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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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16.
신혼여행지로 첫발을 내민 곳은 프랑스였다.
파리의 개선문을 보게 될 줄 알았건만, 예상외의 장소에 도착했다. 와인 지역으로 유명한 디종이라는 곳이었다.
하연은 아무런 불만도 없었다. 어쨌든 프랑스니까. 왔으니 그것으로 된 거다.
모든 건 현조가 계획했고 하연은 따르기로 했다. 숨겨 있을 감동이나 재미, 혹은 그 어떤 것을 기대하며 말이다.
택시가 도착한 곳은 유럽 특유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호텔 앞이었다.
“여기서 좀 오래 머무를 거야.”
“왜요?”
“음, 욕조가 예쁘거든. 둘이 들어가면 꽉 차.”
“월풀은 없고요?”
하연이 고개를 돌린 채 조용히 물었다.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고, 물을 건 물어야 하니.
“그것도 있지.”
“그럼, 저도 좋아요.”
체크인하고 들어간 룸은 모던한 분위기로 갤러리를 방불케 할 만큼 그림이나 장식품이 많이 진열돼 있었다.
“우와! 한국이랑 느낌이 너무 달라요!”
“마음에 들어?”
“그럼요! 누가 예약한 건데.”
“그래. 오늘 푹 쉬고 내일 전시회 가자.”
“전시회요?”
“보면 너도 좋아할 거야.”
“네! 기대할게요!”
하연은 침대에 몸을 던지며 큰소리로 대답했다.
“일단 그 전에.”
현조가 셔츠를 단추를 풀며 다가왔다.
“욕조가 꽉 차는지 실험해야 하지 않겠어?”
“지금요? 이렇게 밝은데…….”
말은 그렇게 해도 하연은 어느새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분위기가 독특하네요.”
지브라 러그가 깔린 곳에는 욕조가 놓여 있었고 한쪽 벽은 전면이 창이 였다.
“우와! 밖이 다 보여요.”
“밖에선 안 보여.”
“그래요? 순간 짜릿했어요.”
“그럼, 짜릿한 걸 해볼까?”
현조는 이미 옷을 탈의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하연은 봐도 봐도 현조의 맨몸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가슴과 허벅지에 선명한 흉터는 더욱이.
현조는 욕조에 걸터앉아 수전을 돌려 물을 받았다.
비스듬한 반달 모양으로 된 검은 무광의 욕조는 그의 말대로 둘이 들어가기엔 조금 좁아 보였다.
“이리 와.”
뻗어오는 손을 잡은 하연은 현조의 품에 안겼다.
“신혼여행 첫날밤이네.”
“낮이잖아요.”
“더 좋지. 신혼여행 첫날밤은 낮부터 시작하면 길어지니 더할 나위 없지.”
“말도 안 돼. 낮인데 밤이래.”
“돼. 자, 지금부터 밤이 시작될 거야. 길고 긴 밤.”
현조의 눈동자가 하연을 담으며 짙게 가라앉았다.
하연은 그의 눈빛이 고요히 잠기면 마른침을 삼키곤 했다. 뒤이어 이어질 긴 열락의 시간을 예고하는 눈빛이기도 했다.
현조가 하연의 뒤통수를 당겨 입술을 삼켰다. 동시에 하연이 그의 머리카락을 휘감았고 현조가 고개를 움직여 얼굴의 각도를 맞췄다.
쏴아아-
욕조를 채우는 물소리에도 가파른 숨소리와 점막이 맞닿는 소리는 감춰지지 않았다.
하연이 현조의 품에서 물러나며 가슴을 툭 밀었다.
스르르 욕조로 들어간 현조를 보며 하연도 욕조로 들어갔다.
“어서 와.”
현조가 짓궂게 웃으며 팔을 벌렸다. 좁긴 했지만, 밀착감은 더할 나위 없었다.
*
하연이 가운을 입고 침대로 올라와 쓰러지듯 누웠다. 팔을 뻗어 손을 보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 물에 불어서 손끝이 쪼글쪼글해요.”
현조가 옆에 누우며 하연의 손을 잡고 입으로 가져왔다.
쪽.
“예뻐.”
하연의 손가락마다 입을 맞추며 말했다.
“나, 발도 불어서 쪼글쪼글한데요?”
장난기가 발동한 하연이 발을 번쩍 들어 올렸다. 현조가 일어나 발을 탁, 잡았다.
“예뻐.”
“설마…… 안 돼요!”
현조의 다가오는 입을 하연이 급하게 막아봤지만 잡힌 다리 탓에 일어나지 못했다.
쪽.
현조는 하연의 발끝마다 키스했다.
“그. 그래도 발가락은…….”
“발가락 하나도 다 예뻐.”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하연의 몸을 겹쳐왔다.
“나 피곤해서 누웠는데.”
“그게 왜.”
