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찾아 줘, 당신이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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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찾아 줘, 당신이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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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찾아 줘, 당신이 나를
2022.06.24.
우리의 결혼은, 프러너스에겐 처음부터 끝까지 정략결혼이었다.
신기할 정도로 나는 그 사실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와 새삼 돌아보니, 그는 선대의 명이라는 이유로 순순히 정략결혼을 받아들이는 인간은 아니었다. 스스로도 이용하려 들었을 것이고, 면밀히 계획했을 것이다.
모든 것이 프러너스의 계획 속에 있었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렇다면 나를 들인 것도, 내친 것도 모두 이유가 있을 터.
“레이디께서 고민하시니, 혹시 도움이 될까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뷰글라스가 시아와 눈짓을 주고받으며 입을 열었다.
“최근 버섯 헌터들 사이에 심상치 않은 얘기가 돌고 있어서 말입니다. 덩이버섯인 정령의 돌은 그간 제국의 암시장에서 소량 거래돼 왔습니다. 이 요물에 대해 아는 이가 제국엔 많지도 않고요.”
하긴 흑마술의 재료가 필요한 경우가 얼마나 되겠는가. 나만 해도 최근까지 그 존재조차 모르고 살았는데.
“그런데 요즘 부쩍 제국 쪽에서 정령의 돌을 구하려는 사람이 많아져서요. 왜 갑자기 수요가 늘어난 걸까 이상하게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배에서 플록스도 최근 들어 정령의 돌을 찾는 이가 많아졌다고 했지.
“마침 수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겁니다. 제국의 어느 귀족 가문에서 다량의 직거래를 원한다고요. 조건도 아주 파격적이었습니다.”
외국과 직거래를 시도할 만큼 부와 권력, 교섭력과 상술을 갖춘 제국의 귀족가라면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동안 내게 주술을 건 범인이 프러너스라면, 그동안은 나 때문에 정령의 돌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공작가를 나온 지금은 더 이상 필요 없을 텐데, 오히려 더 많이 사들이려 한다?
그는 정령의 돌을 어디에 쓰려는 걸까? 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 거지?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그 귀족의 뜻대로 됐나요?”
내 질문에 뷰글라스가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웃으니 어째 더 야비한 사기꾼 같아 보였다. 불쌍해.
“조건이 파격적이라는 건 제국 출신인 제 눈에나 그렇지요. 여기 사람들은 그 제안 자체를 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왜죠?”
“흠, 레이디도 느끼셨을 텐데요. 여기 사람들이 좀 ‘괴짜’ 아닙니까.”
뷰글라스는 시아의 눈치를 보며 ‘괴짜’만 제국어로 말했다. 화를 부르는 행동이었다.
시아는 진정 퇴마사다운 표정을 지으며 뷰글라스를 쏘아보았다.
“방금 하말린 사람들을 나쁘게 말한 거죠? 그것도 비겁하게 제국어로.”
“아, 아니오, 부인. 나는 레이디께서 못 알아들으실까 봐 걱정돼 그런 거요.”
“아가씨의 하말린어는 당신보다 훌륭하거든요? 저렇게 유창하신 줄 알았으면 제국에서 뵈었을 때 수다를 많이 떨었을 텐데.”
확실히 플럼 하우스에서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때의 시아와 지금의 시아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땐 좀 스산해 보였다면, 지금은 입이 자그마하고 목소리 톤이 맑고 가벼운 편이라 말할 때마다 귀여운 느낌마저 주었다.
반전 매력이 있는 부부랄까. 사람들의 편견에 일침을 가하기 위한 표본 같았다.
시아는 카리스마 있는 얼굴과 귀여운 목소리로 항변했다.
“아가씨, 하말린 사람들의 반응은 지극히 당연한 거랍니다. 우린 늘 자연에게 빌려 쓴다는 생각으로 살아요. 주인도 아닌데 주인 행세를 하거나 약탈하는 건 순리에 어긋나는 짓입니다. 악귀는 그런 욕심을 양분 삼아 태어나지요.”
안됐네, 프러너스. 당신이 무슨 흉계를 꾸미는지 모르겠지만 완전히 헛다리 짚었어.
여기 사람들은 당신 계획대로 호락호락 움직여 주지 않을 것 같네.
시아와 뷰글라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저 프러너스를 원망하고 내 불행을 한탄하는 데 그치기엔 사안이 간단치 않아 보였다.
나는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마치 구경꾼인 것처럼 한 발짝 물러나 다시 들여다보았다.
나는 오랫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 흑마술에 희생돼 왔다. 그 흑마술은 기억이나 정신을 조작하거나 조종하는 데 쓰인다고 하니 내게도 그와 같은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범인은 프러너스 혹은 카를슈테인 공작가가 유력하다.
