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당신, 중독됐네2022.01.28.
무슨 소리야? 입이 떡 벌어질 만큼 황당한 소리였다.
“물론 난 프러너스 같은 인간은 당신의 진심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해요?”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어쩌면 당신에겐 아무 의미 없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쓰레기든 독극물이든 당신이 사랑하고 싶은 만큼 사랑하는 게 중요하지.”
“언제부터 그렇게 사랑 요정이 됐어요?”
내 말에 본인도 머쓱한지 그답지 않게 귓불이 붉어졌다. 머리를 말끔하고 시원하게 자르니 귓불 붉어지는 것도 잘 보였다. 저것 때문에 머리를 길러야 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뭐, 당신이 내 독을 몰래 훔쳐 먹고 쓰러져 있는 꼴을 보느니 살아서 아픈 사랑이라도 이어가는 게 낫지 않나 싶어서. 순전히 이기적인 이유지.”
그러니까 진은 예정된 죽음을 비켜 가며 잠시 초월적인 힘을 얻어 내 비밀을 꿰뚫어 본 것이 아니었다. 내가 아직도 프러너스를 잊지 못해 괴로운 나머지 이상한 짓을 줄줄이 벌이고 급기야 독을 먹고 죽을 작정이라고 헛다리를 짚은 것이었다. 내가 내 마음의 상처를 통해 진을 판단하고 있는 것처럼, 진도 자신의 상처를 통해 나를 보고 있는 걸까?
‘그건 진 당신이 바라는 거잖아요. 정작 본인은 그렇게 하지 못했으면서…….’
나는 진에게 팔을 뻗어 그의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벌렸다. 보랏빛이 도는 잿빛 눈동자가 황당함으로 요동쳤다.
“뭐 하는 거지?”
진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이것이지 싶다.
“아무래도 이 음식에 독이 들어 있었던 것 같아서요. 중독됐나 보는 거예요.”
진이 어이없는 눈빛을 보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흠, 당신 중독된 거 맞네요.”
“뭐?”
“나한테 중독! 아닌 척하더니 나한테 완전히 빠져 들었군요.”
“하지 말라고 했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쩜 모든 걸 그렇게 내 위주로 생각할 수가 있어요?”
“…….”
“망상이 심하지만 다 나를 위하는 마음이려니 생각하고 고맙게 받아들일게요.”
나는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꾹꾹 눌러 참으며 말했다. 자기가 생각해도 부끄러웠는지 진이 인상을 북북 썼다.
“하지만 토버마리에 가면 하려고 생각해 둔 일이 많아서 시간이 없을 것 같네요. 아픈 사랑 따위 이어갈.”
지난 열여섯 번의 삶을 아픈 사랑으로 지독하게 채워 갔으면서 나는 앙큼하게도 이렇게 말했다. 진이 살짝 토라진 얼굴로 물었다.
“뭘 하고 싶은데?”
“음, 가장 먼저 버섯을 연구하고 싶어요.”
내 진지한 대답에 진은 한 방 먹은 얼굴이었다.
“버섯?”
“네, 토버마리는 온통 숲이고 황무지라 버섯도 아주 다양하게 많다고요.”
진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보았다.
“왜요, 웃겨요?”
“웃기긴. 버섯 연구 좋지.”
“모양도 색깔도 아주 다양하다고요. 독버섯은 독버섯대로 흥미롭고 약용이나 식용은 유용하죠.”
“그렇지. 요리해도 맛있고.”
“조용하고 평화롭지만 무료하지 않은 일상을 보내기에 버섯 연구만 한 것도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에요.”
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 * * 진의 죽음이 예정되어 있던 밤이 지났다. 별 탈 없이 순탄하게. 우리는 다시 마차를 타고 토버마리로 향했다. 나는 그를 흘끔흘끔 살피면서 몇 번씩 물었다.
“혹시 이상한 점 없어요?”
그는 태평한 얼굴로 무슨 소릴 하냐는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 태평함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거라고는 나도, 진도 생각지 못했다. 석양이 질 무렵 일행을 태운 마차는 마침내 그리운 나의 컨트리 하우스에 도착했다. 하지만 우리는 저택과 정원을 보고 한동안 그 앞에서 할 말을 잃고 서 있어야 했다.
