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독버섯의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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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독버섯의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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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독버섯의 기분
2022.04.01.
토버마리의 내 보금자리, 플럼 하우스로 돌아온 다음 날부터 나는 곧장 버섯 관찰에 착수했다.
이혼 소송이 장기전이 될 거라니,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원래 내가 이곳에서 하려던 일들을 실행에 옮기기로 한 것이다.
첫날과 둘째 날은 저택의 정원에서 구석진 음지를 찾아다니며 소소하게 관찰했고, 셋째 날은 비가 와서 하루 쉬었다.
그다음 날부터는 저택을 벗어나 가까운 숲으로 진출했다. 오솔길을 따라 30여 분 걸으면 나오는 ‘에디의 숲’은 다양한 식물들이 얽히고설키며 자라는 꽤 야성미 넘치는 곳이었다.
그 숲에 기기묘묘한 버섯들이 잔뜩 자라는 버섯 골짜기가 있다는 정보를 앤한테서 입수했다.
플럼 하우스에 딸린 경작지와 목장에서 일하는 농가가 열다섯 집쯤 됐는데, 앤은 그 농가 아이들 중 한 명이었다.
소유지도 둘러보고 소작인들과 인사도 할 겸 하루 날을 잡아 마을을 한 바퀴 돌았는데, 농가마다 아이들이 꽤 됐다.
아이들은 수줍어하면서도 눈을 반짝이며 나를 열심히 구경했는데, 그 눈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경계나 거부가 아닌, 호의와 환영의 눈빛이었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미고 생각도 나서 나는 일부러 아이들을 불러 모은 후 제안했다.
「나한테 희귀하거나 새롭거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알려 주는 사람에겐 1실버를 줄 거야. 물론 그만한 가치가 있을 때만. 그러니까 너희는 나한테 품이나 농작물을 파는 대신 소식이나 정보를 파는 거지.」
알 듯 말 듯 한 표정인 아이들 사이에서 눈이 영리해 보이는 소녀가 물었다.
「레이디께선 어떤 것에 흥미가 있으세요?」
「우선 이 고장에 대해 알고 싶구나. 그리고 버섯 관찰하는 걸 좋아해.」
그 소녀는 바로 다음 날 에디의 숲에 있는 버섯 골짜기에 대한 정보를 팔러 왔고, 1실버를 받아 갔다.
그다음 날은 버섯 골짜기까지 길 안내를 맡아 또 1실버를 받아 갔다.
그로부터 몇 주째 나는 에디의 숲을 들락거리며 버섯을 관찰하고 그 모양을 세밀화로 그리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꽤 중독성 있는 일이어서 한번 빠져들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버섯 골짜기에는 1실버가 아깝지 않을 만큼 신기한 버섯이 많았고 그 종류도 다양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식물 같기도 하고 동물 같기도 하고 요물 같기도 한 그 버섯들은 같은 종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형태와 크기, 빛깔과 무늬가 천차만별이었다.
가끔 햇빛이 마술을 부려 숲에 오묘한 색채가 스며드는 ‘정령의 시간’이 되면 버섯 골짜기 전체가 환상 속의 세계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하튼 오늘도 나는 확대경과 화구, 차와 도시락을 챙겨 들고 버섯 골짜기로 향했다.
“아가씨, 숲에서는 돌개바람을 조심하십시오. 잘못 휩쓸리면 사람도 날아가 버린답니다.”
집사 프랭클린이 집을 나서는 내게 오늘도 이렇게 당부했다.
“미스터 프랭클린도 참, 돌개바람에 날아가기엔 내 덩치가 너무 크다고요.”
어렸을 때부터 나를 봐 왔던 프랭클린은 아직까지도 나를 어린애 취급할 때가 있었다.
에디의 숲에서 발생하는 돌풍에 관해선 소녀 적에도 알고 있었을 만큼 이 근방에 널리 퍼져 있는 얘기였다.
그 숲은 갑작스런 회오리바람이 작은 소동을 일으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숲의 이름부터가 바람의 정령 에디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으니.
그 돌개바람을 ‘에디의 장난’, ‘바람 정령의 장난’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에디의 힘은 종이 몇 장을 날릴 정도지, 성인 여자를 들어 올릴 만큼의 괴력은 아니었다.
이 버섯 골짜기 나들이에 처음 이틀은 하녀장 마델이 함께했다.
나 혼자 숲에 가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라며 전속 하녀가 없는 나를 위해 직접 동행한 것이었다.
하지만 몇 시간이 지나도록 버섯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그림만 그리자 마델로서는 너무 지루했는지 금세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그래도 몰두하실 일이 있어 다행이에요. 내색을 않으셔서 그렇지, 지금 아가씨 속이 말이 아니실 텐데.」
이렇게 다른 사용인들에게 속삭이며 도시락과 필요한 도구들을 꼼꼼하게 챙겨 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사용인들의 착각에서 비롯된 동정은 내가 마음껏 버섯 관찰하러 다니는 데 도움이 되었기에, 딱히 그들의 시선을 정정하지 않았다.
