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불꽃이 피고 지던 해변에서2021.12.31.
열차가 마침내 그리치에 도착했다. 동부에서 가장 큰 항구 도시. 뱃사람과 외지인이 많아 살벌하고 거칠면서도 날것의 매력과 묘한 활력이 넘치는 곳. 그곳에서 마차를 타고 하루 꼬박 달리면 앰브로시아 영지 내에 있는 본가 저택에 다다랐고, 거기서 또 하루 꼬박 달려야 내가 가려는 토버마리의 컨트리 하우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나는 후작 내외를 건너뛰고 곧장 토버마리로 갈 거지만. 어떻게 간다? 내가 생각해도 참 대책이 없었다. 원래는 하말린어 통역을 해 주는 대가로 진에게 호위를 부탁할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물 건너 간 일인 것 같고. 진은 자신의 정체를 들킨 이후로 찬바람 쌩쌩이었다. 실은 그러고도 내가 몇 마디 더 하긴 했지만. 내가 잠자는 진을 건드리고 진이 나를 침대에 메다꽂는 참사가 벌어진 후 객실에는 어색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그러니 거기서 자중해야 했다. 하지만 그가 동요하는 모습을 본 나는 입이 근질근질해서 참지 못하고 그만. 입에 올리지 말아야 할 이름을 올린 것이다.
「아리스타타…….」
그의 잿빛 눈동자에서 특유의 나른함이 싹 걷혔다. 진은 대놓고 나를 노려보았다.
「너 뭐야?」
그답지 않게 귀여운 반응에 나는 하마터면 히죽 웃을 뻔했다. 그래, 사랑이 전부일 때다. 나 역시 바로 전 회차까지 사랑 때문에 나 자신을 시들시들 말라 죽게 했으니.
「어디서 들었어? 대체 목적이 뭐야?」
혹시나 하고 찔러 봤는데 저렇게 쉽게 파르르 끓어오르는 걸 보니 몹쓸 장난기가 또 발동했다. 괜히 인생 17회차겠는가. 척 보니 어떻게 된 일인지 그림이 빤했다. 황족인 시더우드 중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는 ‘바카리스’라는 칭호를 받았다. 몸에서 은은한 삼나무 향을 풍긴다고 해서 인품까지 반드시 좋은 향기가 나는 건 아니었다. 바카리스라는 칭호를 받은 역대 황제들은 황후와 황비까지 여럿 두고도 제 버릇 남 못 주고 힘없는 여자들을 심심풀이로 건드리곤 했다. 신분이 낮은 어머니를 두었다는 이유로 반쪽짜리 시더우드라 불리며 천대받고 자랐을 황자. 그런 그가 유일하게 마음을 준 여인 아리스타타. 하지만 그녀는 황제이자 형의 여자가 되었고, 그때부터 진은 방탕 황자의 길로 들어선다. 그렇게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길을 가게 된 것 같았지만, 실은 그녀를 조금도 잊지 못한 황자는 밤이면 밤마다 그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데……. 크, 어쩜 이리 뻔할 수가. 진 시더우드, 나보다 더 답답한 인간이 여기 있었네. 왠지 조금 속상한걸?
「정말 알고 싶어요? 알면 힘들 텐데.」
진은 무슨 수작이냐는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어디서 듣긴. 당신 입으로 밤새 떠들어 놓곤. 사람 잠도 못 자게 말이야.
「당신이 밤새 그 이름을 불렀어요.」
「……거짓말.」
「그러게 알면 힘들 거라고 했잖아요. 내가 왜 당신을 깨우려고 다가갔겠어요.」
진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러게 알면 부끄러워 죽을 거라니까. 그토록 숨기고 싶었고, 완벽히 숨겼다고 생각한 마음이 그런 식으로 비집고 나올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자객도 독약도 온갖 함정들도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던 그이지만, 그런 그도 자신의 잠꼬대만은 어쩌지 못한 것이다.
‘정말이지 다들 딱하네.’
대체 남자들에게 첫사랑이란 어떤 의미인 건지. 프러너스와 진은 겉부터 속까지 완전히 다른 인간인 줄 알았는데, 그럼에도 첫사랑 앞에서 무모하고 어리석기는 매한가지이니. 아젤리아와 아리스타타. 그녀들은 어떻게 한 남자의 가슴속에 영원하고 유일한 사랑으로 간직될 수 있었을까. 그녀들은 나와 무엇이 다르기에. 인생을 무려 열일곱 번이나 반복하면서도 여전히 그걸 알 수 없는 나는 문득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이름을 아리제트 같은 걸로 바꿔야 할까 보다.’
첫사랑 그녀의 이름에는 ‘아’와 ‘리’가 들어가야 어울리는 모양이니. 아무리 낯가죽이 두꺼운 진이라 해도 자신의 치부를 들킨 마당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굴긴 힘들겠지.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인가 보네.’
