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걱정 많고 다정한 백작부인2022.03.14.
루이와 타마린드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곧장 진, 휴고와 함께 그리치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이혼 소송을 준비해야 하니까. 나는 처음 그리치로 온 날 묵었던 웰츠 호텔로 다시 갔다. 웰츠 백작가에서 운영하는 이 호텔에 투자를 조금 한 덕분에 객실과 식사, 각종 서비스를 언제든 원하는 대로 제공 받을 수 있었다. 즉 공짜로 숙식을 해결할 수 있단 얘기. 이곳의 주인인 웰츠 백작 부부와의 친분도 이용할 수 있다면 십분 이용할 참이었다. 백작인 윌로우 웰츠는 내 소꿉친구였고, 백작부인인 올랜도는 내 유일한 귀부인 친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천성이 다정하고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평소 살갑게 굴지도 않는 나를 변함없이 챙겨 주었을 만큼.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뻣뻣한 공작부인이었던 나는 가능한 한 이곳에 발을 들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과거의 인연은 모두 정리하고픈 마음이 컸다. 더구나 내가 이혼을 하고 프러너스와 척을 지게 되면 나와 거리를 두는 것이 그들에게도 나을 터였다. 나와 가깝다는 사실이 그들 부부의 사업이나 사교계 활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터이니. 하지만 지금은 한 푼이 급하다 보니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뻔뻔함과 생활력이 전에 없이 두터워졌다. 앞으로는 끌어 쓸 수 있는 건 전부 끌어다 쓰면서 야무지게 살아야지. 게다가 지난번에 묵어 보니 호텔의 바다 전망이 매우 아름다웠고 오리 콩피 맛도 훌륭했다. 수상한 분위기의 지배인이 곧장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특별히 신경 써서 배정한 듯 호텔에서 전망이 가장 아름다운 방으로 안내된 나는 잠시 넋을 놓고 바다의 오묘한 푸른빛을 감상했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룸서비스인가? 나의 수락에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호텔 직원이 아니었다. 화사한 외출복을 차려입은 귀부인이었다.
“올랜도?”
“로제트!”
웰츠 백작부인이 반가운 얼굴로 나를 끌어안았다.
“올랜도, 여긴 웬일이에요? 그리치에 볼일이 있었어요?”
“볼일은 무슨요. 레이디를 만나러 왔죠.”
“제도에서 여기까지 일부러?”
“당연하죠. 게다가 우리 호텔에 계시다는데.”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요?”
몇 차례 황당한 일을 당하고 나니 절로 몸을 사리게 된다. 그러나 내 의심이 무색하게도 올랜도는 걱정과 원망이 뒤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꼭 저렇게 나를 보지 않으셨을까 싶은, 그런 눈이었다.
“레이디가 공작저를 나가신 걸 알고 제가 얼마나 걱정했게요. 그이와 함께 레이디의 행방을 수소문했죠. 어쩜 한마디 언질도 없이 그렇게 사라지세요?”
“아, 미안해요. 정신이 없어서 미처 인사도 못 했어요.”
우리가 밀린 인사를 나누는 사이, 직원들이 다과를 내왔다.
“차 마시며 천천히 얘기해요, 우리.”
올랜도는 다과가 차려진 창가 테이블로 내 손을 이끌었다. 우리는 허브티와 아기자기한 구움 과자를 앞에 두고 눈으로 미소를 나누었다. 뜻밖의 장소에서 오랜만에 만나니 어색하기도 했지만, 어느 때보다 그녀가 반갑기도 했다. 올랜도는 늘 그랬듯 다정한 목소리로 내 안부를 물었다.
“어때요? 공작저를 나온 기분이?”
“음, 나쁘지 않아요. 아니, 실은 아주 좋아요.”
“그래요, 때로 기분 전환도 필요한 법이죠.”
