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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내가 모르는 사이 (58/110)


#58화. 내가 모르는 사이
2022.06.20.



 
하말린의 전통 치료 시설인 ‘치유의 오두막’에 갔다 하혈을 하며 쓰러진 이후.

모얌 왕녀는 내가 중독된 독이 무엇인지 밝혀내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는 데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진은 며칠째 화가 난 얼굴로 입을 꾹 다문 채, 내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번엔 정말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이렇게 또 민폐나 끼치고 있다니. 스스로에게 실망스러워 입이 썼다.

아무 일 아니라는 듯 툭툭 털고 일어나고 싶은데, 몸도 몸이지만 생각보다 마음이 잘 잡히지 않았다.

아무리 선대의 명에 따른 정략결혼이었다지만, 프러너스는 왜 내게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도리어 처음엔 큰 상처가 아니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분노감와 상실감은 점점 더 선명해지며 나를 괴롭혔다.

생각했던 것보다 내가 받은 타격이 컸고, 그 사실이 분했다.

물론 언제까지 정신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내가 좋아하는 일에서 탈출구를 찾아보기로 했다.


“왕녀님, 미남이 아니어도 좋으니 실력 좋은 버섯 전문가를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바쁜 중에 잠시 내 상태를 들여다보러 온 왕녀에게 부탁했다.


“또 버섯이에요?”

“버섯을 관찰하고 그리는 데 몰두하다 보면 마음도 안정되고 기운도 날 것 같아서요.”

“하긴, 로제트가 그린 버섯 그림을 보면 에로틱한 에너지가 터질 듯 충만하더라고요. 그건 버섯을 그릴 때 생에 대한 열망이 가장 강하게 차오른다는 뜻이거든요.”

버섯 부인도 민망한데 에로틱이라뇨.

그래도 왕녀가 끝까지 미남주의를 고집하지 않고 버섯의 효능을 인정해 주어 다행이었다.

나는 왕녀의 소개로 버섯 전문가를 만나기 위해 ‘나비의 계곡’을 찾았다. 각종 심령사와 정령사, 수도자가 많이 모여 사는 동네라고 했다.

왕녀의 시녀가 한 오두막의 문을 두드렸다.


“마스터, 왕녀님의 소개로 왔습니다.”

“아, 왕궁에서 오신 손님이시군요.”

안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리더니 곧장 문이 열렸다.


“어?”

나는 문을 연 이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뜻밖의 인물이 똑같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시아?”

“로제트 아가씨!”

지난날 토버마리의 플럼 하우스에서 미고의 영혼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준 심령사 부부 중 아내 쪽이었다.


“세상에, 어떻게 된 일이죠?”

우리가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음에도, 타지에서 아는 얼굴을 만나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더구나 짧은 시간이지만 매우 강렬하고 희귀한 경험을 함께하지 않았던가.

벌써부터 마음이 든든해지는 기분이었다.

이국적인 외모에 말이 없던 그녀는 알고 보니 원래 하말린 출신으로, 그때 본의 아니게 과묵했던 건 제국어에 서툴러서였다고.


“뷰글라스 씨는요?”

“그이야 틈만 나면 성대모사 연습에 연기 연습이죠. 지금도 헛간에서 연습 중이에요. 마치고 곧 돌아올 거예요.”

열세 살 소녀의 목소리를 흉내 내던 그의 모습이며 함께 겪었던 온갖 우여곡절이 떠올라 새삼 웃음이 나왔다.

화가 나 며칠째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진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런 소동도 없었지. 그때 진도 고생 많이 했고.

시아의 얘길 들어 보니, 뷰글라스는 원래 연극 배우였다는 게 아닌가.

제도 변두리 극장에서 배우로 무대에 서는 틈틈이 연기 강습 학원을 운영하던 그는, 무역상이던 숙부를 따라 하말린에 오게 되었고 운명처럼 시아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는 사연이었다.

심령사와 정령사가 가득한 하말린에서 뷰글라스는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고, 특기를 살려 영매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쩐지, 성대모사에 영혼을 갈아 넣더라니.’

