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당연한 말을 해 준 사람2022.01.31.
하필이면 그들은 왜. 딱 사기꾼처럼 생겼는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경솔한 일이라지만, 야밤에 저택을 방문한 이들의 인상이 솔직히 그러했다.
“부부 심령사입니다. 이쪽 신사가 뷰글라스, 그리고 이쪽은 시아 부인입니다.”
집사 프랭클린이 방금 현관문을 두드린 두 사람을 소개했다. 하는 일도 미심쩍고 인상마저 전형적인 야바위꾼 상이었다.
“아까 말씀 중에 아가씨께 소개드린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요리사 한스의 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참이지요.”
뷰글라스와 시아가 각기 허리와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레이디 앰브로시아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만나 뵐 날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레이디와 일행이 드실 식사도 가지고 왔습니다.”
남편 쪽인 뷰글라스가 미소 띤 얼굴로 유들유들하게 말했다. 날카롭게 찢어진 눈, 작고 매서운 눈동자, 뾰족한 매부리코와 불거진 광대뼈, 얇고 비뚜름한 입술, 구부정한 어깨. 아무리 봐도 첫인상이 개운하지 않았다. 방금 지은 미소도 매우 어색하고 비굴해 보였다. 아내 쪽은 사기꾼 느낌은 아니었지만 음산하고 우울해 보였다. 그녀는 남편과 달리 표정도 말도 거의 없었는데, 이목구비가 약간 이국적이어서 제국인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프랭클린의 기별을 받은 한스가 우리를 위해 만들었다는 음식들을 꺼내 보였다. 만든 정성은 고맙지만 먹을 수 있을 리가. 멀쩡한 음식도 의심하며 은 포크로 들쑤시고 시약 같은 걸 뿌려대는 진이 저런 수상쩍은 음식을 입에 댈 리 없었다. 나조차도 이렇게 께름칙한데 말이다.
“허기보다는 궁금증을 해결하는 게 더 시급한 것 같군요. 식사는 그 후에 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이거 안타깝게 됐군요. 한스가 맛과 향이 달아나지 않아야 한다느니 씹는 질감이 살아 있어야 한다느니 온갖 부산을 떨며 신경 쓴 걸 생각하면 말이지요.”
웃으며 지나치듯 하는 말 같지만 꽤 뼈가 있는 말이었다. 만들고 가져온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웬만하면 까탈 부리지 말고 먹어라? 이쯤에서 좀 까다롭고 고압적인 귀족티를 낼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공작부인으로 살 때 깨달은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남편이 내게 소홀하다는 것을 저택의 사용인들이 가장 먼저 눈치챘다. 그러자 나보다 더 오랜 시간 공작저에 살며 잔뼈가 굵은 그들은 슬슬 나를 무시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주제넘은 짓도 서슴지 않았다. 물론 지난 열여섯 번의 삶에서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 따윈 없었다. 증오로 충혈된 눈으로 삶을 크고 작은 복수와 복수를 위한 맹세로 가득 채우던 시절이었으니. 아랫사람에게 손찌검을 한 적은 없었지만, 나의 고상하지만 잔인한 괴롭힘에 사용인들이 먼저 ‘차라리 매질을 해 달라’고 애원할 정도였다. 지금 와 생각하니 다소 민망하고 전혀 자랑스럽지 않은 과거지만, 어쨌든 그것이 그때의 나였다. 따지자면 지금도 비슷한 상황 아닌가. 근래 나보다 더 오래 이곳에 머물렀다는 이유로 객이 주인을 우습게 보는 상황.
‘간만에 성질 나쁜 귀부인 행세 좀 해 봐?’
이 집이 어떤 집인가. 가늘고 희미하게 존재감 없이 살아 무탈하게 수명을 채우고 이번에야말로 완전한 죽음을 맞을 곳. 내 열일곱 번째 삶의 남은 날들을 보내고 영원히 묻혀야 할 곳. 나의 천국이자 요새이자 은신처이자 묫자리가 아닌가. 그러니 이곳을 차지하려는 게 사기꾼이든 유령이든 괴물이든 뭐든, 나는 결코 내줄 생각이 없었다.
