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그녀에겐 특별한 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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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그녀에겐 특별한 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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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그녀에겐 특별한 점이
2022.04.04.
“당신이 왜요?”
‘보고 싶어서 왔다’는 진의 말에 대뜸 내뱉은 말이 이랬다.
내 입의 방정맞은 품행이 스스로도 한탄스러웠지만, 사실 이 순간 그 말보다 더 타당한 반응은 없을 듯싶었다.
그렇지 않은가. 다른 사람도 아닌 진이, 다른 사람도 아닌 나를, 보고 싶어 할 이유가 언뜻 떠오르지 않았다.
소송이나 사업 문제가 아니라면 더더욱.
내 질문에 진은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흘깃 쳐다보고는 다시 그림을 주우며 말했다.
“나도 그 이유가 궁금해서 왔어.”
“뭐, 그간 미운 정이 들었나 보죠?”
숨기고 싶은 그림을, 그것도 하필 진에게 고스란히 보이게 된 탓에 반쯤 혼이 나간 상태라, 다른 건 깊이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이렇게 대충 대꾸해 놓고 나도 다른 쪽에 떨어진 그림들을 줍기 시작했다. 진보다 한 장이라도 더 줍기 위해 서둘렀다.
“그럴지도. 당신 덕분에 극한 경험을 여러 번 했잖아. 습관이 됐는지, 하루 한 번 뒷목을 안 잡으니까 허전하더군. 심심하기도 하고.”
“아아, 약 올릴 사람이 없어 심심했구나. 하긴, 그동안 내 덕분에 지루할 틈이 없었죠?”
이렇게 나를 놀리는 게 취미이고 특기인 사람한테 그동안 그린 버섯 그림을 죄다 들키고 말다니.
곧장 이죽거리며 되받아칠 줄 알았던 진이 잠잠했다.
돌아보니 묵묵히 그림을 줍고 있었다. 자기가 먼저 시비 걸어 놓고 설마 짜증이 난 건가.
그러다 이상한 걸 본 나는 화들짝 놀랐다.
‘왜 웃고 있지?’
진의 입꼬리가 요상한 모양으로 치솟아 있었다.
저 호선 모양과 각도는 비웃을 때와는 좀 다른데? 그사이 크게 충격받은 일이라도 있었나?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진의 행동이 평소답지 않긴 했다.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솔직히 나도 당신이 없으니까 조금 허전했어요.”
“그래?”
“우리 꽤 붙어 다녔잖아요. 티격태격하다 정들었나 봐요. 내가 친구가 없어서 그런지, 당신이 친구 같고 남동생 같고 그래요.”
“오빠겠지.”
대충 비슷한 나이 같은데. 따지긴.
왠지 진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것도 같았다.
이런 게 길들여진다는 거 아닐까. 나쁘게 말하면 세뇌?
고 맹랑한 미고 녀석의 계략에 말려드는 바람에 나도 잠깐 진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을 뻔했다. 나도 참, 아마추어같이 연기와 현실을 혼동하다니.
다행히도 인생 회차에 걸맞은, 성숙하고 올바른 사리 판단을 했지만.
자신이 계략의 피해자인지 모르는 진이 말했다.
“하지만 친구 사이에 몇 주 떨어져 있었다고 자꾸 생각나고 궁금하고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이 어른거리지는 않잖아.”
하, 보자 보자 하니까 이 사람이. 그동안 잘생겼다고 너무 띄워 줬나.
“누가 그렇대요? 그저 조금 허전했다고요. 키우던 강아지를 며칠 못 봐도 그래요, 나는.”
잠시나마 진을 걱정했던 자신을 탓하며 발치에 떨어져 있는 흰계란말똥버섯 그림을 주우려고 허리를 숙였을 때였다.
“아니, 내가 그랬다고.”
“…….”
나는 기껏 주운 버섯 그림을 도로 흘리고 말았다.
그 말은 정말로 단지 내가 보고 싶어서 왔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내게 등을 진 채 서 있어서 진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붉어진 귓불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귓불이 붉어지는 사람이었지.
말투도 행동도 무심하고, 아마 표정도 분명 그럴 테지만, 어쨌든 귓불은 붉어져 있었다.
“당신이 왜요?”
말릴 틈도 없이 나간 말에 진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원점으로 돌아온 건가. 나 역시 왜인지 알고 싶어서 왔어.”
진이 성큼성큼 다가와 마치 여기 답이 있다는 듯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풀리지 않는 문제를 앞에 둔 것처럼 암담한 표정이었다.
진이 내 얼굴 위로 손을 뻗어 왔다. 설마 또? 우리의 코끝이 키스할 듯 가까워졌다.
