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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영혼의 미남과 야수 (55/110)


#55화. 영혼의 미남과 야수
2022.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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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은 잘 모셨나?”

카이저 바카리스 황제가 보고하러 온 심복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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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손님이니 잘 대접해 드려라. 결정적인 순간에 아주 요긴하게 쓸 카드이니 너무 상하거나 못쓰게 되면 큰일이지.”

황제의 얼굴에 보기 드물게 흡족한 빛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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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맛에 맞을 만한 술과 음식도 부족함 없이 넣어 주고. 명색이 일국의 왕자인데 그 정도 대접은 해 드려야지.”

심복이 묵례를 하고 물러가려 하자 황제가 손을 들어 멈춰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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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카를슈테인에겐 철저히 비밀에 부쳐. 미리 알면 재미없잖아. 제가 우습게 생각하는 황제가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을 꾸몄는지, 나중에 알고 박장대소할 모습이 기대되는군.”

황제가 흉흉한 웃음을 흘렸다.

황제도 알고 있었다. 카를슈테인 공작이 자신을 조금도 경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특히 외교 문제에 있어서는 본인을 어린아이 취급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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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깟 자그마한 왕국 하나 뭉개는 데 뭘 그리 뜸을 들이는 건지. 안 그래도 진이 들락거리는 꼴이 심히 거슬리던 차인데.’

마수들의 몸집을 불리고 개체수를 늘리기 위해서는 정령의 돌이 다량으로 필요하건만, 황제의 눈에는 공작이 시간을 끄는 듯 보였다.

그뿐인가. 당장 성사될 듯하던 이혼도 명확치 않은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지 않은가. 공작이 무언가 낌새를 챈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 그 깜찍한 공작부인은 행방이 묘연하고.

자신의 성정대로라면 외교고 나발이고 당장 쳐들어가 싹 쓸어버리고 페트룸도, 정령의 돌도 전부 빼앗아 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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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우아한 공작께서는 지나치게 폼 나는 것만 좋아한다니까. 불쌍한 내 애견들이 배고픔에 저리 울부짖는데, 참으로 무정도 하지. 이참에 진짜 외교가 뭔지 짐이 공작에게 한 수 가르쳐 줘야겠어.”

 

* * *

하말린 왕세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저 왕의 노파심일 뿐일까.

왕세자의 행방불명과 관련해 뭔가 도움이 될 만한 단서가 있을까 싶어 통역관의 본분도 잊고 지난 삶의 기억들을 뒤지고 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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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영혼은 뭐랄까, 기묘하군.”

갑자기 들려온 왕의 목소리에 상념을 떨치고 통역에 집중하려는데 웬일로 왕의 눈이 진이 아닌 내게 고정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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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관, 당신 말이오.”

내가 영문을 몰라 눈만 굴리고 있자 왕이 명확히 짚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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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접해 보지 못한 형상이라 짐도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자연스럽지 못한 흔적이 있군.”

영혼의 형상이 아름답지 않은 사람은 하말린 왕족과 교류할 자격이 없다고 했지.

내 영혼의 형상…… 불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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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큰일을 겪은 적이 있나? 보통 사람들은 겪기 힘든 일 말일세.”

왕이 은근히 집요하게 물어 왔다. 왕세자의 행방이 묘연한 마당에 그깟 영혼 모양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아니면 어떠한 시름도 잊게 할 만큼 내 영혼의 형상이 충격적인 걸까.

왕의 눈빛이 마치 영혼을 넘어 전생까지 꿰뚫어보는 듯해 흠칫 몸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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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반복한 흔적이 영혼에도 남아 있는 걸까? 대체 얼마나 엉망인 거야, 내 영혼은!’

일개 통역관에게 이목이 집중된 이 상황도 참으로 민망했다. 그렇다고 내 비밀을 시원하게 밝힐 수도 없는 나는 어색한 웃음으로 어물쩍 넘어가려 했다.

그러자 내 얼굴을 흘깃거리던 진이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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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작 소개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본 통역관은 제국의 후작가 출신인데 하말린어가 유창해서 제가 특별히 통역을 부탁했습니다.”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을 수만은 없어 짧게 이름이나마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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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 전하의 통역관 로제트 앰브로시아입니다.”

진의 오해가 담뿍 담긴 해명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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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레이디 앰브로시아에게 힘든 일이 좀 많았습니다. 아마도 그 영향을 왕께서 읽으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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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아픔을 들추어서 미안하군. 괜찮다면 사과의 뜻으로 레이디에게 이 방면에 정통한 치료사를 소개해 주고 싶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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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레이디 앰브로시아의 상태가 그 정도로 심각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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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이곳에서 말하는 치료는 제국의 상담이나 휴양과 비슷한 거라네. 우린 정신과 육체를 하나로 보지. 좋은 치료사가 많으니 여기 머무는 동안 한번 만나 보기를 권하겠소.”

