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참 곤란한 소원2022.02.14.
당돌한 아이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나, 진 시더우드를 당황하게 만들 만큼. 처음엔 언니라는 여자와 너무 닮아서 그녀의 어린 시절 환영이 아닐까 생각했다. 가끔 내 어린 시절의 환영을 보듯이. 그 아이는 환영이 아니라 유령이었지만. 황궁에 살 때 망령을 하도 많이 봐서 그런지, 그 정체에 놀라서 주저앉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이 아이가 하는 말이나 행동이야말로 간 떨어지게 하는 면이 있었다. 뒷골목 아이들 중에도 저렇게 당돌하고 앙큼한 아이는 드물 것이다. 이상한 점은, 어디서도 겪어 보지 못한 유별난 경우인데 또 희한하게 낯설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미 이 미고라는 아이를 만난 적이 있는 것처럼 잔상이 따라다녔다. 생김새가 아이 언니와 닮아서 착각하는 걸까. 아니면 동네 아이들 중에 비슷한 느낌이 있었던가. 뭔가 기억해야 할 일을 잊고 있는 듯 마음에 걸리는 감각. 아이는 또 영리했다. 말하는 걸 가만히 들어 보니, 나이는 어려도 언니보다 동생 쪽이 훨씬 야무진 구석이 있었다. 사람 보는 눈도 제법 있는 것 같고. 오히려 걱정되는 건 언니 쪽인데, 성인이 된 지 오래인 레이디가 얼마나 철부지인가 하면, 아무한테나 윙크를 할 정도다. 윙크라니. 어쩌자고 그런 얼굴로 잘 알지도 못하는 시커먼 사내에게 윙크를 해대는 건지. 겁도 없이. 몇 번을 말해도 알아듣지 못한다. 자두 핑계나 대면서. 그 별난 자두가 별나게 신맛이 강하긴 했지만, 그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 미소 지을 때 눈이 휘어지는 거라든가 입꼬리가 좀 독특한 모양으로 말려 올라가는 게 꽤 귀여운 편이라 상대방이 오해하게 만들 소지가 다분하다는 점. 더 큰 문제는 본인이 그렇다는 걸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귀여운데 윙크하는 건 반칙이지. 남자라는 동물을 대체 뭘로 생각하는 건지. 혹시…… 알고 보면 선수인가. 마냥 순진하게만 봤는데 앞으로 조심해야 할 것 같다. 그 여자와 상관없이, 부쩍 키키 생각이 났다. 하는 짓이 어설퍼 자꾸만 신경 쓰이게 만들고, 귀여운 짓을 해서 사람을 홀리고, 결국엔 가장 소중한 자리를 꿰차고. 그렇게 되면 끝장이다. 키키의 경우 그랬다는 얘기다. 어쨌든 매사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엉뚱하기로는 큰 레이디나 작은 레이디나 비슷해서, 느닷없이 동생의 소원을 들어줘야 한다고 강요했다. 물론 말은 도와달라는 거였지만. 어린 소녀가, 더욱이 나를 좋아한다는데, 매정하게 거절하기도 그렇고. 아이의 마지막 소원이라니 웬만하면 들어주고 싶다. 또 아이가 키키만큼 귀엽기도 하고. 뭐, 설마 지금껏 일어난 일보다 더 황당한 일이야 있겠는가. * * * 미고가 손가락으로 진을 가리켰다. 진이 정확하게 미고의 손가락을 쳐다본 걸로 봐선, 진도 미고의 모습이 보이는 게 분명했다.
“저 남자와 연애하라고.”
“얘가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네, 아하하. 저 남자라니, 참.”
다른 사람들은 미고가 보이지 않을 테니, 이렇게 적당히 둘러대며 넘어가려고 했다. 그러자 뷰글라스가 미고의 목소리를 흉내 내 또박또박 말했다.
“진 시더우드. 저 남자와 연애해.”
여동생이고 뭐고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내가 소리쳤다.
“이 철딱서니 없는 기니피그야. 네가 알긴 뭘 알아? 연애라는 게 그렇게 생떼를 쓴다고 되는 일인 줄 알아? 봐, 넌 아무것도 모르잖아, 이 애송이야!”
“그럼 언니는 왜 그랬는데? 왜 바보같이 떼쓰고 매달렸어? 그렇게 잘 알면서!”
허, 저건 내 동생 미고가 아니다. 저건 분명 미고의 탈을 쓴 악마다.
“언니가 떼쓰는 거랑 내가 떼쓰는 거랑 뭐가 달라?”
나왔다. 미고의 우기기 작전. 드러눕기 작전. 병약하다는 이유로 오냐오냐했더니 뭐든 우기면 되는 줄 안다.
‘휴, 그래. 어린아이를 상대로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야.’
아무리 현세에 머문 시간이 길다 해도 미고의 경험과 지식은 이 집이란 공간과 살아 있을 때의 기억을 벗어나지 못할 테지. 이렇게 마음을 가라앉힌 나는 미고를 잘 달래 보기로 했다.
