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황제가 알고 있다
(37/110)
37화. 황제가 알고 있다
(37/110)
#37화. 황제가 알고 있다
2022.04.08.
내 평판을 올리기 위해 두 가지 결심을 뒤집었다.
우선 사교계에서 힘깨나 행사하는 귀족들에게 아부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뒤집었다.
그리고 내 버섯 그림들을 꽁꽁 숨겨 두고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겠다는 결심을 뒤집었다.
물론 이런 변심의 최종 목적은 이혼 쟁취.
플록스에게 부탁해 소송 결과를 좌지우지한다는, 그 주렁주렁한 자문단에 속한 귀족 명단을 입수했다.
그동안 그린 버섯 그림을 엽서 모양으로 재단하고, 그 뒷면에 정성스럽게 손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모넬라 대부인께.
모자란 솜씨나마 평소 존경하던 부인께 바칠 수 있어 기쁩니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시골집에서 이렇듯 제가 좋아하는 버섯을 들여다보고 그리며 여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제가 공작가를 떠나려는 이유는 오직 이런 것입니다.’
내 진심이 전해지기를 기원하며 나는 한 장 한 장 편지를 써 나갔다.
봉투에 담은 후에는 하나하나 축복의 키스로 봉했다.
이 버섯 그림엽서가 수신인의 손에 정확히 들어갈 수 있도록 서신을 전달하는 일도 플록스에게 따로 부탁했다.
이 엽서들을 페가수스까지 운반하는 일은 마침 다시 토버마리를 찾은 진에게 부탁했다.
자신이 내게로 오겠다고 에디의 숲에서 말한 대로, 진은 종종 예고 없이 찾아오곤 했으니까.
방문의 이유는 특별한 게 없었다.
오고 싶어서 오거나, 심심해서 오거나, 내가 또 무슨 사고를 치거나 재미난 실수를 저질렀는지 궁금해서 오거나.
그런대로 마음에 드는 이유여서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다만 덕분에 다른 병증이 생겼다.
열흘에 한 번 오던 사람이 열흘이 넘도록 소식이 없으면 은근히 신경이 쓰이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와 봤자 입을 꾹 다물고 내가 버섯 그리는 걸 지켜보거나, 풀밭에 누워 잠을 자거나, 가끔 버섯에 대해 물어 보거나 뜬금없는 질문을 던질 뿐인데.
와도 특별한 일은 없지만, 안 오면 초조해졌다.
이제 더 이상 오고 싶지 않고, 심심하지 않고, 궁금하지 않은 걸까.
아니면 다치거나 신변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독약을 집어 먹었거나 칼을 맞았거나…….
이런 생각을 하며 일희일비하고 있는 나 자신이 우스우면서도, 내 마음대로 멈출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로제트.”
“응?”
“귀족이란 족속들이 이름과는 달리 얼마나 속물인지 알고는 있지?”
자신이 운반할 봉투들이 무엇인지 알게 된 진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알지. 하지만 하는 데까지 해 보고 싶어.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데 더 후회하게 되려나?”
이렇게 우리 사이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가까워진 마음의 거리만큼 말도 짧아진 것이다.
여긴 내가 대화 예법을 지키는지 아닌지 감시하는 무리도 없으니 말이다. 물론 주로 바뀐 건 나고, 진은 더 격의 없어진 정도지만.
“기왕 이렇게 버섯 그림을 만천하에 공개하게 된 거, 우리한테 판권을 넘기는 건 어때? 작품 관리도, 판매도, 수익 배분도 모두 섭섭지 않게 해 줄 테니.”
페가수스 보스께서 은근슬쩍 흥정을 걸어왔다.
“늘 하는 말이지만, 제안은 너무나 고마워. 내 그림의 가치를 인정해 줘서 내가 얼마나 뿌듯하고 기쁜지 알지?”
“아직도 시장에 내놓을 마음이 없는 거야? 고민할 시간이 더 필요한가?”
“아니, 시간이 필요하다기보다…… 판권은 팔지 않을 생각이야. 그건 내가 가지고 있는 게 좋겠어.”
예상 밖의 말에 진의 가지런한 눈썹이 위로 비죽 치솟았다.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판매 대행 우선권과 사업 우선 교섭권은 페가수스에 줄까 해.”
“그런 쪽으로는 잘 모른다더니……. 하하, 이런, 레이디 앰브로시아에게 한 방 먹었네.”
진이 허탈한 얼굴로 웃었다.
“뒤통수 아프게 해서 미안.”
“아니, 잘했어, 아주 잘했어.”
“배신감이 큰가 보네.”
“진심이야. 온갖 사기꾼들이 들러붙어 선수를 칠까 봐 걱정했는데, 당신 그러는 거 보니 안심이 되네. 앞으로 계속 그런 자세를 고수해.”
내 발칙한 반격에 진이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자 머쓱해진 건 나였다.
사실 간만에 진을 놀려 먹을 생각에 농담 반으로 한 말이었는데.
