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저 하이에나 슈발럼2021.12.10.
물론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사라질 생각이었다.
‘가늘고 희미하고 존재감 없게.’
그것이 앞으로 내가 지향하는 삶의 밑그림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온갖 가십지 기자와 정보 조직 끄나풀의 출장소라 할 수 있는 기차역 대합실에 발을 들인 건, 기자 회견을 자청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인생 17회차임에도 나는 이런 쪽 사정에 무지했다. 심지어 군중 속에 무색무취하게 섞여 든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딴에는 살짝 흥분해 있는 상태였다. 완벽한 착각이란 걸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내가 유명한 건 물론 남편인 카를슈테인 공작 때문이었다. 그는 가십지에서 꽤 탐내는 기삿거리 중 하나였다. 그만큼 남들이 부러워하고 관심을 가지는 유명인사란 뜻이었다. 그건 또 이런 걸 의미했다. 그와 뜨거운 사이였던 아젤리아가 공작부인이 되지 못한 사연부터 그녀가 워릭 백작과 결혼한 경위와 최근 이혼한 사유, 카를슈테인 공작의 결혼 생활과 부부 관계 같은 것들이 모두 공공연한 비밀이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은 아젤리아의 이혼이 불러올 파경과 공작의 행보, 나의 심경이나 거취 같은 것들이 이 바닥 초미의 관심사라는 것을. 바야흐로 대 평화의 시대였다. 지난 10년간 전쟁은 물론 작은 분쟁조차 일어나지 않은 축복받은 시기. 사람들에겐 전쟁 소식 대신 씹고 뜯고 광분할 거리가 필요했다. 가십을 다루는 신문과 잡지들이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과거엔 감히 입에 올리기 힘들었던 황족과 귀족의 비밀이 유흥거리가 되어 열광적으로 소비되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스캔들의 거물과 사교계의 별들이 탄생했다. 그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산업과 기술이 눈부신 발전을 이룬 시기이기도 했다. 국가 간 무역도 활발했다. 무기나 군사보다는 정보의 가치가 높게 매겨졌고, 온갖 정보 조직과 첩자와 해결사들이 판을 쳤다. 이쪽으로는 나도 살짝 발을 담근 적이 있어 조금은 알았다. 지난 삶에서 바람난 남편과 그의 내연녀를 처단코자 그 해결사들의 손을 빌려야 했으니까. 씁쓸한 기억이지만, 그 과정에서 사기도 많이 당했다. 그때 나는 반쯤 미쳐서 눈이 뒤집히고 뇌가 흐물흐물한 상태였기 때문에 속이기 딱 좋은 먹잇감이었다. 아마 그 바닥에서 호구 공작부인으로 통하지 않았을까 싶다. 여하튼 지금 나를 취재하는 건 특종을 잡는 일이었고, 역 안의 모든 기자와 정보원의 신경이 온통 내게 쏠려 있었다. 그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쪽 사정에 어두운 나조차도 눈치 채고 말 정도였다. 자꾸만 몸을 부딪치려고 하는 인간. 말을 걸 핑계를 만드느라 애쓰는 인간. 과도한 친절을 베풀며 접근하는 인간. 언제 봤다고 미소를 날리는 인간. 나도 나름 산전수전 다 겪은 인생 17회차이기에 뭔가 수상하다는 걸 감지했다. 결정적으로 이전 삶에서 내 뒤통수를 친 적이 있는 악명 높은 가십 기자 하나를 발견하고 사태를 대강 파악했다.
‘이런 상황을 왜 예상하지 못했을까. 나도 참 경솔하네.’
이제야 그런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이 하이에나들에게 나의 행선지를 알리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가늘고 희미하고 존재감 없는 삶이 위협받고 있었다. 다급해진 나는 꽤나 깜찍한 짓을 벌이기 시작했다. 내가 탈 열차가 아닌 차량에 올랐다가 출발 직전에 몰래 내리는 일을 반복했다. 짐이 간소한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교란 작전으로 꽤 여러 명을 엉뚱한 기차에 태워 보냈다.
