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뜨거운 왕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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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뜨거운 왕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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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뜨거운 왕녀님
2022.06.06.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요, 무정하신 전하! 왜 이렇게 늦은 거예요? 벌로 그 도톰한 입술을 확 삼켜 버릴까 보다.”
하말린의 탄탈 항에 도착하자마자 일어난 일이었다.
호화롭게 장식한 우차에서 웬 미녀가 튀어나오더니, 진의 목에 매달리며 저렇게 다다다 쏟아놓는 통에 얼이 나갈 지경이었다.
헐벗은 차림새지만 그녀가 꽤 높은 신분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드레스의 디자인과 옷감이 예사롭지 않았고, 장신구도 희귀한 원석이나 금속을 사용해 정교하게 만든 것들이었다. 매끈한 초콜릿색 살결은 오랫동안 공들여 관리한 태가 났다.
매력적인 얼굴에 넘치는 당당함이 또한 내 짐작을 뒷받침해 주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제국어로 인사를 시작하더니 미묘한 부분에서 하말린어로 바꾸어 말했다.
그녀의 거침없고 아슬아슬한 언행에 여독으로 다소 멍해 있던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야 당연히 하말린어로 뭘 삼킨다고 말한 뒷부분까지 모두 알아들었다.
대외적으로는 하말린어를 잘 모르는 것으로 돼 있지만 실은 유창한 실력을 지닌 진도 물론…….
생각해 보니 주변에 있는 하말린 사람들도 모두 들었을 텐데, 다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우리 쪽 사람들만 얼굴을 붉히며 아무것도 못 본 체하고 있었다.
그녀는 언어 표현만큼이나 신체 표현도 아슬아슬했다. 그녀의 아름답고 풍만한 곡선들이 진의 팔과 가슴을 마구 짓눌렀다.
아니, 내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그녀의 곡선 아래 진의 근육들이 눈치 없이 버티고 있는 건지도.
여하튼 진을 애마나 애견인 양 거리낌 없이 껴안고 비벼대는 저 하말린 여인은 대체 뉘신지?
“모얌, 적당히 해.”
진의 무감한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저러니 내가 이것저것 시도했을 때 되지도 않는 유혹 집어치우라며 콧방귀를 날렸던 거군.
“하여간 제국의 도련님은 지나치게 금욕적이라니까.”
모얌이라 불린 여자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깔깔거리며 하말린어로 말했다.
“푸흡.”
나는 제국의 방탕 황자가 금욕 도련님으로 둔갑하는 순간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 웃음소리에 모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하말린어를 할 줄 아나 보네요? 누구죠? 처음 본 얼굴인데?”
그녀가 진을 올려다보며 제국어로 물었다.
“우선 이 목부터 놓지. 이쪽은 하말린어 통역관으로 동행한 앰브로시아 후작가의 레이디. 이쪽은 하말린의 왕녀 모얌 오쿨루스.”
아하, 진에게 엄청난 호감을 품고 있다는 하말린 왕가의 일원이시구나. 나는 하말린 식으로 양손을 가슴에 모으고 인사했다.
“로제트 앰브로시아입니다. 부족한 재주지만 양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왕녀는 이리저리 탐색하더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말했다.
“흐음, 지난번의 청년 통역관이 귀여웠는데. 후작가면 꽤 상류 귀족인데 하말린어는 뭐 하러 그렇게 열심히 익히셨지? 정말 통역관 맞아요?”
“예, 통역관 맞습니다. 개인적으로 하말린에 꼭 와 보고 싶기도 했고요.”
“아무리 그래도 한참 만에 오는 거면서 새 여자를 달고 나타나?”
“…….”
저, 방금 그 말은 보통 속으로 하는 거 아닌가요? 시한폭탄 같은 왕녀의 언행에 다들 어찌할 바를 몰라 눈치만 살폈다.
하말린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걸로 돼 있는 진은 피곤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왕녀의 직설적인 화법이 익숙지 않아 처음엔 좀 당황스러웠지만, 가만히 보니 악의를 품고 있는 건 아닌 듯했다. 두 눈에 호기심이 가득했으니까.
“여긴 왜 오고 싶었는데요?”
왕녀가 다시 내게 물었다.
음, 진짜 해답이 여기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미고 얘길 할 수는 없고.
“제가 그…… 버섯에 관심이 많아서요. 하말린은 버섯 천국이라고 들었습니다.”
따뜻한 기후와 ‘골든 레인’이라고 불리는, 이곳에만 있는 기상 현상 때문에 이 땅에서 나는 모든 것이 풍성하다는 얘기를 하말린어 수업 시간에 들은 기억이 나서 얼른 둘러댔다.
실제로 이곳의 버섯들을 관찰하고 그릴 계획도 있었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버섯? 버섯이라고 말한 거 확실해요? 단어 헷갈린 거 아니고? 그러니까 아쿰? 버섯?”