하지만 진은 내가 상상한 행위 대신 엄지손가락을 들어 내 왼쪽 관자놀이를 쓸었다.
“물감 묻었어.”
그러고는 그 물감 자국을 지우려고 몇 차례 시도했다.
하지만 지워질 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건.
“물감 아니고 점이에요.”
어처구니가 없어 목소리가 떨렸다.
“그동안 키스, 아니 키스 연기를 수도 없이 했는데 이걸 못 봤다고요?”
“자주색인데?”
“그래요, 왼쪽 관자놀이에 자주색 점 있는 여자가 나예요.”
진이 눈을 껌뻑였다. 미간 찌푸리기에서 눈 껌뻑거리기로 습관이 바뀐 것 같았다.
“뭐, 못 볼 수도 있어요. 머리카락 때문에 잘 안 보이기도 하고요. 그보다 지금은 왜 새삼 이게 보이는지가 더 궁금하네요.”
“그땐 그냥 어떤 점이었고, 지금은 그냥 점이 아니라서?”
그냥 점이 아니면 무슨 점인지……. 진이 이상했다.
나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그래서 당신 의문의 해답은 찾았어요?”
“글쎄, 찾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보다 더 분명한 사실 하나는 알게 됐네.”
“뭔데요?”
“당신 그림 솜씨가 예상 밖에 뛰어나다는 거. 버섯 그림들이 기대 이상으로 훌륭해.”
“괜한 소리 말아요.”
“괜한 소릴 왜 하겠어? 버섯이 이렇게 예쁜 줄은 또 몰랐군.”
어느새 남김없이 주워 가지런히 정돈한 버섯 그림을 넘겨보며 진이 말했다.
진의 칭찬이 솔직히 너무 기뻐서 입꼬리가 마구 치솟으려는 걸 겨우 붙들어 맸다.
“먼 길 왔는데, 버섯 그림 중 한 점은 얻어 갈 수 있겠지? 아, 서명을 꼭 넣어 주면 좋겠군. 그래야 가치가 더 올라가거든.”
“내 서명이 무슨 가치가 있다고…….”
“버섯 그림들의 가치가 올라갈 테니 서명도 같이 올라가겠지.”
“당신 듣기 좋은 말도 할 줄 아네요.”
“어떻게 들을지는 듣는 사람 마음이고 난 사실만 말해.”
생각지 못한 칭찬을 듣고 혈액 순환에 이상이 생겼는지 심장이 덜커덩거리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지금껏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종류의 기쁨이 차올랐다. 이런 걸 뿌듯함이라고 하나? 보람? 자부심?
닳고 퇴색한 인생에 오랜만에 청량한 바람이 불어온 듯했다.
“실은 일 얘기도 하려고 했는데, 하말린어 통역 말이야. 몇 개월 후에 나갈 일이 있을 거 같아.”
“하말린에요?”
“그런데 이 그림들을 보니 그 일보다 이 그림들의 판권을 사는 게 더 시급하다는 생각이 드는군.”
“놀리지 말아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해. 다른 건 몰라도 장사엔 진심이거든.”
진이 주워 모은 그림들을 화구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
“베라트 백작부인의 풀꽃 시리즈가 얼마나 고가에 거래되는지 알아?”
“그야 베라트 부인은 사교계의 거물이잖아요. 또 부인이 그린 건 꽃이고요. 물론 그림도 훌륭하지만.”
“귀족들의 유별난 취미를 몰라서 그래?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최고가의 그림이 마물 컬렉션이야. 없어서 못 팔지.”
“마물? 요즘 같은 시대에? 게다가 백 년 전이긴 하지만 한때 마물 때문에 그렇게 고생을 하고서?”
“귀족놀음이란 게 그렇지. 그에 비하면 버섯은 풀꽃과 마물의 중간쯤 된다고 할까.”
칭찬인가? 어쨌든 빈말은 아닌 것 같네.
“그림을 세상에 내놓는 일은 천천히 생각해 볼게요. 제안은 고마워요.”
“좋아. 나한테 한 점 주는 건 미루지 말라고. 어떤 걸로 줄 거야?”
‘왜 줘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진의 칭찬 덕분에 사기가 올랐으니 이번엔 한번 봐주기로 하고. 어떤 걸 줄까 고민하다 제안했다.
“방금 전까지 그리고 있던 청록색 독버섯이 당신한테 어울릴 것 같아요.”
“아직 미완성이겠군. 날아간 그림들도 수습했으니 마저 그리시죠, 레이디.”
“당신은 저택으로 돌아가 쉬고 있어요. 완성해서 가지고 갈게요.”
“아까 말했잖아. 레이디 작업하는 거 보러 왔다고.”