“아까부터 이상한 점이 없냐고 자꾸만 묻더니, 이런 걸 말한 건가?”
진이 짧아진 머리를 손으로 마구 흐트러뜨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석양이 질 무렵의 컨트리 하우스는 혹시 원래 이런 모습이었던가? 오래전 기억이고 어릴 적 일이니 내 머릿속의 기억이 불완전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릴 적 매우 거대해 보이던 건물이 어른이 되고 봤더니 기억보다 너무 조그마해서 당황스러웠던 기억. 그런 기억 하나쯤은 누구나 있잖아…… 라고 납득해 보려 해도 무리가 있는 풍경이었다.
“레이디 앰브로시아, 여기가 확실해? 길을 잘못 든 건 아닌가?”
진이 애써 침착함을 되찾은 목소리로 물었다. 키가 허리를 넘는 잡초들과 건물 외벽을 뒤덮은 담쟁이덩굴은 기억 속에 없는 낯선 풍경이었다. 하지만 여기가 아니라고 하기엔 또 여기가 맞다고 볼 수밖에 없는 너무나 확실한 증거들이 있었다. 특히 대문 옆에 달린 작은 나무 팻말이 그중 강력한 하나였다. 덩굴장미와 잡초로 온통 뒤덮인 낡은 나무판자 위엔 이 집의 이름인 ‘플럼 하우스’가 삐뚤빼뚤하게 새겨져 있을 테니. 나는 판자 위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이 팻말은 십수 년 전 나와 여동생 미고가 직접 새긴 합작품이었다.
“진, 안타깝지만 제대로 찾아온 것 같아요.”
“척 보기에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 같은데?”
눈앞에 보이는 황폐한 풍경이 충격적이긴 했다. 내 기억 속의 정원에는 다종다양한 나무와 화초들이 가지런히 잘 손질돼 있었다. 뒷마당엔 이 집의 이름이 된 자두나무들이 있었고. 이즈음엔 눈부신 하얀 꽃들이 만발했고 여름이면 자줏빛 보석 같은 열매가 잔뜩 열렸다. 자두나무는 아직 뒷마당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정원이며 저택이며 진의 말대로 사람의 손길이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자 나만의 천국, 나의 컨트리 하우스는 괴기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관리인은 믿을 만한 사람이었나?”
진의 물음에 나는 관리인인 집사 프랭클린을 떠올렸다. 그는 고지식하고 재미는 없었지만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저택 관리와 경영을 완전히 위임하고 지금껏 신경 쓰지 않았을 만큼. 일정표와 일지를 꼬박꼬박 작성하고 금언을 수집하는 게 그의 취미였다.
“주인의 손이 미치기 어려운 곳에 있는 별장이나 사유지의 경우 관리인이 제멋대로 예산을 착복하거나 다른 사용인을 갈취하는 일이 종종 있다고 하더군.”
진은 프랭클린을 의심하는 듯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한 정황은 몰라도 저택이 방치된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일단 들어가 봐야겠어요.”
내가 쪽문을 열고 들어서려 하자 마부로 따라온 직원이 나를 막아섰다.
“레이디,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질 나쁜 녀석들이 저택을 차지했을 수도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라고 해 봐야 빈집 정도를 생각하고 있던 내겐 아찔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휴고, 너무 겁주지 말라고.”
넋 나간 내 얼굴을 보고 진이 웬일로 의젓하게 말했다.
“너무 걱정 마.”
위기에 직면했을 때 그 사람의 진가가 나온다고 했던가. 지금 보니 진은 어엿한 정보 길드의 수장이었다.
“당신한텐 무시무시한 필살기가 있잖아. 저 안에 아무리 흉흉한 도적 떼가 진을 치고 있어도 당신 노래 한 방이면 다들 호흡곤란을 호소하며 투항할걸?”
