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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그만 좀 웃겨 (26/110)

#26화. 그만 좀 웃겨2022.02.28.

인생 17회차엔 사람들이 자꾸만 나를 웃기려고 해서 큰일이다. 문제는 웃기지도 않다는 것. 친오빠의 시답잖은 협박에는 비웃음조차 아까웠다. 루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강자에게 비굴하고 약자에게 잔인한 인간 허접이 정도? 앰브로시아 후작가의 재산과 작위를 물려받았으니 본인도 제국에서 내로라할 강자이건만 하는 짓은 거리의 걸인보다 구차했다. 지난 열여섯 번의 삶에서 단 한 번도 내 편이 되어 준 적 없는 오라비와 새언니. 편이 되어 주기는커녕 뻔뻔한 얼굴로 나를 이용하려 들었고, 이용 가치가 없어지거나 자신들에게 조금이라도 손해를 끼칠 것 같으면 살벌하게 잘라 냈다. 고귀한 신분이면 뭐 하나, 천성이 미천한데. 그런 루이에게 나는 결코 앰브로시아면 안 됐다. 무조건 카를슈테인이어야 했다.

1654866320782.jpg“후작 각하, 소식이 늦으십니다. 나는 이제 카를슈테인이 아니고 앰브로시아인데요.”

나는 일부러 그 점을 건드렸다. 역시 루이는 즉각 입에 거품을 물고 사납게 짖어 대기 시작했다.

16548663207825.jpg“어리석은 것. 고위 귀족의 결혼과 이혼이 그리 만만한 일인 줄 알아? 그 정도 일로 감히 이혼을 입에 올리다니. 멍청한 건지, 주제를 모르는 건지.”

이래서 진과 함께 여기 오기 싫었다. 루이가 지껄이는 말이야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진에게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16548663207825.jpg“공작의 배포에 나도 놀랐다. 그 점잖은 사람을 여기까지 오게 만들다니. 받아 줄 때 어서 제도로 돌아가.”

1654866320782.jpg“제도엔 돌아갈 곳이 없어요. 토버마리가 이제 내 집이죠. 잘 모르는 것 같아 설명하자면, 난 이혼했어요. 공작도 동의했고요. 더 이상 카를슈테인 공작부인이 아닙니다.”

내가 의외로 차분하게 입장을 표명하자 루이는 지난 생에 늘 그랬듯 교묘하게 나를 쥐고 흔들려 했다.

16548663207825.jpg“미천한 정부 하나 어쩌지 못하고 제가 가진 걸 몽땅 쥐여 주는 꼴이라니. 가문에 먹칠을 해도 유분수지. 네가 그렇게 생각이 짧고 뻣뻣하니 남편이 갑갑할 만도 해.”

1654866320782.jpg“그래서 자유롭게 놓아주려고요. 공작 자신이 바랐다는 건 얘기하지 않던가요? 자기가 싸지른 똥은 얘기 안 해요?”

16548663207825.jpg“허, 방자한 입 다물지 못해? 카를슈테인 공작부인 자리를 원하는 여자는 줄을 섰어. 공작 정도면 첩실을 둔대도 전혀 흠이 아니지. 그동안 분에 넘치게 대접해 준 은혜도 모르고 공작의 체면을 구겨?”

1654866320782.jpg“그 말 그대로 새언니에게 돌려줘도 될까요? 남의 결혼생활에는 그만 신경 끄시고요.”

빈정거리기 무섭게 어디선가 엿듣고 있었을 새언니 타마린드가 등장했다.

16548663207825.jpg“그래요, 후작 각하. 이런 이야기는 우리 부인들끼리 나누게 두세요. 남자들의 표현이란 세심함이 떨어지지요. 오랜만이에요, 로제트.”

타마린드가 마음에도 없는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16548663207825.jpg“로제트의 마음은 내가 잘 알지요. 하지만 우린 평민 아낙이 아니잖아요. 그들이 꿈에도 누리지 못할 화려하고 고귀한 삶을 얻은 대신 감수해야 할 것들이 있는 거예요.”

