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귀신인지 도둑인지 거지인지2021.12.13.
푸스스한 머리에 반쯤 벗은 남자가 짐 선반에서 기어 나왔다. 그 귀신인지 사람인지 모를 것은 아주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로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차림새가 흐트러져 있긴 했지만 얼굴이나 여기저기 드러난 피부가 뽀얀 게 부랑자는 아닌 듯했다.
‘그건 그렇고, 저 표정, 저 눈빛은 뭐야?’
남의 객실 선반에 도둑처럼 납작 숨어 있던 주제에 지을 법한 표정이냐고 저게. 놀란 가슴이 진정되자 슬슬 어처구니가 없었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어디서부터 따져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사이, 그 선반 귀신이 훌쩍 몸을 날렸다. 의욕 없어 보이는 얼굴에 비해 착지는 의외로 야무지고 날렵해 살짝 감탄한 순간.
‘아, 맞다. 여기 가십계의 독사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지!’
저 근육질 날다람쥐 때문에 놀라서 까맣게 잊고만 성가신 존재가 떠올랐다. 안 그래도 특종감이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독이 바짝 올랐을 텐데. 낯선 남자, 그것도 저렇게 헐벗은 남자가 한 객실에 있는 걸 보았으니! 나를 엿 먹이기 매우 유리한 상황이 됐다. ‘공작의 외도로 파경을 맞게 된 레이디 앰브로시아, 과연 그녀는 피해자이기만 할까?’ ‘공작 부부의 이혼 뒤에 감춰진 충격적인 진실.’ ‘제국의 신사 카를슈테인 공작의 말 못 할 속사정.’ 대충 이런 기사 제목들이 내 머릿속을 지나갔다. 나는 재빨리 옆에 선 슈발럼의 표정을 살폈다. 독사 같은 눈을 번뜩이며 회심의 미소라도 짓고 있을 줄 알았더니. 웬일로 그 역시 긴장한 듯 굳은 얼굴이었다. 악질 기자라도 선반 귀신은 역시 좀 당황스럽지? 부스스한 머리칼을 쓸어 올린 선반 귀신이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슈발럼을 내려다보았다. 선반에 구겨져 있던 몸을 주욱 펴니 슈발럼보다 머리 하나는 족히 더 컸다. 위압감을 느꼈는지 파리해진 슈발럼이 어깨를 움츠리며 더듬거렸다.
“모, 몰랐습니다, 진 시더…….”
“시더?”
“아아, 그…….”
“어이, 슈발럼. 삶에 미련이 없나?”
선반 귀신이 나른한 얼굴로 바짝 얼어 있는 상대의 외투 옷깃에 붙은 배지를 만지작거렸다.
“이렇게 머리가 나빠서야 제대로 밥벌이하겠나. ‘팩트’도 물이 많이 흐려졌네.”
“실수했습니다. 만회할 수 있게 기회를 주시면…….”
“그래야겠지.”
“저는 이만…….”
“실수할 수 있어. 하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짜증 나겠지? 입단속 잘하고.”
그는 딱딱하게 경직된 슈발럼의 어깨를 짐짓 다정하게 두드렸다.
“알지? 걱정돼서 하는 소린 거.”
그가 턱짓으로 문을 가리키자 슈발럼은 체면이고 뭐고 그 문으로 허겁지겁 내뺐다. 늘 고압적이고 안하무인이던 슈발럼이 찍소리도 못 하고 꽁지 빠지게 달아나는 그림이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그 모양 빠지는 꼴을 넋 놓고 지켜보던 나는 퍼뜩 깨달았다. 저 빌어먹을 슈발럼이 저 혼자 살겠다고 선반 귀신인지 도둑인지와 나만 덩그러니 남겨 두고 달아난 현실을.
‘설렁줄을 당기면 승무원이 온다고 했지?’
나는 반쯤 벗은 도둑을 노려보며 설렁줄이 있는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그도 어슬렁거리며 침대 쪽으로 가더니 제 것인 양 느긋하게 기대앉았다. 그의 길고 말같이 단단해 보이는 다리가 내 진로를 떡하니 막았다.
‘하필이면…….’
차라리 소리를 질러 도움을 청하는 게 나을까? 하지만 아까 슈발럼을 다루는 솜씨를 보니 섣불리 움직였다 험한 꼴을 당할 것 같아 두려웠다. 나는 초조한 마음을 누르며 그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내질러 보았다.
