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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머리를 빗겨 주었을까? (16/110)

#16화. 머리를 빗겨 주었을까?2022.01.24.

머리를 빗겨 주겠다는 내 뜬금없는 제안에 진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16548661056187.jpg“어쭙잖은 유혹 같은 걸 또 시도하려는 거면 그만둬.”

또 그 소리. 아니, 내 유혹이 어디가 어떻다고.

16548661056191.jpg“아니면, 당신이 내 머리를 빗겨 줄래요?”

농담이다.

16548661056187.jpg“허튼짓하지 마.”

진이 정색을 하며 과장되게 몸을 사렸다. 빗을 무기로 써야 할까? 따귀 한 대면 이리 쉽게 해결될 일을 쓸데없이 매달리고 고백하고 심지어 유혹한다는 의심까지 받았던 걸 생각하니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16548661056191.jpg‘오 로제트, 침착, 침착하자. 넌 폭력적인 사람이 아니잖아.’

그나마 특출하다 싶을 정도로 잘난 진의 이목구비가 화를 가라앉히는 데 지대한 도움을 주었다. 훌륭한 예술 작품을 보면 마음이 정화되는 것과도 같은 이치랄까. 조각가나 화가가 아무리 까칠하고 오만한 인간이라도 작품의 아름다움과 성스러움마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사실 저런 머리를 하고도 여전히 인간으로 구분되는 건 그 잘생긴 얼굴 덕이리라. ‘당신은 자기 얼굴에 많이 고마워하며 살아야 해.’ 나는 그렇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손가방에서 빗을 꺼냈다. 상아를 정교하게 조각해 페리도트와 핑크 투르말린을 박아 넣은 명품 빗이었다. 생각해 보니 프러너스와 관련이 있는 거의 마지막 물건이었다. 약혼 선물 중 하나였는데, 내 눈동자 색에 맞추어 올리브 그린의 페리도트를 박은 거였다. 핑크 투르말린은 물론 애정을 뜻하고. 진이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16548661056187.jpg“그걸로 내 머리를 빗기겠다? 머리를 빗겨 본 적이 있기는 한가?”

16548661056191.jpg“하, 당연히…….”

빗겨 본 적이 없네. 이 사실을 인생 17회차 만에 깨닫고 나는 살짝 충격을 받았다. 다른 사람의 머리는 물론, 내 머리도 내 손으로 빗기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았다. 귀족 영애와 부인으로 살아온 내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막상 질문을 받고 보니 그 사실이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내 표정을 보고 눈치를 챘는지 진이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16548661056187.jpg“괜히 안 하던 짓 하지 말라고. 일찍 죽거나 탈 나거든.”

저 말본새하고는.

16548661056187.jpg“다시 한번 충고하지만, 어디 가서 유혹 같은 거 하지 마. 하나도 안 어울리니까.”

하! 내가 정숙한 공작부인으로 사느라 그쪽으론 신경을 끊어서 그렇지. 그 방면으로 나가려고 들었으면 당신처럼 아직도 첫사랑의 그림자에서 허우적거리기나 하는 애송이는 한 입 거리도 안 된다고. 그리고 당신 그때 분명 흥분했는데? 내가 봤는데? 나는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그에게 빗을 내밀었다.

16548661056191.jpg“누가 빗겨 준대요? 직접 빗어요.”

16548661056187.jpg“나더러 그런 요사스런 물건을 손에 쥐고 익살을 떨라고? 사양하지.”

16548661056191.jpg“요사스럽다뇨? 사랑스러운 거죠. 제국에서 이 명품 빗을 가진 사람은 로잘린 황녀, 카르티에 공작부인 그리고 나, 이렇게 셋밖에 없다고요.”

16548661056187.jpg“사랑스럽다는 말이 언제부터 그런 데 쓰였지?”

16548661056191.jpg“당신은 하말린어가 아니라 제국어부터 다시 배워야겠네요.”

