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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속이는 줄 알면서 속는 마음 (19/110)

#19화. 속이는 줄 알면서 속는 마음2022.02.04.

16548661570964.jpg“누가 내게 미고에 관한 얘기를 해 주기만 한다면, 그게 사기라도 얼마든지 듣고 싶어요.”

이미 세상에 없는 아이였다. 이제는 아무도 그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누군가 미고에 관한 이야기를 지어내서 들려준다면 차라리 고마울 것 같았다.

16548661570964.jpg“미고는 이곳에서 열세 살까지 살다가 먼 곳으로 가 버린 내 여동생이에요. 여기엔 그 아이와의 추억이 많죠. 참 좋은 시절이었어요.”

우리는 모두 미고를 웃기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 아이가 웃음을 터뜨리면 그것만으로 뿌듯해하고 기뻐했다. 누군가의 웃음이 행복이던 단순한 시절, 그런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16548661570964.jpg“알아요, 이해하지 못할 말이란 걸. 더 이상한 소리 해 봐요? 당신이 미쳤다고 하려나?”

16548661570996.jpg“그런 말 안 해. 속으로 생각하지.”

지난번에 아리스타타를 들먹이며 조금 이죽거렸더니 눈을 새파랗게 뜨고서 나더러 미쳤냐고 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또 머리에 빗 반쪽을 꽂았을 때도 그래 놓고는.

16548661570964.jpg“뷰글라스 내외를 전속 이야기꾼으로 고용할 수도 있어요. 물론 정당한 보수를 지불하고서요.”

진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16548661570964.jpg“이런 어리석은 기쁨, 당신은 모르죠?”

내 이상한 모습을 억지로 하나 더 알게 된 불운한 남자를 향해 하마터면 혀를 내밀 뻔했다. 그 시절 미고와 장난치던 것처럼. 진이 저벅저벅 걸어 창가로 가더니 창턱에 훌쩍 걸터앉았다. 답답했는지 미간을 찌푸린 채 목까지 채웠던 셔츠 단추를 아무렇게나 풀어헤쳤다. 창턱에 양손을 짚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나를 한참 쳐다보던 진이 입을 열었다.

16548661570996.jpg“알아.”

뭘…… 알아요?

16548661570996.jpg“그 어리석은 기쁨이란 거 말이야.”

그걸 안다고? 설마 또……. 진이 무슨 말만 하면 아리스타타와 연관 짓게 되는 이거 병인가. 그녀의 웃음 한 떨기 얻기 위해 원숭이 춤이라도 춰 보셨나? 그녀가 하는 말이라면 쓰고 떫은 거짓말도 슈크림처럼 달콤하기만 했나? 쯧쯧쯧,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니 혀 차는 소리가 절로 나오려 했다. 아까 진이 나를 비웃었던 것처럼 나도 비웃어 주고 싶은데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다. 아리스타타와 연관됐을 듯한 낌새만 있으면 이상하게 잔소리를 퍼붓고 참견하고 싶어지는 내 심보도 좀 요상하긴 하지만. 짝사랑 동지로서 느끼는 동병상련 때문일까.

16548661570996.jpg“사기 사건을 의뢰받아 조사하다 보면 그런 헛소리를 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더란 말이지.”

그러나 진의 입에서 나온 건 아쉽게도 자기 고백은 아니었다.

16548661570996.jpg“보통 가족이나 친지가 찾아와서 울분을 토하며 그 사기꾼 좀 끝장내 달라고 하지. 그런데 정작 피해를 입은 당사자를 만나 보면 뭐라는 줄 알아?”

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16548661570996.jpg“거짓인 걸 이미 알고 있다네. 사기라도 상관없대. 정말 환장하지.”

진은 ‘환장하지’에서 나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16548661570996.jpg“당신의 그 어리석은 기쁨을 추구하는 무리가 한둘이 아니란 거야. 저 사기꾼들은 그런 마음을 이용하는 거고.”

‘어기추’ 애호가가 그렇게나 많을 줄이야. 하긴 지난 열여섯 번의 삶도 그런 믿음과 배반의 연속이었다. 나는 늘 속는 줄 알면서도, 아닌 줄 알면서도 그 길을 고집했다. 왜 그랬을까? 비뚤어진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속여도 아깝지 않을 만큼 그 사람이 소중해서? 이기심? 이타심? 그 마음의 정체를 아직도 모르겠지만, 진의 말대로라면 알고도 당하는 사기는 내 생각보다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16548661570964.jpg“알면, 내가 하려는 일을 도와줄 거예요?”

16548661570996.jpg“레이디, 무리한 요구 좀 하지 마. 유령의 집에 끌려온 것만도 기가 찰 노릇이니까. 나로선 못 본 척해 주는 게 최선이야.”

16548661570964.jpg“무슨 해결사가 그렇게 일을 가려요?”

16548661570996.jpg“일이 일 같아야 말이지.”

16548661570964.jpg“당신, 카를슈테인 공작의 의뢰도 거절했다면서요?”

16548661570996.jpg“…….”

회심의 기습 질문.

16548661570964.jpg“그 일은 왜 거절했어요?”

