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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모두에겐 계획이 있다 (57/110)


#57화. 모두에겐 계획이 있다
2022.06.17.


성공적인 결혼이라면 모를까, 행복한 결혼은…… 없을 걸?

행복을 바라면 나처럼 불행해져, 진.

모얌 왕녀와 자신의 결혼이 행복한 그림일 것 같은지 묻는 진의 반박에,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더욱이 모얌 왕녀는 진이 아버지처럼 따르는 오쿨루스 왕의 딸. 왕을 봐서라도 왕녀를 모른 척할 수 없을 텐데.


“왕도, 왕녀도 모두 좋은 사람들이니까. 함께 있다 보면 행복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왕도, 왕녀도 당신을 좋아하고.”

내 말에 진은 조금 고민하는 표정이 됐다. 그래, 왕녀는 몰라도 왕은 쉽게 무시할 수 없겠지.


“못 해, 결혼.”

“왜…… 무슨 문제라도……?”

“그 기분 나쁜 눈빛은 뭐지? 무슨 생각 하는 거야?”

“말 못 할 사정이 있나 해서.”

“말할 수 있는 사정이야. 난 결혼을 사업으로 보지 않고,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사업이든 아니든 내 알 바 아니야. 그냥 사업도 하기 귀찮은데 뭐 하러 뼈 빠지게 일을 늘리나?”

누가 방탕 황자 아니랄까 봐.

하지만 말은 저렇게 해도 사업을 허투루 하는 사람은 또 아니었다.

겉보기엔 일도 대충 하고 아무렇게나 살며 대단한 계획이나 목표도 없는 것 같지만. 한편으론 무척 기민하게 움직일 때가 있어 헷갈렸다.

제국의 귀족이라면 어떻게든 연이 닿길 바라는 하말린 왕가에 누구보다 먼저 깊숙이 파고들었잖아? 깊숙이 파고들다 못해 왕녀의 심장까지 훔쳤지.

외모 덕을 보는 건가? 의외로 높으신 분들이 선호하는 상이라든지.

어쨌든 결혼 얘기에 사업 운운한 건 역효과인 것 같았다. 어린애 달래듯 잘 달래 봐야 하나?


“결혼이 사업이라는 말은 취소할게. 당신이 은인인 왕에게 무례를 범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말이야.”

“존경하는 왕을 생각해서라도 왕녀의 마음은 정중하게 거절해야겠지.”

“뭐? 하말린 왕가와 척을 지겠다는 얘기야?”

지금 자기 복을 발로 걷어차겠다는 거야 뭐야?

내가 펄쩍 뛰다시피 하며 따지고 들었지만 진은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고의 예로 대하겠다는 말이야.”

진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진지했다.


“당신 말대로 왕도, 왕녀도 좋은 사람들이지. 여기 하말린 사람들이 대체로 좋은 사람들이야. 그래서 이 사람들만은 결코 이용할 수 없어.”

바보 같은 말이지만,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사람을 물건처럼 가치를 매기고 등급을 나누는 거,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 아주 치 떨리는 일이지. 그런데 어느새 내가 그런 일을 하고 있더군. 그걸로 돈도 벌고 밥도 먹고 직원들 급료도 주지.”

진은 위험하고 차가운 황궁에서 반쪽짜리 시더우드로 살아남았다. 그는 이용당한 만큼 이용할 줄 알았고, 학대받은 만큼 위협할 줄 알았다.

끔찍한 게 무엇인지 아는 만큼 누군가를 끔찍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말린 사람들에겐 그러고 싶지 않다는 말이었다. 자신에게 진심으로 대해 준 사람들을 거짓으로 대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겠지.


‘하필이면 이 중요한 순간에 꼭 그렇게 뻣뻣하게 굴어야겠어?’

다른 때는 게으른 연체동물처럼 잘도 흐느적거리면서.

진의 말은 배에서 플록스에게 들었던 말들과 일치했다.

진은 진심으로 하말린과 하말린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기에 그들과 거리를 두려 한다고 했다. 자신이 이 사람들의 행복과 평화를 짓밟는 불행의 씨앗이 될까 봐.

아끼고 사랑한다는 건 아마도 그런 마음이겠지.

나는 어쩔 줄 모르는 심정이 됐다.

진이 답답하고 바보같이 굴 때마다 내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

그러니까 하말린 왕의 부마가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거라는 말인데. 그렇게 양심의 화신인 양 고집을 피운다면…….

혼자 다음 유인책을 쥐어짜고 있을 때 믿을 수 없는 말이 내 귀에 날아들었다.


“무엇보다 난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 그러니 왕녀를 거절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무례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짓이지.”

뭐? 마음에 둔 여자라니? 아니, 언제? 어떻게? 누구를?

나는 한 방 맞은 얼굴로 진을 보았다.


“좋아하는 사람을 마음에 품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일은 없을 거야.”

황제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황후에게 시달리는 위태로운 와중에 연애를 했다고? 진 시더우드, 곧 죽어도 할 건 다 하고 살았구나.

