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이제 보니 당신 제법 웃기네2021.12.06.
“이혼 수속이 끝나기 전에 거처를 옮겨도 되겠죠?”
프러너스의 대답을 기다릴 필요는 없었기에 내가 먼저 등을 돌려 그 자리를 벗어났다. 문득 남편에게 등을 보인 게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등을 보이는 것은 그만의 특권이었다. 멀찍이서 그의 등을 바라보는 건 내게 매우 익숙한 일이었으나 내 등을 보는 건 그에게 매우 낯선 일일 터였다.
‘지금 저 사람 표정이 어떨까?’
이런 걸 궁금해하다 나는 화들짝 놀라 스스로를 비웃었다. 여전히 그를 향해 뻗어 있는 내 못난 마음의 촉수를.
‘설마 아직도 남은 미련이 있는 거야, 로제트?’
만일 그렇다면 나 자신이 싫어져 괴로울 것 같았다. 소중한 첫사랑 그녀를 붙잡기 위해서라면 5년을 함께한 아내에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등을 돌릴 수 있는 그보다. 그의 사랑을 받는다는 이유로 숨만 쉬어도 미운 그녀보다. 나 자신이 역겨울 것 같았다. 하지만 부글부글 끓어올랐던 마음은 복도를 지나 내 방으로 가는 잠깐 사이 금세 가라앉았다. 이번 삶에서 나는 유독 피로와 싫증을 잘 느꼈다. 의욕 저하와 무기력, 그로 인한 게으름 등은 주변 사람들은 물론 나 자신에게도 관대해지게 만들었다. 내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던진 나는 이미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
‘뭐 좀 궁금할 수도 있지.’
호기심 있는 인간이라면 지나가는 길고양이 얼굴도 궁금한 법인데. 삶을 열여섯 차례 반복하는 내내 남편 뒤꽁무니만 쫓아다녔으니 그 버릇이 하루아침에 고쳐지겠어?
‘흥분하지 말자. 담담하게 유유하게 무심하게. 물처럼 바람처럼.’
그렇게 조심조심 살면서 비명횡사를 피하면 삶이 반복되는 걸 막을 수 있겠지. 조용하고 평탄하게 살다가 남들 다 하는 것처럼 영원한 안식에 드는 거야.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오직 이것만 생각하자. * * * 아젤리아에게 갔던 프러너스가 늦은 밤 공작저로 돌아왔다.
‘원래 그는 사흘 후에나 돌아와야 하는데?’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느긋하게 짐을 싸던 나는 인상을 구겼다. 그동안 그는 아젤리아와 사흘 밤낮으로 재회의 기쁨을 만끽한 뒤 본저로 돌아오자마자 내게 이혼을 요구하는 순서를 밟았다. 사흘간 뜬눈으로 지새운 나는 충혈된 눈으로 악을 쓰며 울부짖는 일을 반복했고. 이번엔 빠른 진행을 위해 내가 먼저 이혼 얘기를 꺼내고 원만히 합의도 봤으니 천천히 즐기다 사흘이 아니라 석 달 후에 돌아와도 상관이 없는데 말이지.
‘아, 내 행동이 바뀌면 미래도 조금씩 바뀌는 걸까?’
그렇다면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급한 사무가 생겼거나 외국에서 특급우편이라도 왔는지 모르지.’
프러너스는 신뢰감을 주는 진중한 이미지 덕분에 외국의 상단들과도 오랫동안 성공적인 거래를 해 왔다. 그런 실력을 높이 산 황실에서 외국 사신을 응대하는 일을 그에게 전적으로 부탁하곤 했다. 어찌 됐든 프러너스가 돌아왔다고 해서 나와 부딪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래, 하루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흘러가는 건 좋은 징조니까.’
