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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인생의 신맛 (21/110)

#21화. 인생의 신맛2022.02.11.

16548661884619.jpg“로제트 아가씨!”

결국 요리사 한스와 하녀장 마델이 이곳 ‘플럼 하우스’에 출동했다.

16548661884619.jpg“아가씨를 생각하며 한껏 솜씨를 부렸는데 한 입도 드시지 않으셨다면서요?”

오랜만의 재회에 감격하며 인사를 나누자마자 한스가 딱딱거렸다. 푸근한 인상 때문에 아무리 화를 내도 화나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만. 그들을 보자마자 내가 궁금하게 여긴 건 따로 있었다.

16548661884631.jpg“한스랑 마델이 성혼을 했던가?”

느닷없는 질문에 두 사람은 당황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혔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를 읽던 나는 옆에 선 집사 프랭클린의 안색이 어두워지는 걸 포착했다.

16548661884631.jpg‘어어?’

나도 모르는 사이 아주 재미난 상자를 열어 버린 것 같았다. 이 집에서 맞이할 날들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상승했다. 남의 연애사, 그것도 삼각관계를 구경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법.

16548661884619.jpg“아가씨도 참, 엉뚱하시기는. 그보다 오늘은 제가 점심을 눈앞에서 직접 차려 드리려고 왔습니다. 이래도 안 드시지는 않겠지요? 두고 보십시오.”

한스는 나뿐 아니라 일행인 진과 휴고까지 의욕에 찬 눈으로 쏘아보았다.

16548661884619.jpg“특히 디저트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아가씨가 좋아하시는 자두니까요. 우리 자두는 정말 오랜만이시죠?”

우리 자두는 오랜만이지. 이 집의 이름이 ‘플럼 하우스’인 것은 뒷마당에 자두나무가 있기 때문인데, 이 자두가 아주 명물이었다. 어디에서도 맛보기 힘든, 우리 자두만의 독특한 신맛이 있었다. 얼마나 독특한지는 먹어 본 이라면 사무치게 알 수 있다. 열매는 조금 더 기다려야 하지만 곧 희고 환한 꽃이 만발할 때였다. 생 자두는 없어도 지난해 말려 둔 자두가 잔뜩일 테고, 자두로 만든 잼, 절임, 술이 담긴 병들이 보나 마나 식료품 창고에 빼곡할 터였다. 그 잼과 절임, 건 자두를 이용해 타르트, 파이, 판나코타, 소르베 등의 디저트를 만드는 것이 한스의 특기였다.

16548661884619.jpg“아가씨가 돌아오신 걸 축하하기 위해 디저트를 풀코스로 준비했습죠.”

말만 들어도 턱관절이 찌릿하고 침이 고였다. 한스가 야심 차게 준비한 요리들이 식탁 위에 한가득 펼쳐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은 늘 하던 대로 자신의 시식 시종인 은 스푼을 꺼내 음식을 휘젓고 시약 가루를 뿌려 댔다. 하여튼 식탁의 무법자가 따로 없었다. 사람 좋은 한스의 턱살이 저렇게 적의로 부르르 떨리는 건 처음 보았다. 마델이 한스의 팔을 꽉 붙잡는 게 보였다. 반면 프랭클린의 무표정에 미묘한 기쁨의 색채가 어렸다. 괜히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느끼며 식사를 마친 나는 분위기도 띄우고 한스의 노고도 치하할 겸 조금 지나치다 싶게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16548661884631.jpg“진, 우리 집의 명물을 소개할게요. 한스의 자두 디저트를 맛보면 정말이지 깜짝 놀랄걸요?”

루비처럼 반짝이는 디저트들을 권하며 바람을 잡는데도 진은 고집스레 입을 꽉 다물고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아니, 저 표정은 경계보다 불만이나 짜증에 가까워 보이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맛있는 음식을 권하는데 저렇게까지 인상을 쓸 일인가.

16548661884631.jpg‘흥, 나부터 맛있게 먹어 주지.’

