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전남편의 아내가 되어 줘 (47/110)


#47화. 전남편의 아내가 되어 줘
2022.05.13.


이전 생이었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걸음.

자신과 아이를 해코지하려고 눈이 시뻘게서 노리고 있을 여자를, 불륜 관계인 남자의 아내를 만나기 위해 이렇게 직접 행차할 리 없었다.

아젤리아의 마음이 그만큼 조급하고 초조하다는 증거.

짐작했던 대로 프러너스와 아젤리아의 관계에 변화가 생긴 게 분명했다.

나로서는 프러너스가 이혼만 순순히 해 줬어도 이번 생에 더는 아젤리아를 만날 생각이 없었다.

지난 생엔 늘 내가 아젤리아를 만나고 싶어 안달을 했다면, 이번 생엔 아젤리아가 나를 더 만나고 싶어 하는 상황이 된 걸까.

아젤리아는 참 뭐랄까, 만인의 첫사랑처럼 생긴 여자였다. 첫사랑 상이라고 해야 하나?

첫사랑에 관한 소설책 표지로 그녀의 초상화나 사진을 쓰면 딱 들어맞을 듯한, 그 시절 순수한 감성을 일깨우는 구석이 있었다.

저절로 그녀의 배에 눈길이 갔다. 아직은 자그마하고 모양이 예뻤다.

배 속의 저 아이가 생기던 날 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장면을 전생에는 몇 번이고 음탕하게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잘 그려지지 않았다.

내가 아는 프러너스의 모습은 그저 냉랭하고 날이 서 있어서 저렇듯 따뜻하게 꼬물거리는 생명이 그에게서 잉태될 수 있다는 게 상상이 잘 안 됐다.

그에게도 정염을 억누르지 못하고 뜨겁게 달아오른 허술한 모습이 있을 테지.

다만 아젤리아는 그 모습을 알고 나는 알지 못할 뿐.

뜨거운 프러너스라니, 내게는 뜨거운 물고기처럼 괴이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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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갑자기 찾아와서 당황하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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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이리로 오게 해서 미안해요. 기별을 줬더라면 내가 그쪽으로 갔을 텐데요.”

나는 아젤리아를 편한 자리에 앉게 했다.

긴장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깨물던 그녀는 결심이 선 듯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두 손을 꼭 맞잡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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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도 없는 얘기로 시간을 빼앗지 않을게요. 제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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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괜찮다면 나도 괜찮아요. 너무 흥분하진 말고요. 몸에 좋지 않으니까.”

나는 최대한 다정하게 들리도록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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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던 것과는 많이…… 다르신 것 같아요.”

어디서 무슨 얘길 들었기에. 지난 생엔 듣던 대로 악독한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이번 생엔 아무것도 안 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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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께서 친절하고 소탈하게 대해 주시니, 저도 솔직하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계속 얘기해 보라는 뜻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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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그이를 붙잡고 계신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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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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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가졌다는 얘기를 듣고 당장 저를 공작저로 데려가고 싶어 했던 그이가 자꾸만 날짜를 미루고 있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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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막았다고 하던가요, 프러너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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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아젤리아가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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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는 어떤 이유인지 말해 주지 않았어요. 그냥 저와 아이를 위해서라고만. 그러니까 기다려 달라고만…….”

하아, 프러너스 이 인간, 진짜 이유를 말할 수 없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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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떳떳하지 못한 것도 알고, 레이디께서 상심하셨을 것도 아는데…… 직접 레이디를 만나 뵙고 부탁드리고 싶었어요. 그이를 그만 놓아 달라고요. 저를 욕하셔도 좋아요.”

아, 정말 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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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께서 모르시는 게 있어요. 우리는 정말 사랑했어요.”

그 얘기라면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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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대 공작께선 제 출신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저를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으셨죠. 그이는 당신과 혼인하라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어요. 거기에도 이유는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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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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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존폐가 달린 심각한 이유라고 했어요. 이유를 알면 제가 위험해질 수 있기에 당장 설명해 줄 수는 없다고 했지만, 저는 그 말을 믿어요.”

차라리 슈발럼이 쓴 기사를 믿겠소.

제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면 작위나 가문을 물려받지 못할까 봐 겁이 난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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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배경을 등에 업고 그이를 가로챈 당신을 미워했어요.”

그녀의 눈망울이 촉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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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그동안 우리가 쌓아 온 소중한 시간을 아무것도 아닌 양 무시하고 너무나 쉽게 그를 차지하더군요. 그래서 당신을 원망한 적도 있어요.”

하말린 속담 중에 ‘음지가 양지 되고 양지가 음지 된다’는 말이 있다.

세상은 돌고 도는 것.

그러니까 당신이 공작 부부 사이에 끼어든 것이 아니라 내가 멀쩡한 연인 사이에 끼어든 것이다, 이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얄미운 나쁜 년이 사실은 나였다고?

