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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나를 보는 그를 보았다 (5/110)

#5화. 나를 보는 그를 보았다2021.12.17.

1654865943564.jpg“당신 말이야, 혹시 복수하고 싶은 건가?”

탈라리아 메신저를 들여다보던 진이 자기 턱을 매만지며 물었다.

16548659435646.jpg“복수?”

하긴 제국 전체가 다 아는 일을 저 사람이 모를 리가 없지. 심지어 슈발럼이 지껄인 헛소리까지 엿들었을 테니.

16548659435646.jpg“내가 복수를 해야 하나요? 누구한테?”

지난 열여섯 번의 삶 동안 프러너스와 아젤리아에게 복수하기 위해 내 전부를 걸었던 것치고는 참 천연덕스럽게 시치미를 뗐다.

1654865943564.jpg“이런 경우 보통은 복수하고 싶어 하기에.”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씹다 내려놓은 셀러리를 다시 씹었다.

1654865943564.jpg“해결사가 필요하다기에 그런 건가 하고. 내가 오해했네, 미안.”

방금 미안하다고 했다? 잠시 내 귀를 의심했다. 사과도 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니. 한술 더 떠 진은 나를 칭찬하기까지 했다.

1654865943564.jpg“좋은 자세야. 뭐, 먹고살자니 대신 복수도 해 주고 그러긴 하는데, 권할 게 못 돼.”

그가 인상을 쓰면서 셀러리를 내동댕이쳤다.

1654865943564.jpg“그래 봤자 우리 같은 해결사들 주머니나 살찌우는 거거든.”

영업 비밀을 그렇게 막 발설하고 다녀도 되나요?

1654865943564.jpg“귀족의 삶이라는 게 별거 있나. 적당히 틀에 맞춰 사는 게 현명하지. 돌아가기 전에 조금 혼내 주는 정도야 뭐 괜찮겠지.”

점점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벌거숭이 해결사였다. 자기가 반듯하고 답답한 귀족의 삶에 대해 뭘 안다고? 그 헤프게 벌어진 앞섶이나 좀 어떻게 해 보시지. 방금 전까지 내 의뢰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더니 갑자기 관심 있는 척하는 것도 이상했다. 왠지 모르지만 딱 잘라 거절하던 진의 태도가 누그러졌으니 다시 의뢰 얘길 꺼내 볼까. 계약만 채결돼 봐. 나를 언짢게 하던 저 요사스런 입부터 꾹 다물게 해 줄 테니. 이번엔 당신이 약 올라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차례라고!

16548659435646.jpg“내가 바라는 건 그리 거창한 일이 아니에요. 나만의 안식처로 무사히 갈 수 있게 도와 달라는 거죠.”

거기다 살짝 하나 더 얹자면 당신을 조금 혼내 주는 정도? 그 어울리지 않게 쭉 뻗은 고상한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고 싶은? 모든 게 껄렁껄렁 흐느적거리는 가운데 거기, 그 부위만 높고 곧은 게 묘하게 거슬린단 말이지.

1654865943564.jpg“나만의 안식처라니?”

진이 미심쩍은 눈초리를 하고 물었다.

16548659435646.jpg“내가 조용히 여생을 보낼 곳이요. 그래서 쓸데없는 관심은 사절이에요. 아무 소란 없이 그곳에 숨어들고 싶다는 뜻이에요.”

1654865943564.jpg“진심인가?”

16548659435646.jpg“진심이 아니면?”

1654865943564.jpg“거기서 혼자 살 작정이라고? 앞으로도 죽? 잠깐 머무는 게 아니고?”

뭘 그리 의심이 많으실까. 직업병인가? 귀족 레이디가 혼자 후미진 시골에 들어가 사는 게 흔한 일은 아니겠지만. 어디 살든 내 맘 아닌가.

16548659435646.jpg“잠깐 여행이나 요양을 가는 줄 알았나 보죠?”