걱정 말고 내 할 일이나 하자. 독립을 위해 가장 필요한 건 안정적인 자산과 거주지의 확보였다. 다행히 내겐 친정인 앰브로시아 후작가에서 가지고 온 약간의 유산이 있었다. 작위와 가주직을 물려받은 오빠 루이와 새언니 타마린드가 가문의 재산이 분할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기에, 어머니가 당신 몫의 재산을 따로 챙겨 주신 거였다. 큰 금액은 아니지만 혼자 조용히 살기엔 충분했다. 어차피 사교계에 나가거나 사치를 부릴 것은 아니니까. 이목을 끌 정도로 곤궁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만 않으면 된다. 제국은행의 금고에 얌전히 잠자고 있는 그 돈 외에, 내겐 또 하나 든든한 것이 있었다. 앰브로시아 영지 중에서도 후미진 지역인 토버마리에 있는 내 소유의 낡은 컨트리 하우스. 열두 살 무렵부터 어머니와 여동생 미고와 함께 3년간 지낸 곳이었다. 미고의 요양을 위해서 한적하고 공기 좋은 동네로 간 것이었는데,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작은 천사 같던 아이는 너무 일찍 자신과 어울리는 곳으로 떠나 버렸다. 하지만 그곳에서 우리는 꽤 행복하게 지냈고, 그때가 내 마음속에 가장 아름다운 시절로 남았다. 그런 이유로 나는 오빠 내외에게 이 컨트리 하우스의 소유권만은 내게 달라고 조금은 완강하게 요청했다. 크게 재산 가치가 있는 곳이 아니었기에 서로에게 흡족한 거래가 되었다.
「로제트, 이제 계산은 끝난 거다.」
루이는 몇 번씩 못을 박았다. 나름 공을 들여 손에 넣은 것치고는, 카를슈테인 공작부인이 된 이후로 통 가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곳은 늘 내 마음의 안식처였다. 이 세상에 온전한 나만의 천국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이 되고 마음이 놓였다. 만약 아젤리아가 이혼하지 않고, 그래서 내가 계속 카를슈테인 공작부인으로 살았다면, 어쩌면 토버마리의 낡은 컨트리 하우스는 평생 마음속의 천국으로만 존재했을지 모른다. 이런 용도로 쓰게 될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지금의 나에겐 가장 크게 믿는 구석이었다. 컨트리 하우스에 약간의 경작지와 작은 농장이 딸려 있어서, 거기서 나오는 수익으로 저택이 관리되고 있었다. 집사와 사용인 몇 사람의 급여도 그렇게 해결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필요한 물건 몇 가지와 여행 경비 정도만 챙겨서 공작저를 나서면 되는 거였다. 이번엔 결심한 바가 있었기에, 열일곱 번째로 돌아왔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미리 조금씩 준비를 해 두었다. 토버마리 쪽엔 닷새 전에 기별을 넣어 두었다. 제국은행 본점에서 내 예금을 확인했고, 제국 전역의 지점에서 출금할 수 있도록 계좌도 열어 두었다. 당장의 경비는 수중에 지닌 공작부인의 품위 유지비만으로 충분했다. 이 정도면 공작가의 재산이나 위자료 등에 목매지 않고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었다. 신변정리가 예상보다 더 간단히 끝났다. 바로 내일 아침 떠날 수 있을 듯했다. 앰브로시아 영지와 가까운 동부의 대도시 그리치까지 작년에 개통한 열차를 타고 이동할 생각이었다. 무난하게 살 수만 있다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 앞으로의 여정을 상상하다 보니 모험이라도 떠나는 것처럼 기분이 들뜨려 했다.
‘뭐, 소소한 기분 전환쯤은 괜찮겠지.’
내일 일찍 출발하려면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게 좋을 것 같아 침대로 파고들었다. 살짝 열어 놓은 창문으로 봄밤 특유의 향기가 날아들었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봄밤의 싱숭생숭함이었다. 그래, 봄이었다. 아젤리아의 이혼 소식을 접하고 초조하고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때가, 프러너스가 그녀와 밀회를 즐기던 때가, 프러너스에게 이혼 통보를 받은 때가. 나는 분노와 증오와 질투로 미쳐 날뛰느라 열여섯 번이나 반복한 그 시간들이 봄인 줄도 몰랐다. 역시, 미련을 갖기보다 훌훌 떠나기에 어울리는 계절이었다. 대청소하기에 좋은 계절이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
똑똑. 까무룩 잠이 들었던 나는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이 시간에 누구지?’
다른 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긴 했지만 그래도 꽤 늦은 시각일 텐데.
‘아, 하이디가 허브티를 가지고 온 건가?’
하이디는 내 전속 하녀로 이즈음의 나는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해 불면증에 좋다는 허브티를 주문하곤 했다. 오늘은 내게서 기별이 없자 아마도 알아서 허브티를 가져온 모양이었다. 문이 달칵 열렸다.
