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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죄 많은 남자와 기대한 여자 (6/110)

#6화. 죄 많은 남자와 기대한 여자2021.12.20.

1654865958161.jpg“카를슈테인이라면, 확실히 모르는 사이는 아니지.”

내 표정이 굳어지자 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1654865958161.jpg“아카데미 동기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고. 대화를 나눈 적이 손에 꼽을 정도?”

프러너스와 아카데미 동기라면 꽤 이름 있는 가문 출신이란 얘긴데.

1654865958161.jpg“내가 하는 일이 뭔지 대충 알잖아. 제국 전체를 주무르는 카를슈테인이니 이런저런 일로 엮이지 않기가 더 어렵지.”

하긴 지난 삶에서 보았던 정보 길드의 고위층은 꽤 힘 있는 귀족들이었다. 비싼 정보는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길드의 고위층 정도는 돼야 지닐 수 있는 탈라리아 메신저를 대수롭지 않게 다룰 때 혹시나 했지만. 정말로 귀족이라면 저 남자는 왜 저 모양이지?

1654865958161.jpg“말하다 보니 모르는 사이는 아니지만 딱히 아는 사이라 보기도 힘들군.”

16548659581628.jpg“그래요, 친하진 않았을 것 같네요.”

1654865958161.jpg“무슨 뜻이지?”

16548659581628.jpg“무슨 뜻은요. 그 말 그대로예요.”

거짓말. 내 심사는 한참 뒤틀려 버린 후였다. 진이 프러너스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안 순간, 가벼운 좌절감을 느꼈다. 자존심이 상한 나는 맥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16548659581628.jpg“솔직히 당신과 프러너스는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요? 두 사람이 친한 모습은 도무지 그려지지 않아요.”

1654865958161.jpg“프러너스와 친할 것 같은 건 어떤 건데?”

진이 멀뚱한 얼굴로 물었다.

16548659581628.jpg“보통의 신사들 같은 거죠. 제대로 된 귀족 남성이란…….”

품위 있고 단정하고 고상해야 한다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또 프러너스를 떠올린 것 때문에 우울해졌다. 너무 오랫동안 내 세상의 기준은 프러너스였다. 나 스스로 그에게 길들여지기를 원한 시간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꼴을 당하고도 프러너스를 떠올리다니. 호기롭게 집을 나설 때만 해도 나만 마음을 고쳐먹으면 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나만 프러너스의 바짓가랑이를 놓고 공작가를 떠나면 당장 달라진 삶이 기다릴 거라고. 하지만 공작저 밖으로 한 발 내디딘 순간부터 나는 도리어 프러너스의 영향력을 실감해야 했다. 하이에나 같은 기자들을 아무리 따돌려도, 엉터리 노래를 목청껏 부르며 해방감에 젖어도, 도전적이고 당찬 레이디인 척 굴어도. 나는 그 대단한 카를슈테인 공작의 거대한 그늘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다. 특히 진이라는 낯선 인물을 만나 먼지가 뿌옇게 앉은 호기심이란 감정을 일깨우게 된 건 내게는 매우 희귀한 일이었다. 먹구름 사이로 해가 반짝 비치는 듯한 경험이었는데. 그마저도 프러너스와 연결되어 있다니 알 수 없는 배신감이 밀려왔다. 나는 심술궂게 말했다.

16548659581628.jpg“보통 남자는…… 여하튼 당신 같진 않아요.”

1654865958161.jpg“하?”

16548659581628.jpg“아, 오해 말아요. 긍정적인 뜻이에요.”

1654865958161.jpg“말문이 막힐 영광이군.”

진은 프러너스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귀족 남성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대개의 귀족 남성은 저런 말투도, 차림도, 태도도 보이지 않으니까. 무엇보다 귀족 남성은 먼저 사과하는 법이 없다. 그리고 여성과 대등한 위치에서 대화하지 않는다. 그건 위신이 떨어지는 일이라 여겼으니까. 요즘 인기 있는 디저트에 대해서는 담소를 나누지만, 작위 승계법에 대해선 토론하려 들지 않듯이. 반면 진은 지나치게 대등한 태도로 입바른 소리만 하며 사람을 약 오르게 해서 탈이지만. 그런 진이 아카데미에서 보수적인 교육을 받은 귀족이라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저잣거리나 뒷골목의 사내라면 모를까, 귀족 중에 저런 껄렁껄렁한 유형은 17회차 인생을 통틀어 처음이니까. 마치 산속에서 야생동물과 맞닥뜨린 것처럼 낯설고 아름답고 신기하면서도 불쾌하고 두려운 느낌을 풍겼다. 아니, 나는 대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감정의 스튜 냄비 속에서 온갖 복잡하고 낯선 재료들이 뒤섞여 부글부글 끓어오를지라도 그중 가장 식욕을 자극하는 게 무엇인지. 그건 단연 호기심과 흥미라는 감정이었다. 처음 진과 맞닥뜨리고 무례하고 불쾌하다 느낀 건, 일종의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가까스로 평화를 되찾아 가는 내 일상에 그가 일으킬 파문을 본능적으로 예감했으리라. 솔직히, 진과의 대화는 즐거웠다. 한겨울 공기처럼 신선했다. 상쾌해서든 얼얼해서든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줬다. 세상과의 교류를 끊고 무심하게 살겠다는 각오를 깜빡 잊게 할 만큼 마음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대화다운 대화는 실로 오랜만이었으니까. 프러너스와는 대화라고 할 만한 걸 나눈 기억이 없었다.

