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이런 여잔 내가 처음이지?2022.01.21.
「뺨을 때리십시오. 시원하게 귀싸대기를 올려붙이시란 말입니다.」
「네? 도리어 성질을 내며 길길이 뛸 것 같은데요?」
「청개구리가 달리 청개구리겠습니까. 청개구리에게 그만한 특효약도 없습니다.」
「확신이 안 서는데요? 잘될까요?」
「이번엔 제 감을 한번 믿어 보십시오.」
이것이 아까 나와 플록스가 모의한 내용. 즉, 진을 꾀어내 다른 곳으로 보내야 한다는 내 호소를 듣고 플록스가 내놓은 비책이었다. 플록스의 감을 믿고 감행한 일. 실은 나로선 밑져야 본전이고, 살짝 때려 보고도 싶어서 시도한 일이었다. 하지만 함께 모의할 때 플록스에게도 말했듯이, 나는 사람을 한 번도 때려 본 적이 없었다. 소리 지르고 악을 쓰고 물건을 집어던지고, 심지어 자해한 적은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손을 댄 적은 없었다. 난생처음 누굴 때리려니 너무나 떨리고 긴장이 됐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17회차 인생 첫 따귀를 날리긴 날렸는데……. 의욕이 넘쳤는지 감정이 실렸는지. 그의 고개가 홱 돌아가더니 이내 뺨에 붉은 손자국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이디어를 낸 당사자인 플록스마저도 손으로 벌어진 입을 가리고 있었다. 속으로 벌벌 떨면서 진의 얼굴을 흘끔 보니 그의 눈빛이…… 이제까지와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항상 나른하면서도 만사 무관심한 듯하던 오만한 눈빛이 따귀와 함께 멀리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물론 방금 무지막지한 따귀를 맞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평소 같을 순 없겠지만……. 여하튼 진한테서 저런 눈빛은 처음 보았기에, 플록스가 내린 처방의 기가 막힌 약발에 무서운 와중에도 신통한 생각이 들었다. 진의 눈은 드물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놀라움과 노여움과 황당함과 혼란함과 복수심이 뒤엉킨 눈빛이 묘한 느낌을 주었다. 상기된 얼굴과 함께 보면 자칫 좋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이상하게 의욕이 불타오르는 눈빛이었다. 혹시 이런 거에 막 흥분하고 그러는 취향은 아니겠지……? 그런 의심도 잠깐, 내게 다가온 진은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이마 위로 쏟아지는 진의 뜨거운 콧김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내 추종자들이 여기 이렇게 많은데 설마 따귀를 따귀로 돌려주진 않겠지?’
아무래도 노래로 얻은 토버마리 행 티켓을 따끔한 귀싸대기 한 대로 시원하게 날려 먹은 모양이었다. * * * 나는 토버마리로 가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드디어 그리치를 벗어나 내 유년 시절의 추억이 깃든 시골집으로 간다. 골치 아픈 일을 해치우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했다가 이내 흐물흐물 늘어졌다. 생각해 보면 이번 생엔 아무것도 안 하기로 작정했는데. 어쩌다 보니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걸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가늘고 희미하고 평범하면서 존재감 없게…….’
나는 까마득히 잊고 있던 17회차 인생 목표를 주문처럼 되뇌었다. 엉뚱한 일에 엮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바짝 조였던 긴장의 끈을 느슨하게 풀어 보았다. 표정은 최대한 무심하게, 눈은 멍하게, 고개는 삐딱하게, 자세는 방만하게, 팔다리는 나른하게 늘어뜨리고……. 여러 생을 정숙한 공작부인의 표본으로 살아와서 그럴까? 꼿꼿하게 각 잡은 걸 허무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습관이란 게 참 무서운 거다. 이까짓 게 뭐라고 흉내 내기 힘든 건지. 눈앞에 늘어져 있는 저 화상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기본자세가 저 모양인데. 내가 온몸을 삐거덕거리고 있자, 진이 툭 던졌다.
“이제 만족스러운가?”
아직도 왼쪽 뺨에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걸 보니 좀 우스워서 괜히 헛기침을 했다.
“별로요. 당신 태도가 불만족스러워요.”
“뭐가.”
“자세도 불량하고 그 빗자루 같은 머리 좀 어떻게 하면 안 돼요? 옷섶도 좀 단정하게 여미고요.”
“누가 그러던데? 자기 잣대로 남의 인생에 이러쿵저러쿵 참견하다간 뺨에 불이 날 거라고.”
