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그녀에게 가 봐야겠어 (1/110)

#1화. 그녀에게 가 봐야겠어2021.12.03.

내 앞에 선 카를슈테인 공작께서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그는 제국에서 가장 품위 있고 고상하기로 이름난 신사였다. 그는 아내에게도 늘 정중했다. 사소한 말 한마디 함부로 한 적이 없었고, 언성을 높이는 일 같은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늘 행복에 겨운 듯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실상은 남편의 갖은 횡포와 학대를 감내하며 사는 제국의 귀부인들이 카를슈테인 공작부인을 몹시 부러워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존중받고 있으니까. 뜨겁게 폭주하는 열애는 아닐지라도 한결같고 온화한 애정 속에 살 테니까.

16548658580701.jpg“침실에서는 조금 심심할지 몰라도, 시간 지나 시들해지는 건 어느 남자나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호호호.”

16548658580701.jpg“모르지요, 침실에서는 무례한 짐승으로 변하실지…… 호호호.”

귀부인들은 공작 부부의 점잖은 낮과는 다른 밤을 상상하며 귓불을 붉히곤 했다. 쥐뿔도 모르면서. 존중부터 침실의 짐승까지 모두 헛소리였다. 카를슈테인 공작은 아내에게 함부로 말한 적이 없음은 물론, 아예 말하기를 싫어했다. 물론 제국 최고의 신사인 그가 겉으로 싫은 티를 낼 리가. 그는 아내 앞에서 언제나 다정한 미소를 유지했다. 다만 시선은 어딘지 모를 곳에 두고 판에 박힌 대답을 하는 것으로 말 섞기 싫은 심사를 드러냈다. 가능한 한 마주치지 않도록 바쁜 사무를 많이 만들었지만, 아침과 저녁 식사는 길고 거대한 식탁에 멀찍이 마주 앉아 되도록 함께 먹었다. 황궁 행사나 연회에는 부부가 꼭 함께 참석했지만, 침실은 처음부터 정숙한 공작가의 가풍에 따라 각방을 썼다. 법도에 어긋난 일은 한 치도 없었다. 내 남편, 프러너스 카를슈테인 공작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나와 말 한마디 섞기 싫어하던 남자가 지금은 내게 말을 붙이고 싶어 저리도 안달인 것이다. 제국에서 가장 품위 있고 고상한 남자의 채신머리없는 꼴을 보고 있자니 우습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고.

1654865858071.jpg‘이번엔 어떻게 응대할까? 아무리 상대방이 기억을 못 한다 해도 늘 똑같이 반응하긴 좀 그렇잖아?’

여러 차례 겪다 보니 시답잖게 이런 걸 고민하는 여유도 생기고. 나는 남편의 입에서 곧 나오게 될 말을 알고 있었다. 아는 정도가 아니라 토씨 하나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기에 그를 대신해 대사를 읊어 줄 수도 있었다. 같은 말을 열여섯 번이나 들었고, 이제 곧 열일곱 번째로 듣게 될 테니까. 남편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리며, 두려움에 떨거나 헛된 기대를 품던 때도 있었다. 이제는 그저 짜증이 날 뿐이다. 뜸 들이지 말고 어서 말해. 나도 바쁜 몸이야. 뻔히 아는 내용을 듣고 또 듣는 것도 고역이고, 난생처음 듣는 말인 양 놀라는 시늉을 하는 것도 진절머리나니까.

16548658580714.jpg“로제트,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

남편은 아내에게도 거의 존대를 하는 편이었는데, 이때만큼은 소탈하게 반말을 한다. 다음부터 나올 말이 일생일대의 진심이라는 신호.

16548658580714.jpg“당신도 이미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아젤리아가 워릭과 이혼했어.”

워릭은 아젤리아의 허수아비 남편 노릇을 하다 이제는 전남편이 된 녹스 워릭 백작이다. 겨우 이 말까지만 듣고서 절망감에 휘청거리며 서 있기조차 힘들어 하던 때가 있었다.

16548658580714.jpg“아젤리아에게 가 봐야 할 것 같아.”

이 말을 하는 프러너스의 푸른 눈은 언제나 악의 없이 투명했다. 그래 봐야 본처를 보기 좋게 걷어차고 첫사랑인 그녀와 불륜을 저지르겠다고 말하는 것에 불과하면서.