“미고야, 네가 무슨 마음으로 그런 소원을 말하는지 이 언니가 알 것도 같아.”
“알아? 생각보다 이해력 좋네? 그럼 진 시더우드랑 사귀어.”
참자.
“그렇지만 그건 우긴다고 되는 일이 아니야. 그랬으면 언니도…… 지금 공작저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겠지? 내가 이미 실패해 봐서 알아. 그건 아니야.”
동생을 깨우치기 위해 자신의 상처를 내보이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 언니의 희생정신. 이 인생 17회차의 깊이를 이 녀석이나 저 인간이나 좀 알아야 할 텐데!
“그거야 언니가 남자 보는 눈이 없어서 그런 거지.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언니는 그런 쪽으로 조금 둔하다고.”
참아……야 하나?
“프러너스 그 말똥구리보다 진 오라버니가 훨씬 낫다는 걸 왜 몰라?”
언제부터 오라버니야? 미고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검지 두 개를 교차했다.
“아까 한 말 취소야. 언니랑 내가 떼쓰는 게 같다는 말. 생각해 보니까 내가 더 나은 거 같아. 적어도 나는 어떤 남자가 좋은 남자인지 알지.”
얘는 꼭 사사건건 나를 이겨 먹으려고 들더라. 이 언니가 진실이 무엇인지 어른스럽게 차분히 짚어 주마.
“그래, 나도 프러너스가 싫어. 그러니 프러너스를 두둔할 생각은 조금도 없어. 하지만 세간의 평가는 네 생각과는 조금 다르단다.”
내 말에 미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프러너스는 제국에서 가장 인기 많은 신사로 꼽히는 사람이야. 미혼일 땐 최고의 신랑감이었고. 전남편에 대해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사실은 사실이니까.”
미고는 불만스런 표정으로 볼을 잔뜩 부풀렸다. 물론 양 볼 가득 든 건 심술이다.
“반면에 네가 좋아하는 진은…….”
아차차, 나는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진의 도움이 필요할지 모르는 이때, 면전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그렇지. 미고는 우리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걸 떠올린 나는 미고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러면서 진을 슬쩍 건너다보니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귀를 후비적거리고 있었다. 할 말을 마친 나는 미고의 귀에서 입을 뗀 후 아이의 어깨를 도닥여 주었다.
“이제 알겠지, 미고야?”
이 정도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으면 알아들었겠지? 내 안에서 진주가 자라고 있을 것만 같네.
“그러니까 언니는 바보야!”
하지만 미고는 알아들을 생각 따위 눈곱만큼도 없다는 듯 뷰글라스의 성대를 빌려 소리를 꽥 질렀다.
“내 말보다 사교계 바보들 말을 믿는다고?”
“사교계에 바보가 많은 건 사실이지만, 아무리 말똥구리라도 그렇게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말똥구리면 다 이유가 있는 거라고!”
“흥, 똥은 백 개 있어도 똥이야!”
무슨 그런 비유를! 지금껏 못 본 척하던 진마저 푸흡 하고 웃음소리를 토해냈다.
미고는 허리에 손을 착 올리고 눈을 이글거렸다. 그 모습을 보니 괜히 잘못 건드렸다는 후회가 스멀스멀 밀려왔다.
“좋아, 우리 공평하게 하나씩 인정하기로 해. 내가 먼저 인정할게. 프러너스가 꽤 잘나가는 말똥구리라는 걸 인정할게.”
미고가 갑자기 화통하게 나오는 게 불안했다.
“그렇다고 그 말똥구리에게 돌아갈 건 아니잖아? 다른 사람들 평가는 언니랑 상관없잖아? 그러니까 언니도 인정해. 진이 언니의 짝이란 걸.”
얘기가 왜 그렇게 튀는 건데?
“미고야, 다시 말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하고 연인 사이가 되는 건 그렇게 억지를 부린다고 되는 일이 아니야.”
나는 다시 한번 타일러 보았다. 하지만 수고한 보람도 없이 미고는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언니는 그렇게 사교계 핑계를 대더니 사교계 유행도 몰라? 요즘 사교계에선 마음보다 몸부터 먼저 맞춰 보는…….”
놀란 나는 팔을 휘휘 내저으며 황급히 미고의 말을 막았다. 대체 그런 소린 어디서 주워들은 거야? 우리 애가 이런 애가 아닌데. 아무래도 같이 어울리는 영혼 중에 질 나쁜 불량 영혼이 있는 게 분명했다.
“미고야, 무엇보다 나는 좋은 남자건 나쁜 남자건 남자가 필요 없어. 연애할 마음이 없어.”
“내 소원이라잖아. 언니의 마음은 중요하지 않아.”
아무리 어린애라지만 우길 걸 우겨야지! 나는 다시 한번 인내심을 발휘해 이렇게 구슬려 보았다.
“아,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 내가 천천히 연애할 상대를 물색해 볼게. 네가 이러는 건 진에게도 실례야.”
“아니, 진 오라버니가 딱 좋아. 언니는 남자 보는 눈이 심각하게 떨어지기 때문에 언니에게 맡겨둘 수가 없어.”