나는 허브티를 한 모금 마시며 생각했다. 기분 전환으로 끝낼 일이 아닌데. 하지만 지금 골치 아픈 일을 꺼내 일일이 설명하고 싶진 않아 가벼운 화제를 꺼냈다.
“호텔 전망이 무척 근사해요. 올랜도도 이곳에 자주 묵나요?”
“그럼요. 제도 전역에 있는 저희 호텔 중에서도 이곳을 가장 좋아해요. 가문의 본거지인 데다 실은 이곳에서 프러포즈 받았거든요.”
“어머나, 윌로우가 그렇게 로맨틱한 사람인지 몰랐네. 장소 선정이 기가 막힌데요?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하는 제안을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그런가요? 레이디도 그럴 것 같으세요?”
이 대목에서 내 생각이 뭐가 중요할까. 올랜도의 질문이 좀 뜬금없었지만, 나는 적당히 호응해 주기로 했다. 이번 생엔 맞장구치는 법도 배워야지. 당분간은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럼요, 저렇게 꿈같은 풍경이 눈앞에서 속삭이는 걸요. 참, 여기 오리 콩피도 수준급이었어요. 룸 컨디션이나 서비스도 최상이고요.”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올랜도 얼굴이 좀 수척해진 것 같아요. 내가 제대로 본 건가?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꽤 신경 쓴 차림새에 비해 솔직히 얼굴이 조금 상해 보였다. 내 질문에 당황했는지, 올랜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내가 또 이상한 말을 했나? 진이 말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는데.
“혹시 내가 말실수를 했나요?”
조심스레 묻자 올랜도가 금세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아니요, 레이디가 제 안부를 묻는 게 조금 낯설어 잠시 당황했나 봐요.”
돌이켜보니 안부를 묻는 건 언제나 올랜도의 몫이었다. 나야 올랜도의 안부에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었으니 당연히 묻지 않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안부를 물은 적이 한 번도 없었나? 미안하고 씁쓸한 마음으로 올랜도를 바라보았다.
“요즘 백작은 어떻게 지내요? 잘 지내겠죠? 사업 수완이 뛰어난 만큼 늘 바쁘잖아요.”
“최근에 만난 적 없으신가요?”
“언제 마지막으로 봤더라? 반년 전? 기억도 가물가물해요.”
“그러시군요. 그이는 잘 지내요. 여전히 사업으로 바쁘고요.”
“요즘은 어떤 사업이 잘돼요?”
내 질문에 올랜도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왜요?”
“레이디가 달라지신 거 같아서요.”
“그래요?”
“사업을 다 궁금해하시고.”
“아…….”
하긴 예전의 나라면 그런 걸 궁금해했을 리가 없지. 이제 홀로서기를 하려니 아무래도 돈과 관련된 일들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속이 꽉 찬 정보를 많이 모아야 진에게도 아부할 수 있을 테고. 웰츠 백작가는 카를슈테인 공작가에 비하면 가문의 위세나 재력이 미미했는데도, 현 백작인 윌로우 웰츠가 사업 수완이 좋아 이제는 무시 못 할 부를 축적했다. 무엇보다 새로운 유행을 읽는 데 매우 발 빠르고 감각이 좋다나? 사업에 있어서는 프러너스조차 경쟁자로 의식할 정도였다. 울보 윌로우에게 그런 대단한 능력이 있었다니. 걸핏하면 루이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이고 나와 미고 사이에 끼어 놀고 싶어 했는데……. 어렸을 때 투덕거리며 함께 놀던 소꿉친구의 성장이 눈부셨다.
“사실 레이디는 사업뿐 아니라 궁금한 게 별로 없는 분이었잖아요.”
내가 좀 그랬지. 프러너스에 관한 것 말고는 무엇에도 관심이 없었으니.