16548658580726.jpg

  그 선선한 눈빛은 파렴치하고 역겨운 짓을 참으로 아름답고 숭고한 것으로 둔갑시키는 위력이 있었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미친 여자처럼 악쓰고 원망하고 매달렸다. 어리석게도 그가 하려는 짓을 미화하는 데 일조하고 만 것이다. 그는 마치 제가 피해자라도 되는 양 슬픈 눈으로 괴로운 표정을 짓곤 했다.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저 말을 처음 들었을 때만 내가 발악한 건 아니었다. 부끄럽게도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아니 바로 직전인 열여섯 번째 삶까지도 나는 미련하게 굴었다. 어떻게든 두 사람을 갈라놓고 싶었다. 분탕질을 해서 두 사람의 명예를 더럽히고 그들의 가식을 세상에 까발리고 싶었다. 제국에서 가장 품위 있는 남자의 추락을 보고 싶었고, 그가 목숨처럼 사랑하는 여자가 코르티잔 취급당하는 걸 보고 싶었다. 여하튼 호락호락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어쩌면 그가 돌아올지 모른다는 멍청한 희망을 품었는지도 모르겠다. 정말이지 스스로가 혐오스러워지는 대목이었다. 멀쩡하게 결혼식을 올리고 정식으로 그의 아내가 되어 공작부인 행세를 할 때에도 그는 자신의 한순간도 한구석도 내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된 마당에 누가 누구에게 돌아온단 말인가. 애초에 그는 여기 있었던 적조차 없는데.

16548658580714.jpg“로제트, 당신에겐 미안해. 하지만 지금 아젤리아에겐 내가 필요해.”

프러너스의 표정은 진지했고 목소리는 애절했지만, 매번 같은 대사를 듣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올 뻔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 말을 듣고 이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주절거렸던 걸 떠올리면 입술이 아니라 혀를 깨물고 싶지만.

1654865858071.jpg「아젤리아에게 간다고요? 그럼 나는요? 난 어떻게 해요?」

로제트 어리석긴.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그걸 왜 그에게 물어? 상심에 빠진 첫사랑이 걱정돼 가슴이 미어지고 애간장이 타들어 가는 사람에게 그 따위 멍청하고 이기적인 질문을 들이대다니. 저 품위 있고 상냥한 공작이 지금은 나를 안쓰러운 눈으로 보는 듯하지만, 그 안에 얼마나 차가운 비수를 품고 있는지는 곧 알게 된다. 아니, 이번엔 그 비수를 꽂을 기회를 주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갈 길이 바빠서. 열일곱 번째 삶은 좀 다르게 살아보기로 마음먹었으니까. 그러자니 귀찮고 무의미한 실랑이는 생략하고 프러너스와의 담판을 신속히 끝내고 싶었다. 아젤리아에게 가겠다는 말을 꺼내놓고 내 반응을 기다리는 프러너스를 보았다. 어느 정도의 충돌과 소동은 각오한 듯한 얼굴이었다.

1654865858071.jpg“그래요, 가 봐요. 아젤리아가 많이 힘들 테니.”

내 대답을 들은 프러너스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온화하고 우아한 그에겐 남의 옷처럼 걸맞지 않은 표정이었다. 표정 관리도 잊을 만큼 내 대답이 요상했나 보네. 너무 선선히 수락했나? 그가 내 저의를 의심할 만도 했다. 하여튼 저 좋을 대로 해 줘도 불만이군.

16548658580714.jpg“로제트, 그러니까 아젤리아에게 간다는 건…….”

그만. 내가 그 정도로 천치인 줄 아니? 설마 아젤리아에게 간다는 게 아젤리아네 집에 가서 차나 한잔 마시며 위로와 덕담을 나누고 돌아오겠다는 뜻이겠어? 좋아. 귀찮으니까 단번에 해결하자.

1654865858071.jpg“알고 있어요, 프러너스. 그녀가 당신이 돌아갈 곳이죠. 그걸 알면서도 지금껏 고집을 부려 미안해요.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어요.”

그의 입이 얼간이처럼 벌어졌다. 상상했던 것보다 볼만한 모습이어서 흥이 돋았다.

1654865858071.jpg“당신은 오직 한 여자만을 사랑했죠. 그 지고지순한 마음을 결혼 같은 하찮은 계약으로 돌릴 수 있다 생각한 내가 어리석었어요. 사람은 그렇게 가질 수 있는 게 아니거늘.”

