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미고는 미남을 좋아해2022.02.07.
내 앞에 미고가 서 있었다. 작은 소녀가 양손을 꼭 모아 쥔 채 촉촉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울 생각까진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저쪽 안락의자에 앉아 있던 진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입모양으로 물었다.
‘우나?’
그래, 운다. 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같으니. 나는 눈빛으로 진에게 이렇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나와 미고에 대해 모르잖아!’
미고는 나에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순수 같은 거란 말이야! 그래서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고 느닷없이 슬픈 그런 존재란 말이야! 방탕한 시더우드가 뭘 알겠어! 어차피 우는 모습을 들킨 김에 나는 보란 듯이 바닥에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눈빛으로 쏘아 보낸 항의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는지, 진은 그저 이상한 사람 보듯 한쪽 눈을 찡그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대화를 시도해 보겠습니다.”
뷰글라스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에 있는 영혼이여,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하십시오. 이 영매 뷰글라스가 전해 드리겠습니다.”
열세 살 모습 그대로인 미고가 입을 뻐끔거렸다. 내게 무슨 말인가 하고 있는 듯했다. 이어서 뷰글라스가 왠지 아련해진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언니, 왜 이제 왔어?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알아?”
눈에서 쏟아져 나오려던 눈물이 도로 쏙 들어갔다. 내용만 놓고 보면 오열을 해도 모자랄 말이건만……. 나는 정색을 하고 물었다.
“저기요? 왜 목소리를 그렇게 바꿔서 말하는 거죠?”
그렇게 소름 돋게! 뷰글라스가 전혀 어울리지 않게 소녀 목소리를 흉내 내는 게 아닌가. 시아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 역시 그의 소름 끼치는 목소리 변조에 흙 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서 파괴자인 뷰글라스 본인만 뭐가 문제냐는 듯 뻔뻔한 얼굴이었다.
“그냥 본인 목소리로 말해도 되잖아요? 내용만 전하면 됐지, 굳이 그렇게 무리하게…….”
“아닙니다.”
뷰글라스가 단호하고 엄숙하게 말했다. 처음 봤을 때 그는 분명 비굴하고 유들유들한 느낌이었는데, 본격적인 심령술에 들어가자 갑자기 카리스마 있는 진짜 영매처럼 굴었다.
“결코 메시지를 변형시키거나 자의적인 해석을 가하지 말 것. 이것이 저희 영매 세계의 불문율입니다. 저희는 그저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일 뿐이지요. 관여해서는 안 됩니다.”
“내용만 틀림없이 전달하면 되잖아요.”
“아닙니다, 레이디. 우리가 하는 말에서 어조나 말투, 음성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어쩌면 표면적인 내용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굳이 소녀 목소리를 낼 것까지야…….”
도통 몰입할 수가 없다고요! 오히려 메시지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고요!
“염려 마십시오. 메시지를 변형 없이 전달하기 위해 성대모사 실력을 갈고닦는 건 저희 영매들의 의무이자 자부심이니까요.”
누가 그런 걸 염려한대요? 아아, 내 순수, 순수가…….
“그럼 계속하겠습니다.”
뷰글라스가 저리 직업의식이 투철한 인간이었나. 생긴 건 꼭 사기꾼 같은데. 그는 계속해서 미고의 말을 전했다.
“이 집에서 언니가 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
내용만은 한 마디 한 마디 애잔했다. 기다렸다는 말이 왠지 이번 생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닌 것 같았다. 지난 열여섯 번의 삶 동안 오지 않는 나를 이곳에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을 미고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나도 미고 네가 너무나 그리웠어. 왜 진작 여기 올 생각을 못 했을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도 힘들었잖아.”
뷰글라스가 내는 미고의 목소리도 떨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미고를 안았다. 콩닥거리는 심장 박동이나 자그마한 육신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따스하고 충만한 느낌이 품 안 가득 차오르는 듯했다. 미고는 비 맞은 강아지처럼 애처로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성장하고 어른이 되고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데, 나만 이 모습 그대로 여기 갇혀 있는 거 너무 싫어.”
그 마음 내가 잘 알지. 그 끝나지 않는 절망감이란.
“떠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뱅글뱅글 맴도는 심정 언니는 잘 알지?”
미고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가 삶을 수차례 반복하고 있다는 걸.
“언니 도와줘. 여길 떠날 수 있게 언니가 도와줘.”
“알았어, 언니한테 말만 해. 우리 기니피그,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니?”