예법엔 어긋나지만 손님보다 먼저 예쁜 빛깔의 소르베에 손을 뻗었다. 추억의 별미를 눈앞에 두고 더 참기 힘들기도 했고, 내가 먼저 먹고 안전하다는 걸 증명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16548661884631.jpg‘아우, 새콤해!’

우리 자두의 독특한 신맛에 눈이 절로 감겼다. 눈과 어깨를 움찔거리며 온몸으로 감동을 표현하고 있는데 진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16548661907152.jpg“정말 깜짝 놀라게 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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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맛도 보지 않았으면서? 게다가 전혀 놀란 표정이 아닌데?

16548661907152.jpg“정말…… 그러고 싶은가? 더욱이 이런 상황에.”

16548661884631.jpg“……?”

진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까지 절레절레 저었다. 어째 귓불이라든가 얼굴 여기저기가 상기된 게, 이유는 모르지만 무엇엔가 또 화가 난 것 같았다. 진의 반응에 어리둥절하던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빼먹고 설명하지 않았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왜냐하면 이 집 사람들에겐 너무 당연한 일이어서. 뒷마당에서 딴 자두를 우리는 ‘윙크 자두’라고 불렀다. 특유의 신맛 때문에 생 자두건 자두로 만든 디저트건 한입 베어 무는 순간 도저히 윙크를 참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어렸을 적엔 저택에 놀러 온 손님들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기도 했다. 일부러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자두 디저트를 대접하고는 당황해하는 손님들 반응을 보며 키득거리곤 했던 것이다.

16548661884631.jpg“아, 하하, 오해예요, 오해.”

나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이 집의 유서 깊은 ‘윙크 자두’에 대해 알려 주려 했는데.

16548661884631.jpg“우리 집 자두가 그러니까 좀 독특해요. 특유의 신맛 때문에 누구든 먹으면 절로 윙크가…….”

16548661907152.jpg“정말 못 말리겠군. 자두 핑계라니. 소질 없다고 했을 텐데.”

진이 말을 끊는 바람에 기분만 상하고 말았다. 유혹할 생각도 이유도 없지만, 설령 진짜로 내가 윙크를 했다 해도 저렇게 정색할 일이냔 말이지. 진을 살려야 한다는 다급함에 지난날 거짓 고백이라는 부적절한 방법을 시도한 것은 그래, 일정 부분 내 무덤을 판 것이라 인정한다. 그다음은 순전히 줄줄이 오해였는데, 그런 걸 가지고 언제까지 유난을 떨 건지. 자기는 그 유명한 방탕 황자면서.

16548661884631.jpg“디저트 먹는 데 무슨 소질이 필요한데요?”

16548661907152.jpg“당신은…… 자기 자신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라.”

자신에 대해 모르다니, 주제 파악을 못 한다는 뜻인가? 그래 봐야 윙크 ― 엄밀히 말해 윙크 비슷해 보이는 눈 찡그림 ― 좀 했을 뿐인데, 왜 저리 심술 맞게 구는지 모르겠다.

16548661884631.jpg“생각해 보니 길게 얘기할 필요 없겠네요. 직접 먹어 보면 내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 거 아니에요!”

16548661907152.jpg“피곤하군. 자두 때문에 윙크를 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16548661884631.jpg“먹어요, 먹어 보면 알 거 아니에요?”

나는 자두 디저트 중에서도 제일 신 소르베를 한 스푼 크게 떠서 진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진은 미고가 실컷 펴 놓은 미간을 와락 구기며 입을 꽉 다물었다.

16548661884631.jpg“어디, 윙크 안 할 자신 있으면 먹어 보라니까요!”

나는 집요하게 진의 입에 스푼을 들이밀었다. 여차하면 내가 스푼으로 자기 입을 찌를 기세이자, 진이 내 손에서 스푼을 홱 빼앗았다. 그리고 소르베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진이 입 안에서 소르베를 굴리며 지겹다는 듯이 말했다.

16548661907152.jpg“어린애 장난도 아니고. 대체 그런 말도 안 되는…….”

왔구나! 진의 표정을 보니 드디어 우리 자두가 강력한 존재감을 떨치기 시작한 것 같았다.