‘안녕! 즐거운 여행이 되길 바랄게요!’
황당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기자들을 보며 오르락내리락하느라 땀 흘린 보람을 느꼈다. 정말로 내가 타야 하는 열차에는 반대로 출발 직전에 후다닥 몸을 실었다. 특실 창밖으로 확 트인 풍경이 펼쳐졌다. 속이 후련했다. 나는 침대 두 개가 들어간 특실을 통째로 샀다. 교란 작전을 펼치느라 혹사당한 발을 치하하기 위해 불편한 신발을 벗어 던진 뒤 다리를 쭉 펴고 앉았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유년 시절을 보냈던 낡은 집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마음까지 천진해지는 기분이었다.
“나의 아름다운 미고는 좋아했지, 내가 잡은 개구리를. 하루에 세 개씩 먹었지만 잡을 줄은 몰랐다네.”
나는 아무도 없는 객실을 괜히 한번 쓰윽 둘러보고는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노래 부르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하지만 내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다들 어쩔 줄 몰라 하거나 인상을 쓰기에 웬만해선 부르지 않았다. 기분도 좋고, 주변에 사람도 없고, 열차 달리는 소리도 굉장히 요란하니 지금이 바로 노래를 부를 절호의 기회였다.
“미고는 사랑한다고 말했지. 나를? 아니면 개구리를?”
이 노래는 원래 ‘앤은 내가 만든 푸딩을 좋아했지’라는 유명한 북부 민요인데, 어릴 적 나와 여동생 미고는 이런 식으로 개사해서 부르는 걸 좋아했다. 미고는 이 개구리 개사 판을 좋아해서 불러 주면 까르륵 넘어가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노래가 엉망이라 웃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나는 오랜만에 사람들 눈치 안 보고 발장단까지 맞춰 가며 노래를 불렀다.
“오늘 밤 나는 내가 잡은 개구리를 질투하네에에에.”
“크흡.”
“……?”
누가 웃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오랜 세월 음치라고 핍박을 받아 나도 모르게 주눅 든 걸까? 사람들이 비웃는 환청이 다 들렸다.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이번엔 환청이 아니라 실제로 객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제복을 입은 승무원이 맛있는 냄새와 함께 요리가 차려진 서빙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
“맛있게 드십시오. 물리실 땐 이 설렁줄을 당기시면 됩니다.”
“고마워요.”
그런데 내가 식사를 주문했나? 아니면 객실 서비스에 포함된 건가? 여하튼 배가 고프던 차에 잘됐다 싶었다. 냄새도 좋고 플레이팅도 고급 레스토랑에 뒤지지 않았다. 먹음직스런 음식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 나는 누군가 복도에서 객실 안을 훔쳐보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열차의 룸서비스는 이런 게 좋구나.’
음식이 차례로 서빙되는 게 아니라 한꺼번에 나오니 격식에 맞춰 순서대로 먹을 필요가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메뉴부터 아무렇게나 찔러 보기 시작했다. 애피타이저를 건너뛰고 버터향이 진동하는 아스파라거스와 관자 구이를 먼저 싹쓸이했다. 그 여세를 몰아 칼과 포크를 무기처럼 들고 육질이 부드러워 보이는 필레미뇽을 향해 달려들었다. 레드와인을 한 모금 들이켜니 맛의 하모니가 완성되었다.
“아, 정말. 16년 굶은 하마처럼 먹었네.”
배를 문지르며 노래의 끝 소절 가사를 바꾸어 한 번 더 불렀다.
“오늘 밤 나는 내가 키운 아스파라거스를 질투하네에에에.”
아스파라거스 하니까 아젤리아가 생각나 감정이입이 더욱 잘되는 듯했다.
“푸, 흐읍.”
“…….”
푸? 흐읍? 환청이 아까보다 더 길어졌다.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소리와 의식적으로 수습하려는 소리. 두 마디가 되었다.
내가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피는데, 또 누가 객실 문을 두드렸다.