“제가 먼저 이런저런 얘기를 꺼내도 흥미를 보인 적이 거의 없으시잖아요. 그런데 오늘은 먼저 제 안부도 묻고 다른 일에도 호기심을 표하셔서 솔직히 놀라던 차예요.”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나, 돌아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관심의 초점이 온통 프러너스와 나 자신에게 맞춰져 있었으니, 주변 사람들에게 참으로 차갑고 무심하게 대했던 것 같다. 늘 내게 차갑고 무관심한 프러너스를 욕했는데,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와 똑같이 하고 있었다니.
“나도 이제 달라져야죠. 환경도 생활도 바뀌었으니 그대로일 순 없죠.”
“꼭 그러셔야 할까요? 그러니까 제 말은…… 공작부인으로 부족함 없이 지내던 분이 굳이 그런 고생을 감수하실 필요가…….”
“걱정은 고마워요. 하지만 공작부인으로 살 때도 부족한 점은 있었어요. 도리어 지금이 더 충만한 기분이에요.”
“…….”
“언제 기회가 되면 백작에게도 조언을 구해야겠어요. 나도 이제 사업에 관심이 많아졌거든요.”
탐탁지 않은 눈치이던 올랜도가 금세 표정을 밝게 만들었다. 올랜도가 원래 저렇게 표정 변화가 급격한 사람이었던가.
“네, 기왕 외출하신 김에 저희 호텔에서 며칠 푹 쉬세요.”
며칠 쉬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닌데, 어째서 자꾸만…….
“여기서 신선한 해산물 요리도 많이 드시고 관광지도 둘러보시며 좋은 기운을 많이 받으세요.”
“고마워요.”
올랜도가 따스한 미소를 띤 채 내 얼굴을 살피다 슬며시 물었다.
“충분히 쉬신 후에, 공작저로 돌아가실 거죠?”
으응?
“기분 전환도 필요하시겠지만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아요. 더욱이 지금 같은 때는.”
아무래도 올랜도는 내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 미안해요. 내 설명이 부족했나 봐요. 공작과는 깨끗하게 이혼할 거예요. 여기 있는 것도 이혼 수속을 하기 위해서예요.”
올랜도의 표정이 굳어졌다.
“왜요?”
“네?”
“왜 이혼하시려는 거예요?”
“그거야…… 올랜도도 잘 알잖아요.”
“그동안 잘 버티셨잖아요. 그 여자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하시겠다고요?”
“포기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살아 보려는 거예요. 나 잘 버티지 못했어요. 불행했죠. 이제는 행복해지려고요.”
“레이디, 감정에 휘둘리시면 안 돼요. 그 여자에 대한 공작 전하의 마음이 얼마나 갈 거라고 생각하세요?”
올랜도는 전부터 나만큼이나 아젤리아를 싫어했다.
“잠깐 신선하고 설렜겠죠. 옛 추억도 떠오르고요. 하지만 첫사랑이 왜 애틋한지 아세요?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현실이 되는 순간 급격히 퇴색하게 마련이죠.”
올랜도의 말에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 말대로 아젤리아를 향한 프러너스의 마음이 벌써 퇴색하기 시작한 것 같았으니까.
“그래요, 처음엔 아젤리아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죠. 부정하진 않을게요. 하지만 더 깊숙이는 나와 공작의 문제였어요. 우리 두 사람의 관계는 그녀가 아니라도 애초부터 병들어 있었어요.”
내 말에 올랜도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우리 귀족들의 결혼에는 더 큰 목표가 있잖아요. 남편이나 아내의 애정보다 더 크고 중요한. 공작부인 자리는 감정 따위와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감정이 아니라 인생은 어때요? 행복은요? 내 인생 전체를 포기해야 할 만큼 공작부인 자리가 대단하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혹시 내 말을 오해할까 봐 나는 이렇게 덧붙였다.
“물론 백작처럼 멋진 남편이 있다면 나도 백작부인 자리를 절대로 안 내줬겠지만요.”
웃자고 한 소리인데 올랜도는 여느 때와 다르게 전혀 웃어 주지 않았다. 대신 따지듯이 물었다.
“공작 전하가 이혼을 수락하시던가요?”
