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독버섯의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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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독버섯의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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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독버섯의 이름은
2022.04.15.
‘남자는 역시 팔뚝이라는 선인들의 말이 맞는 걸까.’
특히 일에 몰두하는 팔 근육은 무척이나 아름답고 유혹적이었지.
나는 어제 일을 떠올리며 이런 생각을 하다 화들짝 놀랐다.
내가 왜 이러지? 이름 따라간다더니 정말로 버섯 부인이 되어 가나.
어제도 한바탕 우여곡절이 있었다.
인쇄기 옆에 딱 붙어서 인쇄가 잘 나오나 못 나오나 지켜보는데, 내가 생각한 색깔이 영 아니었다.
몇 번씩 기계를 멈추고 기장에게 어떤 색감이어야 하는지, 어떤 느낌이 나야 하는지 상세히 설명했다.
처음엔 눈을 껌뻑이며 잠자코 듣고 있던 기장이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아니, 대체 뭐 하시는 레이디인데 여기 와서 이러십니까? 사람 손이랑 기계가 어디 같습니까? 말이 되는 소릴 하셔야지.」
「이 그림 그린 작가예요! 당신도 한번 봐요. 이 색깔이랑 저 색깔이 얼마나 다른지.」
「나 참, 답답해서. 기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시네.」
「당신은 인쇄 장인 아닌가요? 작은 점 하나라도 완벽을 추구해야죠.」
나의 끝없는 간섭과 요구에 기장은 결국 두 손 두 발 들고 플록스에게 구조 요청을 했다.
인쇄실에 나타난 건 플록스가 아니라 진이었다.
내 앞에서는 투덜거리던 기장도 보스 앞에서는 태도가 깍듯해지더니 자신이야말로 억울하다는 듯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그만 퇴근해, 폴.」
진이 턱으로 문을 가리키자, 기장은 잠시 머뭇거리다 쌩하니 달아났다.
「아니, 일이 다 안 끝났는데 기장을 보내 버리면 어떡해!」
「내가 하지.」
진이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더니 기계 앞에 섰다.
「뭐가 문제지?」
진이 하면 내가 봐줄 줄 알고?
「이거 봐. 원래 그림은 안개비가 살짝 내려 촉촉해진 흙빛이라면 이건 습기 없는 흙색이잖아.」
내가 말하고도 한소리 들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진은 군소리 한마디 없이 기계를 조종하는 데 집중했다. 얼마나 집중했는지는 그의 좁아진 미간이 말해 주었다.
그때 보았다. 힘을 줄 때마다 진의 팔뚝에 불거지는 유혹적인 근육의 퍼포먼스를.
진의 작업물도 내 기대에 완벽히 부합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아까 그 기장이 한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역시 기술보다 성의 문제였던 것.
아니면 팔뚝 때문에 눈과 마음의 기준이 후해진 탓일까, 흠흠.
다음 날, 오후도 한참 지난 시각에 느지막이 페가수스 사무실에 나가 보니 진은 출타 중이었다. 일 때문에 말보르크 백작과 일찌감치 나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어제 인쇄 작업이 꽤 늦은 시각까지 이어졌는데, 보기보다 부지런하다는 생각을 했다. 평소에 늘어져 있는 모습을 보면 꼭 나무늘보 같은데 말이다.
“전시 준비는 잘되어 가십니까?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는지요.”
플록스가 언제나처럼 깍듯한 태도로 물어 왔다. 진이 없으니 나를 응대하는 건 그의 몫이었다.
우리는 늘 그랬듯 1층 카페로 내려가 칸막이와 주렴이 있는 자리를 차지했다.
“그럭저럭 마무리되고 있어요.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뿌듯하고 기운이 넘쳐요. 이혼 소송을 준비할 때와는 퍽 다르네요.”
“그렇습니까. 지난번 패소로 상심하셨지요? 조금만 여유를 갖고 기다려 주십시오. 저희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요.”
플록스의 말이 고마웠다. 앤의 일로도 신세를 졌는데, 이 은혜를 언제 다 갚을 수 있을지.
“오늘은 와인 한잔하고 싶네요.”
술도 잘 못 마시면서 괜히 바람을 잡았다.
전시회 준비가 계획대로 착착 이루어져 기분이 좋기도 했고, 실은 이런 거나한 분위기 속에서 한잔하는 것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거칠고 강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내고 싶었달까.
얼음송곳 프러너스가 와도, 떼쟁이 코찔찔이 윌로우가 와도, 욕심 사나운 멍청이 루이가 와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네, 준비하겠습니다.”
플록스는 언제 만나도 상냥하고 정중한 사람이었다.
문제의 입 싼 바텐더 힉스가 레드 와인 한 병과 간단한 안주를 날라 왔다.
힉스는 나에게만 와인을 따라 주었다.
