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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56/110)


#56화.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2022.06.13.


하말린의 미남이란 미남은 죄다 끌어모을 기세인 모얌 왕녀. 이쯤에서 내 생각을 분명히 전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왕녀님, 성의는 감사하지만 남자를 더 알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저는 남자보다 버섯 쪽이 더 흥미로워요.”

“네? 더 알고 싶은 마음이 없다니? 파도 파도 끝이 없는 게 미남자의 세계인데. 그건 매우 오만한 태도군요. 아니면 내 실력과 안목을 믿지 못하는 건가?”

“그럴 리가요. 왕녀님의 실력과 안목이라면 확실하시죠. 그저 남자보다는 버섯을 알아 가는 데 시간을 더 쏟고 싶다는 말씀입니다.”

내 말에 왕녀가 손가락으로 나를 찌를 듯이 겨누었다. 도마 위에 오른 버섯이 된 기분이었다.


“로제트, 남자는 이미 알 만큼 안다고 생각하고 있죠? 도프! 도프!”

왕녀가 하말린어로 ‘아니! 아니지!’라고 외쳤다.

그저 남자보다는 버섯을 더 알고 싶어 했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나 오만하다는 질타를 받을 일이란 말인가.

모얌 왕녀의 미남론이 이어졌다.


“세상이 이토록 넓은 이유가 뭔지 알아요? 무수한 미의 가능성을 품기 위함이에요. 거대한 미남의 우주에서 한 사람의 경험이란 티끌처럼 작고 보잘것없는 것임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해요!”

나는 눈을 깜빡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혹시 웃자고 하는 말을 내가 너무 고지식하게 받아들인 걸까? 하지만 하말린 식 농담이라기엔 왕녀의 얼굴이 너무나 진지해서, 나는 안전하게 웃지 않기로 했다.


“저, 왕녀님, 화나신 거 아니죠?”

“화난 게 아니라 안타까운 거예요.”

“어떤 점이요?”

“당신도 멋진 남성을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만날 수 있다고요. 당신은 그럴 자격이 충분한, 멋진 여성이니까요!”

“……?”

분명히 나쁜 말은 아닌데, 기분이 묘했다. 차라리 오만하다는 말을 듣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고작 버섯이라니, 세상에!”

왕녀는 대참사라도 목격한 표정이었다.

왕녀님, 방금 대단히 위험한 발언을 하셨습니다. 노기등등한 버섯들의 항의가 들리지 않나요.


“으음, 저에 대한 후한 평가 고맙습니다. 버섯은 아끼는 취미일 뿐이에요. 왕녀님이 소개해 주신 사람들은 언제 한번 만나 보도록 하지요.”

더 이상 거절했다가는 무슨 황당한 소리가 나올지 무서워 나는 적당히 수락했다.


“로제트, 두렵겠지만 뒷걸음질 치지 말아요. 당장은 그다지 내키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만나 봐요. 분명 내가 등 떠민 걸 고마워할 날이 올 거예요.”

아까부터 왜 왕녀가 내게 용기를 북돋워 주고 싶어 안달인 것처럼 느껴질까? 척 보기에도 내가 연애 운이 없게 생겼나?

단순히 타국 손님에 대한 호의로 받아들이기엔 지나친 감이 있었다.

제국 사교계에 줄을 대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거나 진의 측근과 친분을 쌓아 두려는 계산이라고 보기엔 왕녀의 배포나 기질이 너무 호탕했다.

그런 자잘한 이득을 바라고 친절을 베풀 사람은 아닌 듯한데…….

나는 모호한 기분도 떨치고 화제도 바꿀 겸, 왕녀가 소개한 것들 중 가장 관심이 가던 최면 요법에 대해 말을 꺼냈다.


“방금 권해 주신 최면 요법 말이에요, 요즘 백성들 사이에서 대유행한다는.”

“아하, 아름다운 최면술사가 로제트의 취향이었군요!”

“아니, 그게 아니라…….”

“관심 없는 듯하더니 역시 감이 좋은데요? 그 최면 요법은 굉장히 신기해서, 경험한 후로 삶이 완전히 달라진 사람도 있대요.”