“싫어요! 신경 쓰인단 말이에요. 그리고 당신도 기다리기 지루할 거예요.”
“내 걱정은 마.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게 내 특기야. 좀 지나면 어떤 게 사람이고 어떤 게 버섯인지 구분 못 할걸?”
아무래도 쫓아 버리기는 그른 것 같았다. 나는 진을 설득하는 대신 다시 버섯 앞에 앉아 그리기 시작했다.
‘그래, 보고 싶어서 왔다고 했으니 실컷 보시오.’
그러고 보니 나를 보고 싶어서 왔느니 어쩌느니 하던 게 그림 얘기에 묻혀 버렸네. 그 얘기 좀 더 듣고 싶은데.
‘정말 조용하네. 자나? 혹시 갔나?’
한참 그리는 동안 아무 기척이 없기에 궁금해서 돌아보았다가 내 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진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자신의 말대로 착실하게 레이디 작업하는 걸 구경하고 있었다.
“심심하지 않아요?”
“전혀. 그보다 어렸을 때 황궁에 놀러 온 적이 있었나?”
“응? 선친 말씀으로는 그랬던 적이 꽤 있다는데, 이상하게 그 즈음 기억이 유독 선명하지 않아요. 어릴 때라 그런가? 그런데 그건 왜요?”
“그냥 문득 당신을 예전에 본 적이 있나 해서.”
“아,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아요. 사실 나도 열차에서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잠깐 그 생각을 했거든요.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다는.”
“아니면 전생에 고양이였나?”
“그렇담 당신은 전생에 강아지였겠죠.”
“키키.”
“미미고.”
우리의 대화는 여기서 잠시 중단되었다. 각자 아련한 추억에 잠기느라.
키키는 장제소에서 말에게 걷어차일 뻔한 날 진이 말한 적 있는 천방지축 고양이인 것 같고. 미미고는 내가 어릴 적 키운 강아지의 이름인데 미고의 동생이란 뜻이었다.
그런데 황궁 얘긴 왜 꺼낸 걸까.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그즈음의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면 꼭 두통이 일곤 했다. 그래서 자연스레 그때 생각은 피하게 되었다.
“작업하는 걸 구경하는 것으로 여기 온 목적은 어느 정도 충족이 됐나요?”
“그런 것 같아. 물감이 마르기를 기다리고 있는 저 독버섯 그림이 내 수중에 들어오면 더욱 완벽해지겠지.”
“먼 길 온 이유를 찾았다니 다행이네요.”
“흠, 사실은 그거 말고 딴생각했어.”
“딴생각?”
“당신이 행복해 보인다는 생각.”
“…….”
“당신은 지금 여기 있어야겠네.”
나는 의아한 얼굴로 진에게 물었다.
“지금 여기 안 있으면요? 날 데려가기라도 할 생각이었어요? 혹시 내가 그리치로 가야 할 상황인 건가요?”
“그래야 할까 생각도 했지만, 여기 와 보니 분명해졌어. 당신, 지금은 그림을 그릴 때야.”
“그림이야 언제든 그리면 되죠. 필요하다면 그리치로 갈게요.”
“아니, 당신이 있고 싶은 데 있어. 필요하다면 내가 거기로 가지.”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이었다.
나를 무척 생각해 주는 말 같은데. 아니, 그보다 더 설레는 말 같은데.
진의 표정이 무심해서 헷갈렸다.
“진, 왜 날 봐줘요? 당신은 마음만 먹으면 훨씬 더 냉정하고 무서울 수 있는 사람이잖아요. 나 좀 못되지 않아요? 하는 짓도 막무가내에 유치하고, 또 자기밖에 모르고.”
진에겐 특별히 더 그랬지.
내 질문에 진이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재밌어서.”
“뭐라고요? 난 심각하게 물어 보는 건데 장난치지 말아요.”
“진심인데. 당신은 완벽한 걸 좋아하는지 몰라도, 난 그보다 재미난 걸 좋아해.”
* * *
그렇게 진은 불쑥 나타나 알쏭달쏭한 말들을 잔뜩 남겨 놓고 돌아갔다.
물론 청록색 독버섯 ‘슬픈 암살자’ 그림을 손에 넣고서.
그가 다녀간 뒤로 이래저래 마음이 싱숭생숭하기도 했지만, 꽤 용기를 얻기도 했다.
그러한 진의 격려에 힘입어 나는 또 경솔하다는 잔소리를 잔뜩 들을 만한 일을 저지르게 되었다.
내가 결코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고, 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 일을 시도해 볼 객기가 생긴 것이다.
그것도 두 가지나.
심지어 둘을 하나로 합치는 극단적이고 무모한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