1654866320782.jpg“네, 나도 모든 것을 기쁘게 감수하던 때가 있었죠. 내가 바랐던 건 화려하고 고귀한 삶은 아니었지만. 무엇을 바랐든, 이제는 필요 없어요. 그러니 참을 필요도 없죠.”

나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하고 루이를 노려보았다. 타마린드가 마치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목소리를 낮춰 내게 속삭였다.

16548663207825.jpg“로제트, 영리해져야 해요. 우리 레이디들은 자기 몫을 스스로 챙겨야 한답니다. 한때의 감정으로 놓쳐 버리기에 카를슈테인 공작은 너무나 아까운 대어잖아요.”

나도 타마린드의 귓가에 속삭였다.

1654866320782.jpg“그럼, 언니가 가져요. 솔직히 루이보다 프러너스가 낫긴 하죠. 언닌 여전히 젊고 아름답고 또 똑똑하죠. 난 왜 언니가 루이 같은 남자의 아내로 만족하는지 모르겠어요.”

내 말에 타마린드의 얼굴이 붉어졌다. 물론 그녀를 모욕하기 위해 한 말이지만, 욕심 많은 타마린드는 정말로 심각하게 고민하느라 밤을 지새울 가능성이 높았다. 나와 타마린드가 비밀 얘기를 주고받는 동안 진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쳐다보던 루이가 결국 입을 놀렸다.

16548663207825.jpg“소문이 좋지 못한 자와 어울리니 네 행실이 저급해졌구나. 정숙하지 못하게.”

불똥이 진에게 튀었다. 비겁한 루이가 저렇게 나온다는 건 진에 대한 계산을 마쳤다는 뜻.

1654866320782.jpg“고급하고 고상한 남편이 정부와 놀아나는데 저만 지나치게 정숙하면 그것도 아내 된 도리가 아닌 듯해서요.”

지금 누구 앞에서 정숙을 논하는 건지. 내가 제 뜻대로 고분고분 움직이지 않자, 조급해진 루이는 무리수를 두기 시작했다.

16548663207825.jpg“더는 두고 볼 수 없겠어. 점잖은 공작이 자신의 손을 더럽힐 리 만무하니 내가 대신 매질이라도 해서 가주의 권위와 예법을 가르쳐야겠다. 우리 가문이 더 우스워지기 전에.”

나 참, 가문이 우스워지기 전에 네가 먼저 우스워지려고? 매질? 겨우 저보다 약한 상대에게나 주먹을 들어 보이는 야비한 겁쟁이 주제에. 루이 너나 나한테 처맞지 않도록 조심해라. 지난 삶과 다르게 난 이제 따귀도 때려 본 여자야. 대꾸할 가치도 없다고 여긴 내가 쓴웃음을 짓고 서 있자, 지금껏 잠자코 있던 진이 불쑥 물었다.

16548663231833.jpg“후작, 방금 굉장히 위험한 발언을 한 것 같은데? 매질이니 권위를 가르친다느니 하는 건 재미없는 농담이었다 생각하면 되나?”

저급하다 비꼰 상대에게 언사를 지적받자 루이는 대놓고 뒤틀린 심사를 진에게 쏟아 내기 시작했다.

16548663207825.jpg“남의 가문 문제에 관여할 자격을 드린 기억이 없는데. 애초에 당신이 여기 있는 게 우습지 않나? 멋모르는 귀부인들을 후리고 다닌다더니.”

어디서 뭐가 짖나, 진은 지루한 얼굴이었다.

16548663207825.jpg“설마 순진한 로제트를 꾀어낸 건가. 저 애가 뭘 믿고 저리 방자한가 했더니.”

16548663231833.jpg“나에 대해 잘 아는 모양인데, 그럼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알겠네. 나야 돈 받고 따라왔지. 의뢰인의 안위를 지키는 게 내 일이라서 말이야.”

16548663207825.jpg“로제트에게서 돈 냄새를 맡았나 보군. 하지만 당신 마음대로 안 될걸?”