전 카를슈테인 공작부인의 빗을 뭐로 보고. 나는 빗을 우아하게 집은 채 진을 향해 턱을 치켜들었다. 진이 무관심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16548661056187.jpg“여하튼 필요 없어. 어차피 난 하나도 안 불편하니까. 정 불편하면 안 보면 되잖아. 왜? 그저 나만 바라보고 싶은가?”

느물거리기는. 방탕 황자, 불량 황자의 명성에 걸맞은 행동이군. 잘생겼으니까 한 번만 더 참자.

16548661056191.jpg“하긴 당신이라고 머리를 빗어 봤겠어요. 자기 머리도 안 빗는 사람이니 남의 머리는 말할 것도 없을 테고.”

16548661056187.jpg“…….”

바로 맞받아쳐야 할 그가 잠잠하니 불안했다. 얼굴을 봤더니 눈빛이 미묘하게 아련해져 있었다. 뭐야, 그 눈빛은? 설마…….

16548661056191.jpg‘빗겨 줬구나, 아리스타타의 머리채를!’

요사스런 빗을 손에 쥐고 그녀의 머리칼을 소중한 보물 다루듯이 쓰다듬으며 조심스럽게 빗겼구나! 아흐, 싫다, 싫어! 나는 목덜미로 소름이 지나가는 걸 느끼며 진저리를 쳤다. 그리고 또 설마, 설마…… 남사스런 촉이 폭주했다.

16548661056191.jpg‘서로서로 머리를 빗겨 주며 꽁냥거리던 그녀가 자신을 버리고 떠나자 삶의 의지를 잃은 황자는 그때부터 머리를 빗지 않게 되었다…….’

어후, 싫다, 너무 싫어! 이럴 땐 인생 17회차의 통찰력과 연륜이 달갑지 않았다. 여기서 내가 ‘아리스타타’라고 한마디만 내뱉으면 곧장 사실 확인이 가능할 테지만, 함께 마차를 타고 먼 길을 가야 하니 진을 자극하지 않기로 했다. 진과 입씨름을 하지 않으니 대신 몹쓸 상상력이 가동됐다. 아리스타타의 머리칼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진의 모습은 어느덧 아젤리아의 머리칼에 입을 맞추는 프러너스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16548661056191.jpg‘둘은 서로의 머리를 빗겨 주었을까?’

프러너스는 황홀하게 반짝이는 백금발에 사파이어 같은 청안을 지닌 전형적인 미남이었다. 물론 나는 그의 머리를 빗기기는커녕 감히 만져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아젤리아는 그 부드럽고 아름다운 광택이 흐르는 머리칼을 스스럼없이 만졌겠지?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손으로 다정하게 쓸어 넘겨주었을까? 이제 둘을 생각해도 아무렇지 않다고,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이런 사소한 지점에서 예기치 않은 감정이 무섭게 소용돌이치는 걸 보고 나 자신도 놀랐다. 나와 프러너스는 아무런 일상도 공유하지 않았다. 공식적이고 화려한 자리에는 함께했지만 이런 소소한 기쁨은 나눈 적이 없었다. 약혼 선물로 진귀한 명품 빗을 받아 다른 귀부인들의 부러움을 샀지만, 손가락빗으로 그의 머리를 빗겨 본 적도, 그가 내 머리칼을 소중하게 어루만진 적도 없었다.

16548661056191.jpg‘그를 닮은 아이가 있었다면…… 달라졌을까?’

그랬으면 그와 일상을 공유할 수 있었을까? 그를 닮아 영롱하게 빛나는 아이의 보드라운 금발을 손으로 쓰다듬어 주었을까? 그랬으면 나도 누군가의 머리를 빗겨 보았을 테지. 그 아련하고 소중한 감촉을 내 손가락들이 기억할 테지. 누군가는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그런 일상들이 내게는 왜 허락되지 않는 건지. 나는 쓰디쓴 상념에 젖었다.

