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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길고 더러운 싸움이 될 겁니다 (34/110)

#34화. 길고 더러운 싸움이 될 겁니다2022.03.28.

처음 플록스를 만난 날, 그때도 아래층 카페 겸 바에서 둘이 비밀 모의를 했지. 일명 청개구리 유인 작전. 그때 일을 떠올린 나는 카페에서 함께 식사라도 하자는 플록스의 제안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처럼 칸막이와 주렴이 있어 다른 사람들 눈에서 다소 자유로운 자리에 앉았다. 내 이혼 소송을 승소로 이끌 묘안이라도 내려는 걸까. 이번엔 프러너스의 얼을 쑥 빼놓을?

16548664680666.jpg“레이디, 듣기 좋은 말씀만 드려서는 안 될 것 같아 따로 뵙기를 청했습니다.”

하지만 플록스는 웃음기 하나 없이 서두를 뗐다.

16548664680673.jpg“그래야겠지요. 내 이혼인데, 정확한 사실을 알고 싶어요.”

16548664680666.jpg“그럼 여과 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막상 저렇게 나오니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조금 긴장됐다.

16548664680666.jpg“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첫 번째 소송에선 우리가 질 겁니다.”

16548664680673.jpg“네?”

16548664680666.jpg“솔직히 두 번째 소송에서도 승소를 장담하기 힘듭니다. 아마도 장기전이 될 겁니다.”

예상하지 못한 따귀처럼 갑작스럽고 거친 선고였다.

16548664680673.jpg“난…… 이해가 잘 안 가네요. 방금 전까지 다들 자신 있는 분위기였고, 아니 그보다 공작이 불륜을 저지른 게 명명백백한 사실인데 왜 내가 져요?”

16548664680666.jpg“사과부터 드리자면, 저희가 자신만만하게 군 건 일종의 직업적인 습관입니다. 늘 이기는 것을 상정하고 일을 시작하죠. 어쩌면 당연한 것이, 누가 지려고 계약을 하겠습니까.”

그렇지, 이 사람들 만만치 않은 사기꾼들이었지. 처음부터 스스로 밝혔듯이.

16548664680666.jpg“공작의 외도에 관해 다시 한번 짚자면, 도의적으로는 지탄의 대상이 될지언정 제국법 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16548664680673.jpg“그렇다고 했죠. 나도 다시 한번 물을게요. 어떻게 그래요?”

16548664680666.jpg“제국의 법은 힘 있는 자들의 것이니까요. 사실 저희가 가장 곤란하게 여기는 부분은 레이디와 같은 사례가 전무하다는 겁니다.”

16548664680673.jpg“무슨 뜻이에요? 귀부인이 이혼 소송을 벌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말인가요?”

16548664680666.jpg“귀부인이 소송을 벌인 적은 드물게나마 있습니다만, 남편 쪽에서 이혼을 거부하는데 아내 쪽에서 이혼을 원해 법정까지 오는 사례가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저희가 아는 한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사달은 대부분 남편 쪽에서 이혼을 원하기에 나는 것이니까. 지난 생에 프러너스가 그랬듯이. 나부터도 프러너스가 이혼을 안 하겠다고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니.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건 이번 삶의 계획표에는 전혀 없던 일이다.

16548664680666.jpg“사례가 없기에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하기 어렵고, 그런 만큼 기민하게, 혹은 미리 대처하지 못한다는 게 곤란한 점입니다.”

16548664680673.jpg“그래서 아젤리아에게 접근하자는 방안을 낸 거군요. 법적으로는 이길 가능성이 없으니. 소송은 사실상 포기한 건가요?”

16548664680666.jpg“그럴 리가요. 사례가 없다고 불가능한 건 아니지요. 다만 시간이 꽤 걸릴 겁니다. 소송이 길어질수록 레이디는 힘들어지실 테고요.”

16548664680673.jpg“긴 싸움이 될 거란 얘기네요.”

16548664680666.jpg“각오 단단히 하셔야 할 겁니다.”

