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너의 추락은 나의 날개라는 이들에게 2022.05.09.
오후에 있을 전시 오프닝 파티를 앞두고 나는 지금. 마담 밤비에게 머리채를 맡긴 채 앉아 있다. 밤비에게 머리를 부탁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비용이 워낙 고가인 데다 돈이 있다고 무조건 가능한 일도 아니어서 망설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전시를 밤비의 살롱에서 열면서 밤비의 머리를 하지 않는 것도 우습고. 이래저래 고민하고 있는 내게 밤비가 먼저 제안했다. 그것도 자신이 내 버섯 그림을 무척 갖고 싶으니 그 대가로 헤어 스타일링을 받아 주면 안 되겠느냐는 식으로. 여러 의미에서 참 대단한 사람이었다.
“헤어 커미션이 밀려 있지 않나요? 내게 이렇게 많은 시간을 내주어도 괜찮아요?”
“어머 레이디, 이래저래 서운한 말씀이네요. 저는 이제 마음 가는 대로 커미션을 고르거나 거절할 수 있을 만큼은 명성을 갖추었답니다.”
밤비는 여유롭게 내 머리를 매만졌다.
“자긴 내가 그렇게 좋아요? 나한테 이렇게 잘해 주는 이유가 뭐예요?”
그녀가 고마우면서도 쑥스러워 나는 농담처럼 물었다.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 줄곧 궁금하던 점이었다.
“아, 그거요, 제가 보기와 달리 옹졸한 사람이어서요. 배경을 보는 이에겐 배경으로, 돈을 보는 이에겐 돈으로, 실력을 보는 이에겐 실력으로. 딱 받은 대로만 돌려주는 못된 습성이 있답니다.”
하여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밤비의 실력만 본 덕분에 제국 최고의 헤어 스타일링을 돌려받게 된 나는, 당당히 머리를 치켜든 채 결전의 장소로 향했다. 전시장으로 들어서자 오프닝 파티를 즐기고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단숨에 내게 몰렸다. 찾아 준 이들에게 작가로서 수수한 감사 인사를 전한 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참으로 어색하고 불편한 시간이었다.
“그림 실력이 이렇게 뛰어나신 줄은 몰랐습니다.”
“언제부터 버섯에 관심을 가지셨어요?”
“독특한 염료를 쓰신 것 같아요. 느낌이 참 신비롭네요.”
이런 호의적인 인사도 물론 들었다. 하지만 모른 척하려 해도 자꾸만 귓속을 파고드는 악의적인 목소리도 있었다. 큰 소리로 쑥덕거리는 그들은 물론 내가 들어도 상관없다는 심보였다. 그들 중에 어제 카페에서 내 이야기를 떠들던 이들도 보였다.
“공작부인의 드레스 봤어요? 확실히 유행이 지났죠? 어쩜 패션계의 표준이던 분이. 정말로 시골에서 버섯만 열심히 그리셨나 봐요.”
들으라는 듯 거리낌 없이 하는 말을 듣고 어이쿠 싶었다. 저 말은 자신이 하수라는 걸 스스로 광고한 것이나 마찬가지기에. 제대로 된 제도 귀족들은 몸단장의 완성이 헤어스타일이라는 사실쯤은 잘 알고 있었다. 드레스나 구두, 보석 등을 따지는 건 신참내기나 촌뜨기들이 하는 짓이었다. 저 귀부인이 알맹이인지 쭉정이인지 판단하려면 피부나 머리를 본다. 그만큼 단기간에 눈속임이 어려운 부분이기 때문이었다. 이름 있는 헤어 살롱은 예약하는 것 자체가 무척 어려웠다. 특별한 일이 없을 때에도 고가의 비용을 들여 꾸준히 관리를 받으며 친분을 쌓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몸값이 비싼 마담의 일정표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어야 머리를 들이밀 수 있었다. 평소엔 재력, 특정한 날엔 권력이 필요한 일이란 얘기.
“게다가 머리 모양도 좀 이상하지 않은가요?”
주변에서 별 반응이 없자 방금 그 영애가 한마디 더 얹었다. 이젠 누구도 그녀를 구제할 수 없으리라. 안목이 부족한 것을 만방에 떠든 것도 모자라 감히 밤비의 스타일링을 공격하다니. 이제 그녀는 가는 곳마다 자기 주변에만 사람이 없는 기현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아직 앳돼 보이는데, 안됐네. 사교계에 나오자마자 매장 각이라니. 어쩌면 누군가 경험 없는 그녀를 악의적으로 이용했을지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부전승을 거둔 것에 허탈해할 새도 없이, 이번엔 꽤 도전적인 눈빛을 한 무리들이 나를 둘러쌌다.