1654865943564.jpg“그런 경우거나…… 아니면 남편 길들이기 같은 건가 했지.”

16548659435646.jpg“……!”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아까부터 진이 뜻 모를 소리를 늘어놓은 이유를. 그는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은 것이다. 물정 모르는 귀부인이 바람난 남편에게 깜찍한 시위라도 할 요량으로 가출 쇼를 벌인 거라 여기는 듯했다. 멋대로 나를 재단하고 철없는 귀부인 취급하는 데 울컥했지만 남의 객실에 신세 지고 있는 처지라 인내심을 발휘했다.

16548659435646.jpg“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나와 카를슈테인 공작은 이미 이혼한 사이예요. 길들이고 말고 할 이유가 없는 관계죠. 그는 이런 가출 따위로 길들여질 사람도 아니고.”

1654865943564.jpg“확실한가? 아닌 거 같은데?”

하, 아닌 것 같다니! 진의 주제넘은 참견에 어이가 없었다. 내가 정말로 이혼을 했든 아니든, 그걸 왜 당신에게 증명해야 하지? 그 얘기라면 역에서 만난 하이에나들과 실랑이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일일이 대꾸하기도 지친다 지쳐.

16548659435646.jpg“아니면? 내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소리예요?”

1654865943564.jpg“상대방은 의외로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뜻이었어. 공작은 이혼을 바라지 않을 수 있잖아. 상대의 신을 신어 보라는 격언 알지?”

16548659435646.jpg“바라요, 확실히. 급히 이혼해야 할 이유가 있는 건 그니까. 그건 굳이 번거롭게 신까지 바꿔 신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죠.”

당신은 나와 프러너스에 관한 소문을 듣지도 못했어? 그 격언을 여기 갖다 붙일 일이냐고! 하지만 진은 아까 식사가 모자라서 눈치까지 말아먹었는지 끈질기게 굴었다.

1654865943564.jpg“둘이 대화는 충분히 나눈 건가? 이혼 서류에 서명은 분명히 한 거고?”

16548659435646.jpg“서명은 하등 중요치 않아요. 서류야 있든 없든 그는 하고 싶은 건 어떻게든 할 사람이죠.”

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받아치자 진이 한껏 위협적인 어조로 말했다.

1654865943564.jpg“공작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가 원하는 걸 손에 넣을 위인이라는 점엔 동의하지. 하지만 그가 하고 싶은 게 당신 생각과는 다를 가능성도 남겨 둬. 더 지독할 수도 있다는 얘기야.”

16548659435646.jpg“싫은데? 가능성 따윌 왜 남겨 둬요? 아무 볼일 없는 사인데.”

내 삐딱한 반응에 심각하게 좁아졌던 진의 미간이 허물어지며 김빠진 표정이 됐다. 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젓더니 덧붙여 말했다.

1654865943564.jpg“그리고 레이디, 서명이 중요하지 않다고 누가 그래? 당신이 정말로 공작과 이혼할 생각은 아니라면 또 모를까.”

해결사라기에 내가 저지른 실수도 만회할 겸 소박하게 한 방 먹일 겸 일을 의뢰하려던 것뿐인데. 한심 반, 의심 반인 눈총을 받고 있자니 화도 나고 약도 올랐다.

16548659435646.jpg“내가 쇼한다고 생각하는군요.”

1654865943564.jpg“기분 나쁘게 생각 마. 남녀 사이에 어설프게 끼어들었다 큰코다친 적이 한두 번이어야지.”

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1654865943564.jpg“그중에서도 부부싸움이 가장 피곤하거든. 잘못 참견했다 본전도 못 건지고 되레 봉변을 당하는 경우가 많아.”

봉변까지. 진은 그간 당한 수모가 많은지 괜히 나를 쏘아보며 인상을 썼다.

1654865943564.jpg“가장 고약한 건 변덕이 죽 끓듯 한다는 거야. 하룻밤 사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어제 만난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될 때도 있어.”