그런가 하면 시아의 집안은 대대로 퇴마사를 배출한 곳으로, 그녀 역시 가업을 이어 퇴마사가 되었다고 했다.


“맞아, 시아는 퇴마사였잖아요. 내가 소개받은 건 버섯 전문가인데?”

“제가 퇴마사 겸 버섯 헌터라 그러신 것 같습니다.”

“버섯 헌터? 그게 뭐예요?”

“희귀한 이능을 가진 버섯을 찾아다니는 직업이죠. 주로 퇴마사들이 겸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흰 마기를 잘 감지하는데, 마기와 버섯은 둘 다 비슷한 냄새를 풍기거든요.”

내가 신기해하며 흥미를 보이자 시아는 버섯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들려주었다.


“아가씨는 버섯이 식물이라고 생각하세요, 동물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러고 보니 버섯은 뭐지? 버섯을 그리면서 식물 같기도 하고 동물 같기도 하다는 생각은 나도 자주 했다.


“영적인 관점에서 보면 버섯은 식물도, 동물도 아니고 특유의 이능을 지닌 별개의 종족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외계에서 왔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도 있고요.”

“외계에서 온 종족이라고요?”

“별 조각이 떨어진 곳에서 최초의 포자가 발견되었다는 기록이 있거든요.”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 중에는 버섯 요정이 등장하는 것도 있지만, 버섯이 외계에서 온 종족이라니 갑자기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외계 종족에 둘러싸여 그림을 그렸던 걸까.


“심령사인 저희가 서로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듯이, 버섯은 주로 다양한 매개물로 쓰이는 이능이 있습니다. 힘이나 기운을 흡수하고 증폭시키고 전달하고.”

“이능이라니, 정말 신기한 얘기네요.”

“그래서 버섯엔 정령이나 마기가 잘 깃든다고 하지요.”

“일종의 마물이라고 봐도 되는 걸까요?”

“네, 그렇습니다.”

그동안 버섯을 그렇게나 많이 관찰하고 그렸지만 난생처음 듣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한 기이한 이야기였다.

숲에서 버섯을 그리다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 적은 있었지만. 버섯의 생김새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물이라고 해도 놀랍지 않을 정도로 기기묘묘한 데다 괴이한 빛을 띨 때가 많았다.


“실은 아가씨를 하말린에서 다시 뵙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미고 아가씨의 마지막 전언을 알고 있으니까요.”

“맞아요, 고 앙큼한 녀석이 이곳에 진짜 해답이 있다고 한 바람에 여기까지 오게 됐죠.”

“그런데 아가씨, 안색이 안 좋아 보이세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시아가 한눈에 보기에도 안 좋아요? 실은…….”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시아에게 털어놓았다. 왕녀와 여러 사람이 그 독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힘쓰고 있다는 사실도.

사연을 듣는 시아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아가씨, 허락하신다면 제가 아가씨 상태를 좀 살펴봐도 될까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아가 조그마한 마방진이 그려진 손수건을 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오랜만에 감상하는 시아의 마방진이었다. 역시 뛰어난 솜씨였다. 시간이 되면 이곳에 있는 동안 시아에게 마방진 그리는 법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방진을 따라 일렁이던 오묘한 빛이 사라지자 내 증세를 살피던 시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 미천한 소견으로는, 아가씨의 몸을 장악하고 있는 건 독이 아니라 주술인 것 같습니다.”

“네? 주술이라니요? 어째서 그게 내 몸에…….”

“제가 주술이라 생각하는 이유는, 마침 제가 주로 사냥하는 희귀 버섯이 그 주술에 사용된 듯하기 때문입니다.”

시아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버섯은 매개물로 사용되기 좋은 이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제가 쫓는 그 버섯은 특히 마기의 증폭과 매개에 뛰어나 흑마술의 재료로 사용됩니다. 매우 조심스레 다뤄야 할 놈이지요.”

“그러니까 내가 어떤 독에 중독된 게 아니라 버섯을 재료로 쓴 흑마술에 걸린 거란 얘긴가요?”