“레이디, 축하드려요. 혹시 절 기억하시나요?”
그 무리의 리더인 듯 보이는 레이디가 웃으며 물었다. 사실 나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아도 내가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기에, 저런 질문이 가장 긴장됐다. 그래도 자세히 보니 다행히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헤더임 후작가의 레이디시군요.”
“기억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곧 세인트 안젤라 자리에서 내려오실 거라고요? 설마 스캔들 때문인가요?”
내가 잠자코 있자 곁에 있던 다른 이가 거들었다.
“스캔들이 아니라 이혼 문제 때문 아니신가요? 신전과 이혼은 아무래도 같이 가기 힘든 주제이긴 하죠.”
기운이 넘치는 나이라서 그런가, 돌려 말하려는 성의조차 없이 직진으로 들이박는구나. 신전에서 그와 관련해 아무런 기별이 없었으니, 저 말은 그저 나를 도발하려는 거짓말이다. 내가 발끈하면 ‘어머, 제가 잘못 알았나 보네요’ 하고 웃으면서 내 속을 긁으려는 속셈.
“물러나야 할 때가 되면 당연히 물러나야겠죠. 신전의 사제님들이 저와 정이 너무 많이 들었나 봐요.”
“아직은 때가 아니란 말씀이세요?”
당장 물러나라는 소린데 못 알아듣는 척하니 따지듯 물었다. 내가 그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그녀는 걱정스럽다는 표정과 목소리를 가장하며 말했다.
“무엇이든 알아서 물러나시는 게 모양새가 좋죠. 억지로 끌어내리는 건 시키는 사람에게도 당하는 사람에게도 못 할 짓이잖아요.”
후우……. 물론 여기엔 이 레이디처럼 도전적인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 버섯 부인에 대한 호기심이나 미술품 투자에 대한 관심에서 온 이도 있었고, 화가로 변신한 내 모습에 놀람과 부러움을 표하는 이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가장 응대하기 피곤하면서 가장 눈에 띄는 부류가 바로 이처럼 나의 추락을 자신이 올라갈 기회로 삼으려는 이들이었다.
‘하긴, 귀족 여성에게 주어진 자리가 몇 개 없으니 이 사달이 나는 것이지.’
그들의 뻔뻔하고 악착스러운 태도에 염증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귀족이어도 여성이 누릴 수 있는 명예는 매우 한정적이었으니. 기껏해야 신전에서 귀부인에게 수여하는 상징적인 성녀 지위인 ‘세인트 안젤라’라든지, 황후나 황태후의 말벗 역할인 ‘달리아’가 명예직의 전부였으니 경쟁이 치열할 만도 했다. 원래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을 끌어내려야 다른 사람에게 기회가 돌아가니, 현임 ‘세인트 안젤라’인 나를 깎아내릴 구실을 찾아 저토록 눈을 번뜩이는 것이다. 사실 ‘세인트 안젤라’는 이제 내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수프도 못 끓여 먹을 그까짓 말라비틀어진 가짜 성녀 딱지는 아무나 물어 가라지. 다른 때라면 무시하면 그만인 가소로운 도발이었지만, 나는 지금 공작부인이 아니라 화가 레이디 앰브로시아, 버섯 부인으로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이다. 앤의 입학 청원 서명을 받기 위해. 그러니 이런 도발을 얌전히 넘길 생각은 없었다. 남의 업장에 와서 산통을 깨도 유분수지. 그럼 받은 대로 똑같이 응수할까. 아니면 더 과격하게 샴페인이라도 끼얹을까. 아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하는 게 가장 효율적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레이디 헤더임, 차기 세인트 안젤라를 선발할 때 선임자의 의견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는 걸 아나요?”
잠시 표정이 굳어졌던 헤더임이 곧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그건 명예롭게 퇴임했을 때 얘기겠죠. 그런 말로 절 위협하시는 건가요?”
“내 경험이나 조언이 도움이 될 거란 얘기예요. 차기 안젤라 후보로 세 명 정도 물망에 올려놓고 있답니다. 레이디도 그중 한 사람이고요. 솔직히 당신은 꽤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요.”
“…….”
“좀 우스운 얘기지만, 머리를 밝은색으로 염색하는 건 어떨까 싶네요. 사제도 사람인지라 개인적인 취향을 무시할 수 없답니다. 성직자들의 경직된 미적 기준에 대해서는 짐작하고 있겠죠?”