나는 알 수 없는 기대를 담아 물었다.

16548661570996.jpg“말했잖아. 일이 일 같아야 한다고.”

16548661570964.jpg“그 사람 의뢰라면 보수도 꽤 높았을 텐데요? 해결사는 돈이면 무슨 일이든 하는 사람 아닌가요?”

당신 입으로 그랬잖아요. 돈을 받고 온갖 추잡한 짓을 대신 하는 게 자신의 일이라고. 그런데 내 뒤를 캐 달라는 의뢰는 왜 거절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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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은 이제 완전히 어두컴컴해져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 창밖을 내다보며 툭 던졌다.

16548661570996.jpg“짜증 나잖아.”

누가? 내가? 프러너스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16548661570996.jpg“당신같이 성급하고 무모해서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을 뭐 하러 뒷조사를 해? 앞에서 봐도 다 보이는데. 게다가 자기 아내 아닌가?”

일단 짜증 나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프러너스라는 사실에 작은 승리감을 느꼈다.

16548661570996.jpg“당신 남편이라는 작자는 당신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 같더군. 딴 남자라니. 유혹이라면 소질도 전혀 없고, 자세도 영 무성의한데.”

진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까지 흘렸다. 무성의함을 알아봐 준 건 다행인데, 소질 없다는 건 은근히 빈정 상하는 말이었다. 나름 혼신을 다해서 거짓 고백도 했는데.

16548661570996.jpg“그쪽으론 침팬지보다 더 소질이 없는걸.”

진이 쓸데없이 한 번 더 강조했다. 그 입 다물지 못할까. 내가 제대로 마음먹고 유혹하려고 들면 어쩌려고 저러지? 감당도 못 할 거면서. 나는 진을 흘겨보며 따졌다.

16548661570964.jpg“돈이면 다 한다더니 짜증 좀 난다고 안 해요? 그거야말로 해결사로서 무성의하고 불성실한 거 아닌가요?”

16548661570996.jpg“해결사라고 가리는 게 없는 줄 알아? 짜증 나면 안 해.”

16548661570964.jpg“당신이야말로 진정 어리석은 기쁨을 추구하는 분 같네요. 제가 졌어요. 당할 수가 없네.”

16548661570996.jpg“겸손할 필요 없어.”

이렇게 괜한 실랑이를 벌이다, 유용한 기억이 떠올라 나는 속으로 박수를 쳤다.

16548661570964.jpg“그때, 당신이 프러너스한테 나를 떠넘기려고 한 말 기억해요?”

진이 또 불길한 표정을 지었다.

16548661570964.jpg“당신이 그랬어요. 거짓이라도 허울이라도 쥐고 싶은 게 누구나 하나는 있다고.”

16548661570996.jpg“하여간 이상한 데 갖다 붙이는 덴 선수군.”

16548661570964.jpg“내가 쥐고 싶은 거짓은 프러너스가 아니라 미고예요. 그러니까 본인이 자신만만하게 내뱉은 말에 책임진다는 의미에서 내게 협조해요.”

16548661570996.jpg“기가 막힌 협박이군.”

16548661570964.jpg“어리석은 기쁨을 추구하는 사람들끼리 돕고 살아요.”

진이 창턱에서 내려와 팔짱을 끼고 말했다.

16548661570996.jpg“당신은 매사 너무 맹목적이야. 앞뒤 가리질 않아. 보통 귀족들은 쓸데없는 걱정이 많아 답답한데 당신은 왜 몸부터 나가?”

이번 생엔 그러자고 결심했으니까. 당신도 열일곱 번이나 반복해서 살아 보라고요. 나중엔 잡다하게 머리 굴리는 것 자체가 고역이지.

16548661570996.jpg“당신처럼 막무가내인 사람은 뒷골목에서도 드물걸? 겨우 여기까지 오는 호위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나한테 한 짓을 좀 봐. 머리가 거슬린다는 이유로 한 짓은 또 어떻고.”

진의 뒤끝이 작렬했다.

16548661570996.jpg“직원들에게 레이디 앰브로시아의 배짱을 본받으라고 해야겠어.”

나는 나대로 줄곧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16548661570964.jpg‘어휴, 진짜 이유를 말할 수도 없고. 내가 당신 은인이라고! 이래서 머리 검은 시더우드는 거두는 게 아닌데.’

생각해 보면 갖은 수모를 겪으며 여기까지 힘들게 끌고 와 죽을 고비 넘겨 줘, 덥수룩한 머리칼을 말끔히 처치해 다 죽어 가던 귀티도 살려 줘. 진에게야말로 맹목적일 만큼 잘해 주기만 했네. 이래서 남자 얼굴 보고 마음 약해지면 안 되는 건데. 진의 콧대가 조금만 낮았어도, 턱 선이 조금만 둔했어도. 저런 얄미운 소리는 끝까지 듣지도 않고 진작 하말린의 호신술로 급소를 찔렀을 테지.

16548661570964.jpg“그래요, 나 맹목적인 걸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에요. 알죠?”

과거 프러너스와의 관계를 슬쩍 암시한 말이었다.