“뷰글라스? 뭔가 착오가 있는 모양이네요.”
나는 품위 있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당신을 허락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건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지 못한다면, 곧장 짐을 싸서 이 집을 나가야 할 겁니다.”
나는 최대한 싸늘하게 귀족적인 화법을 구사했다.
“지금 저녁 식사가 중요한 게 아니란 걸 조금 이해했나요?”
분위기가 급속히 경직됐다. 슬쩍 보니 진과 휴고도 처음 보는 내 모습에 조금 어리둥절한 듯.
‘다 부질없다는 생각에 그동안 누군가 나를 만만하고 허술한 여자로 봐도 내버려 두었지만.’
나는 마음만 먹으면 이런 의욕도 부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 안에는 그동안 쓰고 싫증 나서 던져 놓은 가면이 수백 개였다. 사실 카를슈테인 공작부인으로서 내가 가질 수 있는 권력은 작지 않았다. 하고자 했으면 사교계의 기강을 단속하고 정치적인 결정에도 입김을 넣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나의 관심은 오로지 남편, 그리고 그에게 어울리는 현숙한 아내가 되는 데 있었기에 사교계 암투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원하든 원치 않든 늘 사교계의 중심에 있었다. 내가 그 유명한 카를슈테인 공작의 아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이름에 걸맞은 처신 정도는 익혀 두어야 했다.
‘내가 이번 생에 많은 걸 내려놓아서 그렇지, 사실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야. 귀족 중에서도 깍쟁이로 소문난 제도 귀족이라고.’
저 겁 없는 사기꾼도 이제 기가 좀 죽었겠지 싶어 나는 턱을 꼿꼿이 세웠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한 방 먹인 것처럼 조금 우쭐해졌다. 가장 당황한 건 역시 집사 프랭클린이었다. 그는 사색이 되어 내게 해명했다.
“심령사를 수소문한 건 접니다. 뷰글라스 씨 말고도 몇 사람이 더 왔지만 며칠 버티지 못하고 달아났습니다.”
본성에 도움을 요청해도 아무런 응답이 없자 프랭클린은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심령사들을 불러들였다는 것이다.
“저, 레이디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희가 하는 일을 처음부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분은 드물지요.”
눈치를 보던 뷰글라스가 나섰다.
“사실 그렇습니다. 이 저택의 주인은 레이디이시니 필요치 않다 하시면 저희가 이곳에 머물 이유랄 건 아무것도 없지요.”
사기꾼답게 말은 청산유수였다.
“하지만 레이디를 만나 뵙기를 고대했다는 건 진심입니다. 개인적인 바람이었다고 할까요. 솔직히 심령사로서 직업적인 호기심도 없지 않았습니다만.”
아직 분위기 파악이 덜 됐나. 사기꾼이 미끼를 던지려고 슬슬 발동을 거는 듯했다.
“괜찮으시다면 저희가 하는 일에 대해 조금 설명해 드려도 될까요?”
당사자인 뷰글라스보다 좌우에서 더 난리가 났다. 휴고는 이목구비를 이리저리 우그러뜨리며 뷰글라스의 말에 넘어가지 말라고 눈치를 줬고, 프랭클린은 제발 그의 말을 한번 들어보라고 눈빛으로 애원했다. 진을 보니 못마땅한 표정으로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어디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볼까?
“설명해 봐요.”
일부러 뷰글라스 내외를 세워 두고 나도 선 채로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요점만 최대한 빨리 말하라는 뜻이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뷰글라스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저 같은 영매들은 대개 영혼의 형상은 보지 못합니다. 영혼들은 매우 예민하고 낯을 가려서 각별히 아끼거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모습을 드러내지요.”
“유령의 실체를 본인 눈으로 확인한 적은 없다?”
