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다시 애증의 도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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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다시 애증의 도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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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다시 애증의 도시로
2022.05.06.
제도 로시엔에 발을 들이게 된 이상 야무지게 본전을 뽑겠다고 결심했다.
요리사 한스와 하녀장 마델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 ‘뽕을 뽑아야지요!’를 나도 한번 시도해 보겠다는 말이다.
적당히 남기고 흘리고 잊고 잃어버리는 낭비를 귀족적인 처신이라 여기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기에, 다소 과격하게 들리는 저 말을 처음 접했을 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렇게 물었다.
「뭘 뽑는다고?」
당황해하던 한스와 마델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렇게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나지만, 사용인들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서서히 알게 되었다.
‘뽕을 뽑는다’는 건 평민들 사이에선 당연한 생활 요령으로, 넉넉지 않은 저택의 재정이나 농가의 살림살이를 대비한 매우 능동적이고 융통성 있는 삶의 방편임을.
물론 귀족인 내가 평민들처럼 내놓고 본전을 뽑으려 들면 보나 마나 품위 없다는 평판을 얻거나, 몰락의 증거가 되어 동정이나 조소를 살 게 뻔했다.
하지만 평민들의 야무진 ‘뽕 뽑기’야말로 헐렁한 내가 앞으로 배워야 할 덕목이 아닌가 싶었다.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하지 못해 줄줄이 민폐만 끼치는 주제에 체면은 차려서 무엇 할까. 더욱이 내 머릿속 계획을 누가 들여다볼 것도 아니고.
그렇게 나는 제도 행을 앞두고 ‘본전 뽑기 리스트’를 작성하는 데 열중했다. 나에겐 이제 돈도 시간도 빠듯하기만 했으니.
물론 제도에 가는 가장 중요한 용건은 앤을 후원하기 위한 버섯 그림 전시를 여는 것과 아젤리아를 만나 이혼에 관한 담판을 짓는 것, 이 두 가지였다.
‘하지만 힘들게 제도까지 가서 그것만 하고 돌아오기는 아깝지. 알뜰하게 뽑고 또 뽑아야 한단 말씀!’
프러너스를 내조하느라 독실한 신자 노릇을 열심히 해 왔던 만큼, 친분이 있는 신전의 사제들을 만나 앓는 소리를 실컷 늘어놓아야겠다. 이혼하는 데 조금이나마 유리할지 모르니.
그리고 번화가에 가서 자잘한 볼일을 몰아서 보고, 새로 나온 버섯 세밀화 도록 주문서를 브린 앤 해밀턴 서점에 미리 보내 놓고…….
실은 내가 특히 고대하고 벼르는 일이 하나 더 있었다.
나한테는 결코 놓칠 수 없는 기회이자 커다란 의미가 있는 일이었지만, 남들이 알면 또 철없다고 혀를 찰 것 같아 은밀히 추진하기로 한 일.
특히 진한테는 절대 들키지 말아야지.
진이 알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특기인 미간 찌푸리기를 마음 놓고 해댈 것이 분명하니까.
정신없이 터지는 사건·사고 속에서도 전시 준비만은 차질 없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교계 최고 실력자에게 전시 준비를 부탁했으니.
급한 사람이 길을 찾는다고, 전시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내가 지난 생에선 이용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인맥 하나를 가까스로 떠올린 덕분이었다.
전도유망한 인재를 후원하는 버섯 부인의 첫 번째 전시는 제도 미용계의 쌍두마차로 일컬어지는 ‘살롱 드 밤비’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제도 귀족의 사교 활동은 헤어 살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내로라하는 가문의 귀부인이나 영애들이 평소 권력과 재력을 뽐내는 무대이자 수많은 소문의 진원지인 그곳.
마담이라 불리는 그곳의 책임자들은 콧대가 여간 센 것이 아니어서 아무 머리나 만지지 않았다.
그래서 사교계 위상이나 평판을 알아보려면 헤어 살롱에 예약을 넣어 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죄송한데 예약이 꽉 차서 오래 기다리셔야…….’
‘디자이너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
이런 반응이 돌아온다면 그 사람은 별 영향력 없는 쭉정이란 뜻이었다.
종종 누가 어느 헤어 살롱에 예약을 넣었다 퇴짜 맞았다는 소문이 한바탕 돌고는 했는데, 그럼 그 귀부인이나 영애는 그 해 사교 시즌은 조용히 칩거하는 편이 나았다.
제도에서 쌍벽을 이루는 헤어 살롱으로 ‘팔레 드 로잘린’과 ‘살롱 드 밤비’가 있었다.
제국 최고의 세도가인 카를슈테인 공작가의 안주인이었던 나는 살롱에 직접 행차하지 않고 이 대단한 마담들을 저택으로 오라 가라 했다.
로잘린은 화려하고 밤비는 우아했다. 나는 주로 밤비를 애용했다.