16548661570964.jpg“그런데요, 맹목적인 걸로 해도 프러너스는 미고한테 안 되거든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망설임 없이 미고니까.”

맹목적. 동생 미고를 향한 내 애정을 표현하기에 그보다 더 적합한 말은 없으리라.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나는 미고에게만은 한없이 약했다. 만약 뷰글라스가 사기를 치기 위해 미고를 내 약점으로 찾아낸 거라면 그는 꽤 유능한 사기꾼인 셈이었다. 그냥 그 애 자체가 애정의 이유였다. 아무런 대가도 기대하지 않고 그저 사랑하기 위해 사랑한 사람은 그 애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내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미고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었을까. 아무리 삶을 반복해도 그런 부유한 마음으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을 테니.

16548661570964.jpg“뷰글라스의 이야기에 대한 내 반응이 맹목적이고 한심해 보이겠지만, 그 이전에 내가 얼마나 맹목적이고 한심한 언니였는지를 알아 줬으면 해요.”

드디어 내 말이 진의 마음에 가 닿았는지, 진이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얼굴로 한동안 어딘가를 응시했다. 진이 시선을 그대로 둔 채 말했다.

16548661570996.jpg“저 그림들 왜 다 비뚤어져 있지?”

진이 벽에 걸린 그림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이봐요. 남이 진지한 얘길 하면 귀담아듣는 척이라도 해 봐요.

16548661570964.jpg“원래 그렇지 않았나요? 한참 안 쓰던 방이니까.”

16548661570996.jpg“방금 전까지 저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16548661570964.jpg“정말로 여기 누가 있긴 한가 보죠.”

미고를 향한 절절하고 순수한 애정을 무시당한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머리고 복장이고 자세고 늘 불량하고 삐딱한 게 누군데 예민하게 굴긴. 언제부터 반듯한 걸 좋아했다고.

16548661640084.jpg“저, 보스, 레이디? 이 사람들이 할 말이 있답니다.”

또 한바탕 입씨름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데 밖에 있던 휴고가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마침 잘됐다고 생각하며 나는 문을 활짝 열었다. 언제까지 입씨름만 할 게 아니라 부딪쳐 볼 때였다. 무모하고 성급하게, 맹목적으로, 나답게. 나가 보니 뷰글라스가 생각보다 더 느긋한 태도로 물었다.

16548661640088.jpg“영혼과의 대화를 준비할까요?”

16548661570964.jpg“당장 가능한 건가요?”

16548661640088.jpg“작은 아가씨가 대화에 응할지는 시도해 봐야 알 수 있습니다.”

16548661570964.jpg“좋아요, 해 봅시다.”

로비로 나가 보니 그사이 바닥에 마법진을 그려 놓았다. 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그림이 신비하면서도 아름다웠다. 하말린어를 배울 때 〈하말린의 종교와 예술〉이란 책에서 보았던 추상화와도 비슷했다. 우주의 이치를 수만 개의 도형과 문양으로 표현한 하말린 전통 회화. 나는 처한 상황도 잊고 감탄했다.

16548661570964.jpg“와, 멋지네요.”

16548661640088.jpg“감사합니다. 시아의 작품입니다.”

뷰글라스가 한쪽에 음산한 얼굴로 서 있는 제 아내를 가리키며 말했다. 남편은 말재주가, 아내는 손재주가 좋은 모양이었다. 그저 사기를 치기 위한 장치로 보기엔 지나치게 완성도가 높았다. 사기로 성공하지 못하면 그림 쪽으로 나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훌륭했다. 저 마법진 문양을 넣어 러그를 짜고 싶을 정도였다. 영혼과의 대화가 끝나도 지우지 말라고 할까? 소장 가치가 있어 보였다.

16548661640088.jpg“앞서 설명드렸습니다만, 영혼은 우리를 볼 수도 있고 우리의 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 살아 있는 우리는 영혼이 보여 줄 때만 그 모습을 볼 수 있고, 그들이 하는 말은 저 같은 영매만 들을 수 있습니다.”

화려한 마법진에 푹 빠져 정말 중요한 용무를 잊고 있던 나를 뷰글라스의 설명이 일깨웠다.

16548661640088.jpg“레이디와는 각별한 사이셨던 것 같으니 작은 아가씨가 모습을 보여 주실 것을 기대해 봅니다.”

말을 마친 뷰글라스는 마법진 한가운데 있는 작은 화로 같은 것에 불을 붙였다. 그러고 보니 뷰글라스의 복장도 의식용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중얼 주문 같은 걸 외웠다. 화로의 불길이 커지며 푸른색으로 변했다.

16548661570964.jpg‘와, 준비 많이 했네.’

나름 시각적인 효과에 심혈을 기울인 듯했다. 마치 환상적인 분위기의 연극을 관람하듯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낯선 심령술 도구들에 빠져 무방비한 상태로 있던 내 심장이 파삭 얼어붙었다.

16548661640088.jpg“레이디, 영혼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아무래도 우리 곁에 와 있는 듯합니다.”

뷰글라스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16548661570964.jpg‘이미 알고 있어요, 뷰글라스.’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던 어린 동생이 눈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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