마차가 출발한 순간부터 진은 계속 저런 식이었다. 어차피 그는 오로지 엇나가기 위해 이 마차를 탄 거니까. 플록스의 감이란. 정말이지 소름 돋도록 정확했다. 나에게 따귀를 맞은 뒤 진은 태도가 돌변해서 당장 토버마리에 가야겠다고 안달을 하며 직원들을 닦달했다. 덕분에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돼 이렇게 두 시간 만에 그리치 도심에서 꽤 떨어진 벌판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플록스는 유능한 청개구리 조련사였다. 마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진은 최대한 불량한 자세로 좌석에 늘어지더니 내 심기를 긁을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궁리하는 눈치였다.
「왜 갑자기 생각을 바꿨어요?」
「손이 아주 매운 게 사람을 흥분시키더군.」
이런 식이었다. 방탕 황자로 유명하다더니, 취향까지 변태스러웠다.
누차 강조하지만 나는 누굴 손찌검한 게 인생 17회차 만에 처음이었다. 아까는 호기롭게 따귀를 날렸지만 한참이 지난 후까지도 가슴이 쿵쾅거리며 진정이 안 됐다. 그래서 처음 저 말을 들었을 때는 순진하게도 걱정 아닌 걱정까지 했다.
‘또 때려 달라고 하면 어쩌지? 때릴 자신 없는데…….’
시간이 지나자 그저 이죽거리기 위한 말인 걸 깨달았다. 저렇게 얄밉게 나오니 무리하면 두어 번 정도는 더 때려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랬다간 이번에야말로 18회차 행이 되겠지만. 그나마 그와 함께 마차를 타고 가서 좋은 점이라면 마차 안에 삼나무 향이 가득하다는 거였다. 그는 일종의 커다란 인간 방향제였다. 달리는 마차 안엔 침묵이 흘렀지만 전혀 편하지 않은 침묵이었다. 보이지 않는 눈총이 따끔따끔 나를 쏘아대는 것 같았다. 이 불편한 긴장감을 해소하고 소소한 복수도 할 겸, 진이 별로 듣고 싶어 하지 않을 이야기를 떠드는 것으로 그를 괴롭히기로 했다. 나는 진이 눈곱만큼도 관심 없을 화제가 뭘까 생각해 보고는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프러너스와 아젤리아 말이에요, 두 사람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나라면 안 믿겠죠?”
“본인이 그렇다는데, 내가 믿고 말고 할 게 있나.”
“물론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지만, 지금은 아젤리아에게 고마운 마음마저 들어요. 프러너스를 떠맡아 줬잖아요. 이것도 안 믿기죠?”
“내가 어딜 봐서 뭘 믿게 생겼나.”
“하긴 당신에겐 관심도 흥미도 없는 얘기죠? 그래서 나는 더 얘기하고 싶다니까요.”
“악취미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진의 목소리엔 별 감흥이 없었다. 급기야 졸린 눈을 하고 하품까지 연신 해댔다. 나는 못 본 척하고 계속 떠들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는 건 참 외롭고 힘든 일이더라고요.”
“…….”
어느새 진은 다리를 쭉 뻗고서 몸을 좌석에 기댄 채 아예 눈을 감고 있었다. 어차피 따뜻한 반응을 얻고자 꺼낸 말이 아니었으니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프러너스를 탓할 것도 아니에요. 그 사람은 처음부터 나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았어요. 나도 알고 있었고요. 그런데도 나는 꼭 그를 가지고 싶었어요. 어쩌면 그도 피해자인지 모르죠.”
나도 모르게 한숨을 푹 쉬자, 진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웃기는 소리 다 듣겠군. 결혼은 혼자 했나? 사랑 없이 결혼한 사람은 피해자다? 오히려 그 반대 아닌가?”
거의 허공에 대고 말한다 생각하던 나는 진이 의외로 내 말을, 그것도 제대로 파악하며 듣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오오, 방금 내 편 든 거죠?”
그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떴다.
“차라리 슈발럼을 다시 부르지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거 같은데. 기자회견 잡으라고 할까?”
나는 그를 노려보는 시늉을 하면서 또 무슨 소릴 해서 진을 짜증나게 할까 궁리했다. 솔직히 말하면 진은 찔러 보는 재미가 있었다. 관심 없는 척하면서 몰래 귀를 쫑긋거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찔러도 아무 반응이 없던, 아니 찌르기조차 겁나던 남자와 살았더니 저런 반응이 흥미롭기까지 했다. 그래서 또 찔러 보았다.