진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내 기대를 배반하며 웃기지도 않은 소리를 늘어놓았다. 위기 앞의 진가 운운한 건 취소다. 하여간 불량 시더우드 아니랄까 봐. 곤경에 처한 레이디를 놀려 먹을 궁리나 하고. 진중함이란 눈을 씻고 봐도 없다니까. 나는 진을 흘겨보는 한편, 웃음을 참고 있는 마부에게 말했다.
“이름이 휴고인가요? 그럼 부탁할게요.”
내 노래를 듣고 십수 년 만에 후련하게 웃은 뒤 내 추종자가 된 게 분명한 휴고가 자신만 믿으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는 이번 여행의 임시 마부 겸 수행원을 차출할 때 가장 먼저 자원했다. 우리는 휴고를 앞세우고 수풀이 우거진 정원을 지나 현관에 다다랐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 내가 직접 도어노커를 두드렸다. 고양이 발 모양을 한 구식의 도어노커가 탕탕탕 소리를 냈다.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역시 비어 있는 걸까? 다시 한번 고양이 발을 잡으려는데 그제야 삐거덕 소리를 내며 서서히 문이 열렸다.
“누구십니까? 사람입니까?”
겁에 질린 목소리가 주저하며 물었다.
“로제트 앰브로시아, 이 집의 주인이에요!”
“로……제트 아가씨? 정말 아가씨가 오셨습니까?”
반가운 목소리로 외친 상대방이 문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악!”
미안하게도 나는 비명부터 지르고 말았다. 내 반응에 진이 총을, 휴고가 단검을 빼 들었다. 그러자 그도 비명을 지르며 손을 든 채 뒤로 물러났다.
“미스터 프랭클린?”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일렁이는 촛불과 함께 불쑥 등장한 모습이 너무나 창백하고 초췌해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하지만 찬찬히 뜯어보니 많이 변하긴 했어도 이 집의 관리인 프랭클린이었다. 원래도 건장한 체격은 아니었지만 쇠꼬챙이처럼 마른 몸에 퀭한 눈, 푹 꺼진 볼, 하얗게 센 머리 탓에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그 역시 조심스레 나를 살펴보는 듯했다. 하긴 십 대 소녀였을 적에 나를 마지막으로 봤을 테니 나야말로 많이 변했겠지. 프랭클린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큰 마님이 젊으셨을 적 모습 그대로십니다.”
다행히 우리는 서로의 모습에서 옛 기억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아직 남은 문제가 많아 보이지만 조금은 안심이 됐다. 안심이 되자, 그제야 진의 외투 안으로 무단 침입한 현실을 자각했다. 놀라서 순간적으로 아무 데나 가까운 곳으로 대피한 모양이다. 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의 허리에서 손을 떼고 스윽 떨어져 나왔다.
‘됐어. 이만하면 자연스러웠어.’
슬쩍 진의 얼굴을 봤더니 벌레 씹은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전적이 있다 보니, 내가 조금만 접근한다 싶으면 아주 몸을 사리고 난리도 아니었다. 열차에서 아예 벗고 다닐 때는 언제고.
‘어떻게든 당신 살리려고 한 일이었다고. 누군 뭐 정말로 좋아서 그런 줄 알아? 어울리지 않게 조신한 척하기는.’
나는 억울한 마음에 속으로 투덜거렸다. 역시 의인은 외로운 법.
“이런, 제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이렇게 형편없는 환영 인사라니. 어서 들어오십시오.”
프랭클린이 우리 셋을 맞이했다. 저택 내부는 외관이나 정원에 비하면 그런대로 멀쩡했다. 하지만 사람의 온기가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미스터 프랭클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다른 사람들은요?”
그의 해골처럼 창백하고 핼쑥한 얼굴이 울컥한 심정을 삼켰다.
“찬찬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소개드릴 분도 있고요. 곧 식사시간이니 우선 한스와 마델에게 본저로 요리를 가지고 오라고 이르겠습니다.”
프랭클린의 거뭇한 눈 밑을 보고 있자니 식욕이 생길 것 같지 않았다. 그저 의문만 모락모락 피어오를 뿐.
