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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미리 맞춰 봅시다 (23/110)

#23화. 미리 맞춰 봅시다2022.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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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나는 조용히 진의 팔을 끌어당겼다.

16548662215994.jpg“지금 뭐 하는 거예요?”

목소리를 낮추어 따졌다.

16548662215998.jpg“계약.”

16548662215994.jpg“아무리 애가 떼를 써도 그렇지, 어쩌려고 그래요?”

16548662215998.jpg“눈빛이…… 사정이 있어 보였어.”

16548662215994.jpg“뭐라고요? 언제부터 그렇게 너그러웠어요?”

16548662215998.jpg“내가 귀여운 데 좀 약해.”

16548662215994.jpg“…….”

말도 안 돼. 나도 굳이 따지자면 고혹적인 쪽보다는 귀여운 쪽인데, 나한테는 그렇게 까칠하게 굴더니……가 아니고. 중요한 순간에 왜 갑자기 무르게 나오는 건데요? 그래도 진이 미고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려 애쓰는 건 무척이나 고맙고 다행한 일이긴 했다. 그렇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한편으론 이 방법도 나쁘지 않겠다는 계산이 나왔다. 진 앞에서 망신을 당하는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잖아? 흉한 과거는 이미 적립할 대로 적립했으니, 순간의 부끄러움과 민망함은 꾹 참고 우선 미고를 잘 보내 주는 것부터 생각하는 게 어떨까. 어른들 간에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은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으리라. 계약이란 나중에라도 해지할 수 있는 것이니. 위약금은 좀 물어야 하려나. 아니지, 진에겐 위자료나 사례금을 주어도 모자란 상황이었다. 애초에 미고를 잘 떠나보낼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한 것도 나였잖아.

16548662215994.jpg‘그래, 계약 결혼도 아니고 계약 연애쯤이야.’

나는 진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도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고개를 까딱했다. 많은 말은 필요 없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미고를 구슬렸다.

16548662215994.jpg“진과 얘기가 잘됐어. 그래, 네 소원대로 진과 계약 커플이 될게. 이제 안심이 좀 되니? 더 이상 언니 걱정은 마.”

1654866223172.jpg“정말이지? 둘이 예쁘게 잘 사귀어야 해.”

16548662215994.jpg“그……러자꾸나.”

자, 마음에 걸리는 것들은 모두 털어 버리고 자유롭게 날아가렴. 미고, 네가 행복해질 차례야. 다행스러운 마음과 섭섭한 마음이 교차하며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한바탕 말썽이 있었지만 막상 보내려니 가슴이 저릿해 왔다. 나는 미고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새기려고 아이를 찬찬히 살폈다. 한데, 미고가 눈동자를 옆으로 또르르 굴리며 눈을 피한다……?

1654866223172.jpg“내 소원 아직 조금 남았는데?”

16548662215994.jpg“뭐?”

아이는 당돌하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왠지 안절부절못하더니 계속 엉뚱한 데를 흘끔거리며 말했다.

1654866223172.jpg“커플이니까 둘이 키스해.”

인내심을 붙잡아 뒀던 끈이 뚝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얘가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어린아이 장난도 정도껏이어야지. 키스가 무슨 윙크 자두처럼 심심하면 막 집어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랐고, 무엇보다 더 이상은 진에게 폐를 끼칠 수 없다는 생각에 미고를 향해 눈꼬리를 사납게 찢었을 때였다. 미고의 표정이나 행동이 어째 이상했다. 지금까지 막무가내이던 아이의 눈이 마구 흔들리는 게 아닌가. 뭔가에 쫓기는 것 같기도 하고 겁에 질린 것 같기도 했다. 문득 서늘한 느낌이 가슴을 스쳤다.

16548662215994.jpg‘비슷한 상황이 전에도 있었지…….’

급기야 미고는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1654866223172.jpg“언니, 키스할 거지? 약속했거든. 보여 준다고. 나는 허풍쟁이 거짓말쟁이가 아니야.”