내가 지금까지 대체 누굴 걱정한 거니. 그야말로 괜한 걱정에 주제넘은 오지랖이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아는 진의 시간은 극히 일부였다. 그런 주제에 진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굴었다니.

로제트 앰브로시아, 네 앞가림이나 잘하렴. 너나 잘하라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억누르며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난 어떡해, 그럼!”

“뭘……?”

“그…… 왕녀 말이야! 날 붙잡고 당신 얘길 끝도 없이 할 텐데. 더 이상 왕녀를 속이는 건 싫어!”

“그러니까 왕녀와 붙어 다니지 마. 이상한 놈들도 만나러 가지 말고.”

“이상한 놈들이라니…….”

자기는 별거 다 하고 살면서, 왜 나는 이것도 저것도 하지 말라는 거야? 보스면 다야? 급료 주면 다냐고!

나는 왕녀가 소개해 준다는 미남자들을 전부 만나 보리라 굳게 결심했다.


 

* * *

다음 날 나는 보란 듯이 왕녀와 함께 치료사를 만나러 갔다.

실은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특별 왕명’이라고 외치며 들이닥친 왕녀에게 끌려간 거지만.

진이 얄미워서 왕녀의 호의에 흔쾌히 응한 것도 있었다. 자기는 아주 절절한 연애를 하면서 남의 연애 사업은 방해하려는 심보라니.

여하튼 여러 번 살다 보니 ‘치유의 오두막’이라 불리는 하말린의 진료소도 경험하게 되었다.

소박하고 정갈한 건물 안에선 상쾌하고 기분 좋은 냄새가 났다. 진에게서 풍기는 삼나무 향과도 비슷했다.

나는 기운 같은 건 전혀 읽을 수 없지만 왠지 맑은 기운이 가득할 것 같았다. 나까지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저와 가벼운 대화를 나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긴장할 것 없으세요. 그러다 조금 신경 쓰인다거나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 보셔도 좋습니다.”

단정하게 잘생긴 치료사가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경계하는 마음이 스르르 풀어지게 만드는 환한 인상에 믿음이 솟구치게 만드는 울림 좋은 목소리였다.


‘어때요? 괜찮죠?’

왕녀가 나를 향해 눈썹을 찡긋거리며 눈빛으로 말했다.

괜찮았다. 마주보고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그를 따라 입꼬리가 올라갔다.

거울처럼 닮아 가는 걸까. 미소엔 미소로, 미간 주름엔 미간 주름으로.


“왕녀께서 왜 타국에서 온 손님께 치료를 권했는지 조금 알 것 같군요.”

나를 살피던 치료사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역시 이상한가, 내 영혼?

이미 왕에게 한소리 들은 터라 그 말에 절로 위축됐다.

인상 좋고 잘생긴 치료사에게는 한 가지 흠이 있었으니. 그에게 잘 보이려고 아무리 꾸며 봤자 소용없다는 것.


“제 영혼에 문제가 많나요?”

진처럼 영혼이 아름답고 영롱하지 못한 나는 주눅 든 목소리로 물었다.


“아닙니다. 이건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 할 문제가 아니니까요.”

치료사는 온화한 미소를 띠며 내게 바짝 다가섰다.


“아무래도 체질을 먼저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지금부터 제가 레이디께 기운을 흘려 넣을 겁니다. 레이디의 상태를 조금 더 정밀하게 알아보기 위한 것이니 불편하더라도 잠시만 참아 주십시오.”

그러더니 내 정수리에 희고 길쭉한 손을 가볍게 올렸다.


“아, 처음이라 놀라실 수도 있겠군요. 기운을 흘려 넣었을 때 사람마다 나타나는 반응이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 정상 반응이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설명이 길어지는 게 왠지 불안했다.

.
.
.

이럴 줄 알았다. 영혼이 엉망진창이랄 때 알아봤다고!

남들은 잠깐 찌릿하거나 가벼운 현기증이 일고 말거나 오히려 개운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는데.

나만 왜! 이런 추한 몰골로 관심을 한 몸에 받아야 하는 건지.


「체질을 좀 더 정밀하게 진단하기 위한 겁니다. 가벼운 검사라고 할까요.」

치료사가 분명 그렇게 말했는데.

그가 내 정수리에 손을 얹고 기운을 흘려 넣자마자 숨이 가빠 오기 시작하더니 으스스한 한기가 스미기 시작했다.

치료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온화한 미소가 감돌던 그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지자 내 잘못인 것 같아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웬만하면 아무렇지 않은 척 참아 보려 했지만, 냉기는 점점 온몸 구석구석으로 스며들더니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가 되었다.

심장까지 얼어붙을 것 같았다.

곁에서 지켜보던 왕녀가 다급히 주위에 명해 담요 여러 장을 가져다 나를 꽁꽁 감쌌다.

그녀는 덜덜 떨고 있는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손끝에서부터 따스한 기운이 조금씩 퍼져 나갔지만 심장까지 닿기엔 아득히 멀고 미약한 온기였다.


“마스터, 로제트의 상태가 왜 이런 거죠?”

왕녀가 흥분해서 물었다. 본인이 만든 자리라는 자책감 때문인지, 대범한 그녀답지 않게 눈에 띄게 당황했다.