삶이 달라졌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하말린에 오고 싶었던 진짜 이유는 미고의 마지막 말 때문이 아니던가.


「진짜 해답은 그곳에 있어.」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무척이나 약이 올랐지만, 시간이 흐르며 점점 궁금증이 더해졌다.

혹시 왕녀가 말한 그곳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삶이 달라질 정도라니, 최면으로 뭘 하기에요?”

왕녀가 잠시 고민하더니 내게 친절히 설명했다.


“제국에도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 주는 곳이 있죠? 우리가 가려는 그곳은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주는 곳이에요.”

“잃어버린 기억? 건망증 같을 걸 고쳐 주는 곳인가요?”

별 생각 없이 한 말에 왕녀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거 제국 사교계 식 유머인가요? 로제트는 하말린어로 디마고(유실물)와 이마고(분실물)의 차이를 알아요?”

“디마고와 이마고…… 둘 다 잃어버린 물건이란 뜻 아닌가요?”

“네, 하지만 둘 사이엔 미묘한 차이가 있어요. 디마고는 잃어버린 물건을, 이마고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잃어버린 물건을 뜻하죠.”

유실물과 분실물의 차이는 왜?


“우리가 가려는 곳이 바로 기억의 분실물 취급소니까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잃어버린 기억이 있다면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이죠.”

“잊은 게 아니라 잃은 거라…….”

“잊은 줄도 몰랐던 어떤 기억, 소중하거나 은밀하거나 혹은 끔찍할지 모르는 기억을 돌려받는 거예요.”

왠지 반갑거나 다행이란 느낌보다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고 살아온 것을, 굳이 끄집어내야 할까?


“반드시 좋은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군요.”

내가 다소 소심하게 묻자 왕녀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사람에 따라 후유증을 앓을 수도 있대요. 잃어버린 기억이 별것 아니거나 아예 없는 사람도 많고요. 또 기억이 사라졌을 땐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라며 이 요법에 거부감을 표하는 이들도 있죠.”

그렇다. 무언가가 사라지는 덴 이유가 있다.

인간은 나약하고도 영악한 존재라 자신을 지키는 데 위협이 된다면 무엇이든 제거하려 들 테니까. 그것이 설령 자신의 기억이라 해도.

하지만 떨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왠지 미고가 그곳에서 내게 손짓하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

나도 모르게 잃어버린 기억 속에 진짜 해답이 있을까?


 


“뭐가 나올지 두려우면서도 궁금하네요.”

“유쾌할 수도, 불쾌할 수도, 심지어 끔찍할 수도 있지만 분명 그만큼의 가치가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해요.”

시원스레 말한 왕녀는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설령 안 좋은 기억을 되찾게 된다 해도 아름다운 최면술사를 보면 진정이 되지 않겠어요? 미남을 고집하는 덴 다 이유가 있는 거랍니다.”

갑자기 막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왕녀의 미남론.


“멀리서 찾을 필요 있나요? 황자 전하만 봐도 마음이 정화되잖아요. 하아, 정말 멋지지 않아요? 어때요, 로제트가 보기에도 미남이시죠?”

“아…… 네…… 그렇지요.”

웬일로 왕녀가 진 이야기를 안 꺼낸다 했다.

저쪽에 있는 진을 흘끔 보니 하품을 하는 것으로 지루한 티를 내며 못 들은 척하고 있었다.


“훤칠한 체형이나 촘촘하게 들어찬 근육의 모양새까지도 딱 제 취향인 거 있죠!”

“혹시 따로 나가서 편히 말씀하시겠어요?”

무슨 말이 나올까 무서워 왕녀에게 권했다.

진이 하말린어를 전부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녀가 계속 아무 말이나 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괜찮아요, 오늘은 길게 얘기할 건 아니라서. 나중에 따로 자리를 마련할 테니 그때 제도 사교계에 대해 자세히 좀 들려줘요. 전하에 대한 정보도 좀 주고요.”

“아아, 네…….”

“황자 전하 공략법 같은 거 말이죠.”