16548661056187.jpg“무슨 생각 해? 설마 이번엔 내 뺨이 아니라 그걸로 내 정수리를 노리는 건 아니겠지?”

진이 농담이랍시고 던진 말에 겨우 상념에서 헤어났다. 나는 산발한 그의 머리를 노려보았다.

16548661056191.jpg‘다 부질없고 못난 생각이야!’

아이를 바라지 않은 건 남편이었다. 그러므로 남편과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지 못한 것도, 누군가의 머리를 빗겨 보지 못한 것도 결코 스스로를 탓하고 상처 줄 일은 아니었다. 나는 미련과 자기 연민으로 뒤엉킨 진의 검고 부스스한 머리칼을 다시 노려보았다.

16548661056191.jpg‘그런다고, 자기 삶을 진창에 처박는다고 도망간 사랑이 되돌아오니!’

나는 두 팔을 걷어붙였다. 제국에 세 개밖에 없는 진귀한 빗을 단단히 쥐고 세상에서 가장 답답하고 멍청한 남자에게 돌진했다. 늘 나른하고 태연한 표정이던 진도 내 결연한 눈빛에 순간 주춤했다.

16548661056187.jpg“또 뭘 하려고?”

그때까지 끼고 있던 팔짱을 푼 그가 달려드는 나를 저지했다. 나는 내 앞날과 진의 앞날이 모두 그 산발한 머리에 달려 있기라도 한 듯,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그 머리에 내 빗을 꽂았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이리저리 밀려 부딪히면서도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빗어 내렸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머리칼을 잡고는 절박하게 매달렸다. 얼마나 엉망인지 단번에 빗기지 않았다. 빗살이 머리카락에 걸려 나아가지 않았다. 마치 꽉 막힌 우리의 현실 같아서 부아가 치밀었다.

16548661056187.jpg“대체 무슨 짓이야! 미쳤어?”

16548661056191.jpg“잠깐만, 잠깐만 참아요. 이 머리를 단정하게 만들어야 우리의……!”

딱! 우윳빛 상아를 정교하게 조각하고 내 눈동자 색을 닮은 올리브 그린의 페리도트와 사랑의 맹세를 뜻하는 핑크 투르말린을 박아 넣은 빗이. 제국에 세 개밖에 없는 명품이라고 부러움을 샀던 빗이. 프러너스와 관련된 마지막 물건이. 깔끔하게 두 동강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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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8661056187.jpg“당신을 만나고 태어나 처음…….”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진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16548661056187.jpg“……당하는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이 지금까지만 벌써 몇 번째야!”

진은 헝클어진 머리에 두 동강 난 빗의 반쪽을 매단 채 분노를 터뜨렸다. 우당탕탕 큰 소리가 나니 마부가 말을 세우고 마차 안을 들여다보러 달려왔다. 마부는 우리의 몰골을 보고 화들짝 놀라더니 연신 죄송하다고 말하며 황급히 사라졌다.

16548661056191.jpg‘아니, 그냥 가면 어떡해. 죄송하긴 뭐가 죄송하고? 게다가 말과는 달리 하나도 미안한 표정이 아닌데?’

의아해하다 문득 깨달았다. 내가 거의 진의 무릎 위에 올라가 있다는 사실을. 한 사람은 머리카락에 낀 빗 반쪽을 빼내는 데 열중한 나머지, 또 한 사람은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열 받은 나머지, 시뻘게진 얼굴로 씩씩거리고 있었다. 둘 다 매우 흐트러진 차림새로?

16548661056191.jpg‘오해에 오해만 쌓여 가네…….’