“제 소견은 그렇습니다. 왕녀님이 그토록 애를 쓰시는데도 독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하신 건 그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독도 아니고 이번엔 주술이라니. 나에 대해 내가 모르는 일이 대체 얼마나 더 있는 거야.


“그 버섯은 하말린에서만 발견되는 희귀 버섯이라 타국 사람들은 흔히 정령의 돌이라고 부르지요.”

“정령의 돌이라면…….”

사람의 기억을 조작하거나 정신을 조종하는 흑마술에 쓰인다는 그 광물 아닌가?

암시장에서 매우 쏠쏠한 가격에 거래돼 페가수스에서도 노린다고 일전에 플록스가 얘기했던 그 돌.

내 의문은 시아가 곧장 풀어 주었다.


“저희는 그 버섯을 개똥이라고 부르는데, 다른 버섯과 달리 땅속에 사는 데다 모양이나 색깔, 단단한 정도가 돌과 흡사해 광물로 착각하기 쉽지요.”

“정령의 돌이 실은 버섯이라고요?”

“덩이버섯의 일종입니다. 먹는 화석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고가에 암거래되는 정령의 돌도, 버섯 헌터인 시아가 찾아다니는 희귀 버섯도, 내가 걸린 흑마술의 재료도 모두 그 덩이버섯이라는 얘기였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레이디 앰브로시아!”

타이밍도 좋게 성대모사 연습을 마친 뷰글라스가 귀가해 나를 발견하고는 반가운 목소리 인사했다.

여전히 사기꾼 같은 그의 이목구비를 보자마자 나는 양손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아니, 저와의 재회가 그 정도로 기쁘신 겁니까? 아니면 설마…… 그 정도로 꼴 보기 싫으신…….”

뷰글라스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나는 서럽게 흐느꼈다.


“죄, 죄송합니다, 레이디.”

“독살도, 암살도 있잖아. 나 하나 없애는 데 꼭 주술씩이나 동원해야 했어?”

중독도 이해가 잘 안 갔는데, 주술은 더더욱 납득하기 어려웠다. 프러너스가, 아니면 누군가가 나를 죽이려 했다면 얼마든지 다른 방법이 널렸을 텐데 말이다.

주술까지 써서 나를 망가뜨려야 했을 만큼 내가 큰 죄를 지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가씨…….”

시아가 내 등을 쓰다듬었다.


“아가씨에게 주술을 쓴 자는 아마 아가씨의 죽음을 바라지 않을 거예요.”

나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시아를 바라보았다.


“오히려 꼭 살려두어야 할 이유가 있었을 거예요. 이 흑마술은 기억을 조작하거나 정신을 조종하는 데 쓰인다고 말씀 드렸지요? 아마도 주술로 감추고 싶었던 비밀이나 조작하고 싶었던 사실이 있었을 거예요.”

조작된 기억, 빼앗긴 기억,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잃어버린 기억 그리고 진실.


“그때 이이도 말했어요. 아가씨 영혼에 조금 특이한 점이 있다고.”

미고의 장례식이 끝나고 뷰글라스가 그런 말을 했던 게 떠올랐다. 내 영혼에 문제가 있다는 건 이제 세상사람 모두가 아는 사실이 된 건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보니 그랬다.

프러너스는 효율을 지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1분 1초도 내게 허투루 쓰일까 봐 아까워하던 인간이다.

그런 그가 그저 내가 밉고 싫고 거슬린다는 이유만으로 내게 복잡하게 주술까지 거는 정성을 들일 리가 없었다. 게다가 고가인 정령의 돌까지 이용해 가며.

단순히 나를 치우고자 했다면 좀 더 간단하고 효율적이고 싼 방법을 썼을 것이다.

그가 주술까지 동원했다면, 그건 본인이나 가문의 생존이 달린 위급하고 중대한 사안이라서가 아닐까.

왜,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거지, 카를슈테인?

그렇게 소중한 첫사랑마저 포기하게 만든 내 이용 가치가 무엇인지, 반드시 알아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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