16548659581628.jpg‘난감한 일이네.’

나는 토버마리의 시골집에 은거해 죽은 듯이 지낼 계획인데. 이제 와서 대화의 즐거움을 알아 버리면 어쩌자는 건지. 숲속 가득 돋아나 있을 버섯이나 정원의 자두나무, 아니면 어린 시절 헉슬리 숙부와 닮아 헉스라고 이름 붙인 바위를 붙들고 오늘 기분이 어떠냐고 인사를 건네야 하나. 막막한 기분에 젖어 있는데, 아까부터 시끄럽게 울리는 탈라리아 메신저를 한참 들여다보던 진이 대뜸 내뱉었다.

1654865958161.jpg“당신의 그 남자다운 남자에 대해 알 것도 같군.”

나도 모르겠는 걸 당신이 어떻게 안다는 건지.

1654865958161.jpg“가출해 보니 더 분명해지지 않아?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금 남편만 한 남자가 없다는 사실이. 그걸 깨닫는 데 내가 크게 기여했다는 건 조금 씁쓸하지만.”

16548659581628.jpg“또 그 소리예요? 난 가출이 아니라 이혼했다니까.”

1654865958161.jpg“남자 중의 남자인 당신 남편도 지금쯤 비슷한 생각일 거야. 그러니 적당히 하고 돌아가는 게 어때?”

16548659581628.jpg“왜 자꾸 엉뚱한 소리예요? 그가 어떤 생각이든 나에겐 중요치 않아요.”

1654865958161.jpg“가끔 밖에 있는 사람 눈이 정확할 때도 있잖아.”

16548659581628.jpg“틀렸어요.”

나는 단호히 말했다. 아무리 제삼자의 눈이 더 냉정할 수 있다지만, 저건 너무 과한 자신감 아닌가. 나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며 물었다.

16548659581628.jpg“대체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가 뭐예요?”

1654865958161.jpg“근거라…… 내 나름의 정보?”

16548659581628.jpg“정보에 그렇게 빠삭하신 분이 제국인이 다 아는 불륜 스캔들은 정작 모르나 봐요. 그는 사랑하는 여자가 따로 있다고요.”

프러너스와 친해 보이지도 않고, 실제로 친한 사이도 아니라면서 마치 그의 생각을 훤히 안다는 듯 구는 저 태도는 뭐지? 나는 혼란하고 야속한 마음으로 진을 흘겨보았다. 진이 무슨 죄냐고? 알지도 못하면서 답답한 소리를 늘어놓으며 참견한 죄? 쓸데없이 예리한 눈썰미로 내 약점을 간파해 나를 놀린 죄? 곤경에 처한 레이디를 의심 없이 덥석 도와준 죄? 프러너스와 아는 사이인 죄? 죄목이야 많고 많지만, 가장 큰 죄는 기대하게 만든 죄. 삶의 밑바닥으로 조용히 가라앉으려는 나를 두근거리게 만든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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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기대하라고 했냐고? 나 혼자만의 변덕이니 진에겐 억울한 죄목이려나. 새로운 삶에 첫발을 내딛자마자 남에게 신세 지기 싫은 오기와 신기한 것을 맞닥뜨린 흥분 때문에 잠시 내 각오를 망각했다. 시의적절하게 등장해 준 프러너스의 망령 덕에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지만. 이로써 나의 다소 낭만적인 일탈은 맥없이 일단락되었다. * * * 열차가 덜컹거리는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한바탕 설전을 벌였던 것이 무색하게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은 또다시 울린 탈라리아 메신저를 꺼내 보더니 객실을 나갔다. 나는 홀로 객실에 남아 이리저리 흔들리며 스스로에게 실망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담담하게 유유하게 무심하게, 물처럼 바람처럼. 이 듣기 좋은 말들이 공허하게 나부꼈다. 조금만 방심해도 제자리로 돌아가고 마는 내 수준을 확인하고 의기소침해졌다.

16548659581628.jpg‘토버마리로 가면 뭘 하려고 했더라?’

나는 공작저를 떠날 때 가졌던 초심을 되살리려 애썼다. 생각해 보면 이런 삶은 이번이 처음이지 않은가. 아무리 17회차라도 시행착오란 게 있을 수 있지. 나는 내 계획을 차분히 되짚어 보았다. 일희일비하며 흔들리지 않으려면 몰두할 일이 있는 게 좋겠고, 세상 물정도 더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6548659581628.jpg‘내가 할 줄 아는 게 뭐 있을까?’