마담 밤비는 좀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북부 출신인 그녀는 전직 명문가 소속 기사였다.
출신이나 이력 때문인지 밤비를 향한 제도 미용계의 텃세가 매서웠다. 내가 밤비의 감각이나 능력을 높이 산 것이 그 텃세를 잠재우는 데 도움이 된 모양이었다.
내 이혼에 관한 이야기가 제도 사교계에 일파만파 퍼졌을 텐데도 밤비는 길게 묻지도 않고 이번 전시의 주관을 흔쾌히 맡아 주었다.
제도로 떠나기 전에 나는 플록스가 감금돼 있는 방에 들렀다. 사정사정해서 겨우 얻어 낸 기회였다.
그렇게 굵은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플록스와 마주하게 되었다.
금주 맹세를 깬 것 때문에 감금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마음고생을 해서인지 플록스의 얼굴이 매우 까칠했다.
그는 나를 보더니 퀭한 눈만 껌뻑거렸다. 창살 때문인지 억울하게 잡힌 불쌍한 야생동물 같아 보였다.
플록스는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레이디.”
“나한테 죄송할 거 없어요.”
“이혼 소송에 전시에, 레이디께 중요한 일들이 산더미인데 도와드리지는 못하고…….”
“지금 내 걱정 할 때예요? 플록스야말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저야 어차피 예전에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목숨이라……. 레이디도 들으셨지요? 제가 과거에 저지른 짓을요.”
“그래요. 방식이 바람직하진 않았지만 진의 말로는 참작할 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사람을 다섯이나 죽이고 어떻게 온전히 살아가길 바라겠습니까. 저는 그때 제 삶을 버렸습니다.”
아무리 봐도 순하디순한 사람인데 어쩌다 그런 일을 저지른 건지.
“진 보스가 노예상에 팔려간 제 동생들 일을 수습해 주셨기에,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살아 있는 겁니다. 그러니 제 목숨은 보스의 것이지요.”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 삶의 주인공은 의심할 나위 없이 나 자신이고, 세상은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태도로 살아가다 문득.
세상이 다른 이의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만들어 낸 간절한 이야기 속 조연이 아닐까. 방금 플록스의 말을 들으며 왠지 그런 생각을 했다.
지난 생에 지옥 같은 내 내면만 들여다볼 것이 아니라, 이렇게 다른 사람의 시각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괴로운 삶을 더 일찍 끝낼 수 있었을까?
어쨌든 그 해변에서 진이 죽지 않은 건 무척 다행한 일이었다. 플록스를 위해서도.
그리고 나를 위해서도.
“플록스, 소유권이 넘어간 사실은 모르나 봐요?”
“예?”
“그 목숨 내가 넘겨받았거든요. 이제 보스 거 아니고 내 거니까 함부로 다루지 말아요. 내가 데리러 올 때까지 거기 얌전히 있으라고요.”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당신 소원대로 황후를 확실하게 떼어 내고 진을 구할게요. 그러니 딴생각 말고 무사하기만 해요. 심심하면 버섯 도감 빌려 줄까요?”
* * *
나는 페가수스의 수행원 둘과 함께 제도 행 열차에 올랐다.
이미 편한 사이가 된 휴고와 이혼 추진단에 있던 막스가 이번 수행 임무를 맡았다. 둘 다 ‘형수님’을 연호하는 내 추종자들이었다.
진과 함께 객실을 쓰지 않으니 밤에 푹신한 침대에 누워 두 다리 쭉 뻗고 푹 잤다.
제공되는 식사도 훌륭했고, 독이 들어 있나 없나 안달복달하지 않고 느긋하게 먹을 수 있어 더욱 맛있었다.
열차란 이리도 편한 교통수단이었던 것을!
다만 짐 선반을 자꾸만 흘끔거리게 되고 음식을 괜히 휘젓고 싶은 충동이 인다는 후유증이 남았다.
휴우…… 편하고 쾌적한데 내 입에선 한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요즘은 이상하게 진만 생각하면 한숨이 나왔다.
사실 어젯밤 플록스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진과 맞닥뜨렸다. 몇 마디 투덕거리다가 찜찜한 기분으로 헤어졌다.
그래서인지 뭔가 싱숭생숭하고 나도 모르게 자꾸만 한숨이 나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좋게 헤어질걸.
하지만 무를 수도 없는 제도 행에 대해 자꾸만 우려를 늘어놓지 않나, 심지어 아직 저지르지도 않은 실수에 대해 미리 타박까지 하고.
사실 제도 행을 서두른 건 진을 하루라도 빨리 황후의 마수가 미치지 않는 곳으로 피신시키려는 이유도 있는 건데.
진 역시 내가 걱정돼서 하는 소리란 걸 알면서도 욱하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한마디 쏘아붙이고 말았다. 참을 걸 그랬지.