16548663231833.jpg“어쩌려고? 레이디 앰브로시아보다 더 높은 금액을 제시하려고? 참고로 날 움직이려면 꽤 통 크게 써야 할 거야.”

16548663207825.jpg“저속해서 말을 섞을 수가 없군.”

16548663231833.jpg“그래, 나도 말보다는 주먹이 좋아. 아까 매질 운운한 것처럼 나한테도 그 잘난 힘자랑 좀 해 봐.”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고 있을 때였다. 이 모든 소란을 잠재울 이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언제나처럼 서늘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계단 위에 서서 우리의 소동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16548663253592.jpg“로제트, 나와 이야기하지.”

점잖은 중저음이 로비에 낮게 울려 퍼졌다. 한때는 프러너스의 저런 모습에 설렜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진도 당연하다는 듯 나를 따라왔다. 그런 우리를 담담한 얼굴로 바라보며 별말이 없던 공작은 방문 앞에 이르러서 보는 눈이 줄어든 걸 확인한 후에야 미간을 좁히며 진에게 말했다.

16548663253592.jpg“그때는 내 의뢰를 거절하더니, 이제 내 아내에게 관심이라도 생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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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래저래 황당한 발언이었다. 게다가 내 아내라니.

1654866320782.jpg“진은 내 호위 자격으로 온 거예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 내가 나섰다.

16548663253592.jpg“그렇다면 더 이상 수고할 필요는 없겠군. 남편보다 든든한 호위는 없을 테니.”

멀쩡한 얼굴로 자꾸 이상한 말을 하는 게, 간단치 않은 충돌이 예상됐다. 우리의 이혼, 아직 정리되지 않았나? 프러너스 당신은 제국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고, 하루라도 일찍 아젤리아를 공작저로 데려오기 위해 안달을 했잖아?

1654866320782.jpg“프러너스, 먼저 들어가 있겠어요? 진에게 할 말이 있어요.”

이 말만으로 프러너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가 몸을 돌려 방으로 사라지자 나는 진에게 말했다.

1654866320782.jpg“여기까지 함께 와 줘서 고마워요. 괜히 불쾌한 말 듣게 해서 미안하고요.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진이 나를 멀거니 쳐다보다 말했다.

16548663231833.jpg“그런 귀여운 앙탈은 불쾌한 말 축에도 못 들어. 그보다 레이디 앰브로시아, 한 가지만 물어보지.”

진이 고개를 기울이며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

16548663231833.jpg“혹시 당신 오라비나 남편이 당신에게 손을 댄 적이 있나?”

갑작스런 질문에 어리둥절해졌다. 아, 아까 루이가 매질 어쩌고 한 말 때문이구나.

1654866320782.jpg“아니에요. 그런 적 없어요.”

루이 그 인간은 어쩌자고 그런 말을 지껄여서는. 내게 매질보다 더한 짓도 많이 했지만, 일단 직접 손을 댄 적은 지금까지 없었다.

16548663231833.jpg“정말?”

1654866320782.jpg“둘 다 그럴 사람들은 아니에요. 하나는 비겁하고 하나는 가식적이라 혹여 발목 잡힐 빌미는 만들지 않죠. 그리고 나도 가만있을 사람은 아니고요.”

내가 오른손을 활짝 펼쳐 보이자 진이 한쪽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16548663231833.jpg“웬만하면 저들에겐 쓰지 말도록. 나처럼 뒷골목에서 막 구르던 치도 지릴 판인데, 고귀하신 분들에겐 감당하기 힘든 고난이지.”

하여간 표현하고는. 익숙한 그의 이죽거림에 웃음이 쿡 나왔다.

16548663231833.jpg“당신한테 손을 댄 적은 정말로 없단 말이지?”

진이 내 눈을 깊숙이 들여다보며 다시 한번 물었다. 그 눈빛이 키스 연습할 때 보았던 것과 어딘지 닮아 있어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16548663231833.jpg“내가 워낙 본능에 충실하잖아. 힘이라곤 없는 사람들 앞에서 힘자랑하는 치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눈이 빡 돌아서 말이지.”

1654866320782.jpg“그랬군요. 하지만 난 힘이 아주 없지 않잖아요. 당신도 알겠지만.”