“평소엔 관심도 없던 어떤 여자에게 뜬금없이 다른 남자가 생겼느냐고 묻는 건 어떤 심리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진이 불퉁하게 대꾸했지만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푼수처럼 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게, 프러너스가 말이죠, 헤어지기 전에 갑자기 묻더라고요. 혹시 내게 남자가 생긴 건 아니냐고. 알다시피 적반하장이잖아요.”
진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놓고 그렇게 물었다고? 프러너스가? 믿을 수가 없군.”
“남자들이 그러는 거, 어떤 의미죠?”
“어떤 의미긴. 저 자신을 끔찍이 사랑한다는 의미지. 남자들은 보통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해. 여자들은 좀 다른 거 같더군. 안됐지.”
역시 심술궂은 걸로는 진을 쫓아갈 수가 없네.
“아하, 자기애. 당신은요?”
“뭘?”
“당신은 자기애를 주로 어떤 식으로 표현해요?”
나는 진의 연애담, 더 정확히는 아리스타타와의 연애담을 궁금해하며 넌지시 떠보았다. 내 질문의 속뜻은 이러했다.
‘당신이 아리스타타에게 어떤 식으로 자기애를 표현했는지 얘기 좀 해 봐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질문을 받은 진의 낯빛이 대낮에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창백하게 변했다. 사실 진에게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보나 마나 또 미간이나 찌푸리겠지.
“드디어 나와 프러너스를 동급으로 취급해 주는 건가?”
진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뜻밖에 뭐라고 대답할지 궁리하는 모습을 보였다. 내 질문을 그냥 씹을 줄 알았는데. 정말로 아리스타타와 얽힌 사연을 들을 수 있는 걸까? 나는 눈이 동그래져서 그의 입술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진의 입에서 나온 건 전혀 엉뚱한 소리였다.
“그때 열차에서 왜 해결사가 됐냐고 물었지?”
“네?”
생각지 못한 진의 말에 멈칫한 나는 눈만 깜빡였다. 그 질문을 기억하고 있었구나.
“어려서부터 내 목숨을 노리는 사람이 너무 많았어. 황궁에서 붙여 준 호위 기사나 시종들은 다 허수아비들이었지.”
“…….”
“그렇다고 바깥에 있는 해결사에게 일일이 의탁하자니 의탁할 일이 너무 많고 의뢰 횟수가 너무 잦아. 그래서 그냥 내가 해결사가 되어 스스로 해결하기로 했지. 편하고 싸게 먹히고.”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뗐다 붙였다 했다.
“난 그냥 살아 있기만 하면 됐는데. 독을 탄 식사나마 매끼 줬으면 기뻐서 더 바라는 게 없었을 테고. 그 작은 바람이 누군가에겐 위협이라니.”
내 질문은 분명, 속뜻은 둘째 치고 표면적으로만 옮겨도 ‘당신은 자기애를 어떤 식으로 표현해요?’였는데. 남자들이 하는 수작은 대부분 자기애에 불과한 것이라기에 놀리듯 던진 질문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해결사가 되었을 만큼 자기애가 강하다는 건지 뭔지. 다소 장난스럽다고 생각한 질문에 저런 식으로 현실적인 대답을 하니 진을 더 괴롭히기 힘들어졌다. 한마디로 입을 다물게 만드는 대답이었다.
“어렸을 적 꿈이 해결사였냐고 물었던가?”
사람 미안해지게 왜 자꾸 그래요? 진이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내가 알았을 턱이 있냐고.
“내 꿈은 과자 가게 주인이었어.”
진이 평소처럼 피식 냉소를 흘렸지만 이번엔 그 웃음이 쓸쓸해 보였다.
“정말 웃기지 않아?”
웃기긴 뭐가 웃기다고. 지금이라도 과자 가게 차리면 되는 거지. 머쓱해진 나는 속으로 꿍얼거렸다. 내가 왠지 숙연해져서 말을 잇지 못하자 진의 얼굴에 만족스런 빛이 스쳤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짓궂게 굴고 싶은 마음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마침 아까부터 거슬리던 진의 헝클어진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보살핌받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그림자가 그 단정치 못한 머리에 남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일까. 얄미운 마음 반, 애처로운 마음 반이 된 나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진, 머리 빗겨 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