그놈의 오라버니 타령. 아무래도 설득의 방향을 바꾸어야 할 것 같았다.
“실은 진 황자 전하께선 나를 안 좋아하셔. 그래, 좋아하는 여인이 따로 계셔. 그러니 자꾸만 조르는 건 무례한 행동이야.”
역시, 미고의 고집스런 눈빛이 흔들렸다.
“정말?”
“그럼, 아주아주 사랑하는 여인이 있으시단다. 그렇지요, 진 전하?”
미고의 눈은 물론, 모두의 눈이 진에게 쏠렸다. 나는 진에게 눈으로 협조 요청을 보냈다.
‘제대로 대답해요. 이 길이 나도 살고 당신도 사는 길이란 말이에요!’
진은 갑자기 자신에게 이목이 쏠린 것이 매우 성가시고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나에게도 발언권이 있는지 몰랐군. 나는 내가 똥 덩어리인 줄 알았지. 말똥구리가 이리저리 굴리다 만.”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멋대로 우리 일에 끌어들인 거 사과할게요.”
그러니까 얼른 격렬하게 나를 거부하라고요. 내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진을 마구 채근하는데, 미고가 나를 제치고 진에게 직접 다가갔다.
“진 오라버니, 정말로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요?”
미고에게 직접 질문을 받은 진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웬 고민? 당신이 해야 할 답은 하나밖에 없는데. 진이 미고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 지금은 없어.”
미고는 활짝 웃었고,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입이 벌어졌다. 이제껏 껄렁껄렁한 뒷골목 협잡꾼으로 살아왔으면서 갑자기 이 대목에서 진솔한 오라버니 행세를 할 게 뭐람. 미고가 신이 난 목소리로 진에게 말했다.
“그럼, 형부가 되어 주세요.”
야! 내가 당장 달려들어 미고의 앞을 막아서려는데, 진이 무릎을 꿇어 커다란 키를 줄인 후 미고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구나.”
진의 대답에 미고는 순식간에 풀 죽은 얼굴이 됐다. 그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진이 물었다.
“너처럼 안목도 훌륭하고 똑똑한 숙녀가 이렇게 억지를 부릴 때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안목이 훌륭해? 둘이 주거니 받거니 죽이 척척 맞네. 진의 물음에 미고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지 못할 이유가 있는 거로구나.”
진의 말에 미고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럼 어떻게 한다? 언니는 나를 보통 남자로도 쳐 주지 않고, 나는 돈만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렇게 안 생겼는데…….”
시무룩한 표정으로 미고가 웅얼거리자 진의 입가가 순간 움찔했다.
“안타깝게도 나와 언니는 서로 좋아하는 게 많이 다르구나.”
“아닌데…….”
“그렇다고 우리가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좋아하는 척 거짓말하는 건 너도 바라지 않지?”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이던 미고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진이 아이를 잘 다룬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라도, 둘은 결국 서로 좋아하게 되어 있어요!”
미고가 아직 남은 생떼를 쥐어짜며 말했다. 그럼 그렇지. 우리 미고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아이가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저런 닭살 돋는 대사라니. 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러니까, 어차피 좋아할 거니까, 그냥 미리 좋아하는 걸로 하면 안 돼요?”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닭살 돋는 미고의 생떼와 소름 돋는 뷰글라스의 연기가 합쳐져 견디기 힘든 두통을 유발했다. 거기다 진의 눈치까지 보려니 민망해 죽을 맛이었다.
‘진, 어차피 당신은 미고에게 찍힌 이상 쉽게 벗어나기는 힘들 거예요.’
나는 조금 안쓰러운 눈빛으로 진을 보았다. 이 와중에 미고는 생떼는 제가 써 놓고 어처구니없게도 커다란 눈에 눈물을 그렁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미고의 필살기였다. 과연 진이 저 눈물 연기를 무사히 돌파할 것인가.
“흠…….”
진은 난처한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다. 버텨요! 저 소악마의 연기에 넘어가면 안 돼요, 진!
“이렇게 하면 어떨까?”
잠시 후 진이 입을 열었다.
“난 돈을 받고 부탁받은 일을 하는 사람이거든. 너랑 나랑 계약을 하면 어떨까?”
“계약? 서로 필요한 걸 주고받기로 약속하는 거 말이에요?”
“그렇지. 똑똑하구나. 난 네 소원을 들어주고, 넌 나에게 대가를 치르고. 거짓말이 아니라 거래를 하자는 거지.”
“거래? 멋져요, 어른이 된 기분이에요. 그럼 계약 연애도 할 수 있는 거예요? 사교계에서 유행한다는?”
미고는 좋아서 방방 뛰었다.
“정식으로 계약할래요!”
“그래. 대가는 무엇으로 치를지, 결정하는 것도 네게 맡기마.”
“걱정 마세요. 오라버니에게도 절대 손해나는 거래가 아닐 거예요. 믿어도 좋아요.”
잠시만요, 여러분? 그 계약 연애라는 걸 할 사람이 설마 나는 아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