이 와중에 여기가 허허벌판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치 도심이었으면 어느 틈엔가 영상 도구에 찍혀 내일 아침 가십지 1면을 장식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슈발럼이 열차에서 있었던 일을 치정극으로 각색해 신나게 써재꼈을지도. 희한하게도 검은 그물에 걸린 빗 반 토막은 아무리 빼내려 해도 빠지지 않았다. 뽑아내려 할수록 머리카락만 더욱 엉켜 들어 점점 심각한 사태로 치달았다. 아무래도…… 머리칼을 잘라 내야 할 것 같았다.

16548661056187.jpg“지금껏 겪은 일이 다 기가 차지만 더 기가 찬 건…….”

진이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

16548661056187.jpg“왠지 이게 끝이 아닐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거지.”

하긴 돌아보면 진에겐 일진이 매우 사나운 날이었다. 파렴치한 변태 호색한으로 몰려, 장제소 바닥에서 굴러, 부하들 앞에서 따귀까지 맞더니 결국 토버마리 행 마차에 실려 가다 머리카락에 빗까지 엉키는 참사가……. 아무리 그래도 불꽃놀이 구경하다 죽는 거보다는 덜 황당할걸요?

16548661056191.jpg‘내가 당신을 사신한테서 구해 냈다고요. 그에 비하면 머리카락 조금 자르는 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빗은 빗대로 부러지고 욕은 욕대로 먹고. 역시 제일 불쌍한 건 나인 것 같았다. 어차피 날도 저물어 미리 알아 봐둔 동네에서 하룻밤 묵고 가야 했다. 마부로 따라온 페가수스 직원이 여관의 객실과 식사를 확인하는 동안 진은 잠시 모습을 감추었다. 마침 여관 주인이 손재주가 좋아 간이 이발소와 세탁소를 겸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방에서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나는 먼저 식당에 가서 진을 기다렸다. 잠시 후 들어오는 기척이 나기에 돌아보니, 누구세요? 다른 귀족 남성들처럼 깔끔하게 머리를 자른 진의 모습이 낯설었다. 허술한 동네 여관 겸 이발소에서 다듬었을 뿐인데 외모에 귀티가 추가됐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껄렁껄렁 불량스런 뒷골목 사내였던 그에게서 곱게 자란 도련님의 태가 나다니! 누가 보면 저택, 학술원, 신전밖에 모르는 모범적이고 금욕적인 시더우드 청년인 줄 알겠네. 그의 환골탈태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갑자기 내 머릿속에 진이 머리를 산발하고 있었던 건 아리스타타가 준 상처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제기됐다. 어쩌면 뒷골목의 거친 장정들 사이에서 세 보이기 위해 일부러 머리를 덥수룩하게 기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면밀하게 설계된 스타일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 것이다. 지금의 진은 깎아 놓은 밤알같이 말쑥하고 뽀얘서 암흑 보스의 권위 같은 건 도저히 느끼기 힘들었다.

16548661056191.jpg‘만일 그렇다면 미안하게 됐습니다, 진 시더우드.’

이 삭발 사태는 지나친 감정 이입이 부른 참사라고 할 수 있었다.

16548661056187.jpg“역시 이상한가?”

내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자 진이 어색하게 물었다.

16548661056191.jpg“아니요, 너무 잘 어울리세요.”

미안한 마음에 나는 양쪽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리며 극찬했다.

16548661056187.jpg“당신이야 그렇게 말해야겠지.”

16548661056191.jpg“꼭 그렇게 삐딱하게 받아들여야 직성이 풀려요? 훨씬 사람 같아요. 보기 좋으니까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하고 다니세요.”

여관의 안주인이 곧 음식을 내왔다. 수프 냄새가 구수했다. 오늘 많은 일을 겪어서인지 배가 무척 고팠다. 내가 음식을 향해 달려드는데 진이 손으로 저지했다.

16548661056187.jpg“조심성이 없기로는 당신을 따를 사람이 없군.”

그러더니 은 포크와 무슨 가루 같은 걸 품에서 꺼내 음식을 뒤적이기도 하고 가루를 뿌린 후 지켜보기도 했다.