「당신, 신경 쓰여 미치겠어.」
나를 향한 건지, 아니면 스스로를 향한 건지 모를 역정을 내며 진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 마음에 밟혔다.
로시엔에 도착한 우리는 역에서 마차를 타고 페가수스의 제도 출장소로 갔다.
번화가에서 두 블록 정도 들어간 곳에 사무실과 숙소가 있었다. 숙소는 출장 온 직원은 물론 일반 투숙객도 받는 단출한 호텔이었다.
정보 길드의 숙소를 이용하는 건 여러모로 편리한 점이 많았다. 이런저런 일 처리를 손쉽게 의뢰할 수 있으니.
객실에 짐을 푼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티켓 한 장을 구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구하기 까다로운 티켓이라 어디에 어떻게 부탁할지 걱정했는데, 해결사 사무실이 코앞에 있으니 수월하게 해결됐다.
두 번째로 한 일은 내가 좋아하는 카페로 간단한 식사 겸 티타임을 하러 간 것이다.
카페 그린 테라스. 싱그럽고 화사한 정원을 바라보는 프라이빗 테라스를 여러 개 갖추고 있어 귀부인들이나 영애들이 즐겨 찾는 장소였다.
나 역시 좋아하던 곳이고 숙소에서도 가까워 오랜만에 한번 가 보고 싶었다.
아직은 내가 제도에 입성한 것을 떠들썩하게 알리고 싶지 않아 베일이 달린 모자를 쓰고 카페로 향했다.
테라스 하나를 차지하고 주문을 한 뒤, 나를 호위하기 위해 따라온 휴고와 막스에게 동석할 것을 권했지만 그들은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 그래서 차라리 마음 편히 쉬라고 밖으로 내보냈다.
주문한 티와 티 푸드를 맛보고 예쁘게 손질된 정원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어 들 때였다. 옆 테라스에 한 무리의 손님들이 들어오는 기척이 들렸다.
말이 프라이빗 테라스지, 덩굴식물이나 화병, 레이스 커튼 등으로 시선만 살짝 가렸을 뿐 옆자리의 기척이나 말소리는 충분히 들렸다. 오죽하면 테라스 카페에 가는 재미는 옆자리 수다를 엿듣는 것이라 했을까.
활기 넘치는 귀부인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내 테라스로 끊임없이 넘어왔다.
“내일 전시 오프닝 파티에 가실 건가요?”
‘전시’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버섯 그림 전시를 말하는 걸까?
“버섯 부인이라면 요즘 최고 화제인데 안 갈 순 없겠죠. 그림들의 몸값이 어마어마하게 뛰었다면서요?”
내 전시 초대장을 받은 귀부인들인 듯했다.
“흠, 이런다고 뭐가 바뀔까요? 결국 전시도 다 공작의 관심을 끌려는 의도겠죠?”
“공작부인이 이혼을 원한다는 말이 있던데요? 내연남이 있다는 소문도 있고. 순진한 여자들이 도리어 큰 사고를 친다더니.”
“아닐걸요? 공작부인이 이혼을 안 해 줘서 공작이 골머리를 앓는다던데요? 공작이야 후계자까지 가진 내연녀를 하루속히 들이고 싶겠죠.”
“공작부인도 참, 이기적이네요. 후사를 잇지도 못했으면서. 카를슈테인이 웬만한 가문인가요. 이쯤 되면 알아서 비켜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대화는 전시 이야기에서 이혼 이야기로 바뀐 지 오래였다.
“그 내연녀가 그렇게 불안해한대요. 공작부인이 배 속의 아이를 해코지할까 봐. 공작부인도 만만치 않은가 봐요.”
“어머, 그럴수록 남자들은 더 싫어한단 걸 모르나요. 후사도 잇지 못하면서 투기만 부리면 정이 뚝 떨어질 텐데.”
“하지만 공작부인이 공작저를 나간 지가 꽤 되었다던데. 그럼 마음을 정리한 게 아닌가요?”
“여러분, 제가 확실한 소식통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공작부인은 절대로 이혼하지 않을 작정이래요.”
“확실한 소식통이요?”
“그 웰츠 백작부인이요. 그이 말에 따르면 공작부인은 공작가 없이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 필사적으로 버틸 거라던데요?”
“올랜도라면 정확하겠네요. 공작부인의 시녀나 마찬가지였으니.”
“이혼을 하든 하지 않든, 차지하고 있던 명예직들은 양심상 내려놔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래도 살롱 드 밤비를 빌린 걸 보면 아직은 건재하다고 봐야 하나?”
“마지막 발악 아닐까요. 마담 밤비가 참으로 난처했겠네요.”
버섯 부인의 인기에 취해 잠시 잊고 있었다. 이곳이 전쟁터보다 더 살벌한 제도 사교계라는 것을.
너의 추락은 나의 기회.
내일 전시 오프닝 파티가 그 기회를 노리는 이들의 각축장이 될 거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그 열기로 손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