16548664680673.jpg“정말! 불륜을 저지른 남편과 이혼하는 게 이렇게 어려울 일이에요? 대체 어디까지…… 어디까지 내 진심을 증명해야 하는 건데요?”

아니, 진심 따위 공감받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그저 이혼하고, 그들을 위한 이야기에서 빠져나와 조용히 삶을 마감하고 싶을 뿐인데. 플록스가 말없이 내 앞으로 찻잔을 밀어 주었다. 찻잔 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한동안 바라보다 물었다.

16548664680673.jpg“내가 어떻게 하면 돼요?”

16548664680666.jpg“길게 보고 견뎌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법적으로는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16548664680673.jpg“고마운 충고이긴 한데요, 현실적인 문제가 좀. 시간이나 재력에는 한계가 있잖아요. 언제까지 물 쓰듯 쓸 수는 없는 거라서…….”

당장 숙소 해결도 막막한 형편인데.

16548664680666.jpg“그 부분은 크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위자료를 청구할 거니까요. 비용은 거기서 충당하면 됩니다. 그리고 저희도 레이디께 바라는 바가 있어서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16548664680673.jpg“바라는 바요?”

16548664680666.jpg“그건, 차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장사꾼이란 걸 잊지 마십시오. 결코 손해 보는 짓은 하지 않으니 괜한 부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대체 뭘까. 굳이 이런 충고를 해 주는 것 자체가 특별대우 같기는 한데.

16548664680673.jpg“어쨌든 제국법에 정의를 바라기는 어렵다는 말이군요. 그럼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 들어 볼 수 있을까요?”

16548664680666.jpg“시간을 끌수록 힘들어지는 건 레이디만이 아닙니다. 공작도 마찬가지겠지요. 그 틈을 노릴 겁니다. 1차, 2차, 3차 소송을 거듭할수록 불리한 요소들이 분명해질 테고 우린 그걸 제거해 나갈 겁니다.”

듣는 것만으로도 벌써부터 진이 빠지는 듯했다.

16548664680673.jpg“견디는 거 말고 다른 건요? 법이 내게 호의적이지 않다면 다른 쪽으로 만회할 부분이 없나요?”

16548664680666.jpg“불쾌하실 수 있는 얘깁니다만, 평판을 높이실수록 유리합니다. 일종의 여론전이랄까요.”

평판이라. 자신 없는 부분이었다. 지금껏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관심도 없이 살아온 만큼,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평가하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다.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수 있는 올랜도와 윌로우에 대해서조차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오지 않았는가. 두 사람의 일로 인간관계에 대해 가뜩이나 회의감이 생긴 나는 평판에 대한 주문까지 받자 더욱 의기소침해지고 말았다. 내 평판은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무신경한 사람을 좋아하는 이는 별로 없으리라.

16548664680666.jpg“눈치채신 대로 제국의 법은 힘 있는 자들의 유희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귀족의 기강이나 풍속에 관한 일엔 법보다 자문단의 입김이 더 세게 작용하지요.”

16548664680673.jpg“자문단?”

16548664680666.jpg“세력 놀음이나 편 가르기를 좋아하는 귀족 자문단들이 주렁주렁 있습니다.”

16548664680673.jpg“그 사람들도 어차피 카를슈테인 공작의 편이겠죠.”

16548664680666.jpg“사람의 욕망은 종잡을 수 없는 것이기에 무엇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재미있는 것이지요. 덕분에 저희 같은 협잡꾼들이 기회를 잡을 수도 있고요.”

16548664680673.jpg“그래도 공작의 평판이 훌륭하다는 건 확고한 사실 아닌가요?”

16548664680666.jpg“모두가 공작을 좋아해서 그의 편에 선 거라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당장은 그편이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지요. 그중에는 공작을 물 먹이고 싶어 기회를 엿보는 자들도 분명 있습니다.”

믿기 힘든 얘기였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럴싸한 말이었다. 귀족들은 근본적으로 누군가의 위에 군림해야 직성이 풀리는 족속들이니. 당장은 자신보다 강한 이 앞에서 몸을 숙이는 시늉을 하지만, 날카로운 발톱을 숨기고 있는 것이 그들이었다. 강자가 상처를 입거나 덫에 걸려 약해질 순간을 노리고서.