16548663231833.jpg“맞아, 그랬지.”

진이 마치 기특한 아이 보듯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1654866320782.jpg“카를슈테인 공작과 이혼하는 거, 생각보다 깔끔하게 끝나지 않겠어요. 나 잘할 수 있을까요?”

16548663231833.jpg“프러너스와 진심으로 이혼하고 싶어?”

1654866320782.jpg“네.”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열일곱 번의 삶을 통틀어 지금처럼 이혼이 간절한 적은 없었다.

16548663231833.jpg“그럼 잘할 수 있을 거야.”

진이 웬일로 이죽거리지 않으니 그것도 이상했다. 긴장한 얼굴로 문 앞에 서자 진이 덧붙였다.

16548663231833.jpg“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호위를 불러.”

그러면서 자기 귀를 톡톡 두드렸다. 내 편이 되어 주겠다는 말로 들려서 마음이 든든해졌다. 나는 진에게 싱긋 웃어 주고는 프러너스가 기다리는 방으로 들어갔다. 등 뒤로 두껍고 무거운 문이 탕 하고 닫혔다.

1654866320782.jpg“당신같이 바쁜 사람이 여기는 웬일이에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묻자 발걸음도 우아하게 다가온 프러너스가 내 얼굴을 한참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16548663253592.jpg“내가 경솔했어.”

첫마디부터 불길했다.

16548663253592.jpg“당신의 심정을 헤아렸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진심이 아니란 것쯤 알아챘을 텐데. 로제트 당신을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어.”

무슨 소리?

16548663253592.jpg“귀족의 결혼은 그렇게 간단히 깨뜨릴 수 있는 게 아닌데. 감정으로 결정할 문제는 더더욱 아니고. 내가 성급했어. 나답지 않게 말이야.”

1654866320782.jpg“…….”

이건 또 무슨 꿍꿍이지? 설마 지난 삶에 그랬던 것처럼 또 첩이 되라고 제안하려고? 그러기만 해 봐. 이번에야말로 그 잘난 입을 뭉개 놓을 테니. 이제 나도 좀 때려 본 여자야.

16548663253592.jpg“함께 공작저로 돌아가지.”

1654866320782.jpg“돌아갈 생각 없어요. 이제 그곳에 내 자리는 없으니까.”

16548663253592.jpg“공작부인 자리를 저리 방치해 둘 셈인가.”

1654866320782.jpg“아젤리아는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데도 프러너스는 별일 아니라는 듯 심상하게 말했다.

16548663253592.jpg“그건 당신이 신경 쓰이지 않도록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여하튼 우리는 공작저로 돌아가서 차근차근 대화를 나눠야 할 필요가 있어.”

처리……한다고? 아젤리아를?

1654866320782.jpg“의외네요. 당신이 나와 대화라니. 아젤리아와는 상의해 본 건가요?”

16548663253592.jpg“로제트, 지금 아젤리아가 중요한가. 물론 당신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래, 내가 실수했어.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우리 둘의 얘기야.”

프러너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나는 그 의미를 읽으려고 애썼다. 제대로 읽은 건지 모르겠지만, 이번 삶의 프러너스는 열일곱 번의 삶을 통틀어 최악이었다.

1654866320782.jpg“당신, 아젤리아에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말하고 보니 내가 하기에 그다지 적합한 말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입에서 나와 버렸고, 진심이었다. 가끔 피가 도는 인간이 맞나 싶게 냉정하고 금욕적이며 철두철미한 카를슈테인 공작. 아젤리아는 그런 그에게도 뜨거운 심장이 있다는 증거였다. 너무 완벽해서 숨이 막힐 것 같던 그 안의 파격이자 숨구멍이었다. 물론 그 증거가, 파격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에 좌절하고 분노해 미쳐 날뛰었지만. 이제 와 돌이켜 보니 그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첫사랑을 향한 무모하고 이기적인 순정이야말로 내가 그를 완전히 미워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랬는데. 그런 심장마저 없다면. 프러너스, 당신은 대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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