“어머, 혼자 마시라고요? 플록스도 같이 해요.”
“아닙니다, 저는. 더욱이 업무 중에는…….”
플록스가 난처한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지금이 무슨 업무 중이에요. 와인 싫어해요? 그럼 억지로 권할 순 없죠.”
말은 이렇게 하면서 매우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구색 갖추기로 글라스에 따라만 놓겠습니다.”
플록스가 눈짓을 보내자 힉스는 망설이는 얼굴로 주저하는 듯하더니 결국 플록스 앞에 놓인 글라스에도 조심스레 와인을 따랐다.
내가 와인을 한 모금 마시기를 기다렸다 플록스가 물었다.
“무례한 질문입니다만, 저희 보스와 각별한 사이이신 거지요?”
각별한 경험을 함께한 동지이지만 플록스가 말하는 각별함이란 그런 걸 가리키는 게 아니리라.
“아, 그건 사실 오해…….”
“휴고에게 다 들었습니다. 매우 깊은 사이시라고.”
“그건, 설명하기 힘든 사정이 있어서…….”
“예예, 감정의 점화란 기적같이 찾아오지요. 남들에겐 암만 설명해 봐야 이해 못 할 일입니다. 저희를 이해시킬 필요는 더더욱 없으시고요.”
아니고요, 유령 얘기를 여기서 한들 믿겠느냔 말이죠.
“휴고에게 들은 말 때문이 아니어도, 진 보스의 태도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지요. 보스가 쉽게 곁을 내 주시는 분이 아니거든요.”
“플록스 눈엔 그래 보이나 봐요.”
“제 눈에만 그래 보이는 건 아닐 겁니다. 요즘은 별 용건도 없이 심심하면 그리치와 토버마리를 오가시지 않습니까.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닌데.”
플록스가 감격한 얼굴로 눈시울을 붉혔다.
“내연남 딱지도 개의치 않으실 땐 정말, 세상에.”
저기요, 진이 들으면 뒷목 잡고 쓰러질 말인데요. 결코 본인이 원한 일이 아니라고요.
“어쩌다 보니 주제넘게 말이 많았습니다. 제가 드리려던 말씀은, 기필코 저희가 레이디의 이혼을 쟁취해 내겠다는 겁니다.”
“네에?”
“맡겨 주십시오. 두 분을 위해 제 몸을 갈아 넣어서라도 카를슈테인 공작의 더러운 모략을 깨부수겠습니다!”
평소의 온화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과격한 발언을 한 플록스는 본인 앞에 있던 와인글라스를 단숨에 비워 버렸다.
구색 갖추기로 따라만 놓겠다더니.
“저, 괜찮으세요?”
게다가 내 이혼인데 왜 두 분을 위한다는 거야?
의아하게 생각하는 순간, 굵직하고 나직한 구호가 바 안 가득 깔리기 시작했다.
“형수님! 형수님! 형수님!”
맞다. 이곳은 시선만 조금 가릴 수 있을 뿐, 방음이 전혀 안 되는 곳이었지!
줄곧 이상하게 생각하던 점이 있었다. 내 이혼 추진단이 왜 이렇게까지 과하게 꾸려졌나 하는 것. 전략 회의 때마다 어째 다들 묘하게 신이 난 듯한 느낌이었는데…….
나와 진을 엮으려는 기대 때문이었다니!
지난번 플록스가 내게 바라는 바가 있다더니, 혹시 이것?
아무리 그래도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원들이 보스의 애정사에 이 정도로 관심을 쏟고 애를 쓰는 것이 정상이냔 말이지.
‘이 사람들이? 내가 그렇게 좋은가? 곧장 형수로 맞이하지 못해 안달할 만큼? 나한테 완전히 빠져들었잖아.’
지난 생엔 인기라곤 눈을 씻고 봐도 없던 나인데, 이번 생엔 엉뚱한 데서 인기가 폭주해 골치였다.
그때 부른 개구리 노래 덕분에 호감을 잔뜩 얻은 걸까.
치솟으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내리며 겸양의 미덕을 발휘했다.
“여러분의 성원은 감사하지만 이런 건 억지로 밀어붙인다고 되는 일이 아니에요. 당사자인 진의 의사와 취향이 중요하죠. 진은 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플록스가 텅 비어 버린 글라스를 꽝 내려놓았다.
언제 그렇게 됐는지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느 틈에 얼마나 마신 거지?
플록스는 딴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불량하게 내질렀다.
“취향? 개나 줘 버리라지! 아무나 그 여자만 아니면 됩니드아!”
아무나…… 그 여자만 아니면 돼?
술 취한 사람이 내지른 말이라도, 아니 그래서 더욱 진담일 듯해 속이 쓰렸다.