뭐, 아무래도 좋다.

이제는 그 일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누가 누구 사이에 끼어든 것인지 시비를 가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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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람된 말씀이지만, 레이디께서도 잘 아시잖아요? 사랑 없는 관계가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저도 워릭 백작과 살며 경험해 봐서 알거든요.”

아젤리아가 진심 어린, 그래서 오히려 빈정이 상하게 하는 얼굴로 말했다.

네, 정말 괴롭습니다. 나도 싹 정리하고 싶다고.

사랑은 고사하고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예의도 없는 그런 관계를.

그런데 프러너스 그 변태 같은 인간이 이상한 오기를 부리고 나서는 바람에 나도 골치가 아파 죽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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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괴로움을 먼저 겪은 사람으로서 감히 장담하자면, 결단을 내리시는 게 레이디를 위한 길이기도 합니다. 분명 당신께도 진정한 사랑이 찾아올 거예요. 그러려면 먼저 놓으셔야 해요.”

아이고, 머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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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지옥 같잖아요. 마음이 없는 사람을 바라보는 일.”

이 어이없는 훈수도 그러려니 넘어가……자니 조금 억울했다.

왜 사랑 없는 관계라 단정하는가.

한쪽이라도 사랑했다면 사랑이 아닌가? 워릭 백작은 아젤리아를 사랑했을지도 모르잖아?

워릭 백작 사정이야 속속들이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나는, 프러너스를 사랑했다.

실은 그의 번드르르한 겉모습이나 이미지를 사랑했을 뿐인지, 그의 배경이나 지위를 사랑한 건지, 그 부분은 지금에 와선 헷갈리지만.

여하튼 그를 사랑해서 구애했고 결혼한 것은 분명했다.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을 뿐.

하지만 잠시 흥분하고 보니, 그 역시도 지금은 중요치 않았다. 결과적으로 사랑이 식었고, 사랑 없는 관계가 된 것이 맞으며, 이제 그 관계를 끝내고 싶으니까.

그런 시답잖은 과거보다 지금 당장 내게 닥친 더 시급한 문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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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치없지만 레이디께 부탁드립니다. 힘들어하는 그이를 놓아주세요. 원망은 제가 다 듣겠습니다.”

저렇게 살살 긁으며 질척거리는 아젤리아에게 뭐라고 말하느냐는 것.

사교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말 속의 말을 알아채는 훈련을 해야 한다. 들리는 대로만 들으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니까.

자신이 원하는 걸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애걸하며 접고 들어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모습을 보니 아젤리아도 보통은 아니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진실이 무엇인지 밝히는 게 아닐 터.

어쨌든 아젤리아를 움직여 이혼을 해 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 지금은 아젤리아를 띄워 주고 등을 떠밀어 주어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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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을 들으니 내 마음이 무척 아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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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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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얘기를 듣고 큰 깨달음을 얻어 생각이 바뀌었달까요. 프러너스와 이혼하고 싶어요. 그러니 당신이 좀 도와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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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제가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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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혀 개의치 않을 테니 당장 공작저로 거처를 옮겨요. 당신은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믿을 건가요?”

아젤리아가 잠시 주저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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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프러너스는 나를 믿지 못할 가능성이 커요. 그러니 그를 귀찮게 하지 말고 거처부터 조용히 옮기도록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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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될까요? 그이가 싫어하면 어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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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할 이유가 없잖아요? 어차피 나 때문에 주저하던 일인데. 드러내 놓고 기뻐하기 힘든 상황이라 그렇지, 아마 그도 내심 반가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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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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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생각해요. 카를슈테인의 후계자가 될 아이잖아요. 아이의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당당해져야 해요.”

나는 마구 바람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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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공작부인 지위를 달라고 한시라도 빨리 요구하세요. 당신은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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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요? 제 입으로 그런 걸 요구하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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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만약 직접 요구하기 힘들다면 가신들부터 당신 편으로 만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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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들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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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니 프러너스나 당신이 직접 나서는 것보다는 가신들이 추대하는 게 모양새가 더 좋긴 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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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들이 저같이 출신도 한미한 굴러온 돌을 쉽게 받아들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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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당당해야 그 아이도 당당한 공작가의 일원이 될 수 있다고 했잖아요. 차기 공작위와 가주직을 차지할 사람이 누구인지 가신들에게도 일깨워 줘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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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들을 움직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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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공작부인으로 승인받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다면 아이가 태어나는 즉시 후계자 승인부터 받아내도록 하세요. 그러기 위해서라도 가신들을 당신 편으로 만들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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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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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요 가신들의 이름과 특징을 메모해 줄게요. 공작저 내에서 당신의 세력을 차근차근 넓혀 가는 거예요.”