이번엔 평소보다 나흘이나 더 늦게 나타나 괜히 마음 졸이게 만들었고, 그런 것치고는 너무나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나 왠지 약 오르게 만들었으니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막상 진과 마주하면 이렇듯 못되게 굴고 마는 것이다.
이러다 이 사람한테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닌지, 조금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 * *
황제의 심기가 불편했다.
딱히 큰소리를 내거나 인상을 찌푸린 것은 아니었지만, 카를슈테인 공작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이번엔 무슨 변덕을 부리려는 걸까.
공작은 마음의 준비를 했다.
바카리스답게 원래도 성정이 잔인하고 비뚤어진 인간이었지만, 언제부턴가 그의 눈에 광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광기의 첫 번째 희생양은 몽펠리 후작가.
제국에서 막강한 세력을 떨치던 세 가문 중 하나인 몽펠리 후작가는 선황비 중 한 사람이었던 마르멜 대부인의 친정이었다.
마르멜 대부인은 출산 직후 승하한 선황후를 대신해 지금의 황제를 친아들처럼 돌본 이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가문을 멸문한 만큼, 귀족들의 공포심은 극대화되었다.
남은 것은 카를슈테인 공작가와 현 황후, 알펜시아 바카리스의 친정인 페리에 공작가.
몽펠리 후작가가 사라진 덕분에, 남은 두 가문의 위상은 더 올라간 것 같기도 하고 위태로워진 것 같기도 했다.
카를슈테인 공작은 의심 많고 조급하지만 미숙한 황제를 다룰 자신이 있었고, 대비책도 세워 두었다.
각 가문의 선대들이 황제의 약점을 쥐고 그를 압박하고 조종하려 했다면, 공작은 황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조력자가 되기로 한 것이다.
공작이 보기에, 현 황제 카이저 바카리스는 결코 약점으로 좌지우지될 만큼 이성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미치광이에게 정상인의 협박은 효력이 없는 법.
몽펠리 후작가의 몰락을 보며 공작은 자신의 예측이 들어맞았음을 확인했다.
몽펠리의 늙은 여우가 황제에게 뭐라고 입을 놀렸는지 확실치 않지만, 어쨌든 황제를 옭아매기는커녕 제 명을 재촉한 꼴이 되었다.
“바카리스의 가호가 온 제국에 닿기를.”
“어서 오시오, 공작.”
하지만 황제는 뜻밖에 입꼬리를 한껏 올렸다.
불길하고 찜찜한 미소였다.
“요즘 사교계에 아주 재미난 일이 있던데? 때 아닌 버섯 열풍이라더군.”
황제의 말은 알현 준비를 단단히 했다고 자신한 공작의 허를 찔렀다.
공작은 얼굴색이 변하지 않도록 노련하게 처신했다.
“부인이 참 재미있는 사람이었더군. 그런 깜찍한 엽서를 감정이라곤 말라비틀어진 귀족들에게 보낼 생각을 하다니. 그런 건 감성이 양철통 같은 짐에게 보냈어야지.”
얼마 전 황제의 불같고 변덕스러운 성격을 양철통에 빗대어 뒷말을 한 관리 하나가 행방이 묘연해졌다.
황제가 말한 깜찍한 엽서란 로제트가 자문단 귀족들에게 쓴 일종의 이혼 청원서를 가리키는 것일 터.
직접 버섯을 그리고 그 뒷면에 자필 편지를 썼다는 보고를 듣고 공작 또한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뜨리긴 했지만. 황제가 그걸 알고 관심을 보인다?
“그나저나 이혼을 번복할 생각인가? 공작이 합의를 안 해 주는 모양이던데? 정말 아내를 사랑하게 되기라도 한 건가?”
황제가 안됐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소름 끼치는 짓이었다.
“폐하께서 일개 신하의 이혼 문제에 관심을 보이실지 몰랐습니다. 심기를 어지럽혀 드려 송구합니다.”
“일개 신하라니, 섭섭하게. 짐은 공작을 친우이자 형제로 생각하고 있다. 제국의 기둥인 카를슈테인이 평안해야 황궁도 평안할 수 있지.”
“감사합니다, 폐하. 이런 하찮은 일로 심려치 않으시도록 제 가정사는 잘 정리하도록 하지요.”
“내 충고 하나 할까? 가문 안의 문제에서 최우선으로 고려할 건 후계야. 그건 황궁도 다르지 않지. 결국 제 씨앗을 어느 태에 뿌려서 어떻게 솎아내 가장 센 놈을 나 다음에 세울까, 그거거든.”
서늘한 예감이 공작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황제가 알고 있다.
“뭐 씹은 얼굴 말라고. 까놓고 말하면 결국 다 그 얘기지. 고상한 귀족들이 허구한 날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는 게 다 그 짓거리라고. 그런데 공작의 그 귀여운 부인께선 후사를 볼 수 없는 몸이라지?”
“…….”
황제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뭘 망설이는 거지?”