16548659435646.jpg“자기 마음을 자기도 잘 모르나 보죠. 그럴 때 있잖아요. 내 마음인데도 헷갈릴 때.”

1654865943564.jpg“모르는 것도 문제지만 더 골치 아픈 건 그 모든 게 진심일 때야.”

알 듯 모를 듯한 말이었다. 하긴 진이 내 구구절절한 사정을 어떻게 알겠는가. 진의 눈엔 나 역시 그 변덕스런 부부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잠깐의 일탈이 아니란 걸, 그런 깜찍한 부부싸움 놀이는 더더욱 아니란 걸 어떻게 설명한다……. 잠깐? 그런데 내가 왜 해명하려고 하지? 하마터면 진의 마수에 걸려들 뻔했네. 그래, 일일이 해명할 필요 없지! 필요는 없지만, 그렇지만……. 이상하게 해명하고 싶었다. 내 부부 관계나 이혼 여부가 아니라 나, 로제트 앰브로시아라는 사람에 대해.

16548659435646.jpg“진, 아까 복수하고 싶냐고 내게 물었죠? 그럴 생각 없다고 대답했고요. 실은 질문 자체가 틀렸어요.”

1654865943564.jpg“질문이 틀렸다?”

16548659435646.jpg“내가 복수 당하는 역할이거든요. 그래서 후미진 시골로 꼬리를 말고 도망가는 중이고요.”

1654865943564.jpg“흠…… 복수하려는 자는 많이 봤지만 스스로 복수 당해 마땅하다는 사람은 처음이군.”

16548659435646.jpg“아, 아니, 마땅하다고는 말하지 않았잖아요.”

내가 항의하자 진의 한쪽 입꼬리가 비죽 치솟더니 어깨가 들썩였다. 비웃는 건가? 그는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앉아 있던 의자를 들고 다가와 등받이가 내 쪽을 향하도록 내려놓았다. 털썩. 의자를 말처럼 탄 그가 의자 등받이에 가슴을 기대고 팔과 얼굴을 올려놓았다. 기괴한 자세였다.

1654865943564.jpg“무슨 짓을 했기에 복수를 피해 달아나는지 어디 한번 들어볼까?”

말은 저랬지만 자세나 눈빛은 딱히 조사하려는 의욕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나른한 분위기가 왠지 말 시켜 놓고 딴 생각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여하튼 저런 자세로 이야기를 듣겠다는 사람은 인생 17회차 만에 처음이어서 나는 기겁했다. 만난 직후부터 줄곧 이상한 남자였다. 지금껏 내가 접한 남자라고는 제국 최고의 신사라 불리는 전남편 프러너스나, 그 정도는 아니어도 죄다 귀족적인 예절을 익힌 인간들이었기에 그의 행동은 낯설었다.

16548659435646.jpg“좋아 죽겠다는 두 사람을 갈라놓은 죄? 멀쩡한 연인을 불륜 남녀로 만들었네요, 내가.”

나는 괜히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1654865943564.jpg“흐음, 확실히 당신이 나빴네.”

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기분 나쁠 만큼 재빨리 수긍했다.

16548659435646.jpg“삶이라는 게 무척 짧은 거더라고요. 얼마 되지도 않는 시간을 적어도 살고 싶은 사람과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물론 프러너스와 아젤리아도요.”

진은 별말이 없었다. 의자 등받이에 팔과 턱을 괸 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16548659435646.jpg“왜 그렇게 쳐다봐요?”

1654865943564.jpg“관찰. 당신에 대해 파악 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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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그러고 쳐다보면 뭐가 보이나? 나는 어색해진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진은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나를 보는 동안,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나를 볼 때 나도 그를 보았다. 그의 눈이 나를 염탐할 때 내 눈도 그를 염탐했다. 헝클어진 머리나 차림새에 비해 의외로 피부가 희고 고운 것이 눈길을 끌었다. 속눈썹도 의외로 가지런하고 풍성했다. 그 속눈썹 아래 길게 누운 잿빛 눈이 이상하게 슬픈 빛을 띠고 있어서 화들짝 놀랐다.