왕과 진이 내 면전에서 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통역하고 있자니 분위기가 묘했다.

진은 영혼의 형상이 그렇게도 아름답고 영롱해서 하말린 왕가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다는데, 나는 치료가 필요할 만큼 영혼이 못생겼다니.

이런 데서도 열등감을 느끼게 될 줄이야.

제국에서는 진이 방탕 황자, 내가 정숙한 공작부인이었는데 지금은 입지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척 봐도 저 껄렁껄렁한 황자보다야 모범적인 귀부인으로 살아 온 내 영혼이 반듯해도 훨씬 더 반듯할 텐데. 이곳 왕족들은 사람 보는 눈도 참 특이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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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요, 로제트. 내가 잘 아는 치료사를 소개해 줄게요.”

귀에 익은 목소리가 왕의 집무실에 명랑하게 울려 퍼졌다.

모얌 왕녀가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이 당당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등장했다.

그녀는 스스럼없이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와 내게 팔짱까지 꼈다.

놀라운 친화력이었다. 더욱이 무엇 하나 아쉬울 것 없는 왕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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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관과 이미 아는 사이인 것 같구나?”

왕녀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왕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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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제가 황자 전하를 맞으러 항구에 나갔는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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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왕이 난처한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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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황자에게 또 부담을 주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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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마마, 부담이라니요. 전하는 우리 왕국의 귀한 손님이잖아요. 모텝 오라버니가 안 계시니 당연히 왕녀인 제가 직접 나가 맞이하는 것이 도리지요.”

왕녀는 자신의 주장을 조금도 굽힐 생각이 없는 듯했다. 도리어 진에게 짓궂은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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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중을 나가서 전하도 즐거우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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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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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는 다 좋은데 수줍음이 너무 많으셔서 탈이에요. 여기선 너무 격식 차리지 않으셔도 돼요.”

‘수줍음’과 ‘격식’ 부분에서 나는 이를 꽉 물었다. 진과 저 단어들이 함께 쓰이는 날이 올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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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얌, 나라마다 예법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른 법이다. 제국은 제국만의 풍습이 있으니 우리 방식을 강요하지 말거라.”

왕이 철부지 딸에게 타이르듯 말했지만, 왕녀에겐 소용없는 듯했다. 진에게 바짝 다가서며 이렇게 물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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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한 내가 싫어요?”

진은 수줍게 왕녀의 말을 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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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와 나누던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왕도 조금 엄한 목소리로 왕녀에게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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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하거늘. 황자와 긴히 나눌 말이 있으니 지금은 물러가거라.”

부친의 명에 모얌은 입을 조금 삐죽이더니 나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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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말씀이 끝나고 로제트를 제가 좀 차지해도 될까요?”

갑자기 나는 왜? 꿩 대신 닭이라고 공략 대상이 수줍은 진에서 나로 바뀐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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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녀, 무슨 소리인가? 통역관은 항시 황자를 수행해야 하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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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제국의 사교계에 관심이 많지 않습니까. 마침 로제트가 제국의 귀족 출신이니 물어 보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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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녀가 제국의 사교계는 무엇 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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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일이란 모르는 거 아닙니까. 제가 제국 사교계에 데뷔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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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이 보기에 괜한 걱정인 듯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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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선 무엇이든 알고 싶은 법입니다. 그를 둘러싼 환경이나 문화까지도요.”

왕녀의 막무가내에 왕이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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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는 왕녀를 못 당하겠구나. 레이디 앰브로시아, 괜찮다면 부디 저 아이에게 제국 사교계의 구설수와 말조심의 필요성에 대해 따끔하게 알려 주시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부녀의 설전을 쫓아가느라 머리가 다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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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는 나와 함께 치료사도 만나러 가야 하고요.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과 함께 하고 싶은 일이 무척이나 많답니다.”

모얌이 나를 향해 화사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지나치게 수줍은 진 황자 대신 만만한 내가 시달려야 할 모양이었다.

이번 생의 나보다 더 오지랖 넓은 사람이 여기 하말린 왕실에 있었을 줄이야.

왕을 알현하고 본궁을 나온 후, 왕녀와 재회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왕세자 때문에 급히 소집한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왕녀가 우리 일행의 숙소인 별궁으로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에너지도 넘치고 실행력도 무시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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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나, 내가 방해가 됐나 봐요.”

느닷없는 등장에 당황한 직원들을 보며 왕녀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왕녀님, 그렇게 웃으실 때가 아닌데요.

역시 왕 앞에서만 발휘되는 인내심이었을까. 진이 보란 듯이 미간을 와락 구기며 냉랭하게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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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 나가지 그래?”

물론 제국어로 말했기에 왕녀가 정확한 뜻을 알 수는 없겠지만, 어투나 분위기로 봐서 그리 유쾌한 말은 아니란 것쯤은 눈치 챘으리라.