16548661056187.jpg“안전하군. 들지.”

나는 멍하니 그가 먹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볼이 미어지게 음식을 입에 넣고 우적거리는 모습이 그가 여전히 암흑 보스 진임을 말해 주었다. 진의 학대 받던 어린 시절 모습도 겹쳐 보였다. 외모가 말쑥해진 만큼 품위 없는 행동들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16548661056191.jpg“식사는 늘 이렇게 하는 거예요?”

16548661056187.jpg“이미 말했지만 나를 노리는 사람이 좀 많아.”

16548661056191.jpg“지금도요? 왜요?”

16548661056187.jpg“나도 묻고 싶군.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좀 짠한 마음이 들었다. 저렇게 쫓기는 모양새로 허겁지겁 먹으면 맛이나 제대로 느낄 수 있나?

16548661056191.jpg“진, 천천히 먹어요. 독이 없다는 건 확인했잖아요.”

16548661056187.jpg“이젠 밥 먹는 모습이 거슬리나? 내 모든 것이 공작부인 마음에 안 드나 보군.”

16548661056191.jpg“걱정돼서 하는 소리예요. 그리고 이제 공작부인도 아니고요.”

16548661056187.jpg“…….”

그의 먹는 속도가 조금 느려졌다. 머리가 깔끔해져서 그런지, 그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선심 쓰듯 말했다.

16548661056191.jpg“그때 열차에서 했던 것처럼 식사 때마다 내가 먼저 음식을 먹어 볼까요? 독 때문에 걱정된다면 말이에요.”

나야 어차피 독이 든 음식을 먹어도 죽지 못할 테니 가볍게 해 본 말이었다. 혹시 죽는다면 더 좋고 말이다. 진이 양손에 들고 정신없이 휘두르던 포크와 나이프를 탕 내려놓았다.

16548661056187.jpg“정말 역겨운 제안이군. 그러느니 차라리 굶어 죽는 게 낫지.”

싫으면 말지, 성질은. 시원하게 이발한 모습이 기분 좋아서 선심 좀 쓰려던 나는 졸지에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16548661056187.jpg“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설마 또 괴상한 일을 꾸미는 건가?”

16548661056191.jpg“내가 언제 괴상한 짓을 했다는 거예요?”

16548661056187.jpg“어쨌든 하지 마.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마.”

나는 입을 댓 발 내밀고, 하지만 귀부인의 품위를 잃지 않으려 애쓰면서 우아하게 깨작거렸다.

16548661056187.jpg“혹시.”

진이 잠시 망설이다 목소리를 착 깔고 말했다.

16548661056187.jpg“죽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가?”

나는 진을 바라보며 다시 눈을 깜빡였다. 그거야, 죽고 싶은 마음이야 늘 간절하죠. 그런데 진이 그런 내 사정을 어떻게 알았지?

16548661056191.jpg‘혹시 뭔가 눈치 챘나? 진이 은근히 예리한 구석이 있단 말이지.’

게다가 운명대로라면 오늘은 진이 죽음을 맞는 날. 지금 진의 시간은 뒤틀리고 있을 것이다. 원래 그리치에 있어야 할 그가 전혀 다른 곳에 와 있으니. 그래서 진도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모른다. 내가 삶을 반복하는 것처럼 가끔 초인적인 상황은 발생하니까. 나는 진을 흘끔흘끔 살피다 물었다.

16548661056191.jpg“왜요? 뭐가 좀 이상해요?”

16548661056187.jpg“이상하지 그럼.”

16548661056191.jpg“어디가 어떻게 이상한데요?”

16548661056187.jpg“남이 먹을 독을 대신 집어 먹고 싶을 만큼 괴롭다면…….”

16548661056191.jpg“……?”

16548661056187.jpg“차라리 아파도 당신 사랑을 다시 이어가 보는 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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