16548659435646.jpg‘정말이지 어울리지 않게…….’

무엇보다 그 눈을 전에도 본 듯한 이상한 느낌이 퍼뜩 스쳐 갔다.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다. 그와는 이번 생에 처음으로 만났다. 지난 생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눈은 반쯤 나를 향하면서 반쯤 생각에 잠긴 듯했다.

16548659435646.jpg‘저렇게 생겨서는 왜 뒷골목을 전전하는 해결사가 됐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는 스스로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나도 참, 저렇게 생긴 사람은 그럼 뭘 해야 어울린다는 건지. 하지만 진이 귀족 출신이었다면 지금과는 매우 다른 삶을 살았을 것 같았다. 사교계에서도 꽤 잘나갔을 것 같고. 진의 태도나 행색을 보면 귀족 신분일 리는 없겠지만.

16548659435646.jpg‘어떻게 살아온 사람일까?’

나는 성인이 된 후로, 결혼한 후에는 더더욱, 나 자신과 프러너스가 아닌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내가 너무나 오랜만에 타인의 삶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었다.

16548659435646.jpg“진, 당신은 왜 해결사가 됐어요?”

평범해 보이는 간단한 물음. 하지만 나에겐 작은 일탈 같은 것이었다. 성인이 된 이후 처음으로 타인에게 건넨 순수한 질문이었으니. 내 질문에 진은 황당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헛웃음을 터뜨렸다.

1654865943564.jpg“내게 묻는 건가?”

16548659435646.jpg“왜요, 나는 물어보면 안 돼요?”

1654865943564.jpg“해결사에게 ‘왜’라는 건 없어. 조건을 따져 할지 말지 결정할 뿐.”

16548659435646.jpg“확실해요? 아닌 거 같은데?”

나는 소심한 복수를 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1654865943564.jpg“어렸을 적 꿈이 해결사였냐고 묻지그래?”

진이 미간을 구기며 비딱하게 말했다.

16548659435646.jpg“아, 안 그래도 묻고 싶었는데 참았어요.”

우리가 이렇게 서로를 염탐하며 주거니 받거니 상대의 비위를 살살 건드리는 동안에도 진의 손에 감겨 있던 탈라리아 메신저는 분주하게 깜빡거렸다.

16548659435646.jpg“많이 바쁜 것 같네요?”

그의 심기를 긁는 일은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탈라리아 메신저를 가리켰다. 진은 메신저를 흘깃 보더니 침대 위로 던져 버리곤 딴소리를 했다.

1654865943564.jpg“당신 화법이 매우 이상한 건 알아? 마치 자기 삶을 다른 사람 것인 양 말하는 거.”

16548659435646.jpg“그랬나요?”

1654865943564.jpg“프러너스와 아젤리아는 마치 살아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어디 소설 속에라도 등장하는 인물 같고.”

진의 관찰력은 나름 예리한 구석이 있었다. 정말로 그랬다. 삶을 반복하다 보니 이젠 삶이 삶 같지 않고 사람들도 사람 같지 않았다. 진의 말대로 마치 구경꾼이라도 된 것처럼 무대 바깥에서 삶이라는 연극을 관람하는 기분.

16548659435646.jpg“어쨌든 내가 바라는 건 복수가 아니라 두 사람이 잘 사는 거예요. 별 탈 없이.”

나는 절반쯤 진심으로 말했다.

1654865943564.jpg“프러너스가 들으면 눈물 나겠군.”

진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16548659435646.jpg“프러너스를 알아요?”

1654865943564.jpg“프러너스 모르는 사람도 있나?”

16548659435646.jpg“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방금 프러너스와 안면이 있는 것 같은 말투였다고요.”

1654865943564.jpg“흐음…….”

16548659435646.jpg“그를 개인적으로 알아요?”

나는 불길한 예감을 안고 진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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