“언니, 말조심해 줘. 나도 어엿한 숙녀라고. 여기 신사분들도 계신데.”
미고가 돌연 정색을 하고 새침하게 말했다. 십수 년 만에 만났는데도 저 별명에 질색하는 걸 보니 내 동생 미고가 분명했다.
‘신사분 운운하는 걸 보니 누가 또 마음에 든 눈치인데?’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 미고를 보니 반갑기도 하고 살짝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처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혼자 울기만 했어. 그러다 나랑 비슷한 친구들을 만났지. 그 친구들이 말하기를, 내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못 떠나는 거래.”
“뭐가 그렇게 마음에 걸린 거니? 기니, 아니 우리 미고 영애께서.”
내가 안타까운 심정으로 묻자 미고가 나를 빤히 올려다봤다.
“언니.”
내 심장에 또 한 번 충격이 가해졌다. 이 앙큼한 기니피그 녀석. 날 이렇게 감동시키기야?
“내가 걱정돼서 못 떠나고 있는 거야?”
“언니가 행복해져야 내가 훨훨 날아갈 수 있어.”
“미고…… 내가 불행해 보였니?”
혹시 미고 네가 내 삶을 계속 되돌린 거니?
“응. 물론 내가 없는데 언니가 행복하긴 힘들었겠지. 하지만 우리 둘 모두를 위해 이제는 달라져야 해. 언니는 행복해지고 나는 자유로워지고.”
“널 도우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니? 행복해져야 한다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 대신 언니를 사랑하고 아껴 줄 사람을 찾을 거야.”
“그럼 난 뭘 하면 되는데?”
“그 사람이랑 행복하게 살면 되는 거지. 여하튼 내 마음이 흡족해져야 인정할 거니까 언니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내 부탁 꼭 들어준다고 약속해.”
여하튼 제멋대로인 것도 똑같네. 오랜만에 듣는 동생의 생떼도 반가웠다. 문득 내가 프러너스를 동생처럼 생각했던 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미고를 향한 맹목적인 애정이 갈 길을 잃고 헤매다 프러너스라는 새로운 목표를 발견했던 건 아닐까. 다소 억지스런 논리지만, 한편으론 미고가 살아 있었다면 프러너스에게 그렇게까지 매달리지 않았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잠깐 딴생각에 빠진 사이 미고가 사라졌다.
‘오늘 만남은 이걸로 끝인 건가?’
이렇게 생각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나는 흠칫 놀랐다. 아까부터 어째 불안하더라니 결국.
‘내려와, 내려오라고. 왜 거기 있는 거야.’
나는 얼굴 표정과 턱짓으로 소리 없이 미고를 채근했다. 미고는 진의 무릎 위에 앉아서 발을 까딱거리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너 정말!’
미고는 어려서부터 미남자를 좋아하던 조숙한 아이였다. 아까 신사 운운하며 새침을 떨 때부터 진이 눈에 들어왔던 게 분명했다. 진의 기색을 보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별 느낌이 없는 모양이었다. 모르는 척하는 게 자신의 최선이라더니, 이 의식에 관심이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미고에게 내려오라고 눈치를 주며 계속 눈썹으로 신호를 보내고 턱짓을 했다. 그러자 갑자기 뷰글라스의 입이 열렸다.
“싫어. 여기가 넓고 탄력도 좋아. 착석감이 완전 짱짱해……?”
나는 뷰글라스를 흘깃 쳐다봤다. 곧 죽어도 변형은 안 된다더니 왜 의문형으로 끝내는 건데요? 잠시 표정이 무너졌던 뷰글라스는 금세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뚝 뗐다.
“언니, 이 잘생긴 남자는 누구야?”
야! 그렇게 말하면 누구를 가리키는 건지 너무 표 나잖아. 철딱서니 없는 동생에게 눈을 부라리려는 순간, 진을 제외한 남자들이 모두 얼굴을 붉히고 있는 게 보였다. 이 사람들이 대체…… 다들 무슨 착각 속에 사는 거야!
“언니의 새 애인이야? 어쨌든 난 이 사람 참 맘에 든다.”
미고, 제발……. 기니피그처럼 깜찍한 녀석이 이성에 대한 관심은 얼마나 지대했고, 미남을 향한 총애는 어찌나 유난스러웠는지. 한번은 ‘개구리 왕자’ 이야기를 들려줬더니 가족들 몰래 뒷마당에서 개구리를 잡아다 키스를 시도한 아이다. 그 모습을 들키는 바람에 두고두고 놀림감이 됐지만. 내가 즐겨 부르는 북부 민요 ‘앤은 내가 만든 푸딩을 좋아했지’의 개구리 개사 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왕자님이야? 키스하고 싶다.”