“그게…… 실은 무슨 변덕인지 이혼을 안 하겠다고 나와서 골치예요. 당장 하길 바랄 땐 언제고. 분명 다 끝난 얘기였는데 말이죠.”
“그것 보세요. 남자의 지조란 그처럼 믿을 게 못 된답니다. 못 믿을 것에 흔들리면 안 되죠. 변치 않을 것을 잡으세요.”
평소 올랜도가 나를 챙기고 걱정해 준 것은 알지만, 이 정도면 좀 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지지부진한 대화를 끝내기 위해 일부러 자극적인 얘길 꺼냈다.
“어쨌든 아젤리아가 이미 공작저로 거처를 옮겼을 텐데, 거기서 함께 지내는 건 좀 그렇잖아요. 그녀가 공작의 아이를 임신한 건 알죠?”
그러자 올랜도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은 소문을 들었는데, 아젤리아의 거처를 옮기는 일이 미뤄졌대요. 무슨 의미겠어요?”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공작 전하가 아이만 거둘 거라는 얘기도 이미 돌고 있어요.”
“말도 안 돼…….”
프러너스 이 인간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그러니까 레이디, 어서 공작저로 돌아가세요. 이혼 얘기는 그만 거두시고요. 공작 전하께서 저렇게 애쓰시는데.”
애쓰다니, 올랜도의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그런 무책임하고 의리도 없는 인간에게 돌아가라는 말을 뭐 이렇게 열심히 하는 거야? 이혼 방지 부인회 회장이라도 되셨나?
“입장을 분명히 하자면, 공작과 아젤리아의 사이가 어떻게 되든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이혼에 관한 결정도 마찬가지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공작 전하가 아젤리아를 버리고 레이디께 돌아온다 해도 기어코 이혼을 하겠다는 말씀이세요?”
“프러너스에게 선택권을 주고 싶진 않네요. 게다가 그 사람은 내게 마음이 있어서 이혼을 거부하는 게 아니에요.”
“설령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해도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신 거겠죠. 솔직히 공작 전하의 평소 모습을 생각하면 아젤리아와 관련해 보이신 행보들이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그렇긴 했다. 그로선 의외의 모습이었고, 그래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실은 약간 오해가 생겨서, 프러너스는 내게 남자가 생긴 줄 알아요.”
오해라기보다 내가 적극적으로 조장한 면이 크지만, 먼저 어이없는 의심을 품은 건 그였다. 올랜도의 얼굴색이 하얘졌다. 정숙한 레이디인 그녀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난잡한 전개겠지?
“남자라니, 누구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레이디 올랜도, 일단 숨부터 쉬어요. 그렇게 숨도 못 쉴 만큼 놀랄 일은 아니잖아요.
“누구긴요. 오해라니까요. 세상에 없는 사람이에요.”
그녀의 순진한 반응에 내가 손사래를 치며 대꾸했다.
“그러니까 공작 전하도 이혼을 원치 않으시는데 레이디는 꼭 이혼을 밀어붙이겠다는 말씀인가요?”
“네, 그래요.”
올랜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참,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도 마지막까지 이렇게 말했다.
“이혼에 대해 다시 생각해 주시면 좋겠어요. 귀족의 결혼이란 어설픈 연정보다 신성하고 무거운 가치를 지니니까요.”
“설마 그렇게 거창할까요. 내 결혼이나 이혼이 다른 사람에게 무슨 가치나 의미가 있겠어요.”
내가 가볍게 건넨 말에 올랜도는 진심으로 화가 난 듯했다.
“아닙니다. 거기에 기대고 있는 것이 의외로 많답니다. 레이디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정하고 친절하고 상냥한 올랜도가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초조한 기색인 데다 신경질적이기까지. 세상에, 내가 아는 그 올랜도가? 그 모습이 어딘지 절박해 보이기까지 해, 늘 그녀의 걱정을 받던 내가 처음으로 그녀를 걱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