나는 손으로 내 머리칼을 살짝 쓸었다. 역대 세인트 안젤라들은 모두 밝은 금발이나 은발이었다. 레이디 헤더임의 머리색은 어두운 갈색이었다.
“그래요, 머리색이 조금 걸리는 것 말고는 당신이 셋 중 가장 유력해 보입니다.”
지난 생을 통해 내가 터득한, 경쟁에서 손쉽게 우위를 차지하는 법. 그것은 피 튀기는 경쟁에 똑같이 뛰어들기보다 경쟁을 지켜보고 인정해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즉 우위나 승부를 다투기보다 순위를 정해 주고 승부를 가려 주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다. 최고를 알아보고 인정해 준 나는 저절로 최고보다 더 위에 선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잘난 사람들 중에 누가 가장 잘난 사람인지 판별해 주는 내가 더 잘난 사람이란 소리. 사람들은 어느덧 내 하찮은 인정을 얻기 위해, 내 별것 아닌 조언을 듣기 위해 집착하게 되리라. 이렇게 공정한 평가와 인정이라는 무기를 적절히 사용하며 내게 도전해 오는 이들을 하나하나 응대했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주변을 주의 깊게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혹시나 올랜도가 오지 않을까 해서. 평소 같으면 아마 가장 먼저 달려와 자기 일처럼 챙겼을 그녀인데.
‘오늘은 오지 않으려나 보네.’
포기한 내가 사교계 패션 아이콘의 지위를 넘보며 덤비는 한 영애를 차분히 손봐주고 있을 때였다. 내 눈에 올랜도의 머뭇거리는 그림자가 포착됐다. 조용히 다가가자 버섯 그림 앞에 선 올랜도가 얼빠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이런 걸로 보상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당신은 원래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잖아.”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올랜도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래요, 허술하고 미숙한 나도 찾아보니 그럭저럭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 있더라고요. 당신은 아마 나보다 더 잘해 낼 거예요.”
“해 내긴 뭘 해 낸다는 건지.”
“남편을 떠나 자유롭게, 조금 더 나답게 사는 일.”
올랜도가 내 손을 뿌리쳤다.
“아니, 나는 남편을 절대로 안 떠나. 당신처럼 가만히 앉아서 다 빼앗기지 않을 거라고. 멍청하게.”
* * * 앤의 칼리지 입학 추천 서명을 충분히 확보한 걸 확인한 나는 전시회장을 나섰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 오프닝 파티 이후로는 밤비가 알아서 관리해 줄 것이다. 올랜도 때문에 술이 심하게 당겼지만, 지체할 겨를이 없었다. 지금은 그런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럼 지금이 어떤 때냐고? 어떤 때긴. 뽕 뽑을 때지! 이 머리가 어떤 머리인가. 그 유명한 마담 밤비가 손수 만져 준 머리 아닌가. 이 초호화 머리가 망가지기 전에 최대한 본전을 뽑아야 하리. 기왕이면 보는 눈이 많은 번화가에서의 용무부터 몰아서 보고, 어차피 베일을 써야 하는 신전에서의 일정은 뒤로 팍 미루고……. 어떻게든 내일 저녁까지 버텨서 당당한 머리로 그분을 영접하러 가리라! 그분이 누구시냐. 전설의 배우, 제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배우, 아름답고 기이하고 위대하신 배우, 미스터 N이시다. 내가 제도에 오며 은밀히 고대하고 벼르던 일이 바로 이 전설의 배우가 주연을 맡은 전설의 연극 ‘장화 신은 야수’ 카이저 3년 판 무대를 보는 것이었다. 제도에 도착하자마자 구입을 의뢰한 것도 내일 저녁 페레티 극장에서 상연하는 이 연극의 특별석 티켓. 그리고 기왕이면 제대로 단장했을 때 아젤리아를 만나면 좋겠다는, 속물적인 생각도 했음을 고백한다. 다행히도 어떻게 아젤리아와 접촉하면 좋을지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밤비의 작품이 흐트러지지 않게 조심조심 시내에서 볼일을 보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 아젤리아가 호텔 로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원대로 머리 본전은 확실히 뽑게 되었다.
“레이디 앰브로시아, 연락도 드리지 않고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나를 명확하게 앰브로시아로 지칭하는 사람은 아직 많지 않은데. 그녀의 바람은 분명하게 파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