듣는 나는 속이 타 죽겠는데 왕녀는 속 편하게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전하에 대해서는 저보다 왕녀님이 더 잘 아실 것 같은데요.”

“에이, 그러지 말고 내 연애도 좀 밀어 줘요. 아, 우리 서로의 사랑을 응원하는 거 어때요? 누가 먼저 애인 만드나 내기할까요?”

“제가 졌습니다.”

“로제트, 할 수 있다니까요!”

길게 얘기하지 않을 거라더니. 그러게 나가서 맘껏 얘기하시라니까.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황자 전하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내 이상형이라니까요. 생각만 해도 몸이 막 달아오르는 거 있죠? 아, 군침 돌아.”

제발 고정하세요!

무엇보다 우리끼리 하는 얘기일 수가 없다고요!


“전하의 기운은 아주 웅장하고 강할 것 같아요. 전하의 그 기운을 내 걸로 만들 거야.”

진이 다 듣고 있을 걸 생각하니 민망해서 머리가 다 어질어질한데, 왕녀가 갑자기 어조를 바꾸어 외쳤다.


“참, 지금까지 내가 말한 건 전하한테는 비밀!”

상큼 발랄하게 웃는 왕녀의 얼굴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제 와서 비밀이라니…….


“제국 남자들은 너무 솔직해도 매력 없다고 생각한다죠? 제국 남자와 연애하려면 적절한 내숭과 밀고 당기는 기술이 중요하다고 들었어요.”

내숭이요? 밀고 당기기요? 이 왕녀님을 어쩌면 좋아.

그래도…… 나는 소녀처럼 눈을 반짝이는 왕녀를 보며 생각했다.

화끈하고 과감한 왕녀도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조금쯤 수줍은 마음이 되는 걸까.


“또 미리 알면 재미없잖아요? 생각지 못한 순간에 짜잔 하고 깜짝쇼를 해야 황자 전하를 한 방에 넘어뜨릴 수 있지 않겠어요?”

수줍음이 아니라 불시에 덮치려는 계획이었군요.

진, 심장마비로 저세상 가지 않도록 마음 단단히 먹어야겠네.

왕녀는 양껏 수다를 떨었는지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치료사부터 만나러 가요. 이 사람 아주 멋지다니까요. 나만 믿어요!”

그렇게 왕녀는 또다시 나를 향해 응원의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인 후 마침내 퇴장했다.

한바탕 돌풍이 휩쓸고 간 듯, 왕녀가 왔다 간 자리에 기진맥진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언제까지 넋 놓고 있을 수 없어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왕녀님이…… 그러시다고 해.”

“굳이 설명하지 마.”

진은 특기인 미간 주름 잡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같은 미간 주름이라도 어떤 신호인지, 이제는 조금 보였다.

화났다, 짜증난다, 고민된다, 모르겠다, 슬프다, 안됐다, 황당하다, 피곤하다, 졸리다, 불편하다, 민망하다, 부끄럽다 등등.

오늘의 미간엔 민망함과 쑥스러움의 골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다시 생각하니 진이 하말린어를 알아들을 수 있어 다행인 점도 있었다. 아니었다면 왕녀가 간 후 분명 내게 무슨 대화를 나눴느냐고 물었을 게 아닌가.

그 낯간지러운 소리를 재생하는 데 꼼짝없이 내 입을 빌려 주어야 했을 걸 상상하니 새삼 아찔했다.


“어떻게 할 거지?”

내가 진에게 묻고 싶은 말을 진이 내게 물었다.

이 방에 우리 둘밖에 없으니 내게 물은 게 맞겠지만, 이렇게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한테 물은 거야?”

어떻게 할 건지, 결단을 내려야 할 건 내가 아니라 진 당신인 것 같은데?


“왕녀에게 끌려 다닐 필요 없어. 싫은 건 굳이 하지 않아도 돼.”

“딱히 억지로 하는 건 없는데?”

“치료사니 정령사니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눈치던데. 왕녀의 억지에 일일이 장단을 맞춰 줄 필요 없다고.”

남자보다 버섯에 더 관심이 있다고 해서, 남자와는 담을 쌓고 살겠다는 말은 아니다. 더욱이 미남자라면.