“집안의 소사는 제가 알아서 처리하지요. 황제께선 부디 제국의 대사에 집중하시지요.”
“하여간 까칠하긴.”
능글맞게 웃는 황제의 얼굴을 보며 공작은 일이 생각했던 것보다 골치 아프게 됐음을 직감했다.
“명하신 애견 육성 사업에 대해 보고를 드려도 될지요.”
“아, 그렇지. 내 정신 좀 보게. 우리가 나눌 중대사가 그것이었지. 공작가가 얼른 안정돼야 공작도 뜻을 확고히 하고 이 일에 집중할 터인데.”
“감히 폐하께 드린 맹세를 저버리겠습니까. 제겐 무엇보다 그 일이 우선입니다. 제 아내가 누구이든 그 점은 이미 확고합니다, 폐하.”
.
.
.
카이저 바카리스는 돌아서 나가는 공작의 뒷모습을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제론, 공작이 마음을 바꾼 이유가 뭘까?”
몸을 감추고 있던 황제의 심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 아비의 당부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 것 아니겠습니까.”
“그뿐일까? 마수들 얘긴 공작이 먼저 제안한 것 아닌가. 그걸로 새로운 성벽이라도 쌓은 양 자신만만하더니. 이중으로 대비한다는 건가. 나만큼 의심 많은 위인이군.”
황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여러 가능성을 머릿속에서 굴려 보았다.
그러다 문득 짜증이 솟구친 얼굴로 내뱉었다.
“아젤리아는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카를슈테인과 밀회를 나눌 수 있게 엮어 줘, 애까지 배게 해 줬으면 지금쯤은 공작부인 자리를 꿰차고도 남았어야지, 쯧!”
“공작의 태도가 달라져 본인도 당황하고 있습니다. 좀 더 압박을 가해 보겠습니다.”
“어린 계집 하나 처리하지 못하고 여기까지 왔다는 것부터가 우스운 일이지. 선대 카를슈테인, 그 능구렁이 같은 영감.”
생각해 보면 참으로 독종 아닌가.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아이를 자기 가문의 안위를 위한 인질로 삼은 것이니.
현 공작도 선대 공작만큼 영악하고 비열할 것인가.
‘그는 단연 제 아비보다 위지.’
계집 하나가 아니라 제국민 절반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쓸어버릴 위인이니까.
‘정말 마음에 드는 괴물이야. 내 약점을 알고 있는 이상 방심할 순 없지만 확실히 쓸모는 있어.’
황제는 이런 생각을 하며 로제트가 그린 버섯 그림엽서를 집어 이리저리 돌려보다 입매를 비틀었다.
“맹랑한 계집이야. 제 발로 공작저를 나간 것도 모자라 하필 진 그 놈팡이랑 엮이질 않나, 이젠 이혼하겠다고 귀족들을 온통 들쑤시고 다녀?”
“이혼 소송을 페가수스에서 대리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데도 정작 공작이 이혼을 피한다……. 꽤 재미있는 계집인데, 황궁으로 불러들여 좀 데리고 놀까?”
황제의 저속한 표현에 심복조차 민망한 듯 눈길을 피했다.
“아, 로제트 앰브로시아를 궁에 들이면 황후가 아주 좋아하겠군. 황후께선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 이제부터는 그 얘길 좀 들어 보지.”
.
.
.
공작은 마차에 오르자마자 미간을 와락 구겼다.
‘그 멍청한 황제가 이미 다 꿰고 있다?’
공작은 황제의 말을 복기해 보았다.
그는 분명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황제 본인의 출생에 얽힌 비밀도, 로제트에 관한 것도.
후사에 관한 얘기를 콕 집어 말하는 걸 보면, 그간 로제트에게 해 온 짓까지도.
황제가 모든 걸 알았다면, 그 양철통이 로제트를 가만 두진 않을 텐데.
공작은 자신이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황제는 전쟁과 분란을 필요로 했다. 혈통의 정통성을 대체할 새로운 힘을 손에 넣고 싶어 했다. 그는 새로운 룰을 만들고 싶어 했고, 커다란 걸림돌 하나를 제거하는 데 이미 성공했다.
그 새로운 판에서도 승자가 되기 위해 공작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낡은 게임 말은 버리기로 했다.
처음엔 이혼하더라도 큰 문제 없으리라 자신했다. 로제트에겐 적당히 감시를 붙여 놓으면 되는 일이라고.
아니, 공작부인 자리를 빼앗기더라도 그녀가 갈 곳은 마땅히 없으리라 생각했다. 여전히 공작저에 남거나 그 주위를 배회하거나.
너무 안일한 판단이었나.
로제트는 공작의 예상과는 달리 너무나 빠르게 자신에게서 멀어져 갔다.
자신이 알던 여자가 아닌 것 같았다. 예상치 못한 동선을 그렸다.
‘원래 어떤 여자였지?’
공작은 이제야 생각해 보았지만, 아는 것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