초여름에 접어든 숲은 싱그럽고 활기가 넘쳤다.
버섯들은 그중에서 빛도 바람도 부드러운 곳에 느긋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화려한 외양이나 정연한 주름, 고고하게 갓을 치켜든 자태를 보면, 그들이야말로 숲속의 귀족들 같았다.
“오늘은 너로 정했어.”
나는 완만한 언덕 모양의 갓에 치명적인 청록색을 띤 버섯을 콕 짚어 가리키며 말했다.
그 갓의 매력적인 색깔이나 희고 깨끗한 대, 유독 단정한 턱받이가 눈을 사로잡아 한참 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던 버섯이었다.
빼어나게 아름다운 모양새로 봐선 독버섯 같은데, 내 지식으로는 정확한 이름을 몰라 ‘슬픈 암살자’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간 그린 버섯 세밀화가 꽤 됐지만, 지금껏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자랑할 만한 솜씨는 못 되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림에 대한 반응이 시원찮으면 상심이 클 것 같았다.
그렇다고 대충 그린 그림은 결코 아니었다. 이미 완성한 그림들도 전부 들고 다니면서 수정할 곳이 보이면 그때그때 수정할 정도였다.
그리다 보니 점점 염료 욕심까지 생겨서 앤에게 희귀한 염료 제조법을 수배해 놓은 상태였다.
처음엔 기기묘묘한 버섯의 형태를 따라 그리는 데 급급했다면, 점차 금속성이나 야광성을 띠기까지 하는 그 유혹적인 빛깔에 깊이 빠져들었다.
슬픈 암살자를 이제야 그리게 된 것도 기존의 물감으로는 그 오묘한 색깔을 흉내조차 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청산가리 맛이 날 것 같은 짙은 청록색, 아름다우면서도 위험해 보이는 버섯이었다.
그리기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목과 어깨가 조금 뻐근한 것 같아서 차를 마시며 쉬기로 했다.
집중했더니 숲속인데도 살짝 땀이 나서 시원한 개울물에 손발을 씻었다.
“곧 한여름이 오겠네.”
여름이 절정을 향해 내달리면 숲도 전성기를 맞이할 터였다. 감당하기 힘든 생명력이 터질 듯 차오를 것이다.
왜 그랬는지, 나는 아젤리아와 프러너스의 아이를 떠올렸다.
이제 아젤리아의 배도 꽤 불렀을 것 같았다. 아이도 곧 태어날 텐데 대체 프러너스는 어쩌려는 걸까.
실은 일주일 전에 플록스로부터 소송 관련 서신을 받았다.
이혼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2차 소송을 준비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예상했던 결과였어도 기분이 착잡했다.
나는 향긋한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고 그간 그린 버섯 그림들을 한 장 한 장 넘겨 보았다.
‘그리다 보니 어째 독버섯만 잇따라 그리고 있네.’
세상에 이렇게 많은 독버섯이 있는 걸 보면, 이들도 다 존재하는 이유가 있겠지? 쓸모는 없어도 이토록 아름다운데.
비뚤어진 성격에 현명하지 못해 매번 바보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나는 어쩌면 독버섯 같은 존재일지 몰라도, 그런 나도 누군가에겐 쓸모가 있지 않을까. 모두에게 쓸모 있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이런 다소 뜬금없고 우울한 상념에 빠져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바스락대는 낯선 소리가 들렸다.
바람이나 나무나 풀이 내는 소리가 결코 아니었다. 분명 그것과는 다른, 동물이 내는 소리였다.
숲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터득한 감각이었다.
가끔 작고 귀여운 산짐승이 기웃대다 후다닥 달아나곤 했지만, 결코 얕지 않은 숲인 만큼 혹시 커다란 맹수라도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신경이 곤두섰다. 산짐승이 아니라 괴물이나 정령일 수도 있고.
유령도 있는데 정령이라고 없겠는가. 지금은 멸종됐다고 알려진 마수도 불과 백 년 전만 해도 제국의 골칫거리였던 존재들이다.
무서운 상상을 해서 그런지, 바스락대던 소리가 점점 묵직한 발소리로 들렸다.
머리털이 삐죽 선 나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사방을 살피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아니나 다를까, 소리가 점점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만약을 대비해 화구 상자에서 팔레트 나이프를 급히 집어 드는데.
그와 거의 동시에 수풀에서 검은 그림자가 튀어 나왔다. 짧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정체를 드러낸 상대방도 내 몰골을 보고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산사람이 다 됐네. 활기 넘쳐 보이고…… 좋네.”
그러다 어색하게 꺼낸 첫마디.
산짐승, 괴물, 마수에 가깝고 정령은 아닌, 불량 황자 암흑 보스였다.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후 물었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
“지나가는 길이야.”
“농담 말고요. 설마 나 만나러 온 거예요?”
“그럼 버섯 만나러 왔을까 봐?”