이 말은 진심이었다. 아젤리아는 프러너스의 첫사랑이자 유일한 사랑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가문의 반대로 맺어지지 못한 것은 그들에겐 비극이었겠지만, 오랜 시간 프러너스를 흠모해 온 내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물론 내가 기회라 생각한 것이 진짜 기회는 아니었지만. 이미 말했듯 사람은 그렇게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내가 가졌다고 착각한 건 그의 껍데기였을 뿐.

1654865858071.jpg“프러너스, 아무 걱정 말아요. 이혼 수속도 조용하고 빠르게 처리했으면 해요. 나는 이만 퇴장하고 싶거든요. 두 사람을 위한 무대에서.”

나는 이 말로 열여섯 번이나 반복했던 비루한 싸움을 단숨에 뛰어넘었다. 지난 삶에서의 나는 이혼을 완강히 거부했다. 프러너스는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잔인해질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런 그에게 동정심이나 부부의 정 같은 걸 어설피 기대했다 처참한 꼴을 당하기도 했다.

1654865858071.jpg「내 모든 게 여기 있는데, 이혼은 너무 가혹해요. 여기서 내쳐지면 난 어떻게 살라고요?」

16548658580714.jpg「듣고 보니 그렇긴 하군. 여태 공작가 귀부인으로 살아온 당신을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저택에서 내보내는 건 너무 매몰찬 처사가 맞아. 제국의 법이 후실을 허락하니…….」

1654865858071.jpg「……?」

16548658580714.jpg「아젤리아에게 잘 말해 보겠어. 그녀는 매정한 사람이 아니니까.」

1654865858071.jpg「설마 나더러 첩이 되라는 거예요?」

16548658580714.jpg「그렇지만…… 아젤리아에게 그럴 순 없잖아? 내가 아젤리아에게 어떻게 그런…….」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 동의를 구하는 그를, 처음으로 죽이고 싶었다. 실제로 이전 삶에서 그나 아젤리아의 독살과 암살을 사주하기도 했다. 그뿐이랴. 악에 받쳐 별별 시도를 다 해 보았다. 하지만 마지막에 죽는 건 언제나 그들이 아니라 나였다. 프러너스가 손을 쓴 건지, 아젤리아가 손을 쓴 건지, 아니면 제3의 인물이 나선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패배의 쓴잔을 들이켜고 고꾸라지는 건 언제나 나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되돌아왔다. 남편의 첫사랑이 이혼하기 며칠 전으로.

16548658612064.png

  무려 열일곱 번이나 돌아온 건 내가 멍청한 인간이기 때문일까. 그 정도는 죽었다 깨어나야 겨우 교훈을 얻을 수 있을 만큼 어리석은 인간이라 신께서 특별히 배려한 건지도.

1654865858071.jpg‘기왕이면 결혼 전으로 훌쩍 돌려보내 줄 것이지.’

그랬으면 두 사람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을 텐데. 열일곱 번이나 기회를 떠안길 만큼 넘치게 자애롭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들어줄 마음은 없는 모양이었다. 곤란하고도 심술궂은 배려였다. 그간 나 자신의 어리석음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미련함에 걸려 넘어지고 멍청함을 밟고 미끄러지고 아까 그 멍청함을 또 밟고 미끄러지는 촌극을 펼친 후에야, 나는 마침내 깨달았다.

1654865858071.jpg‘저 두 사람의 삶에서 멀리 도망쳐야 한다.’

그들의 선택이 내 삶을 결정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동안 악다구니를 쓰고 발버둥을 친 일들은 모두 내 삶을 그들의 그림자로 가득 채우는 일이었다. 고단했다. 더 이상의 증오도 패악도 무리였다.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는 건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이제 내 바람은 오직 하나. 다시는 삶을 반복하지 않는 것. 프러너스와 일사천리로 이혼하고 저택의 내 방을 비우고 홀가분하게 떠나리라. 아무도 아는 이 없는 시골로 들어가 무엇에도 휘말리지 않고 평범하게 적당히 살다가 영원히 죽으리라. 완벽히 죽기 위해 어떻게든 끝까지 살아야 한다는 것이 매우 모순된 상항이었지만 아무렴 어떠랴. 이 초라하고 굴욕적인 삶을 끝낼 수만 있다면. 이 진저리 나는 운명의 쳇바퀴를 부술 수만 있다면!

1654865858071.jpg“어서 가 봐요. 그녀가 기다리잖아요. 나는 떠날 준비를 할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