“아직은 단언하기 조심스럽지만, 레이디의 몸은 본인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안 좋을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영혼이 아니라 몸에 이상이 있다고요?”

“영혼의 형상이 좀 독특하시지만 그 자체로 문제가 있다고 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몸에는 분명 이상 징후가 있습니다. 정확한 원인은 좀 더 살펴봐야 알 수 있겠지만.”

저기요, 가뜩이나 상태도 안 좋아 힘든데, 면전에서 남의 영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지 말아 달라고요.

나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눈만 겨우 깜빡였다.

영혼이 아니라 몸에 이상이 있다고? 딱히 몸이 심각하게 아픈 적은 없었는데?


“몸에 이상이 있다면…… 혹시 망가진 영혼이 육체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그런 경우인가요?”

“아니오, 심리적인 증상이 아닙니다. 내부에서 생겨난 문제가 아니란 말씀이지요. 외부에서 온, 매우 인위적인 요인 때문일 거라 추정됩니다.”

“그 얘기는…….”

독약이나 마약?

두 사람이 내 눈치를 살피는 모양새를 보니 내 짐작이 맞는 듯했다.

나를 증오하는 사람이야 줄을 섰지만, 그중에 누구? 지금까지 별다른 증상은 없었는데.


“해독을 위해서는 독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 혈액 채취를…… 이런.”

“아악, 로제트!”

왜? 이번엔 왜요?

왕녀의 경악한 시선을 따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연보라색 드레스 위로 검붉은 얼룩이 번져 가고 있었다.

혈액 채취를 따로 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 * *

‘치유의 오두막’에 잘생긴 치료사를 보러 왔다 다량의 피를 쏟고 침대에 쓰러진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듯했다.

왕녀의 자랑인 미남 치료사를 잠깐 보고 숙소로 돌아가 회의에 합류할 요량이었는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린 건지.

무엇보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왕녀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불편했다. 왕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툭툭 털고 일어나야 할 텐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전까지는 아무렇지 않고 팔팔하기만 했는데, 심각한 이상이 있다는 말을 들은 직후부터 안 아픈 곳이 없는 듯했다.

누군가 내게 독을 먹인 것 같았다.

나도 지난 생에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 독약을 써 봐서 안다. 먹는 즉시 사망하는 극약을 쓰는 건 하수들이나 하는 짓.

서서히, 피해자는 모르게 몸속에 차곡차곡 쌓이도록 하는 것이 독살의 참된 미학이다.

먹잇감이 완전히 못 쓰게 될 때까지 어떠한 증상도 없이, 심지어 건강해 보이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명품 독약의 조건인 것이다.


「그래서 곧 죽나요?」

「혈액 검사를 해 보니 목숨에 지장이 있는 극약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독성이 불임의 원인이 된 것 같습니다.」

독살의 미학을 제대로 아는 자의 소행이었다.


“로제트, 다 내 탓이에요.”

왕녀가 내 손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카를슈테인 그 나쁜 놈! 쓰레기 같은 놈!”

그녀의 입에서 그 나쁜 놈의 이름이 나와서, 나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왕녀를 바라봤다.


“내가 제국 사교계에 관심이 많다고 했잖아요. 가십지도 다섯 개나 구독하는 걸요. 만나자마자 당신이 누구인지 금세 알아봤어요.”

하긴 버섯 부인까지 알 정도이니, 내가 제국 사교계를 뒤흔든 불륜 스캔들의 주인공이란 것쯤은 단번에 알아보고도 남았을 터.


“잘못은 제가 저질러 놓고 당신에게 독약까지 쓰다니! 철면피 악마가 따로 없지!”

내게 독을 쓴 게 프러너스일까.

나는 솔직히 이해가 잘 안 됐다. 대체 프러너스가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는지.

그렇게나 내가 싫었으면 처음부터 정략결혼을 거부할 것이지. 아무리 선대의 명이었다 해도 내게 이런 짓까지 해 가며 따라야 했을까.


“진정한 복수는 로제트가 보란 듯이 행복해지는 거예요.”

왕녀는 내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아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동안 왕녀가 보여 준 지나친 오지랖의 이유를.

내 사연을 모두 알고 있었던 그녀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내게 힘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무슨 독인지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어요. 정말 미안해요.”

“왕녀님이 왜 미안해해요. 그동안 저한테 마음 써 주신 거 잘 알아요.”

“내가 꼭 로제트를 낫게 할 거야. 이런 건 미남 치료밖에 방법이 없다고, 흐흐흑.”

가슴 아파하는 거…… 맞겠죠?

모얌 왕녀에게 과분한 위로와 격려를 받고 있는데 병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 어느 때보다 험상궂은 미간을 한 진이었다.

근무지 이탈에 근무 태만.

진이 그렇게 만류한 곳에 와서 이 꼴로 누워 있으니, 그로선 몹시 화가 날 만도 했다. 앞으로 일하는 데도 지장이 있을 테고.

병실을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눈을 이글거리고 있는 진을 보며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뒤늦게 찾아온 마음의 통증 때문에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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