“네, 아쿰.”
“정말로 요리해서 냠냠 먹는 버섯? 버섯 비슷하게 생긴 다른 거 아니고?”
“냠냠 먹을 수 있는 식용 버섯이 있고 먹으면 큰일 나는 독버섯도 있지요. 버섯 연구가 제 취미입니다.”
“세상에 많고 많은 재미난 것 중에 버섯이라니. 레이디 앰브로시아의 취미도 참 유별나네요.”
당신보다 유별날까요. 나는 양쪽 입꼬리를 힘껏 끌어올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가만, 버섯? 귀족 레이디에다 버섯이라면…… 당신 혹시 버섯 부인?”
나는 이역만리에서 튀어나온 ‘버섯 부인’이란 소리에 너무 놀라서 숨이 턱 막힐 뻔했다.
“왕녀께서 어떻게 그걸……?”
“맞구나! 역시 내 촉이란. 당신이 그 유명한 버섯 부인이라니!”
버섯 부인의 유명세가 이곳 하말린까지 알려질 정도라고?
“너무 놀랄 것 없어요. 내가 이래 봬도 하말린 최고 정보통이라고요. 특히 제국의 사교계에 대해선 모르는 게 없답니다. 와, 제국 사교계의 유명 인사를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정말 꿈만 같아요!”
나야말로 꿈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잠깐, 버섯 부인이라면 그…….”
왕녀가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해 다음 말을 기다리며 귀를 기울였다.
“……아, 아니에요.”
“……?”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고요. 당신한테 물어 볼 말이 아주 많거든요.”
처음의 탐탁지 않아 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나를 보는 왕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참, 당신 말대로 양국의 평화에 기여하고 싶다면 통역해야 할 말과 통역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구분하도록 해요.”
왕녀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며 눈을 찡긋했다.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지만 저 하말린 왕녀의 못 말리는 솔직함이 심히 걱정스러웠다. 내가 통역을 하지 않아도 진은 모든 걸 알아듣는데.
악의 없이 솔직한 사람을 속이는 건 영 탐탁지 않았다. 제발 왕녀가 스스로 말을 좀 가려서 하기를.
“그럼 왕궁에서 다시 만나요. 가는 동안은 말이 필요한 일이 별로 없어서.”
왕녀는 이렇게 말하며 진을 끌고 가장 화려한 우차에 오른 뒤 출발했다.
한바탕 돌풍이 휩쓸고 간 느낌이었다.
나한테 아무리 궁금한 게 많아도 우차를 함께 타고 가자고는 않는구나. 나는 반쯤 혼이 나간 채 그들이 탄 우차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와 플록스 등 나머지 사람들은 수행원용 우차를 타고 그 뒤를 따랐다.
달리는 길 양쪽으로 하말린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햇볕만 차양으로 가린 우차로 달콤한 바람이 드나들고 싱그러운 풀 냄새가 풍겨 왔다.
“레이디, 이곳의 자유분방함이 낯설고 불편하시지요?”
플록스가 내 눈치를 살피며 어색하게 물었다.
“익숙하진 않아도 그게 이곳의 풍속이라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편이 낫겠죠. 더군다나 악의 없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렇게 이해하신다면 다행입니다. 하말린 사람들의 기질이 예법에 길들여진 제국인들 눈에는 불편해 보일 수 있지요.”
아, 배에서 교육할 때 플록스가 자연의 순리 운운한 게 바로 이곳의 과감한 애정 표현을 에둘러 말한 거구나. 어쩐지 난처한 얼굴로 버벅대더라니.
내 눈에는 솔직하고 활달한 왕녀의 모습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경직된 제국의 귀족 사회에서는 보기 힘든 여성상이어서 조금 놀라긴 했지만 신선했다.
“듣던 대로 진이 이곳에서 큰 신임을 얻고 있는 모양이네요. 왕궁에서 우차도 보내 주고 일국의 왕녀께서 직접 마중까지 나오시고.”
하말린의 왕도 진을 총애하고 왕녀도 저토록 진을 좋아하니 그가 부마가 되는 건 시간문제인가? 진의 미래를 위해 나쁘지 않은 선택지 같았다.
제국에서 괄시받던 진이 이곳에서 제대로 된 황자 대접을 받는 걸 보니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배신감이 드는 것 같기도 하고…….’
둘 다 사랑에 패배한 천덕꾸러기라는 점에서 동질감을 느꼈는데, 그는 아니었다니!
하말린의 인기남 진 시더우드 황자께서 과연 본인의 바람대로 혼전순결을 지킬 수 있을지.
그러기에 상당한 애로가 있어 보이는 곳에 온 듯했다.
* * *
왕궁에 도착한 후 진은 곧장 하말린 왕을 알현하러 갔다.