16548661884631.jpg‘진,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요.’

나는 얼굴색이 파리해진 진을 보며 산뜻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거대 정보 길드의 수장으로서 자존심이 있는지, 진은 꽤 버텼다. 사실 이 정도 버틴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버티던 진은 결국 ‘윙크 자두’에게 굴복해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렸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방금까지 아웅다웅하던 것도 잊고 궁금한 마음이 앞섰다.

16548661884631.jpg‘진이 윙크하는 거 보고 싶네. 저 얼굴로 윙크하면 꽤 근사한 그림이 나올 것도 같은데?’

하지만 내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쉽게도 그 윙크의 주인은 따로 있었으니. 그 근사했을 윙크는 하필. 진이 황급히 고개를 돌린 쪽에 서 있던 뷰글라스에게 쏟아졌다.

16548661929544.jpg“아아 이런, 송구합니다. 아시다시피 제겐 가정이 있어서.”

얼결에 진의 윙크를 듬뿍 받아 버린 뷰글라스가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엄한 사람에게 실컷 윙크를 날린 진은 짜증이 난 나머지 목까지 새빨개졌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16548661884631.jpg“거봐요, 내가 얼마나 억울했을지 이제 좀 알겠어요?”

평생 할 윙크를 한꺼번에 다 한 진이 다소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16548661907152.jpg“이 집은 자두나무까지 사람을 당황스럽게 하는군. 먹으면 윙크가 나오는 자두라니…….”

16548661884631.jpg“내가 윙크로 당신을 유혹하고 싶었던 거라면 당신은 윙크로 뷰글라스를…… 여하튼 이제 알겠죠?”

16548661907152.jpg“적절한 곳에서 끊어 줘 고맙군.”

진이 크게 심호흡을 한 다음 허탈한 웃음을 튕겨 내며 말했다.

16548661907152.jpg“당신은 짓궂은 장난을 잘 치잖아. 그래서 이번에도 그런 건 줄 알았지.”

진의 말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내 본성을 되찾은 것 같아서. 나는 원래 장난기 많은 소녀였다. 동생 미고와 서로 골탕 먹이고 장난치고 말썽을 모의하느라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런데 그 많던 장난기가 다 어디로 사라졌던 걸까? 사교계에서도 나는 정숙하지만 매우 지루한 사람으로 통했다. 내가 얼마나 웃고 웃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물론 아무에게나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아니었다. 번듯한 얼굴을 한껏 구긴 채 못마땅한 척하거나, 꽤 세심한 성격이면서 겉으로는 무심한 듯 구는 진을 보면 자꾸만 건드리고 싶어졌다.

16548661907152.jpg“자매가 모두 장난이 지나친 건, 집안 내력인가? 그것도 저 심술궂은 자두 때문이야?”

16548661884631.jpg“자매라니, 미고를 말하는 거예요? 뷰글라스가 한 미고 얘길 믿기로 한 거예요?”

내 물음에 진이 양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16548661907152.jpg“눈앞에 보이기까지 하는데 안 믿을 수는 없더군.”

16548661884631.jpg“……!”

나는 손으로 이마를 탁 짚었다. 그제야 진이 오늘따라 더 예민하게 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미고가 진에게도 모습을 드러냈구나. 하여간 미남자에게 약한 녀석. 나는 짐짓 딴청을 피우며 말했다.

16548661884631.jpg“내 동생인지 어떻게 알아요? 다른 영혼일 수도 있잖아요.”

16548661907152.jpg“모르기가 더 어렵겠던데?”

16548661884631.jpg“어째서요?”

16548661907152.jpg“당신을 똑같이 축소해 놓았잖아. 손버릇이 괴상한 것도 똑같고.”

진은 나와 미고 둘 다를 분노케 할 말을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았다. 특히 미고는 나와 닮았다는 말을 싫어했다. 나도 그리 달갑진 않았고. 우리는 둘 다 자신이 조금 더 미인이라고 생각했다.