16548664680673.jpg“사교계 거물들과 친분이라도 쌓으라는 말인가요? 내키지 않는 일이네요. 그러기엔 너무 늦은 것 같기도 하고.”

빤한 사교계 인사들과 마음에도 없는 미소를 주고받는 데 내 마지막 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어설픈 공세에 쉽게 움직일 사람들도 아니고.

16548664680666.jpg“사교계가 싫으시다면 영지민이나 사용인들 사이에서 신망을 얻는다거나 남들이 흠모할 만한 재능으로 명성을 떨치는 것도 좋습니다.”

16548664680673.jpg“그게 소송과 무슨 상관이…….”

16548664680666.jpg“자문단의 능구렁이들이 레이디라는 게임 말에 한 번쯤 모험이라도 걸어 볼 수 있는 존재감 정도는 만들어 놓으시라는 소립니다. 하다못해 악명이라도…….”

나는 약간 충격받은 얼굴로 플록스를 쳐다보았다.

16548664680666.jpg“주제넘은 말이었다면 사과드립니다.”

16548664680673.jpg“이미 내 평판을 조사해 보고 하는 말이군요.”

플록스는 부인하지 않았다. 평판 조사를 해 보니 눈 씻고 봐도 쓸모 있는 구석이라곤 없었다는 얘기. 지금껏 공작을 돋보이게 할 액세서리를 자처하며 살아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패악깨나 부리며 연일 가십지 1면을 장식했던 지난 생이라면 차라리 소송에 유리했을까. 모난 돌같이 불편한 존재감을 떨치던 때는 이혼하지 않으려고 죽어라 버텼는데. 이혼하고 조용히 살기로 마음먹었더니 이제는 존재감이 없어 불리하다니. 삶이란 참 얄궂기도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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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8664680673.jpg“플록스, 지금 당장 출발할 야간 마차를 구할 수 있을까요? 토버마리로 돌아가려고요.”

16548664680666.jpg“예? 지금 말씀입니까?”

16548664680673.jpg“어차피 금방 결판 날 일이 아니라면서요. 토버마리에서 지내며 소식 기다릴게요.”

16548664680666.jpg“오늘은 호텔에서 묵으시고 내일 일찍 출발하시지요.”

16548664680673.jpg“변덕스러워 보이겠지만, 당장 떠나고 싶어요.”

나는 한껏 지친 표정을 지어 보였다.

16548664680666.jpg“보스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그냥 가실 겁니까?”

16548664680673.jpg“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아니,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는 것이 진에게도 좋을 거예요.”

플록스는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이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16548664680666.jpg“믿을 만한 종일 마차를 불러 드리겠습니다. 호위도 몇 명 붙여 드리고요.”

16548664680673.jpg“고마워요.”

16548664680666.jpg“보스께는 정말로 남기실 말씀이 없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진의 신변이 걱정되긴 했다. 원래는 내가 살린 목숨이니 안전을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는 곁에서 참견하고 돌보면서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임을 지기는커녕 도리어 내가 짐이 되는 상황의 연속이라 이쯤에서 떨어져 나가 주는 것이 도리인 듯싶었다.

16548664680673.jpg“플록스, 내가 전에 진의 신변에 대해 한 말 기억하죠? 그때 한고비 넘기긴 했지만 여전히 기운이 불안정해요. 경이 진의 안위를 각별히 챙기고 신경 써 주세요.”

16548664680666.jpg“네, 약속하겠습니다. 레이디께서 직접 인사 겸 메시지를 남기시는 게 어떻습니까?”

16548664680673.jpg“진에게 남길 메시지라고 해 봐야,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 외엔 딱히 할 말이…… 아!”

오늘 진에게 전하려 했던 게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나는, 손가방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플록스에게 건넸다. 봉투를 받아 든 플록스는 기쁜 듯 눈을 반짝였다.