진의 통역관으로 동행하게 된 나는 내심 긴장해서 목이 뻣뻣해질 지경이었다. 통역관으로서 처음 맡는 정식 임무를 실수 없이 잘해 내고 싶었다.
“오, 바람의 아들, 우리의 아들 어서 오게.”
“하말린의 위대한 지도자, 푸른 숲의 현자시여,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두 사람의 인사를 통역하는 것으로 내 새로운 경력의 첫걸음을 뗐다.
외교 관례에 따라 통역관인 나는 가벼운 묵례로 거창한 인사를 대신했다. 나는 한 사람 몫이 아니라 진의 귀와 입, 그림자로서 동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쿨루스 왕은 과연 현인이라는 평판답게 인자한 인상이었지만, 동시에 매우 강한 기운을 풍기는 인물이었다. 부드러움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그런 기운.
‘아들이라 칭하는 건 그 정도로 총애한다는 뜻이겠지? 바람의 아들은 또 뭘까. 바람둥이 아들?’
흐뭇하게 웃으며 진을 바라보던 왕이 곧 의문을 표했다.
“흐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그대의 영혼이 많이 달라졌군?”
왕의 눈이 순간적으로 날카로운 빛을 뿜은 것 같아 나는 가슴이 덜컹했다.
하말린 왕은 ‘영안을 뜬 자’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다고 했지. 진의 운명이 바뀌었다는 것도 알아볼 수 있을까?
“그간 중요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군. 중요한 사람을 만났거나.”
“최근 만난 어떤 사람 덕분에 해괴한 일을 많이 겪긴 했습니다. 그런 것도 보이십니까?”
“허허, 영혼의 결을 바꿀 만큼 특별한 사람을 만났나 보군.”
“예, 그 사람이 좀 유별나지요.”
저 대화 속에 등장하는 유별난 사람이 혹시……. ‘특별한’ 것과 ‘유별난’ 것은 하말린어로도 제국어로도 엄연히 다른 것이거늘.
“영혼의 결이 변했다는 말씀이 조금도 놀랍지 않을 정도입니다. 난생처음 겪은 황당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요.”
“허허, 시간 날 때 그 모험담 좀 들려주게.”
진이 고개를 저으며 들으란 듯이 하는 말에 왕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중간에서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하말린어와 제국어를 번갈아 전했다.
영안이 없어도 이 모든 사정을 훤히 꿰고 있는 나는 진이 그동안 맞은 다채로운 날벼락을 하나씩 떠올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일은 뭐니 뭐니 해도 삶의 마지막 장면이 바뀐 것일 터.
영혼의 결이 세로에서 가로로 뒤바뀌었다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말린의 현인이시여, 당신이 그토록 아끼는 진을 다시는 못 보실 뻔했답니다.’
환담을 나누던 진이 돌연 조심스레 목소리를 낮추었다.
“왕이시여, 초청 서신에서 전에 없던 초조함을 느낀 건 제 착각인지요? 달리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았습니다.”
진의 말에 하말린의 왕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평범한 서신에서 내 걱정을 읽다니 우리가 정말로 혈육 같은 사이가 되었나 보군.”
“부탁하실 일이 있다면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쁘겠습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서 말일세. 모텝과 연락이 끊긴 지 좀 되었네.”
“모텝이라면 세계 일주를 떠난 왕세자 말씀입니까?”
수행인 없이 홀로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견문을 쌓는 ‘승계 여행’은 하말린 왕가의 오랜 전통으로, 왕위 계승자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었다.
“나쁜 소식이 들려온 것은 아니네. 그저 연락을 취하기 힘든 외진 곳에 있거나 용무가 바쁜 것인지도 모르지. 겨우 이런 일로 불안해하다니 나도 어쩔 수 없는 아비인가 보네.”
“혹시 모텝 왕자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겁니까?”
“실은 그렇다네. 왕자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
왕은 별일 아닌 듯 말했지만 진의 표정은 금세 심각해졌다.
“저희 길드가 왕자의 흔적을 찾아보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고맙네. 실은…… 그대가 아니면 부탁할 곳이 없다네. 이 일이 새어 나가면 하말린 왕실의 약점이 될 수 있거든.”
왕자의 신변에 관해 철저히 비밀로 해 달라는 당부였다.
왕자, 더욱이 왕세자의 행방불명은 정치적으로나 외교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하거나 이용당할 빌미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하말린 왕은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왕이 진에게 이 일을 털어놓았다는 건, 그만큼 진을 믿는다는 뜻이었다.
“왕자의 일은 짐과 그대밖에 모르는 일이네. 모얌에게도 말하지 않았거든. 아직은 모든 것이 안개 속에 있다네.”
“불확실한 만큼 도리어 희망이 있는 것이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왕세자의 행방을 찾는 막중한 임무가 페가수스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