16548661884631.jpg“미고가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요. 정말로 당신 도움이 필요할지 모르겠어요.”

미고는 어릴 적에도 노골적으로 미남자를 편애했다. 괜히 진에게만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니리라. 이번에도 어떤 식으로든 진을 걸고넘어지려 할 게 분명했다. 게다가 진은 미고가 지금껏 본 적 없는 특출한 미남이었다. 얼굴뿐 아니라 훤칠한 키나 멋진 체형 같은 것도 그러했다. 생각할수록 점점 불길한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16548661884631.jpg“미고는 이제 그만 이곳을 떠나고 싶어 해요. 나도 그 앨 꼭 보내 주고 싶고요. 혹시 다급한 상황이 생기면 도와줄래요?”

괜한 일에 말려들게 하자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본인 얼굴이 자초한 일이기도 했다.

16548661907152.jpg“어째서 나지?”

16548661884631.jpg“음, 그러니까…… 미고가 당신같이 생긴 사람을 좋아해요.”

16548661907152.jpg“나같이 생긴 사람?”

16548661884631.jpg“그게, 애가 어려서부터 맹수나 맹금류처럼 위험하게 생긴 쪽을 좋아하더라고요.”

심장에 위험하게 생긴.

16548661907152.jpg“자매가 사람 보는 눈만은 매우 다르군?”

진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기분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자기처럼 생긴 사람을 좋아한다는데, 딱 잘라 거절하긴 힘들었나 보다. 손으로 뒷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면서도 고개를 까딱하는 걸 보니. * * * 오늘 저녁 식사 때는 뷰글라스 내외까지 동석해 또 한바탕 난리를 치렀다. 난리의 무심한 진원지는 물론 진 시더우드. 어찌어찌 까다로운 저녁 식사 자리를 마무리한 후, 시아가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지난번 이미 완성한 그림을 보았을 때도 환상적이었지만, 눈앞에서 쓱쓱 그려나가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더욱 신기했다. 평소 음산한 얼굴로 한기를 내뿜던 시아가 달라 보였다. 지금은 완전히 마스터의 분위기를 풍겼다.

16548661884631.jpg‘아, 맞다! 뷰글라스가 아니라 시아가 영매 역할을 하면 되지 않나?’

넋을 놓고 마법진을 보던 내 머릿속에 좋은 수가 번쩍 떠올랐다. 시아가 미고 목소리를 흉내 내는 건 그나마 크게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뷰글라스보다는 백만 배 낫겠지. 그 끔찍한 음성 변조를 듣지 않을 수 있다면!

16548661884631.jpg“저, 뷰글라스, 이번 의식엔 시아가 영매를 하면 어때요? 아무래도 같은 여자끼리니까 메시지를 듣기에 훨씬 편할 것 같아요.”

나의 제안에 뷰글라스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16548661929544.jpg“불편하셨군요. 하지만 그 말씀은 들어드리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시아와 저는 각기 전문 영역이 다르거든요. 저는 영매, 시아는 퇴마 전문입니다.”

끄응, 심령술에도 전문 분야가 따로 있다니.

16548661929544.jpg“걱정 마십시오, 레이디. 제가 비록 남자의 몸이지만 작은 아가씨의 메시지와 목소리를 조금의 변형도 없이 정확하게 전달하겠습니다.”

영매 역은 절대로 내놓지 않겠다는 듯, 뷰글라스는 더욱 결의를 불태웠다. 당신이 내는 미고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내 머릿속에서 심각한 변형이 일어날 것 같아 그러지요……. 물론 뷰글라스의 공로도 없지 않았다. 오랫동안 집을 떠나지 못한 동생의 영혼과 만나고 그 영혼을 영원히 보내는 의식이었다. 당연히 심각하고 엄숙하고 슬프기도 한 일이었다. 하지만 뷰글라스의 전혀 의도치 않은 익살로 분위기가 애매해진 덕에 어둡고 무거운 느낌이 많이 흩어져 버렸다. 나 역시 슬픔에 지나치게 잠식당하지 않을 수 있었고. 뷰글라스와 시아는 전날과 비슷한 절차로 의식을 이끌었다. 오늘 의식용 복장은 조금 더 화려했다. 아무래도 ‘영원한 사랑’이라고 부르는 이별 의식을 앞두고 있으니. 왜 하필 영원한 사랑일까? 죽음만이 변하지 않으니까? 죽은 사람은 누군가를 배신할 수도 누군가에게 배신당할 수도 없으니까? 반대로 살아 있는 인간은 결코 누군가를 영원히 사랑할 수 없는 구제불능이라서? 삶과 죽음이 자두 디저트를 먹는 것보다 무료하고 무감한 일이 되어 버린 나는 이런 불경한 생각을 곱씹고 있었다.

