 하우스라는 곳이었다. 미술관이자 컨트리 하우스로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었다.


“여기가 오고 싶었어?”

“왔었는데 현조 씨랑 걷고 싶어서요. 정원이 산책하기 좋거든요. 또 미술품 구경도 하고요.”

하연은 현조보다 약간 앞서서 가벼이 걸어 나가다가 어느 지점에서 우뚝 멈춰 섰다.


“여기! 여기가 ‘노팅힐’ 영화 촬영장소예요.”

하얀 건물을 등지고 하연이 환하게 웃었다.


“하연아.”

현조가 하연을 조용히 불렀다.


“왜요?”

“혹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이유가 나 때문이야?”

“현조 씨, 뭔가 큰 착각을 하는 것 같은데요.”

“착각?”

“내가 돌아가지 않겠다는 이유는 현조 씨가 나랑 살아야 하는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에요.”

“혹시 그게 가장 큰 이유야?”

“당연하죠. 살면서 내내 늘 의문이었기도 하고요.”

사는 내내? 현조는 이 말이 날카로운 단편이 되어 심장에 아프게 박혔다.

마음 졸였을 하연이 안쓰러웠고, 동시에 무신경했던 자신을 자책했다.


“나는 너와 살 때 재미있었어.”

현조가 하연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 재미있어서 결혼했다면서요.”

다소 퉁명스러운 대꾸였다.


“부인은 안 할게. 재미도 있었고 기분도 좋았어. 그래서 자꾸만 보고 싶어지고 이야기하고 싶어졌지.”

하연은 무슨 소린지 몰라 그의 말을 다시금 되씹어보았다.


“나는 사랑이 뭔지 모르던 놈이야. 그런데 네가 가르쳐 줬어.”

하연의 눈이 점점 커졌다.


“처음엔 몰랐어. 어떤 게 사랑인지.”

현조는 담담히 제 마음을 고백했다.


“네가 웃으면 기분이 좋고, 네가 울면 신경이 쓰였어.”,

“내 공간에 네가 있는 게 당연하다고 느껴졌고.”,

“널 안고 있으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어.”

느리게 전해지지만, 정확히 전달되는 말이었다.


“네가 사라지고 긴 밤을 지새우며 술로 버틸 때 알았어. 내가 얼마나 널 사랑하는지 말이야.”

하연의 눈에 눈물이 그득하게 차올랐다.


“하연아.”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하연의 심장을 파고들어 헤집었다.

하연은 현조의 얼굴을 마주했다. 경사진 곳이라 아래 있는 그와 눈높이가 맞았다.

현조는 무척이나 그답게 담담히 고백했다.


“사랑해.”

“사랑해, 설하연.”

“사랑해, 설하연, 내 작은 새.”

연이은 고백에 하연의 심장은 아플 만큼 빠르게 진동했다.

눈물이 눈동자의 공간을 빽빽하게 메웠지만, 현조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내 작은 새는 여기, 여기 있어.”

현조가 한 손으로 심장 근처를 툭툭 쳤다. 그곳은 상처가 있는 곳이었다.


“내 작은 새, 설하연은 내 심장이야.”

조용한 울음이 하연의 입을 통해 터져 나왔다. 흐느끼는 하연에게 현조가 팔을 벌렸다.


“늦어서 미안해.”

팔을 벌리고 기다리는 그에게 다가갔다.

작은 새가 포로롱 날아가듯 사뿐하게 그의 품에 안착했다.


“미안해. 내가 미안해.”

머리 위에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하연의 가슴에 파고들자, 아프기도 하고 설레기도 해서 엉엉 울었다.

그간 마음을 들킬까 봐 전전긍긍했던 시간이 영화필름처럼 지나갔다.

원망한 날이 많았다. 그래서 그에게 똑같이 해줄 작정이었는데, 그녀는 현조에게 언제나 약했다.


“미워요.”

울먹이는 소리로 하연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렸다.


“미안해.”

“내가 얼마나 눈치 보고 마음 졸이고 살았는데.”

“눈치를 왜 봐. 마음을 왜 졸여.”

“마음 들킬까 봐요. 사랑하지 말라고 했으니까요!”

“미안해. 앞으로 내가 잘할게.”

현조는 사과하고 다짐했다. 그의 이 짧은 말이 어떤 의미인지 하연은 알고 있었다. 그는 뱉은 말을 지키는 남자였다.


“안 가려고 작정했는데, 정말 작정했는데…….”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려보았다. 이조차 해 본 적 없었던지라 조금 어색했다.


“네가 안 가면 나도 눌러살 작정이었어.”

하연이 젖은 얼굴을 들어 현조를 쳐다봤다. 진심인 걸 알면서도 괜히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어서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정말요?”

“정말.”

“그런데 나 마음이 다 풀린 건 아니에요.”

“그래? 어떻게 하면 풀릴까.”

“음…… 매일 다른 컨셉의 남편을 기대해 볼게요.”

하연이 음흉한 눈빛으로 웃었다.


“그래. 기대해. 지금은 아내에게 고백하고 사과의 키스를 하는 남편.”

말 끝나기가 무섭게 하연의 입술을 덮쳤다. 눈물로 젖은 입술을 가르며 하연의 여린 점막을 천천히 쓰다듬듯 조심스럽게 탐했다.

하연은 입안이 부드럽게 감기는 느낌에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사과의 키스라지만 위로의 키스 같았다.