내 순수, 순수가……. 아니, 지나치게 순수한 건가? 미고가 진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바짝 대고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생긴 것만 천진한 열세 살 소녀지, 음란 마귀가 따로 없잖아. 여기요, 마귀 쫓는 의식은 없어요? 하긴 이승을 떠돈 햇수를 합치면 결코 어린 나이는 아니었다. 더 이상 자라지 않는 몸과 많이 자라 버린 정신의 부조화가 미고를 괴롭히는 걸까?
“해치지 않아요. 인상 좀 펴세요.”
미고를 볼 수 없는 사람들에겐 수수께끼 같은 말이 이어졌다. 미고는 진의 얼굴에 작은 손을 뻗었다. 그리고 개구리 왕자 때처럼 키스하는 대신 구겨진 진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펴기 시작했다. 손으로 입을 막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는데, 진이 뻣뻣한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미묘했다.
“왜요? 뭐 이상한 점이라도?”
나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진에게 물었다. 진은 왠지 어쩔 줄 모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
하지만 곧 표정을 굳히더니 아무 일 없다는 듯 짧게 대꾸했다. 혹시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챈 걸까? 진은 마구잡이로 사는 것 같지만 은근히 예민한 구석이 있었다. 아까 그림 액자 살짝 비뚤어진 것도 귀신같이 알아차렸듯이. 아마 허벅지랑 미간이 이상하게 간질간질하겠지?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는 웃음에 나는 입을 꽉 다물었다. 누가 보면 울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이리라.
‘하긴 진이 꽤 잘생기긴 했지. 미남 보는 눈은 나랑 꼭 닮았다니까.’
다행히 미고는 손으로 진의 미간 주름을 펴 주는 정도로 만족하고 그의 무릎에서 내려왔다. 휴, 정말이지 아슬아슬해서.
“오늘은 이만하고 쉴래. 내일 언니에게 뭘 부탁하면 좋을지 밤새 고민해야 하니까.”
“내일 나한테 뭔가를 부탁할 거야?”
“응, 내 마지막 소원. 언니가 꼭 들어 줬음 좋겠어. 그래야 내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으니까.”
“힌트라도 좀 주면 안 돼? 네 소원 꼭 들어줄 수 있도록 나도 준비를 하고 싶어.”
미고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돼. 그건 언니한테 이미 많으니까. 다른 건 필요 없어.”
미고는 알쏭달쏭한 말을 남기고 모습을 감추었다. * * * 오랜만에 푹 잘 잤다. 매일 밤 마시던 허브티 없이도 괜찮았다. 공작저에서는 불면증 완화에 효과가 있다는 허브티를 입에 달고 살았다. 잠옷 차림에 대충 숄을 걸치고 정원으로 나가 보았다. 밤엔 그토록 괴기스러워 보이던 정원도 아침에 다시 보니 나름 매력적이었다. 온갖 들꽃과 잡초로 뒤덮인 그곳엔 길들여지지 않은 야성적이고 활기찬 생명력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눈부신 광경이었다. 이 집에서 보내게 될 날들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버섯을 연구하고, 시아에게 마법진 그리는 법을 배우고……. 아, 존재감 없는 열일곱 번째 삶을 위한 시간 때우기 리스트에 마법진 그리기도 넣기로 했다. 어젯밤 그린 마법진이 훌륭해서 그대로 남겨 두자고 했더니 한 번 쓴 마법진은 소멸해 버린다지 뭔가. 야생의 정원을 바라보고 있자니 새삼 공작저를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어딘가로 떠나기만 해도 삶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었는데……. 공작저를 떠나지 못한, 아니 떠나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던 지난 삶들이 안타깝고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미고도 떠나보내야 하는 거겠지…….’
나는 잠깐 이런 생각을 했다.
‘이대로 미고와 여기서 살면 안 될까?’
미고와 뷰글라스 내외와 집사 프랭클린과 이 집에서 오순도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하지만 나의 이기적인 바람일 테지……. 무엇보다 미고 본인이 떠나고 싶다고 했다. 나더러 떠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했지. 다시는 지리멸렬한 삶을 반복하고 싶지 않은 나이기에, 심지어 삶을 마감하고도 이곳을 떠나지 못한 미고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게다가 떠나지 못한 이유가 나 때문이라니. 나는 반드시 행복해져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