16548662215994.jpg“그게 무슨 소리니, 미고? 누구랑 무슨 약속을 했다는 거야?”

1654866223172.jpg“다들 기다리고 있거든. 키스하는 거. 우리는 영원히 열서너 살이라 정말로 궁금하거든.”

16548662215994.jpg“미고야, 언니 눈을 봐. 차근차근 얘기해 볼래? 우리가 누군데?”

1654866223172.jpg“나 같은 소녀들이 좀 있어. 같이…… 봐도 될까?”

16548662215994.jpg“같이 보다니, 그게 무슨. 너 설마 또…….”

나는 언성을 높이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 일은 미고에게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겼고, 내게도 가슴 아픈 기억이었으니까. 미고는 턱을 잘게 떨었다.

1654866223172.jpg“언니가 키스 안 하면 나는 또 외톨이가 될 거야.”

16548662215994.jpg“미고야, 괜찮으니까 심호흡해. 후후 하하…….”

미고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미고는 자신의 머리칼을 손으로 마구 헝클어뜨리더니 급기야 사라져 버렸다.

16548662215994.jpg“아…….”

나는 소파에 털썩 내려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어떻게 유령이 되어서도 그러니……. 생전에 풀지 못한 문제는 죽어서도 끌고 다니게 되는 걸까. 미고가 무거운 족쇄를 끌고 가는 환영이 보이는 듯했다. 속상해서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때 어깨에 무언가 슬쩍 닿았다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진이 다가와 있었다.

16548662215998.jpg“미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지?”

나는 벌떡 일어나 진을 별실로 끌고 갔다. 등 뒤로 방문을 닫자마자 그에게 다짜고짜 통보했다.

16548662215994.jpg“우리 키스해야 돼요.”

진이 잽싸게 뒤로 물러섰다.

16548662215998.jpg“뭘 해야 된다고? 또 시작이군.”

16548662215994.jpg“당신이 미고와 계약한 거잖아요. 그러게 누가 스스로 무덤을 파래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진에겐 면목이 없었다. 지금까지 미고의 장단에 맞춰 준 것만도 뜻밖이었고 너무나 고마웠다.

16548662215994.jpg“……미안해요. 무리한 부탁인 줄 아는데, 기왕 도와준 거 조금만 더 도와주면 안 될까요?”

진의 미간이 또 구겨졌다. 지금 아니면 말하지 못할 것 같아 나는 얼른 덧붙였다.

16548662215994.jpg“그렇지만 지금까지 동생에게 친절하게 대해 준 건 무척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키스를 거절한다 해도 말이죠.”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이지 동생이 아니고 골칫덩어리다.

16548662215998.jpg“무슨 일인지, 좀 자세히 설명해 봐.”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았는지, 진이 소파에 앉더니 다리를 꼬며 말했다.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나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해야 할 말도 골랐다.

16548662215994.jpg“미고에겐 큰 상처가 있어요. 이렇게 영혼이 되어서도 벗어나지 못했을 만큼이요.”

나는 아주 오랜만에 그 일을 떠올렸다.

16548662215994.jpg“미고는 병약해서 늘 집에만 있었어요. 그런 미고에게 또래 친구란 매우 궁금하고 귀중한 존재였죠. 상상 속의 정령처럼요.”

내 말에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16548662215994.jpg“어쩌다 또래 누군가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호감을 보이면 제 모든 걸 홀딱 다 내어 주고 싶어 안달이었죠. 그만큼 외로운 아이였어요.”

말하다 보니 또다시 마음이 아파 왔다.

16548662215994.jpg“그러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파티에 초대를 받았는데, 거기서 친구들의 환심을 사려고 거짓말을 한 거예요. 우린 아이가 작은 허풍을 떤 것뿐이라고 가볍게 생각했는데 일이 커져서…….”

16548662215998.jpg“그즈음의 아이들은 귀엽기도 하지만 잔인하기도 하지.”