현조는 한번 시작하면 좀처럼 끝을 보려 하지 않았다. 끝났나 싶으면 잠시 쉬는 거라고 하곤 했다.
“소문, 정말 거짓이었어.”
하연이 귀엽게 웃자, 현조가 뭔가 생각난 듯 표정을 바꿨다. 갑자기 성실하게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분홍색 그거 살까?”
그러면서 대뜸 하연의 양쪽 팔목을 앞으로 가져왔다.
“이렇게, 묶어 두면 되는데.”
“죄수 같아요!”
“그럼 이렇게 할까?”
현조가 하연의 몸을 돌려 두 팔을 뒤로 돌렸다.
“뭐예요! 이게! 미국에서 범인 검거 할때 이렇게 하잖아요!”
팔을 잡힌 하연이 버둥댔다.
“그런가? 그럼 어떻게 하지.”
하연이 얼굴을 돌려 현조와 눈이 마주쳤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에 그녀가 빽, 소리쳤다.
“사긴 뭘 사요! 사기만 해 봐! 내가 당신 손 묶어 버릴 거야!”
“그거.”
하연의 몸이 순식간에 돌려지고 현조를 마주 봤다.
“좋네.”
탁한 음성과 함께 더운 숨결이 하연의 입술을 가르며 들어왔다.
딩동.
벨 소리가 뜨겁게 엉기는 호흡을 멈추게 했다.
“어쩌죠. 밥 왔는데.”
“어쩔 수 없지. 밥은 먹어야 하니까. 먹고 하지.”
아쉬운 얼굴로 현조가 몸을 일으켰다.
“먹고 나 잘래요. 피곤해 죽겠어요.”
“안 돼.”
안 된다고 거듭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저녁 먹고 곧바로 잠든 하연을 몇 번이나 깨웠지만, 미동조차 없었다.
태평하게 자는 그녀를 품 안에 넣고 현조는 한참 바라보았다.
품 안에서 잘 자는 하연의 감은 눈에, 닫힌 입에, 반듯한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녀가 잠들면 의식처럼 행하는 이 순간, 현조는 비로소 마음이 안정됐다.
현조는 그녀보다 늦게 눈을 뜬 적 없었다. 눈을 뜨면 하연이 있어야 하므로 언제나 일찍 눈을 떠 자는 모습을 확인했다.
“하연아.”
나직하게 한 번 부르면 하연은 음, 하며 몸을 뒤척이며 더 깊게 파고들었다.
하연 몰래 즐기는 현조의 소소한 행복이었다.
*
현조가 하연을 데리고 간 곳은 미술 전시장이었다.
“누구 전시회죠?”
“꽤 유명한 작가. 해외에서 먼저 알려졌어.”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현조를 따라 들어갔다.
미술 전시장이라 긴 의자 몇 개를 제외하곤 바닥에는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입구에선 작가의 프로필이 벽에 쓰여 있었고, 커다란 화면에선 작품의 스토리텔링이 흘러나왔다.
“나 고상한 취미 만들어주려고 공부하라고 하는 거예요?”
참으로 엉뚱한 생각에 현조가 웃음이 터졌다.
“고상한 취미까지야. 관심 없으면 그만이지. 나도 관심 없어.”
“그럼 왜 왔어요?”
“글쎄. 왜 왔을까. 일단 구경할까?”
현조는 하연의 어깨를 감싸며 첫 번째 그림 앞에 섰다.
“주제가 그리움이야.”
하연은 현조의 설명을 들으며 그림을 감상했다. 제목은 모두 여인이었고 뒤에 로마 숫자를 붙여 제목을 구분했다.
첫 번째 그림은 멀리 있는 여자의 모습.
두 번째 그림은 여자의 뒷모습.
세 번째 그림은 옆모습.
모든 그림에는 여자가 있었고 각도가 조금씩 달랐다. 그림을 지나칠수록 점점 얼굴이 드러났다.
그리고 여자의 정면, 앞모습이었다.
그림의 여자를 정면으로 마주 본 하연은 어깨를 덜덜 떨었다.
그림 속 여인은 엄마였다. 예쁜 화관을 쓰고 부케를 들고 있는.
분명 엄마의 얼굴이었다.
현조가 하연의 어깨를 감싸며 옆으로 조금 이동한 후 마지막 그림 앞에 섰다.
제목은 앞 그림들과 달랐다. 사랑하는 여인들.
엄마의 양쪽에 하진과 하연이 손을 잡은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사진과 같은 배경, 같은 옷, 같은 표정. 눈물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림에선 하진과 엄마가 웃고 있었다. 사진처럼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그녀는 겨우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죠.”
“이리와.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
하연은 현조와 함께 전시장 뒤편에 마련된 사무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곳엔 사진 속에 있던 남자가 보였다.
사진과 비슷한 모습이지만 나이 든 모습이었다. 하지만 분명 콜린 퍼스를 닮은 멋진 얼굴이었다.