내가 할 줄 아는 건 프러너스 카를슈테인.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면 좋아할지, 오직 그것만 궁금해하며 살아왔다. 물론 그마저도 낙제점을 받고 밀려났지만.

16548659581628.jpg‘진은 정보 길드에 있으니까 스스로 으스댄 만큼 세상 돌아가는 걸 잘 알겠지.’

마음 같아서는 곧장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지만, 알량한 자존심이 발동했다.

16548659581628.jpg‘생각을 좀 줄일 필요가 있겠어.’

나는 삶의 지침을 하나 더 추가했다. 물처럼 바람처럼 담담하면서도 홀가분하게 살기로 해 놓고 생각을 너무 많이 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자신을 괴롭히고 지나치게 타인에게 휘둘리는 삶은 지난 열여섯 번으로 족했다.

16548659581628.jpg‘마음 내키는 대로 가 보는 거야. 하루아침에 딴사람이 되는 게 쉽지 않겠지만, 최대한 저 거침없는 남자처럼 생각 없이 살아 보는 거야.’

막 객실로 되돌아온 진은 자신을 바라보는 내 눈초리가 수상했는지 불길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둘 다 이 침묵을 먼저 허물 생각이 없다는 듯 굴었다. 입에 발린 사교적인 언사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식사를 치워 달라는 기별이 없자 – 설렁줄이 망가져서 부르고 싶어도 부를 수 없었다 – 객실을 들여다본 승무원이 목석같이 앉아 있는 우리를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엄밀히 따지면 두 사람이 똑같진 않았다. 진은 정말로 신경 쓰지 않는 것일 테고, 나는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속으로 서성거리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속 시원하게 이렇게 묻고 싶은데.

16548659581628.jpg‘진, 당신은 정보를 다루는 사람이니까 세상살이에 밝죠? 사회 변화에도 민감할 테고. 앞으로는 뭘 하면 전망이 좋을까요? 나 지금 절실하다고요.’

갑자기 묻자니 민망하고 망설여졌다. 그렇지만 급한 사람이 접고 들어가야지 어쩌겠는가. 프러너스의 견고한 세계에서 벗어나려면 나부터 뻣뻣한 공작부인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겠지.

16548659581628.jpg“귀하가 보기에 앞으로 뭘 하면 전망이 있겠어요?”

하지만 속마음과는 다르게, 조언을 구하는 사람치고는 내가 생각해도 너무 느닷없고 무뚝뚝하게 말이 나갔다. 진이 길 가다 낙석이라도 맞은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1654865958161.jpg“귀하가 누구야? 전망은 왜?”

16548659581628.jpg“앞으로 일을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1654865958161.jpg“끝내 가출이 아니라 독립이다 그 말씀? 레이디께선 개구리 노래 말고 잘하는 게 있으신가?”

16548659581628.jpg“귀족의 예법에 통달했으니 나만 한 예법 선생도 없을걸요. 행운의 매듭도 기가 막히게 잘 만들고.”

1654865958161.jpg“흐음…….”

16548659581628.jpg“또…… 아, 하말린어를 조금?”

1654865958161.jpg“하말린어? 그거라면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외국어잖아. 전망 좋은 걸 찾더니 이미 알아서 잘 찾아갔네?”

진이 웬일이냐는 눈빛을 보냈다. 그가 다른 귀족 남성과 눈에 띄게 다른 점 중 하나는 이렇게 사과도 인정도 매우 빠르고 솔직하다는 거였다. 무례한 말투에 약이 바짝 올랐다가도, 좋은 건 좋다고 담백하게 인정하는 이런 면이 은근히 사람 마음을 풀어지게 했다.

1654865958161.jpg“요즘 하말린어 하는 사람들 몸값이 장난 아니야. 여기저기서 사람 구하려고 기를 쓰는 형편이지.”

그러고 보니 하나둘 기억이 난다. 하말린어를 공부하면서 그 나라에 대해서도 조금씩 알게 되었다. 비옥한 영토와 풍부한 자원을 지닌 나라. 신의 축복을 받은 나라. 신비한 정령들의 가호가 함께하는 나라. 그것이 하말린을 수식하는 말들이었다. 자연친화적인 전통과 아등바등 일하지 않아도 풍족하게 살 수 있는 환경 덕분에 왕권이 강하지 않은 나라이기도 했다. 제국의 황제와는 달리, 그곳의 왕은 영적인 지도자에 가깝다고 했던 것 같다. 즉, 하말린은 제국을 비롯해 국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열강들의 매우 군침 도는 먹잇감인 셈이었다. 먼저 차지하는 자가 주인이라는 말이 나돌며 각국의 장사꾼, 사기꾼들이 남보다 한발 앞서 그곳을 차지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그런 시국이니 하말린어 능통자도 덩달아 잘 팔린다는 뜻이겠지.

16548659581628.jpg‘웬일로 내 인생에도 순풍이 부는 건가?’

프러너스 때문에 그늘졌던 내 마음에 한 줄기 햇살이 쏟아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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