“왜요?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요? 당신이 직접 여기까지 올 정도면 큰일이 난 거죠?”
내가 심각한 얼굴로 묻자 진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큰일이라면 큰일인데…… 아, 긴장 풀어.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큰일은 아니니까.”
“그럼 뭔데요?”
“당신이 나한테 서류만 달랑 디밀고 시골로 튀, 아니 가 버렸잖아.”
아, 그 보좌관 지원서. 까맣게 잊고 있었네.
준비한 게 아까워서 떠나기 전에 플록스에게 맡긴 그 서류를 약속대로 그가 목숨 걸고 진에게 전달한 모양이었다.
“회신을 보내면 될 걸, 겨우 그거 거절하려고 직접 온 거예요? 일 처리가 똑 부러지시네요.”
뾰족한 말투로 톡 쏘자, 진이 멍한 표정으로 눈을 껌뻑이며 나를 바라봤다. 정곡을 찔린 모양이지?
“어떻게 지내는지, 시골 마을에서 사고나 치는 건 아닌지 궁금하잖아.”
진은 뻣뻣하게 말하더니 새삼 인사인지 뭔지 모를 말을 내게 건넸다.
“잘 지낸 것 같네. 건강해 보여. 복장도 아주 편해 보이고.”
그러고 보니 숲을 오르고 개울에서 손발을 씻고 하느라 차림이 엉망일 터였다.
소매는 둥둥 걷어 올렸고 거추장스러운 치맛자락은 리본으로 동여매 무릎 아래까지 끌어올린 참이었다. 머리도 단정치 못할 테고.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모습인데. 설마 나를 따라 한 건가?”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작업 중이잖아요. 편한 게 최고죠.”
“작업 중이었군. 작업이라면 버섯 그리기? 플럼 하우스 사용인들이 얘기해 주더군.”
아, 그렇지. 먼저 저택에 들렀으니 내가 여기 있는 것도 알았겠지.
사용인들이 어디까지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았을까.
“버섯을 그렇게 열심히 그린다면서? 그림 구경 좀…….”
“가까이 오지 말아요!”
나는 그때까지도 손에 쥐고 있던 팔레트 나이프를 다시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진이 눈이 둥그레져서는 멈춰 섰다.
“버섯 그리기가 아니라 숨겨야 할 만큼 이상한 짓을 하고 있었던 건가?”
“알 것 없어요! 여하튼 볼 생각 말아요.”
내 노력과 정성을 쏟아 부은 그림들을 진이 비웃고 비아냥거리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대로 뒷걸음질해서 숲을 내려가요. 저택에서 시원한 자두 셔벗이라도 먹으며 기다려요. 끝나고 갈 테니까.”
“방해하지 않을게. 각자 할 일 하자고.”
“당신이 여기서 무슨 할 일이 있는데요?”
“레이디 작업하는 거 구경?”
“남 작업하는 거 구경해서 뭐 하게요. 신경 쓰이니까 가요.”
“그림 한 장만 보여 주면 가지.”
“싫어요! 어울리지 않게 왜 이러는 거예요?”
진과 입씨름을 하고 있을 때였다.
에디가 최악의 장난을 친 것은.
“어어, 내 그림!”
갑자기 불어닥친 돌개바람이 하필 방금 차 마시며 넘겨보다가 내려놓은 그림 뭉치를 덮쳤다.
짓궂은 바람은 버섯 그림 수십 장을 집어삼켰다가 여기저기로 토해 냈다. 흩어진 그림들은 나뭇가지에도, 풀밭에도, 실개울에도 떨어졌다.
마치 숲속 전시회라도 열린 것 같았다.
에디, 이 바람의 악당!
“꼼짝 말아요! 보지 말라고요!”
당황한 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애꿎은 진을 향해 꽥꽥 소리를 질렀다.
“보기만 해 봐요. 계약 파기할 거예요.”
내 밑도 끝도 없는 역정에 황당한 표정을 짓던 진이 뻣뻣하게 서서 양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내가 겨눈 팔레트 나이프가 권총이라도 되는 듯이.
“봤죠?”
“못 봤어.”
“정말 하나도 못 봤어요?”
“실은…… 봤어.”
사방천지가 내가 그린 버섯 그림인데, 못 보기가 힘들겠지.
“이미 여러 장 봐 버렸으니까 그림들부터 구하는 게 어때?”
“당신은 상관 말이요.”
“혼자서 저걸 다 어떻게 수습하려고? 높은 가지에 걸린 것도 있고 몇 장은 저기 떠내려가고 있잖아.”
진이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개울로 달려가 그림들을 건져 냈다.
“그깟 버섯 그림 뭐 중요하다고…….”
“안 중요한데 그런 표정을 짓나? 당신 보물들이잖아.”
건져 낸 그림을 바위 위에 널어놓은 진은 이어서 높은 데 걸린 그림부터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척 보면 알지. 당신은 눈치가 그만큼은 안 되는 모양이지만.”
“…….”
“보고 싶어서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