“아니, 그 사람들 만난다고 내가 손해 볼 건 없잖아?”

“그래서 기어이 만나시겠다? 그 허우대만 번지르르한 사기꾼들을?”

“왕녀가 보증한 사람들인데 왜 사기꾼이라고 매도하는 거지?”

“그런 치들 보나마나 뻔하지 뭐.”

“알면서도 속아 주는 마음 기억 안 나? 미남자라면 더욱 속아 주는 보람이 있겠네.”

“일정이 바빠. 여기 놀러 온 게 아니니까. 왕을 알현했을 때 당신도 들었지만, 생각지 못한 일이 추가됐고.”

치사해라. 갑자기 보스 행세?


“그렇더라도 약간의 자유시간은 있겠죠, 보스? 미남 얘긴 농담이고 미고가 남긴 말 때문이라도 그들을 만나 보는 게 좋을 거 같아.”

“미고의 말? 하말린으로 가면 운이 트여서 하는 사업마다 잘될 거라고 했다며. 치료사와 정령사에게 사업 상담을 하게?”

아, 그렇지. 미고가 뭐라고 했는지, 진에게 전부 털어놓지 않았지.


“사업에서 운이 얼마나 중요한데. 인간과 자연의 기운을 읽는 사람들이니 도움이 될지 모르지.”

“퍽이나.”

“당신이야말로 어쩔 셈이지? 왕녀의 마음을 언제까지 모른 척할 거야? 이제는 그 마음에 답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게 호의에 대한 예의인 것 같아.”

진이 나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왜? 내가 뭐 틀린 소리 했어?


“왕녀는 좋은 사람 같아. 그런 사람을 속이는 일은 나도 탐탁지 않아.”

진의 미래를 생각하면 왕녀와의 결혼은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다. 어차피 제국에 그를 위한 자리는 없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하말린 왕녀와 결혼하고 싶어 안달이 난 가문과 신랑감은 지금 제국에 차고 넘칠 것이다.

그런 왕녀가 진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지금껏 불운했던 반쪽짜리 황자의 삶에 찾아온 선물인지도 몰랐다.

더욱이 모얌 왕녀는 황후처럼 소유욕과 자기애를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과 혼동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둘 사이에 지금은 사랑이라 부를 만한 감정이 없더라도 앞으로 얼마든지 생겨날 가능성이 있었다. 그만큼 내 눈에도 왕녀는 괜찮은 여자였다.


“부마가 될 거란 얘기 들었어.”

“누가?”

왜 쓸데없이 시치미를 떼고 그러지?


“주제넘은 일인지 모르지만, 내가 한마디 참견해도 될까?”

“어디 한번 들어 보지.”

“나도 철없던 어린 시절엔 사랑해서 결혼하는 줄 알았어. 그런데 결혼도 어쩌면 치열한 사업이더라고. 왕녀와의 결혼은 당신에게 좋은 기회야.”

그러니 너무 고민하며 주저할 필요 없어, 진.

이익이나 안정을 위해 결혼하는 것은 제국의 귀족 사회에선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니까.

그래, 당연한 일인데, 그런데. 진과 모얌의 결혼을 그려 보는 내 기분이 왜 이렇게 씁쓸한 걸까.

진의 미래와 그를 위한 좋은 기회에 대해 잘도 떠드는 내 마음은 결코 순수하지 않았다. 그를 향한 감정은 이처럼 늘 모호하고 어지럽고 앞뒤가 맞지 않고 이중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 마음속에만 묻어 두어야 할 풍랑이었다.


“나 그렇게 치열하게 사는 사람 아닌데?”

잠자코 듣던 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뭘 열심히 할 위인인가. 사업이니 성공이니 치열하게 해서 뭐 하게? 날 너무 성실한 인간으로 봤군.”

“…….”

그렇긴 하지. 방만하고 불량한 자세로 껄렁껄렁, 그게 당신이긴 하지만…….

진이 내게 눈을 지그시 맞춰 오며 물었다.


“나와 왕녀가 결혼하면 내 행복은 둘째 치고, 당신이 보기에 왕녀가 행복할 것 같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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