송시욱. 사진 속의 남자.
남자는 긴장한 얼굴로 두 사람을 맞았다.
“일전에 연락 드렸던 최현조입니다.”
현조가 먼저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남자에게 인사를 한 후 현조는 하연을 돌아보며 소개해 주었다.
“하연아, 인사드려. 네 친아버지셔.”
하연은 너무 놀란 나머지 들고 있던 백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아, 아버지요? 아버지라니…….”
“네가 하연이구나.”
하연은 시욱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시욱도 마찬가지였다. 염탐하듯 천천히, 그리고 세밀하게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한 번 안아 봐도 되겠니?”
시욱의 말에 하연이 주춤거리다 그의 곁으로 가서 안겼다.
“진짜, 아버지 맞아요?”
“그래. 맞단다.”
“현조 씨, 정말 우리 아버지 맞아요?”
“누가 봐도 맞아. 붕어빵이야.”
그 말에 시욱과 하연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설명 좀 해 주세요. 어떻게 된 건지.”
하연은 너무 정신없어서 감동보다는 충격이 앞선 상태였다.
*
*
*
1985년. 새내기였던 윤희는 복학생인 시욱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윤희는 유하 건설 막내딸로 부유하게 자랐다. 티 없고 구김살 없이 자란 그녀는 미술전공인 시욱을 따라다녔다.
그는 진중했고, 똑똑했으며 예의 발랐다.
보육원에서 자랐다고 했다. 뛰어난 재능으로 유하 건설의 후원을 받아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숨김없이 말해주었다.
‘선배, 난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난 선배만 있으면 돼요.’
시욱은 해맑게 웃으며 다가오는 윤희를 차마 밀어내지 못했다.
윤희는 배경을 숨기고 시욱과 사랑에 빠졌다. 윤희가 졸업하고 하진이 생겼다.
윤희는 아버지를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어머니는 앓아누웠으며 당장 유학 보낼 태세였다.
윤희는 울고불고 매달렸지만 소용없었다. 자신이 후원한 가난한 고아에게 눈이 먼 딸을 이해할 수도, 허락할 수도 없었다.
‘집어치워! 그딴 녀석과는 절대 안 된다! 이제껏 후원해줬더니 이런 식으로 배신을 해?’
‘아빠! 제발요! 돈이 다 무슨 소용이에요. 아빠가 좀 도와주시면 되잖아요!’
‘돈이 무슨 소용이냐고? 돈 없이 제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윤희는 아이를 포기할 수 없었다. 짐을 싸 들고 집을 나와 시욱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시욱은 태어날 아기를 위해 미술을 포기했다. 지하 방에서 아이를 맞이할 수 없어서 낮에는 공사장 막노동을 하고, 저녁에는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볕이 드는 작은 방으로 이사하고 하진이 태어났다. 매일 충혈된 눈으로 시욱은 밤낮으로 돈 버는 일에 매달렸다.
아이의 웃음을 생각하면 더 나은 환경을 주고 싶었다. 윤희는 거칠어진 손을 보며 행여 자신이 시욱의 꿈을 막은 것 같아 죄책감이 쌓여갔다.
하진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연이 들어선 걸 알게 됐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윤희는 병원에서 임신 소식을 접했지만, 마냥 좋아할 수가 없었다.
흑백의 초음파 사진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다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병원으로 뛰어간 윤희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공사장에서 낙상한 시욱은 머리와 다리를 심하게 다쳐 수술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수술해도 후유증이 남을 수 있습니다.’
‘후유증이요?’
윤희는 곧장 부모님을 찾아갔다.
‘시욱 씨만 살려주세요. 국내 최고 의사에게 수술시켜 주세요. 제발요! 뭐든 할게요.’
윤희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수술이 끝나고 다리 재활이 남았지만, 다행히 뇌 손상은 없었다.
윤희는 시욱이 퇴원하자 기다렸다는 듯 통보했다.
‘미안해요. 더는 이렇게 못 살겠어요. 당신은 당신 인생사세요. 하진이 걱정은 하지 말아요. 내가 잘 키울게요. 알잖아요. 우리 집 부자인 거.’
시욱이 아무리 말리고 애원해도 윤희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거, 그간 모은 돈이랑 보상비예요.’
보상비로는 수술비도 못 미쳤다. 윤희는 아버지에게 온갖 거짓말로 돈을 달라고 했다. 집을 옮기느라 빚을 졌다는 둥, 사는 게 힘들 때 사람들에게 빌렸다는 둥.
‘이거 가지고 떠나요. 가서, 그림 그리세요. 그려서! 유명해지세요. 내가 우리 하진이가 크면 말할게요. 저기, 저 사람이 네 아버지라고요. 그리고 때가 되면 당신을 만나게 해 줄게요. 그러니 다 잊고 당신 꿈 이루세요.’
마지막 말을 뱉고 매몰차게 돌아서는 윤희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