생각해 보면 애초에 여기까지 올 일도 없는 사이였다. 다른 때와 달리 내가 패악을 부리는 대신 조용히 집을 나왔고, 귀찮은 기자들을 피하느라 열차를 잘못 탔고. 그렇게 내 행동이 바뀌면서 나를 둘러싼 미래가 조금씩 바뀌었고, 그 와중에 나의 세계와 그의 세계가 잠시 맞물린 것이리라. 갑자기 자신의 세계를 침범한 무례한 여자 때문에 애꿎은 그가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건지도. 비록 잠시 맞물린 인연이었다 해도 막상 여기까지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아쉽고 허전한 마음이 들긴 했다. 역에서 나오니 북적북적한 광장이 펼쳐졌다. 진은 아무 말 없이 허리에 손을 올린 채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뭔가 이 도시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머리도 빗고 옷도 멀쩡하게 갖춰 입은 진은 꽤 근사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진은 왜 느닷없이 자기 삶에 들이닥친 낯선 여자에게 호의를 베풀었을까? 선반 위에서 슈발럼이 하는 말을 엿듣고서 동정심이 일었던 걸까? 내가 그 유명한 카를슈테인 공작부인이었던 여자라 호기심이 생겼는지도. 아니면 자신과 같은 사랑의 패배자라서? 그래서 나를 봤던 걸까?
“앞으로 어떻게 할 셈이지?”
진이 여전히 광장 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저렇게 묻는다는 건 나는 하말린어 통역을 해 주고 그는 나의 해결사가 되어 주기로 한 계약을 없었던 일로 하자는 뜻이겠지? 하긴 그에게 하말린어 통역 따위는 처음부터 절실하지 않았는지도 모르지. 그래도 나는 모르는 척 한 번 더 찔러 보았다. 여기서 헤어지면 앞으로 영영 볼일이 없을 거라 생각하니 진과 투덕거렸던 시간들이 꽤 즐거웠던 순간으로 기억됐기 때문이었다. 진과 나눈 대화 같은 것도 다시는 나눌 일이 없겠지.
“저, 우리가 계약을 했을 텐데요.”
진이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계약은 지키기 힘들겠어, 레이디 앰브로시아.”
“저기요, 진. 내가 뭘 잘못했나요?”
그가 난처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따지자면 당신에게 상처를 준 건 그녀 아닌가요? 엉뚱한 데 화풀이하는 거처럼 보이네요. 나는 당신이 잠꼬대하는 걸 들은 죄밖에 없어요.”
나는 진을 도발하기 위해 최대한 심술궂게 말했다. 어쩌면 엉뚱한 데 화풀이하는 건 나인지도. 올려다본 진의 얼굴은 황당함과 살벌함 그 자체였다. 그의 목에 굵은 힘줄이 도드라졌다. 저렇다는 건 내가 넘겨짚은 것이 모두 사실이라는 뜻.
“당신은 미쳤어. 물론 그럴 만도 하지.”
진이 꽉 문 잇새로 거칠게 내뱉었다. 그 말을 듣고 올려다본 그의 눈에 이미 후회가 소용돌이치는 걸 보았다. 사실 나는 그 말이 별로 화나거나 슬프지 않았다. 저런 경멸 어린 말은 숱하게 들어서 내게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 물론 아무렇지 않다고는 말하기 힘들지만, 이미 마음을 비운 지금은 많이 담담해졌다. 나는 그보다 진이 내 치정 문제에 꽤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 놀라웠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럴 만도 하다’는 말이 나올 수 없는 거잖아?
“……미안. 해서는 안 될 말이었어.”
하여간 사과는 빠르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당신 잘못은 없어.”
그렇더라도 함께하긴 힘들다는 소리겠지?
“그렇지만 당신과 함께 일하기는 힘들 것 같아. 그 이유는…… 내가 불편해서야. 시골까지 가는 마차를 구한다면 믿을 만한 곳을 소개해 줄 수는 있어.”