“음…… 고마……워. 하지만 오늘밤은 차가…… 필요 없을 것 같아. 업어 가도 모를 만큼 숙면에 빠질 거거든. 다리 쭉 뻗고 잘 거야.”
“…….”
대답도, 나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아 좀 이상하다고 생각할 때였다.
“나는 오늘 밤 쉽게 잠들지 못할 것 같은데. 의외군.”
이 점잖은 목소리는 첫사랑과 바람난 공작 전하? 아이 씨, 이 저택에서 숙면을 취할 마지막 기회인데. 왜 온 거야? 그냥 잠에 취한 척하자. 일부러 숨소리를 쌕쌕 내는데, 그가 나가기는커녕 침대로 점점 다가오는 기척이 들렸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그가 내 얼굴을 쏘아보는 게 느껴졌다. 입 안 가득 고인 침을 더 이상은 참기 힘들어 하는 수 없이 한숨을 푹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여긴 웬일이에요?”
나는 성가심을 드러내기 위해 최대한 고저 없이 말했다.
“내게 요구할 건 없나 궁금해서. 생각해 보니 이혼 조건에 대해 제대로 논의하지 못한 것 같군.”
아니, 이 시간에 자는 사람 깨워서 그거 따지시려고? 짝사랑 5년에 결혼생활 5년, 10년간 쫓아다닌 남자가 좀생이라는 사실을 지금에야 알게 된다.
“없어요. 아마…… 없을 거예요. 설령 있다 해도 법률 대리인을 통해 서류로 요청하면 되겠죠.”
무성의한 대답에 프러너스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쏘아보았다. 사람을 저렇게 잘도 쏘아볼 수 있는 사람이란 것 역시 새롭게 알게 된다. 내가 안다고 생각한 프러너스 카를슈테인이 어떤 사람인지 갑자기 헷갈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잠이 덜 깬 모양이었다. 그는 갑자기 내 방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몇 차례나 왔다 갔다 했다. 당최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내가 순순히 이혼을 받아들이고 이곳을 떠나는 게 여전히 의심스러운 걸까? 혹시나 자신의 소중한 종달새 – 이전 생에 그렇게 부른 적이 있었다 – 에게 내가 해코지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걸까? 내가 원래 하던 대로 좀 더 패악을 부려야 하는데 뜻밖에 잠잠하자 그 역시 무의식중에 뭔가 찜찜하고 미진한 느낌을 받은 건가? 내 속을 까뒤집어 보여 줄 수도 없고. 뭔가 해명이라도 할까 하다 그만두었다. 귀찮았다. 저러다 가겠지 싶어 목석처럼 버티고 있자 그가 산만한 발걸음을 멈추더니 대뜸 물었다.
“혹시…… 남자가 생긴 건가?”
“…….”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잠이 덜 깬 뇌가 덜거덕거렸다.
“당신을 추궁하려는 게 아니라, 그래,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러겠어. 만일 그렇다면 내 마음이 한결 편할 것 같아서 그래.”
나는 멍한 눈으로 프러너스를 바라보다 코로 컹 소리를 내면서 웃음을 발사하고 말았다. 그가 가까이 있었다면 그 면상에 내 침이 튀었을 것이다. 나는 숨이 가쁠 때까지 배를 잡고 웃었다. 적당히 웃고 말고 싶은데 도무지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급기야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너무 웃겨서 눈물이 나온 건 어렸을 때 오빠 루이가 깝죽거리다 분수대에 얼굴을 처박아 코가 깨진 걸 본 이후로 처음이었다.
“하아, 하아…….”
정말이지 제대로 웃겼다. 프러너스 카를슈테인. 살다 보니 저 인간이 사람을 배가 아플 정도로 웃기는 날도 온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더니. 겨우겨우 웃음을 떨치고 그를 보니 일자로 꽉 다문 입에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얼굴부터 목까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 역시 낯선 모습이었다. 그의 얼굴에도 피는 돌고 있었다.
“당신이 그래야 마음이 편할 거 같다면, 그런 걸로 해 두죠.”
내 말에 그는 미간을 팍 구기더니 아직 더 할 말이 남았는지 입술을 몇 번 달싹대다 결국 몸을 돌려 나가 버렸다. 나는 눈가의 눈물을 몇 번 더 훔치고는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