이 말을 하는 진의 표정에서 나는 설핏 그의 어린 시절을 엿보았다. 반쪽짜리 시더우드인 그도 어렸을 때 황궁에 살면서 잔인한 취급을 많이 받았겠지? 그래서 미고의 마음을 헤아리는 걸까.

16548662215994.jpg“아까 당신도 미고가 횡설수설하는 걸 들었겠지만, 아무래도 그때와 비슷한 사고를 친 것 같아요. 그래 놓고 어찌나 겁에 질려 있는지.”

궁지에 몰린 작은 짐승처럼 불안하게 흔들리던 커다란 눈동자를 떠올리니 나까지 초조해졌다.

16548662215994.jpg“또래 영혼들에게 키스하는 걸 보여 주겠다고 큰소리친 모양인데.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오면서도 속상하고, 화가 나면서도 안쓰럽고 걱정되고…… 알아요, 알아.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기죠.”

죽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생각했던 나에겐 새로운 국면이 아닐 수 없었다. 생전에 풀지 못한 숙제가 죽어서도 여전히 남아 영혼을 괴롭힌다니. 살아온 삶이나 관계가 만든 응어리. 물론 나 같은 어른이야 그 정도 응어리는 품고 가도 괜찮았다. 하지만 미고는 어린아이고, 아이들의 문제란 대개 본인의 잘못이 아니지 않은가. 미고에게 그런 고통은 가혹했다. 얼마나 황당무계하고 허무맹랑한 얘기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내게는 당장 미고를 아프지 않게 하는 것이 시급했다. 나는 미고를 웃게 만들어야 했다. 나는 미고 일이라면 만사 제치고 달려드는 맹목적인 언니니까. 내가 미고에게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터였다. 이런 일을 부탁하는 나도 황당한데, 진은 얼마나 더 기가 찰까 생각하면서도 포기할 수 없었다. 이렇게 구구절절 설명한 것도 진의 동정심을 바라서였다. 기왕 미고의 소원을 들어주는 일에 발을 담갔으니 키스도 좀 협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6548662215998.jpg“그러니까, 미고의 유령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키스를 해야 한다?”

진이 착잡한 얼굴로 확인했다. 상상하니 끔찍했지만,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후 설득에 들어갔다.

16548662215994.jpg“깊이 생각하면 이상하고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겠지만, 그냥 가볍게 연극을 한다고 생각해 보면 어때요? 관객을 앞에 두고 하는.”

16548662215998.jpg“연극?”

16548662215994.jpg“아카데미에서 연극 해 봤죠?”

16548662215998.jpg“숲속의 나무들이나 까마귀 떼 같은 거?”

16548662215994.jpg“음, 축하해요. 이번엔 그런 단역이 아니라 주목받는 주인공 역할이에요.”

16548662215998.jpg“황송하군.”

기왕 이렇게 된 거, 인생 연기 한번 펼쳐 보자고요.

16548662215994.jpg“연극에서 키스하는 장면이라고 생각하자는 거죠. 진짜로 하는 게 아니라 하는 것처럼 보이게 연기를 하자는 거예요.”

16548662215998.jpg“가능한가?”

16548662215994.jpg“미리 의논해서 동작을 맞추면 가능하죠.”

16548662215998.jpg“흠…… 과연 그 정도로 속아 줄까?”

진이 미덥지 못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16548662215994.jpg“감쪽같이 해야겠죠. 진짜로 키스하는 것처럼 보이게. 무대에서 배우들이 진짜로 키스하는 건 아니잖아요.”

공작부인이 된 후에도 끊지 못한 유일한 처녀 적 취미가 연극 관람이었다. 그동안 본 유명한 키스 장면들이 머릿속에 줄줄이 지나갔다.

16548662215998.jpg“그거야, 보는 사람도 진짜 키스하기를 기대하지는 않으니까 그럭저럭 넘어가 주는 거지. 저 짓궂은 꼬마 영애들은 눈에 불을 켜고 볼 텐데?”