“당신 뭐죠? 왜 여기 있는 거냐고요? 그 흉측한 몰골은 또 뭐고. 나 참 기가 차서.”
나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란 걸 보여 주기 위해 날카로운 목소리로 기선을 제압했다. 그는 멍한 눈을 껌뻑이더니 하품이라도 하는 듯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뭐냐? 진이라고 불러. 왜 여기 있냐? 내 방이니까. 왜 이런 몰골이냐? 내 방이니까.”
방자한 태도만 봐선 제 방인 것 같지만 여기는 엄연히 내 방이다.
“언제부터 여기가 당신 방이야?”
“꽤 됐지, 아마?”
“대체 뭘 믿고 남의 방을 자꾸 자기 방이라고 우기는 거예요?”
그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나를 바라보더니 손을 내밀었다.
“표 좀 보지.”
“뭐요? 당신 뭘 믿고 내 표를 보여 줘요?”
저 인간도 혹시 특종을 노리는 하이에나 중 하나인가? 나는 경계의 눈빛을 보내며 설렁줄 쪽으로 조금 더 다가섰다. 그가 몸을 조금 더 앞으로 기울였다. 내가 조금 더 접근하자 그가 몸을 조금 더 내밀었다.
‘일부러 저러는 거잖아!’
당황한 표가 났는지, 그가 내 얼굴을 흘깃 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당기면 당신이 곤란해질 텐데? 무임승차? 무단침입? 난 상관없지만.”
“그건 그쪽이 걱정할 일이지!”
호기롭게 소리쳤지만 상대가 저리 당당하게 나오니 나도 슬슬 자신이 없어졌다. 혹시 내가 정말로 객실을 잘못 들어온 걸까? 열차는 처음 타 보는 거라……. 아니야, 분명 특실 3B호인 걸 몇 번이나 확인했다고. 아 참, 그러고 보니 저 인간 짐 선반에 숨어 있다 나온 거잖아? 제 방이면 그럴 리가 없지! 내가 그 점을 따지려 하는데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흐음…… 그럼 이렇게 하지. 아까 슈발럼인가 뭔가 하는 작자가 지껄이는 걸 들으니 사정이 딱하던데. 여기 침대가 둘이니까, 원하면 쓰도록 해.”
“뭐어?”
방금 내 이성이 뚝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숨어서 내 약점을 다 훔쳐 듣고는 개수작을 부리는 거지? 더러운 자식, 더러운 자식! 분노와 서러움에 눈앞이 하얗게 된 나는 그에게 달려들었다. 온몸을 던져 그를 밀치며 설렁줄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침내 내 손에 들어온 설렁줄을 힘껏 잡아당기며 침대 위로 고꾸라졌다. 조용했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슴 아래서 뭔가 진동이 느껴졌다.
“크흑 크크크큭.”
그가 내 아래 깔린 채 온몸을 떨며 웃고 있었다.
“어젯밤에 차창 밖으로 던져 버린 자객 녀석이 있는데 말이야.”
웃음을 참느라 끄끅거리며 그가 말했다.
“그 녀석이 설렁줄을 끊어 놓았단 걸 깜빡하고 말을 안 했네, 내가.”
아마 내 얼굴이 불타고 있으리라. 그가 얄미운 얼굴로 반대쪽 침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침댄 양보 못 해. 난 이쪽이 맘에 들거든. 당신은 저쪽을 쓰도록 해.”
* * *
‘거지 같아, 거지 같아, 거지 같아!’
나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분해서 울었다. 좀 전에 그의 표를 빼앗아 내 표와 비교해 보니 똑같은 특실 3B호였다. 눈에 힘을 주고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니 다른 점이 눈에 띄었다. 열차가 달랐다. 싸한 느낌이 밀려왔다. 결국 나는 그가 이 객실의 주인임을 인정해야 했다. 하이에나 기자들을 따돌리느라 일부러 이 열차 저 열차를 오르락내리락하며 교란 작전을 펼치다 나 역시 엉뚱한 열차를 잡아타고 만 것이다. 침대 한 귀퉁이에 의기소침하게 몸을 말고 앉아 있는 나에게 그가 물었다.
“몸은 어때? 매스껍거나 하진 않아?”
날 걱정해 주는 거야? 갑자기? 하긴 연약한 레이디의 몸으로 무리한 활극을 벌이긴 했지. 무슨 몸이 쇳덩어리로 됐나, 아까 그를 밀쳤던 팔뚝에 멍이 든 것 같았다.