작위 승계 싸움이라. 당신도 이제 골치 좀 아파야 할 거야.

내연녀로 살 때는 공작의 애정만 있으면 됐겠지만, 공작부인으로 살아가려면 그것만으로는 안 된답니다, 아젤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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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저를 도와주시는 건가요?”

상대가 갑자기 친절하게 나오면 찜찜하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까부터 아젤리아의 표정이 무언가 못마땅한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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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긴요. 당신이 내게 진심을 털어놓았으니 나도 그 마음에 보답하고 싶은 거지요. 당신이 해 준 조언을 듣고 많은 걸 깨달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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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셨군요. 제가 주제넘은 소릴 한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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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리가요. 내가 앞으로 행복해진다면 그건 많은 부분 아젤리아 덕분이랍니다. 고마워요.”

나는 입으로 다정한 호선을 그리며 말했다.

진심이었다. 아젤리아가 프러너스 그 돼먹지 못한 쇠꼬챙이를 사랑으로 기꺼이 떠맡아 준 덕분에 새 삶을 얻을 수 있었으니.

자, 이제 둘이서 아름다운 미래를 만들어 가세요. 전 부인이 이 정도 떠먹여 줬으면 그다음은 둘이 알아서 잘해라, 제발.

애매한 표정으로 내 말을 한참 곱씹던 아젤리아가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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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부디 거절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친한 척 훅 다가오는 게 불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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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속의 아이에게 이름 하나 지어 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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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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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주시면 너무나 영광되고 기쁠 것 같아요.”

하아, 이 첫사랑 강적이네. 아이를 상대로 치사하게 굴기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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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내가 이름을 지어 줄 자격이 있을까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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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은 충분하세요. 누구보다 이 아이의 미래를 걱정해 주시잖아요.”

피곤하다. 더 실랑이하기도 입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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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그렇다면…… 딸이면 아리스, 아들이면 스타토가 어떨까요? 물론 다른 이름을 지어 준대도 전혀 섭섭해하지 않을 테니 참고만 해요.”

얘야, 커서 누군가의 첫사랑 되고 공작가도 세상도 다 가지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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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나, 너무 예쁜 이름이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레이디 앰브로시아.”

아젤리아가 돌아간 후 잠시 멍하게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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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당한 거지?’

상대방의 남편과 불륜을 저질러 생긴 아이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하는 건 진심을 떠보려는 명백한 시험이었다.

하얀 건지 까만 건지 헷갈린다. 그녀의 머릿속.

그래, 아젤리아 기 좀 살려 주지, 뭐.

이혼만 할 수 있다면 그깟 아이 이름쯤이야. 둘째, 셋째도 지어 주마.

날 밟고 가라. 공작저 깊숙한 곳으로.

우아하게 이름까지 지어 주니 아젤리아는 그제야 안심한 듯한 표정이었지. 덕분에 의욕을 얻은 아젤리아가 이혼 성사를 위해 큰 활약을 펼쳐 주리라 믿는다.

굴욕을 미래를 위한 투자로 미화시키며 어수선한 마음을 다잡은 나는 거울에 머리 상태를 비추어 보며 궁리했다.

어쨌든 제도에 온 가장 큰 목적인 전시와 아젤리아와의 담판을 모두 해치웠으니, 이제 남은 큰일은.

그분, 이상하고 아름다운 미스터 N을 영접하는 것!

그 일을 생각하니 조금 가라앉았던 기분이 급속히 고조됐다.

그때까지 남은 시간엔 뭘 할까? 머리 망가지기 전에.

이런저런 생각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을 때였다. 불청객이 느닷없이 찾아온 것은.

부부나 연인이 동반하지 않고 각기 내외해 시차를 두고 행차하는 것이 요즘 귀족 사회의 풍속인가.

진의 말대로 이 불청객은 업무로 매우 바빠 이런 곳에 일일이 행차할 위인이 아니었다.

하긴 그 바쁜 와중에 외도도 하고 후계자도 만들 만큼 부지런한 분이기도 하지.

아젤리아가 여기 왔다는 걸 알고 쫓아왔나? 그녀가 무시무시한 행동력을 발휘해 벌써 공작가로 쳐들어갔을 리는 없고.

대체 여긴 왜 왔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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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적반하장으로 프러너스가 객실을 한번 둘러보더니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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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에서 운영하는 더 좋은 호텔도 있고, 그보다 더 좋은 저택을 놔두고.”

기껏 입실을 허락했더니 저런 트집이나 잡고 있었다.

내가 그의 입실을 허락한 건, 그동안 내 입장을 그에게 똑 부러지게 전하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이 들어서였다.

생각해 보니 그와 이혼하겠다면서 엉뚱한 핑계를 대거나 엄한 사람 뒤에 숨으며 정작 그를 피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이번엔 프러너스를 정면으로 마주하자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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