그렇긴 하네. 예리한 지적이다. 하지만 그래 봐야 어린 소녀들이다. 걔들이 키스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어?

16548662215994.jpg“그러니 연습이 중요해요. 부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도록 두 사람의 호흡이 잘 맞아야겠죠. 고개의 방향과 각도, 디테일한 동작, 실감 나는 소리 같은 게 절묘하게 맞물려야 해요.”

관객 인생 17회차의 연륜을 밑천 삼아 나름 세심한 연기 지도를 펼치는데, 진은 소파에 삐딱하게 기대앉아서 멍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 현실 도피 중이거나, 몹시 피곤하고 짜증스럽다는 티를 팍팍 내며 시위 중이거나. 나는 모르는 척하며 진에게 부탁했다.

16548662215994.jpg“잠깐 일어나 주시겠어요?”

진이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느릿느릿 일어섰다. 마주 서서 보니 역시 키 차이가 상당했다. 물론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키스를 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니 새삼 실감 나게 다가왔다.

16548662215994.jpg“진이 몸을 숙여야겠죠? 수고스럽겠지만.”

나는 머릿속으로 장면을 상상하며 동작을 안배하기 시작했다. 내가 펄쩍 뛰어올라 진의 목에 매달리거나 진이 나를 들어 올리는 건 진짜 연인끼리나 가능한 열렬한 키스가 될 것 같았다. 그러니 진이 키를 접을 수밖에. 내가 고개를 내리라고 손짓을 하자 진이 마지못해 어깨를 기울여 다가왔다. 겨우 입술 높이가 비슷해졌다. 이제 보니 진은 도톰하고 색깔이 예쁜 꽤 요망한 입술을 달고 있었다.

16548662215998.jpg“그다음은?”

진이 묻자 그의 숨결과 삼나무 향기가 얼굴에 훅 끼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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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8662215994.jpg“아, 다음은…….”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의 얼굴 양쪽에 내 양손을 살짝 갖다 댔다.

16548662215994.jpg“각도를 이렇게 맞추면…….”

손으로 진의 고개를 기울이면서 나도 그에 맞춰 고개를 틀었다. 입술이 닿을락 말락 더욱 가까워졌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진의 눈이 보이지 않는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콩닥콩닥, 아까부터 내 귀를 어지럽히는 소리가 진의 귀에까지 들릴까 봐 너무나 신경 쓰였다. 그저 연기일 뿐인데, 대체 이 심장이 왜 이렇게 주책맞게 구는지. 키스 한번 못 해 본 여자처럼! 정신 똑바로 차려야 했다. 이 키스 연기의 핵심이라 할 만한 부분이었다. 어색하지 않으면서도 기왕이면 각도나 방향이 아름답고, 입술이 닿은 듯이 보여야 한다. 연극의 키스신을 수없이 본 기억을 바탕으로 나는 얼굴의 각도와 방향을 치밀하게 조정해 나갔다. 심장의 이상을 숨기기 위해 나는 더욱 천연덕스럽게 연출에 몰두하는 척했다.

16548662215994.jpg“이렇게 하면 입술이 닿은 듯이 보이겠죠? 감쪽같겠죠?”

마침내 최적의 결과를 얻은 내가 진에게 동의를 구했다.

16548662215998.jpg“모르겠는데.”

16548662215994.jpg“모르겠으면 그냥 외워요. 이 각도와 방향을 잊지 말고 몸에 새겨야 해요. 자, 다시 한번 해 볼게요.”

나는 방금 전 동작을 반복했다.

16548662215994.jpg“이 부분에서 두 사람의 호흡이 얼마나 잘 맞느냐가 관건이에요. 한 번 더 해 볼게요.”

16548662215998.jpg“꼭 이래야 하나?”

16548662215994.jpg“왜요? 별로예요?”

16548662215998.jpg“내 생각엔 이렇게 애를 쓸 바에야 입술 정도는 닿아도 되지 않나 싶어서.”

응? 입술을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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