“예, 그렇습니다. 저는 기운을 감지할 뿐이지요. 대신 영혼의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영혼의 말?”
“살아 있는 인간 중에 영혼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건 저희 영매들뿐이지요. 영혼의 바람이나 메시지를 듣고 가족이나 친지에게 전해 주는 게 저희 역할입니다.”
말은 그럴싸한데 확인할 길 없는 소리였다. 오직 자신만 들을 수 있는 영혼의 말이라니, 아무렇게나 지어내도 그만 아닌가. 이자가 사람을 뭐로 보고.
“그래서 이 집에 영혼이 있다는 건가요?”
“예, 그렇습니다.”
“그렇단 말이죠. 이 집에 사는 영혼은 뭐라고 하던가요?”
“제가 느끼기에 이 영혼은 고집이 센 편인 듯합니다. 지금껏 단 한 가지 말만 반복했으니까요.”
“한 가지 말?”
“돌아와, 로제트.”
“……!”
침착하자 로제트. 내 이름 정도는 누구나 알 수 있어. 사기꾼이라면 상대방의 이름을 이용해 먹는 것쯤은 도가 텄겠지.
“꽤 수다스런 영혼도 많이 만나 봤습니다만, 이 영혼은 오직 이 말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제게는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이요.”
“그 말이란 게 ‘돌아와, 로제트’라?”
“네. 그래서 레이디와의 만남을 고대했던 겁니다. 레이디께서 이곳으로 돌아오셨을 때 과연 이 영혼이 무엇을 원할지 궁금했거든요.”
벌써부터 불길한 예감이 몰려왔다. 자꾸만 떠오르는 작은 얼굴 하나가 있었기에.
“그 영혼에 대해 더 아는 건 없나요?”
“아쉽게도 제게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아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뷰글라스가 내 눈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제가 느낀 기운이나 목소리 등을 종합해 보면 열한두 살 정도 되는 새침한 소녀인 것 같습니다.”
설마 했는데, 역시나…… 미고! 나는 귀족의 깐깐함이나 위엄 따위 깡그리 잊고 휘청거렸다. 알면서도 팽개쳐 둔 삶의 요령이나 지혜로운 처세술을 뒤적거려 봐도 소용없었다. 어쩌면 사기꾼이 던진 미끼를 제대로 문 건지 몰랐다. 머리로는 저것이 나를 아프게 할 미끼란 걸 알면서도 가슴은 이미 그 미끼를 게걸스럽게 삼킨 후였다.
그때 강하고 단호한 힘이 주저앉으려는 나를 붙잡았다. 시선을 옮기니 진의 손이 내 팔을 단단히 붙들고 있는 게 보였다. 이 손이 아니었다면 나는 정말로 다리 힘이 풀려 볼썽사납게 주저앉았을지 모른다.
‘짜증스러운 얼굴로 딴청을 피우는 것 같더니 언제 곁에 와 있었지?’
그 손에서 시선을 들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얼굴에는 여전히 짜증이 꿈틀거렸다. 인정머리는 없어도 순발력과 아귀힘은 좋은 남자였다.
“정말 눈을 뗄 수가 없군.”
진은 뷰글라스 내외와 프랭클린을 버려 둔 채 나를 데리고 별실로 갔다. 휴고는 별실 문밖에서 그들을 감시했다.
“믿을 수가 없어. 그렇게 쉽다니.”
진은 어이없고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방금까지 의기양양하던 나는 완전히 쭈그러져서 고개를 떨궜다.
“그래가지고 지금껏 어떻게 그 악어 같은 귀족들 틈에서 살아온 거야?”
종류별로 어리석은 짓이란 짓은 다 하면서요. 이제 겨우 열일곱 번째로 사는 햇병아리라. 하지만 솔직히 이 순간에도 진의 비아냥거림은 별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뷰글라스의 말에 사로잡혀 있었다. 진이 인상을 쓰면서 쓴소리를 늘어놓았다.
“사기꾼이 무엇에 능한지 알아?”