‘디저트인가?’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디저트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쉬어 터진 악질 기자 놈이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얼굴. 지난 삶에 저 인간에게 뒤통수를 맞고 안 그래도 우울한 삶이 더 우울해졌으니. 가십지 <팩트>의 기자 척 슈발럼. 제정신이 아닌 나를 구슬려 인터뷰를 하고는 내 말을 악의적으로 바꾸어 온 제국에 퍼뜨린 인간. 거짓 기사가 사람 하나 골로 보내는 건 일도 아님을 그때 깨달았다. 이번 생에서 나를 처음 만난 그는 친근한 웃음을 흘리며 인사했다.
“레이디, 식사 중이셨군요. 인사를 드리고 싶어 결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실은 제가 앰브로시아 출신이거든요.”
사기 치고 있네. 넌 제도 토박이잖아.
“그리치로 가시겠군요? 거기서부터는 마차로 움직이십니까? 후작가에서 마중을 나옵니까?”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가 어울리지 않게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이런 제가 너무 조급했습니다. 반갑기도 하고 또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만. 레이디는 워낙 유명인이시라, 더욱이 앰브로시아 출신인 제겐 친근한 분이라 실수를 했습니다.”
그래, 계속 떠들어 봐.
“척 슈발럼 남작입니다. 실은 오라버니 되시는 루이 앰브로시아 후작 각하와도 만난 적이 있지요.”
“…….”
“그리치는 대도시라 레이디 혼자 다니시기에 매우 위험합니다. 괜찮으시면 제가 가시는 곳까지 에스코트해 드려도 될지요?”
“아뇨.”
다 거짓말인데 길게 대꾸하기도 귀찮았다.
“하하, 제가 여전히 수상한 사람으로 여겨지시나 봅니다. 하긴 조심할수록 좋지요.”
“나가요.”
“절 의심하시는 건 괜찮은데 레이디가 걱정이 돼서 말입니다.”
“승무원을 부르겠어요.”
내가 설렁줄을 당기려 하자 마침내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자신이 아는 평판과는 다른 내 모습에 조금 당황한 듯했다. 자신의 수작이 씨알도 안 먹힌다는 걸 파악하자마자 그의 태도가 돌변했다. 가식을 떠는 건 정체를 들키기 전까지만. 유들유들한 웃음을 흘리던 눈은 어느새 독사처럼 변해 있었다.
“허접한 준남작 가문 출신 계집한테도 다 빼앗기는 주제에. 남편이고 공작부인 자리고 고스란히 쥐여 주고 어디 가서 뭐 하나 했네.”
그가 타이를 거칠게 잡아당기며 좌석에 아무렇게나 털썩 기대앉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유치하고 저급한 도발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지금 저걸 듣고 나더러 흥분하란 건가.
“워릭과 이혼하기 전에 이미 두 사람 만나고 있었던 건 아시나? 아젤리아의 배 속에 이미 카를슈테인의 씨가 자라고 있다던데?”
이용해 먹지 못할 상대에겐 상처라도 내서 못쓰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부류가 있다. 물론 이전 삶에서 저런 소리를 숱하게 들었다. 저것뿐이랴.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칼날이 되어 내 가슴에 박혔다. 솔직히 지금도 조금은 아리지만, 이제는 이렇게 생각한다.
‘어차피 태어날 생명이라면, 조금 일찍 생기나 늦게 생기나.’
나는 일부러 업신여기는 표정을 지으며 거만한 목소리로 슈발럼에게 말했다.
“앉으라고 안 했는데? 난 신분 차별이 심하거든.”
“하, 막말로 이제 공작부인도 아니잖아? 좋은 말로 대우해 주니 아직도 자기 처지가 파악이 안 되시나?”
“공작부인은 아니라도 사람과 쓰레기는 구분하지. 내 시트에 구린내 배기 전에 썩 꺼져.”
“흐흥, 하긴 남편 바람나고 이혼까지 당했으니 제정신 아니지, 어?”
그가 사나운 기세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내 어깨를 밀치려 했다.
“꺄악!”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를 꽥 내질렀다. 쓰레기 슈발럼 때문이 아니었다. 천장 아래 짐 선반에서 누군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