나는 진을 째려보고는 하말린어로 적당히 둘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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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회의라서 왕녀님께 양해를 구해야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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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그렇게 말한 거 같지 않은데? 어쨌든 그럼 잠시 기다리죠.”

왕녀는 한쪽에 있는 안락의자에 풀썩 앉았다. 아니요! 나가 달라고요! 조금 후에 오시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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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니라, 제 통역이 미흡했던 것 같은데…….”

뭐라고 말하면 기분 나쁘지 않게 왕녀를 쫓아낼 수 있을까 궁리하는데, 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말린 사람들과는 달리 진의 예쁜 영혼은커녕 불량하고 포악한 성질머리만 봐 온 직원들이 얼른 막아섰다.

얼핏 무감해 보이는 보스의 저 표정은 태풍 직전의 고요란 걸 직원들은 익히 알고 있었기에.

보아하니 하말린의 왕녀도 보통 성격은 아닌 듯한데, 두 사람이 충돌하면 골치 아파지는 건 결국 자신들이란 걸 직원들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여태 다져 온 사업적 우위를 허무하게 날려 버릴 순 없지. 플록스의 눈짓을 신호로 직원들이 핑계를 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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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 회의가 거의 마무리되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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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말린에 막 도착했으니 좀 쉬었다 하시죠? 배도 고프고요.”

이렇게 바람을 잡으면서 한 사람씩 슬금슬금 꽁무니를 뺐다. 나에게 뒷일을 잘 부탁한다는 눈빛을 남긴 채.

순식간에 방 안에 세 사람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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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려야 한다더니 생각보다 회의가 일찍 끝났네요. 고마워요.”

왕녀가 활짝 웃으며 인사하는데도 진의 미간 주름은 펴질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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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기에 걸핏하면 밀고 들어오지?”

나는 왕녀의 눈치를 살피며 진의 말을 부드럽게 바꾸어 통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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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찾아온 용무가 무엇인지요?”

하말린어를 다 알아듣는 진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그런 진을 보며 왕녀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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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보지 마요. 반하겠어요. 그리고 황자 전하가 아니라 로제트에게 볼일이 있어 온 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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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벌써 그렇게 죽고 못 살 사이가 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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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말했잖아요. 로제트에게 제국의 사교계에 대해 물어보고 또 치료사도 소개해 주겠다고.”

진이 이죽거리든 말든 왕녀는 내게 눈을 찡긋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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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얌이라고 불러요. 말도 편하게 하고. 나도 그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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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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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녀라고 해 봐야 하말린은 작은 왕국이니까. 물론 그렇다고 나와 내 나라를 무시한다면 나도 가만있지 않겠지만. 지금은 내가 당신과 친해지길 바라는 거니까 괜찮아요.”

나와 왕녀 사이의 대화이니 굳이 진에게 통역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진은 전부 알아듣겠지만.

지금도 진이 관심 없는 척하며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게 내 눈엔 보였다.

오랫동안 정보 길드를 이끌어 와서 그런지, 건들거리는 겉모습과 달리 꽤 섬세하고 치밀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걸 다 보고 있었구나, 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하고 놀랄 때가 종종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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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사는 기대해도 좋아요. 내가 아는 수많은 치료사 중에 가장 젊고 잘생긴 이로 골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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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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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몸 좋은 건 기본이죠. 치료사가 자기 영육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어요?”

좀 당황스럽긴 해도, 나쁜 소식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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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요즘 백성들 사이에서 대유행하는 최면 요법이 있는데, 그 요법도 로제트에게 권하고 싶어요. 인기 있는 최면술사 중에서도 아름답게 생긴 이가 누구인지, 정보를 입수해 두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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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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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바닥 소식엔 정통하거든요.”

이 바닥이란…… 미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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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이 아니에요. 아까 하말린의 버섯을 연구하고 싶다고 했죠? 로제트의 버섯 연구를 돕고 자문도 해 줄 능력 있는 정령사도 물색해 두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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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는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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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는 자연과의 교감 능력이 뛰어난 이들이잖아요. 특히 버섯은 정령이 많이 깃들기로 유명한 식물이고요. 물론 정령사도 미남!”

이곳 하말린 사람들은 영혼의 형상을 중시한다고 하지 않았나? 아무래도 왕녀는 하말린 사람들 중에서도 육체파인 것이 분명했다.

왕녀가 지금까지 한 말을 모아 보면, 하말린의 다양한 직군에 종사하는 미남들을 두루 만나게 해 주겠다, 이런 말로 들리는데.

아무리 왕녀가 친화력이 좋고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라 해도 내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지.

의아해하는 내 손을 왕녀가 꼭 잡더니 뜬금없는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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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 사랑의 상실은 사랑으로 치유할 수 있어요. 이곳 하말린에도 멋진 남자가 많답니다. 이 왕녀의 실력과 안목을 한번 믿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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