“…….”
“정보 수집과 심리 게임이야.”
진답지 않게 건실하고 멀쩡한 전문가처럼 말했다.
“그들 작업의 99%는 정보 수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감이라거나 운에 기대는 부분은 아주 미미해.”
“정보 수집…….”
“내가 정보 길드에 있으니 누구보다 잘 알지. 당신의 가족관계라든지, 가문에서 최근 사망한 사람과 그에 얽힌 사연을 알아보는 건 일도 아니야.”
맞는 말이다. 그렇겠지.
“상대의 심리를 장악하는 비결이란 것도 별 게 아니야. 다 디테일한 정보력에서 나오는 거지.”
“그러니까 당신 말은, 뷰글라스가 한 말이 전부 거짓이라는 거죠?”
“물론이지. 협잡 중에서도 하급이라 해야 하나. 그런데 그런 저질…….”
진이 나름 자제하며 말을 흐렸다.
“그런 저질 수법에 놀아나는 멍청이가 바로 나죠.”
뒷말은 내가 대신 이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미끼를 물고 싶다면?
“진, 만약 속아도 좋다면 어떻게 해요? 이런 말 하면 당신은 날 또 한심한 인간으로 보겠지만 솔직히 나는…….”
내 초라한 생각을 진에게 털어놓기로 했다. 어쩌다 보니 진은 내 민낯을 가장 많이 본 사람이 됐다.
‘과분한 영예는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양보하지.’
진이 알면 또 미간을 찌푸리며 이렇게 비꼬려나. 이번 생엔 딱히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미 못난 꼴을 잔뜩 들킨 진이기에 편한 걸까. 그도 아니면 ‘나를 가장 잘 아는 이는 나의 적’이란 하말린 속담처럼 우리가 앙숙이라서? 어찌 됐든 남편이었던 프러너스보다 진이 엉성한 민낯을 비롯해 내가 가진 얼굴을 더 풍성하게 본 것만은 분명했다. 아마 프러너스가 아는 내 얼굴은 몇 가지 안 될 것이다. 그나마도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건 프러너스가 무관심한 탓도 있지만 애초에 내가 보여 주지 않은 이유가 컸다. 귀족의 삶이나 부부 생활이란 것이 원래 다분히 가식적이긴 하지만, 그런 걸 감안해도 내가 프러너스 앞에서 떨었던 내숭은 유난했다. 나는 그에게 좋은 모습, 준비되고 다듬어진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고, 그렇게 했다.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어떤 모습도 그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지만.
‘그만. 자책은 하지 않기로 했잖아, 로제트.’
이상하게도 나는 지난 삶에서 나 자신을 자주 탓했다. 부부의 신의를 저버린 배덕한 인간은 남편인데도 말이다. 프러너스와 아젤리아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어디가 부족한지를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자신을 괴롭혔다. 쓸데없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뇌세포가 닳아 없어질 지경이었다. 아마도 그때 총명하던 머리가 훅 나빠졌지 싶다. 내가 이번 생에 ‘물처럼 바람처럼 유유하면서도 거침없이’를 주문처럼 외면서 가능한 한 생각을 많이 하지 않기로 다짐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열일곱 번째 생에 처음 만난 어떤 껄렁껄렁한 남자가 이렇게 말해 주었다.
「웃기는 소리 다 듣겠군. 결혼은 혼자서 하나?」
얄미운 비웃음에 가려진 나머지 그 말에 은근하게 녹아 있는 위로와 두둔을 자칫 놓칠 뻔했다.
‘결혼은 둘이서 하는 것이듯, 당신 혼자 일을 망친 게 아니야.’
당연한 소리였다. 그런데 그때까지 내게 그 당연한 말을 해 준 사람이 없었다.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내 못난 모습을 강제로 섭렵하게 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런 말을 해 준 진이기에 나는 또 기꺼이 내 한심한 모습을 꺼내 보여 주기로 한다. 내 눈빛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진은 벌써부터 불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