“그럼 독은 안심이군.”
“……?”
그는 내가 남긴 음식을 포크로 뒤적거렸다.
“대체로 조심성이 없군. 남의 객실에 밀고 들어오질 않나. 뭐가 들었을지 모를 남의 식사를 먹어 치우질 않나.”
그는 내가 먹다 남긴 음식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밀어 넣고 우적거리더니, 허리춤에서 은으로 된 포크를 꺼냈다. 내가 손도 대지 않은 애피타이저 등은 그 은 포크로 먹었다.
“관자며 송아지며 내가 좋아하는 것만 골라서 거덜 냈네. 레이디, 콩이랑 브로콜리도 먹어야 튼튼해지지.”
나는 쩝쩝대는 그를 노려보았다. 열일곱 번의 삶을 통틀어 저렇게 이상한 남자는 처음 본다. 슈발럼 같은 하이에나나 그동안 만난 온갖 사기꾼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로 불쾌하고 무례하다. 아까 자객이 설렁줄을 끊었다더니, 식사엔 누가 독까지 타나 보지? 도대체 저 인간 정체가 뭐야?
“멀쩡한 자기 방에서 왜 짐 선반에 올라가 있었던 거예요?”
나는 아까부터 궁금하던 걸 물었다.
“나를 노리는 놈들이 꽤 있어서.”
“아, 자객이 무서워서 거기 숨어 있는 거구나.”
내가 깐죽대자 그가 포크로 콩을 으깨면서 말했다.
“자는데 건드리면 내가 좀 사납게 돌변해서 말이야. 아무리 나라도 산목숨 꺾고 나면 기분이 좋진 않거든.”
아하, 그러니까 자객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 선반에서 구겨져 주무신다? 잘났네, 정말.
“선반도 적응되면 꽤 아늑하고 괜찮아. 천장이 낮으면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거든.”
“그런데 꼭 그렇게 반쯤 벗고 있어야 해요?”
“다 입고 선반에 누워 있으면 옷이 더러워지고 구겨지잖아.”
나름, 용의주도하네.
“당신 대체 뭐 하는 사람이에요?”
“이름은 진이고, 더 이상은 알려고 하지 마. 밥줄이 달린 일이라 나도 다 밝힐 수는 없어. 당신이 다 밝힐 수 없는 거처럼.”
“하는 일이 해결사 같은 거예요? 정보 길드 같은 데 속한 그런?”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렇단 말이지……. 번뜩 좋은 수가 떠올랐다. 그와 나의 관계를 역전시킬.
“진, 얼마면 돼요?”
“뭐?”
“당신에게 의뢰하고 싶어요.”
“뭐 하러?”
“나도 해결사가 필요하던 참이에요. 나를 노리는 사람도 많거든요.”
“당신은 걱정 없겠던데?”
“슈발럼이 하는 소리 다 들었다면서요? 그 인간처럼 나를 이용해 먹으려는 하이에나가 한둘이 아니라고요.”
“아까 슈발럼을 상대하는 거 보니까 혼자서도 잘하겠던데, 뭐.”
그는 브로콜리를 접시 한쪽으로 밀어놓으며 귀를 후비적거렸다.
“계약 조건에 여기 객실료도 포함시키면 되잖아요. 당신한테 얹혀 가는 것도 마음이 불편하단 말이에요.”
“불편할 거 없어. 알다시피 침대가 남아도니까.”
나는 순진한 눈빛을 자아내며 말했다.
“그리치는 대도시라 나 같은 레이디가 혼자 다니기엔 위험하다면서요?”
“그다지. 그리치도 사람 사는 데야. 그리고 이능은 뒀다 뭐 하나. 위험하다 싶을 땐 그걸 써. 당신한텐 노래로 사람을 공격하는 재주가 있잖아.”
나는 입을 꽉 다물고 그에게 눈을 부라렸다. 이런 식으로 거절한단 말이지? 왠지 오기가 생기려고 했다. 그때 주름 하나 가지 않도록 곱게 벗어서 걸어둔 그의 외투에서 신호음이 들렸다. 그는 외투에서 불빛을 깜빡이고 있는 작은 기계를 꺼냈다. 탈라리아 메신저. 이전 삶에서 저 기계를 본 적이 있었다. 정보 길드에서도 꽤 상부에 있는 이들, 주로 귀족 출신인 이들이 가지고 있는 통신 기기였다. 탈라리아 메신저를 들여다본 그는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일이 참…… 재미있게 돌아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