16548661884631.jpg‘하긴 오늘 미고와 이별하면 그 아이는 내 마음속에 훼손되지 않는 영원한 사랑으로 남을 테지.’

나는, 영원한 안식을 얻지 못한 나는 영원한 사랑으로 남을 기회도 얻을 수 없었다. 오직 쓰디쓴 배신만을 끝없이 맛보아야 했을 뿐.

16548661884631.jpg‘미고, 먼저 가서 기다리렴. 나도 이번 생엔 반드시 영원한 사랑이 되어 보겠어.’

뷰글라스와 시아뿐 아니라 의식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도 예식에 어울리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진을 보니 나름 단정하고 멀쩡한 정장을 갖춰 입고 있었다. 셔츠와 재킷의 단추도 똑바로 채우고 머리도 단정하게 빗고, 나름 성의를 보인 복장이었다. 평소에도 저러고 다니면 꽤 인기가 있을 것 같았다. 저 심드렁한 표정만 어떻게 하면 말이다. 훤해진 진을 보고 있자니 뜬금없이 이런 생각도 들었다.

16548661884631.jpg‘만약 진이 예정된 운명대로 죽었다면 그도 누군가에게 영원한 사랑으로 기억됐을까?’

그 누구란 아리스타타일까? 그녀는 죽어 버린 진을 영원한 사랑으로 기억할까? 적어도 다시는 그를 배신할 수 없겠지. 이런저런 잡념이 오락가락하던 내 머릿속에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얼음물이 우르르 쏟아졌다. 준비를 끝낸 뷰글라스가 소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6548661977263.jpg“언니, 마지막 인사하자.”

미고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영원한 나의 어린 동생을 또 한 번 꼭 안았다. 처음 안았을 때처럼 품 안에 따스한 추억의 감각이 차올랐다.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한스와 마델이 한숨을 쉬며 눈물을 훔쳤다.

16548661884631.jpg“미고, 마지막 소원은 정했어? 널 훨훨 날아가게 해 줄 소원 말이야.”

16548661977263.jpg“응, 열심히 생각하고 생각해서 어렵게 정했어.”

16548661884631.jpg“이 언니가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았구나!”

16548661977263.jpg“응, 생각할수록 언니의 행복이 내 행복이더라고.”

이런, 우리 기니피그가 혼자 고생하더니 철들었구나.

16548661977263.jpg“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아름다운 로맨스에 대한 갈증이 있어.”

으응? 뭐라고? 앞선 말에 가슴 뭉클해하던 나는 갑자기 어리둥절해졌다.

16548661977263.jpg“언니가 너무 놀라지 않았으면 하는데, 사실 나도 알 건 다 알거든. 옛날의 순진한 미고가 아니야. 모습은 어린아이지만. 그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알아?”

다 알긴 뭘 안다는 건지.

16548661884631.jpg“그래서?”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물었다.

16548661977263.jpg“나는 영원히 열세 살이라 연애도 못 해 봤잖아? 나 대신 언니가 연애해. 그 말똥구리 같은 프러너스는 잊고. 이게 내 마지막 소원이야.”

16548661884631.jpg“뭐라고?”

뷰글라스가 전한 메시지를 이 자리의 모두가 함께 듣고 있었기에, 다들 내색은 못 하고 어색한 표정으로 나를 흘깃거렸다.

16548661977263.jpg“저기, 저 남자랑 연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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