“한스라면 요리사, 마델이라면 하녀장? 그들은 왜 여기 없는 거예요? 밖에서 따로 살아요?”
휴고도 눈을 부라리며 프랭클린을 위협했다.
“영감, 허튼짓하면 가만 안 둬.”
프랭클린은 편두통이 오는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눌러대며 말했다.
“응접실로 가시지요. 드릴 말씀이 매우 많습니다.”
. . . 프랭클린의 한숨 반, 하소연 반의 길고 긴 보고가 끝나자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눈동자만 굴렸다. 솔직히 처음부터 끝까지 믿기 힘든 얘기뿐이었다. 하지만 프랭클린의 절박한 눈빛이라든가 그 초췌한 몰골을 보면 간단히 불신을 표하기도 힘들었다.
“그러니까 유령 때문이라고 했나요?”
나는 감정을 숨기고 다시 한번 확인했다. 프랭클린의 말에 따르면, 이 모든 상황이 이 집에 깃든 유령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느 날부터 유령의 장난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겁먹은 사용인들이 하나둘 이 집을 떠났다고. 새로 사람을 고용하려 해도 귀신 들린 집이라는 소문이 근방에 자자하게 퍼져서 그 역시 여의치 않았다고 한다. 자신마저 이 집을 버리고 도망칠 수는 없어 어떻게든 버텼지만, 혼자서 정원까지 가꿀 여력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저택이 못쓰게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고, 저택에 딸린 경작지와 농장은 차질 없이 운영되도록 관리하고 있다며 일지와 장부도 보여 주었다. 사용인들도 딱히 이곳이 싫어서 떠난 것은 아니었기에, 몇몇 오래된 사용인들은 한스와 마델처럼 근처에 집을 얻어 자신을 돕고 있다고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도록 왜 알리지 않았어요?”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프랭클린은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외람되지만 저야말로 왜 이제야 오신 건지 궁금합니다.”
“내게 기별을 넣었나요?”
“아가씨께서 계신 제도의 공작저에는 어떻게 연락을 취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늘 해 오던 대로 앰브로시아 본성에 서신을 수차례 드렸지요.”
소유권이 내게 넘어오기 전까지 이 집은 당연히 본성에서 관리해 왔다. 모든 보고와 지시도 본성과 이루어져 왔고.
‘망할 루이!’
욕심은 많은데 머리는 나쁜 내 오라비가 뭔가 치사한 짓을 꾸민 게 분명했다. 일부러 이곳의 소식을 내게 알리지 않고 방치했다든가.
“내가 보낸 기별도 못 받았겠군요.”
집을 나오기 닷새 전에 이곳으로 기별을 보냈지만, 우편 배달원도 아마 귀신 들린 집은 피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 정말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나 역시 시간을 거슬러 열일곱 번이나 되살아났지만,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면 십중팔구 믿지 않을 삶을 살고는 있지만, 그런 나조차 쉽게 믿기 힘든 얘기였다. 하필 유령이라니. 지난 열여섯 번의 삶 동안 별별 일을 다 겪었지만 유령은 본 적이 없었다. 내 망설임이 길어지자 휴고가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레이디, 설마 저런 허무맹랑한 얘길 믿으시는 건 아니지요?”
유령 이야기를 듣는 내내 목을 벅벅 긁으며 답답해하던 그였다.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저 영감을 족쳐서 실토하게 만들 테니 말입니다.”
휴고가 프랭클린에게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지금껏 팔짱을 낀 채 이 상황을 관전하던 진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아주 흔한 사기군. 이런 유령 저택 사기는 제국 전역에 하도 많아서 일일이 따지기조차 하품 나오는군.”
진의 말에 프랭클린의 퀭한 눈에 억울함이 가득 고였다.
“이런 사기의 특징이 뭔지 알아? 반드시 내부자와 결탁한 외부 공범이 있다는 거.”
그때 누군가 현관의 도어노커를 쾅쾅 두드리곤 소리쳤다.
“미스터 프랭클린, 우립니다. 뷰글라스와 시아요.”
그 소리를 들은 진의 한쪽 입꼬리가 비죽 치솟았다.
“마침 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