나는 미소 띤 얼굴로 진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돌아서서 가는데 기분이 묘했다. 과장을 조금 섞자면, 두 번째 이혼을 한 기분이었다. 안다. 어처구니없는 소리란 걸. 하지만 프러너스와 사는 동안 나눈 대화를 전부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대화를 여기까지 오는 동안 진과 나누었다. 물론 다정한 대화는 아니었고, 언쟁과 조롱과 투덜거림이 대부분이었지만. 아마 나에 대해서도 프러너스보다 진이 더 많은 걸 알리라. 우리는 매우 짧은 시간 동안 서로의 가장 깊숙한 어둠까지 들여다보았다. 그래서인지 마치 수십 년을 함께한 배우자를 떠나보낸 기분이었다. * * * 일단 먹고 쉬자. 그리치에도 믿는 구석이 한 곳은 있었다. 웰츠 백작가에서 운영하는 웰츠 호텔. 백작부인인 레이디 올랜도와는 평소에도 왕래가 잦은 편이었다. 나는 원래 남편밖에 모르던 사람이라 사교계 활동도 미미했고, 친한 귀부인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올랜도는 왜인지는 모르지만 나를 좋아했다. 내가 다소 무뚝뚝하게 대해도 그녀는 늘 내게 살가웠다. 방구석 레이디인 나를 위해 공작저에 자주 방문해 사교계 소식도 들려주고 내 말벗이 되어 주기도 했다. 또 프러너스가 첫사랑과 바람이 났을 땐 나를 위로하기도 하고. 하여간 매우 싹싹하고 다정하게 나를 챙겨 주었다. 그녀의 남편인 윌로우 웰츠 백작은 내 소꿉친구이기도 했다. 그는 사업 수완이 좋아 제국 전역에서 호텔 체인을 운영했다. 그리치에 있는 호텔은 내가 약간의 투자를 한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를 위한 객실이나 식사 등의 서비스를 언제든 제공받을 수 있었다. 사실 시골에 조용히 묻히기로 결심한 후로 모든 인간관계를 정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정이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지. 낯선 곳에서 무작정 헤매느니 딱 한 번만 옛 인맥을 이용하자고 마음먹었다. 어차피 오늘 당장 토버마리로 출발하기는 힘들었다. 호텔에 묵으면서 믿을 만한 마차도 알아보고 필요한 물건도 살 계획이었다. 마침 웰츠 호텔의 오리 콩피 맛이 훌륭했다. 나는 흡족한 마음으로 디저트 와인을 홀짝이며 레스토랑 창밖으로 펼쳐진 바다를 감상했다. 특별히 전망이 아름다운 곳을 골라 호텔을 세운 듯했다. 잠시 후 호텔의 지배인이 다가와 인사를 했다.
“레이디, 불편한 점은 없으십니까?”
“아뇨, 객실도 식사도 훌륭하고 풍경도 아름답네요.”
“감사합니다. 혹시 축제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축제요?”
“그리치 비치 파이어 파티라는 불꽃 축제인데, 이 지역에선 가장 큰 축제지요. 밤하늘과 밤바다를 수놓는 불꽃이 꽤 볼만하답니다. 마침 내일부터 시작되거든요.”
“무척 환상적일 것 같네요.”
“굳이 항구로 나가시지 않아도 레이디가 묵고 계신 객실에서 충분히 잘 보일 겁니다. 조금 시끄러울 수는 있겠군요.”
“알려주어 고마워요. 내일 밤이 기대되네요.”
지배인이 물러가자마자 나는 흐뭇한 미소를 얼굴에서 지우고 미간을 찌푸린 채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치 비치 파이어 파티. 이 명칭을 듣는 순간 두통이 일었다. 무언가 매우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분명 이즈음 이 불꽃 축제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 같은데……. 나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갔다. 나야 멀리서 벌어진 사고 소식 같은 데는 관심이 없었고, 당시 분위기도 사건을 슬며시 덮는 쪽이었던 듯하다. 왜냐하면 지난 삶에서 나를 위로하러 왔던 올랜도가 그 사건을 이야기하며 안됐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게 떠올랐으니까. 백작의 고향과 가까운 곳이자 자기 가문의 호텔이 있는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 사건에 관심이 컸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황궁에서 내놓은 황자라 해도 그렇지요. 황족이 죽었는데 이렇게 쉬쉬하며 넘어가다니. 폐하도 야박하신 면이 있으세요.」
「어떻게 죽었기에?」
「그도 제대로 밝혀진 게 없답니다. 불꽃 축제 때 사고를 당했다고도 하고…….」
올랜도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암살을 당한 것 같다고도 해요.」
당시 프러너스와 아젤리아에게 앙심을 품고 암살까지 생각하고 있던 내 귀에 ‘암살’이란 말이 쏙 들어와 박혔던 게 기억났다. 아름다운 불꽃이 그리치 해변을 수놓던 날, 황자 한 명이 그곳에서 죽었다. 그는 황궁에서도 내놓은 방탕 황자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당시 그의 죽음은 조용히 묻혔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금세 지워졌다.
“저, 레이디 괜찮으십니까?”
지배인의 걱정스런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와인 잔이 쓰러져 새하얀 테이블보가 온통 핑크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오, 이런. 이를 어째…….”
“별일 아니니 마음 쓰지 마십시오. 드레스는 직원에게 내 주시면 세탁해 놓겠습니다.”
“아, 정말 미안해요.”
“아닙니다. 그보다 안색이 안 좋으신데 괜찮으십니까? 얼굴이 하얗게 질리셨는데 의사를 불러 드릴까요?”
안 괜찮지만, 의사는 소용없어요. 내 병명은 진 시더우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