진의 세상은 그 여자와 그 여자가 아닌 아무 여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나는 그 여자 외 아무개 중 하나다.
플록스가 저토록 미워하는 그 여자는 아마도 아리스타타겠지.
내 짐작을 확인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미친 황후만 아니면 된다고오!”
이렇게 플록스가 몸소 확인시켜 주었다. 참 친절한 사람이야.
플록스는 말릴 틈도 없이 테이블에 자기 이마를 쿵쿵 박더니 간청했다.
“가라고요, 가라고요, 제발 좀 데려가 주시라고요오. 저러다 죽어요, 죽습니다. 우리 보스 죽어요, 레이디이!”
안 그래도 죽을 뻔한 걸 이미 한 번 살려 놨는데…….
아, 그래서였나.
지난번 내가 진을 그리치 밖으로 끌고 가기 위해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둘러대도 통했던 게.
예감이 안 좋다는 둥 주변 기운이 안 좋다는 둥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데도 플록스는 잠깐 의심하고 금세 납득했다.
플록스의 거침없는 주사에 ‘형수님’을 연호하던 장정들 중 몇이 파랗게 질린 낯빛을 한 채 주렴 안으로 허겁지겁 들이닥쳤다.
하긴 황후까지 들먹였으니. 게다가 미쳤다는 말까지 했지.
“어떤 정신 나간 자식이 플록스 경에게 술을 준 거야?”
이런 소리도 들려왔다.
나는 몰려든 사람들을 향해 단호하게 손을 들어올렸다.
개구리 노래나 부르던 좀 웃기고 이상한 아무 여자의 단호한 제지에 장정들이 멈칫했다.
“괜찮아요. 난 플록스 경의 고견을 더 듣고 싶군요.”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진과 아리스타타의 관계에 대한 묵은 궁금증을 해소할 절호의 기회인데!
지금까지는 당연히 두 사람의 로맨스를 혼자 추측하고 상상하는 수밖에 없었다.
“예엡, 들으셔야죠, 들으셔야 하고말고요. 그 망할 황후인지 첫사랑인지 아리까리 퉤퉤인지만 아니면!”
첫사랑이란 단어가 이렇게 열불 나는 말이었던가.
언젠가 버섯만 연구할 수 있는 한가한 날이 오면, 가장 아름답고 치명적인 독버섯에 첫사랑이란 이름을 붙여 주리라.
“그 여자만 아니면 레이디, 당신은 합겨억!”
플록스는 내게 대놓고 손가락질까지 했다.
치민다.
형수님 유력 후보에서 아무 여자로 전락한 나는 파르르 떨리는 눈가를 진정시키려고 애쓰며 물었다.
“그 미친 황후가 무슨 짓을 했기에 그래요?”
미친 걸로 따지면 나도 뒤지지 않지.
그래, 나도 좀 취한 듯.
“사람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갔으면 됐지, 왜 자아꾸 건들고 찔러 보고 하냔 말이죠.”
“그 여자가 나쁘네요.”
황홀한 팔뚝을 가진 내 책임 1호에게 감히.
“나쁘지요. 아주우 사악하지요. 사람 마음이 노리개도 아니고 왜 갖고 노냐고요.”
“요즘도 황후가 진에게 그래요?”
“걸핏하면 불러 대는데, 사람 죽이려는 거지 그게!”
아까부터 손님을 내보내고 건물을 단속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플록스가 취해서 떠드는 소리는 그의 명을 재촉할, 아니 여기 있는 모든 사람과 페가수스의 생존을 위협할 만한 것이었다.
대대로 황제들은 반쪽짜리 시더우드를 살려두려 하지 않았다.
반역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어렸을 때부터 차별과 멸시를 당해 온 그들은 황실에 적대감을 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컷 괴롭힐 때는 언제고, 이제는 그 괴롭힘을 구실 삼아 불온하다 몰아붙이며 결국은 두려워하는 꼴이라니.
음지에서 세를 불려 가며 동부의 강자로 자리 잡은 진이 황제의 심기를 얼마나 불편하게 만들고 있을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더욱이 황후의 옛 애인이라니.
그도 모자라 황후가 여전히 진을 놓아 주지 않고 보란 듯이 불러 재낀다면.
‘황제가 진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났을 법도 하네.’
현 황제 카이저 바카리스는 성정이 잔혹하고 의심과 조바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물론 내가 직접 만나 본 건 아니고, 프러너스가 그렇게 말하는 걸 엿들은 적이 있다.
타국 사절단을 맞이하는 자리에 그러한 황제가 나서면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기에 늘 자신이 불려 다닌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사업을 위한 뒷거래를 넣기에는 황제의 그런 성정이 딱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황제는 그런 인간이라 치고, 알펜시아 황후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황후가 진을 죽이려 한다는 건 무슨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