16548664680666.jpg“역시 준비하셨군요, 레이디. 봉투가 꽤 두툼합니다.”

16548664680673.jpg“네, 부끄럽지만 기왕 준비한 거니까 진에게 전해 주면 고맙겠어요.”

16548664680666.jpg“걱정 마십시오. 제 목숨을 걸고 반드시 전해 드리겠습니다. 소송과 관련된 일들은 서신으로 기별 드리지요.”

  * * * 그렇게 플록스가 마련해 준 토버마리행 야간 마차를 탄 나는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내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모든 것이, 그중 무엇 하나 시원스레 뒤집을 수 없는 나 자신이 답답하게 느껴져 떠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어둠에 잠긴 시골길은 딱히 보이는 풍경도 없었건만, 나는 하염없이 까만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심한 인간관계, 형편없는 처신, 보잘것없는 평판. 그동안 한참 잘못 살아온 자신을 질타하며 반성하고 있었느냐고? 나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분통을 터뜨리며 마차 좌석을 주먹으로 꽝 내리쳤다. 반성, 안 했다. 반성은커녕 세상을 향해 잔뜩 골이 나 있었다. 어리석고 멍청하고 친구도 없고 성질 더럽고 잘난 거 없는 사람은 사람도 아니니? 그런 사람은 이혼도 못 해? 남한테 피해 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시골에 처박혀 조용히 살겠다는 거잖아. 그런 일에 무슨 자격이 필요하냐고! 뭐, 사교계 자문단? 개나 물어 가라지! 남편이 첫사랑과 바람이 나서 비참한 심정으로 이혼하겠다는 여자한테 훌륭한 평판과 현명한 처신, 매력적인 재능을 바라다니. 다들 정신 나간 변태들이 아닐 수 없다. 돌아보면 지난 생에도 늘 그랬다. 불륜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내게 모질게 군 것은 프러너스인데도 다들 내게만 인격자로서의 면모를 강요하고, 내 행동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며 비난하기 바빴다. 묻고 싶었다. 당신들은 왜 그토록 잔인한 건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이혼 안 해 줄 거라고? 평생 이혼 소송이나 하면서 반 홀아비로 살든지.

16548664680673.jpg‘내키는 대로 살 거야. 다들 실컷 눈살을 찌푸리라지.’

나는 심술궂게 웃으며 결의를 다졌다. 이 와중에 토버마리로 향하는 야간 마차를 탄 건 참 잘한 선택이었다며 스스로 흡족해했다. 숙박비와 마차비 양쪽으로 돈이 들 뻔한 걸 마차비 한 방으로 해결했으니까. 어차피 장기전이라는데 괜히 타지에서 숙박비를 낭비할 필요 없지. 이렇듯 나는 내 멋대로 살겠다고 호기를 부리면서도, 속으로는 작아진 손으로 착실하게 돈 계산을 하고 있었다. 밤새 달린 마차는 아침 겸 점심 식사를 위해 잠시 식당에 들른 후 다시 저녁까지 달려 토버마리의 컨트리 하우스에 도착했다. 플록스가 보내겠다던 전보가 무사히 도착했는지, 집사 프랭클린이 기다렸다는 듯 나를 맞이했다. 요리사 한스와 하녀장 마델이 귀가를 환영하는 식사를 풍성하게 준비해 두었음은 물론이다. 세 사람은 나를 반가워하면서도 아쉬운 눈으로 두리번거렸다.

16548664825099.jpg“저, 아가씨, 혼자 오셨어요?”

16548664680673.jpg“응.”

내가 짧고도 단호하게 대답하자 사용인들은 더 이상 묻지 않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이들이 진의 흔적을 찾고 있는 것을. 한동안 붙어 다니며 우여곡절을 함께 겪어서인지, 나 역시 생각보다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기는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남의 삶에 걸리적거릴 순 없지. 아마 지금쯤 진은 성가신 여자가 눈앞에서 사라져 속 시원해하고 있을 것이다. 오늘 밤은 암살 위협도, 뻔뻔한 의뢰인도 잠시 잊고 부디 단잠에 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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