길지 않지만, 기분 좋은 키스가 끝나고 현조는 타액에 반들거리는 하연의 입술을 엄지로 쓸었다.


“그런데 야왼데…….”

뒤늦게 부끄러워 현조의 품에 안겨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도 안 쳐다봐.”

“아니에요. 저기 옆에 커플이 쳐다봤어요.”

“부럽겠지.”

현조는 하연의 턱을 잡아 다시 한번 입술을 베어 물고 진득하게 키스했다.

키스가 끝나고 하연이 쑥스러움에 현조의 손을 잡고 자리를 이동했다.


“그런데 나 아버님 어머님 볼 면목이 없어요. 다시 돌아간다고 하면…….”

“아무 걱정하지 마. 좋아하실 거야.”

“정말요?”

“그럼. 정말이지.”

근심 가득한 눈으로 현조를 올려다봤다. 그는 하연의 눈가에 남은 눈물을 엄지로 덜어내며 걱정도 덜어내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하연은 그간 영국에서 있었던 일을 천천히 들려주었다.

하연이 떠들자, 현조의 입가가 솟았다. 재잘대는 하연의 목소리는 늘 현조를 웃음 짓게 했다.


“좀 늦었지만, 집에서 점심 해줄게요. 불고기 어때요?”

“좋지.”

하연은 집으로 돌아와 곧장 주방으로 들어갔다. 앞치마를 두르고 전투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밥할까?”

현조가 다가오자 손을 들어서 막았다.


“아뇨! 손님이잖아요. 그냥 있어요.”

“천천히 해.”

“현조 씨가 제대로 못 먹었다니까 맛있게 하려고요.”

“네가 한 건 뭘 해도 맛있어.”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하연이 여봐란듯이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렸다.


“앉아 있어요. 밥 세 그릇 먹게 해줄게요.”

미리 재워둔 소불고기를 볶고 급하게 당면을 삶아 함께 넣었다.

뚝배기를 올려 계란찜도 하고 김치를 썰어 그릇에 담았다.


“자, 먹어요.”

현조는 제일 먼저 불고기를 맛보았다.


“음. 최고야.”

역시 만족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얼른 먹어요.”

현조는 하연의 바람과 달리 세 그릇은 먹지 못했지만 두 그릇은 먹었다.

밥을 먹고 난 현조가 휴대폰을 무음에서 소리로 바꿨다.

전화기는 쉴 사이 없이 울려댔다.


“큰일 난 거 아니에요?”

“큰일은 아니고. 급한 일이 있긴 하지.”

“얼마나 급하기에 전화가 계속……. 장 실장님이에요?”

장 실장은 물론이고 어머니와 수희, 형에, 누나까지.

아무래도 수희가 말했을 가능성이 컸다.

하연과 어떻게 됐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얼마나 궁금했으면 평소 전화가 잘 없던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전화를 해댔을까.


“서울에서 1조짜리 계약이 있어. 회사 운명이 왔다 갔다 해.”

“네? 1조요?”

하연이 천문학적 숫자에 손가락을 접으며 중얼거렸다.


“십억, 백억, 천억…… 가요.”

하연이 의자를 뒤로 끌며 벌떡 일어났다.


“지금 밥이 문제가 아니네.”

급하게 그릇을 치웠다. 현조도 일어나 먹은 그릇을 치웠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지금 1조가 왔다 갔다 하게 생겼는데 설거지가 문제예요?”

하연이 현조 손에 들린 고무장갑을 낚아채고 제 손에 끼웠다.

빛의 속도로 설거지를 끝내고 동동거리며 가자고 재촉했다.


“나 짐 싸야 하는데 어떡하죠? 아니다! 그냥 몇 개만 가져가고 나머지는 부쳐달라고 해야겠어요.”

“괜찮으니까 배 좀 꺼지면 그때 일어나자.”

아닌 게 아니라 밥을 두 공기나 먹었으니 현조는 배가 불러 움직이기 싫었다.


“하여튼 느긋해서 문제야.”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여서 과일을 깎아 내어왔다.


“후식이나 먹어요.”

현조는 하연이 내준 과일을 먹으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간의 긴장이 풀리는지 현조는 온몸이 나른했다.

현조의 눈이 부드럽게 변한 걸 보고 하연이 하품을 크게 했다.


“현조 씨 나른한 얼굴 보니까 내가 다 졸려요. 전염되나 봐.”

“한숨 자.”

현조가 제 허벅지를 톡톡 두드렸다.

하연이 빙그레 웃으며 몸을 눕혀 현조의 허벅지에 머리를 올렸다.

현조는 하연의 머리를 귀 뒤로 쓸어넘겨 주며 눈을 감았다.

고즈넉한 공간에서 둘은 서로를 허락하며 잠시 잠이 들었다.

*

하연은 뺨에 점이 있는 곳을 콕콕 누르는 느낌에 잠을 깼다. 그 점을 누르는 사람은 현조밖에 없었다.

눈을 떴을 때는 눈앞에는 놀란 얼굴로 서 있는 진헌이 보였다.


“어! 오늘 좀 일찍 왔네.”

하연은 몸을 일으키고 기지개를 쭉 켰다.


“응. 누나도 곧 올 거야.”

진헌은 소파에서 현조의 다리를 베고 자는 하연의 모습에 잠시 놀랐지만, 표정을 바꾸고 현조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 하연이가 많이 의지했다지요?”

우리란 말에 현조의 눈썹이 사납게 꿈틀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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