그 주술에는 하말린에서만 구할 수 있는 정령의 돌이 필요하다. 실은 덩이버섯인 그 정령의 돌을 프러너스가 다량으로 쓸어 가려고 눈독을 들이고 있다.
내 결혼은 단순한 정략결혼이 아니었다. 무언가 더 큰 음모가 감춰져 있을 것이다. 불길하게도 최근 하말린과 관련한 제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혹시 둘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왕궁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진과 모얌 왕녀에게 내가 알게 된 사실들을 곧장 알렸다.
버섯 보러 갔던 사람이 갑자기 돌아와 잠꼬대 같은 소리를 늘어놓자, 처음엔 진과 왕녀 모두 놀란 눈치였다. 조심스럽게 내 정신 상태를 떠보았으니.
하지만 두 사람은 양국의 정보 전문가답게 금세 사건의 가닥을 잡는 듯했다. 부디 내 불길한 예감 따위는 괜한 걱정에 그치고, 내 개인적인 불운으로만 끝나기를 바라지만.
더욱 착잡해진 심정을 수습하고 싶어 나는 숙소인 별궁과 본궁 사이에 있는 정원을 걸었다. 이국적인 식물들이 눈길을 끌었다.
진실을 알면 알수록 더 불행해질 뿐인데, 과연 진실을 파헤치는 게 옳을까. 사라진 기억은 사라진 채로 내버려 두는 것이 낫지 않을까.
프러너스가 내게 한 짓을 밝혀내겠다고 호기롭게 다짐했지만, 점점 주저하게 된다.
돌아보면 나 자신이 부끄럽고 한심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자신이 어떤 거대한 음모에 연루되었는지도 모른 채, 그저 남편의 사랑을 구걸하는 데만 정신이 팔렸던 지난 생이라니.
나 같은 멍청이에게 주어지기엔 과분하게 많고 아까운 시간이었다. 신이시여, 당신은 권능과 자비를 쓸모없는 데 낭비하셨습니다.
신의 화답인지 역정인지, 갑자기 이마 위로 시원한 물방울이 툭 하고 떨어졌다.
‘황금 비……?’
말로만 듣던 하말린의 골든 레인이었다.
빗줄기가 순식간에 거세졌지만 나는 넋을 잃고 이 신기한 광경을 바라보았다.
마치 황금빛 노을 속에 있는 듯 사방이 찬란한 빛으로 물들었다.
하말린에만 나타난다는 희귀한 기상 현상인 골든 레인. 말 그대로 황금빛을 띠는 소낙비로, 이 비 덕분에 이곳의 자연과 자원이 이토록 풍요롭고 윤택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하말린에는 흔히 ‘정령의 나라’, ‘정령의 축복을 받은 땅’과 더불어 ‘황금 비가 내리는 곳’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세상이 꼭 샤프란으로 물들인 요리 같기도 하고, 통째로 꿀단지 속에 빠진 것 같기도 하고. 황홀하면서도 아름다워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실은 외계에서 온 이종족일지 모른다는 버섯들. 그 형형색색의 버섯들이 하늘을 향해 갓을 뒤로 젖힌 채 오랜만에 이 꿀 비를 양껏 받아먹는 모습이 문득 눈앞에 떠올랐다.
‘맛있을 것 같아.’
나는 고민하다 얼른 혀를 조금 내밀었다. 이 골든 레인이 무슨 맛일지 견딜 수 없이 궁금했다. 왠지 달콤할 것 같았다.
‘어?’
그런데 혀에 떨어져야 할 빗방울은 떨어지지 않고 검은 그림자가 머리 위를 덮쳤다.
고개를 들어 보니 커다란 재킷이 우산이 되어 쏟아지는 비를 가리고 있었다. 동시에 익숙한 손길이 내 팔을 감쌌다. 비에 젖어 차게 식은 내 팔에 닿은 그 손이 무척 뜨거웠다.
그 재킷과 손의 주인은 나를 근처 정자로 이끌었다.
“몸이 아직 안 좋을 텐데, 비는 왜 맞고 서 있어?”
진이 머리를 덮었던 재킷을 거둬 탁탁 턴 뒤, 다시 내 어깨에 걸쳐 주었다. 재킷에서도 삼나무 향이 풍겼다.
“꼭 비를 맛보려는 사람 같잖아. 이상한 오해받기 딱 좋은 모습을 하고서는.”
“……신기하잖아. 골든 레인을 태양의 눈물, 허니 레인, 꿀물이라고도 부른다지? 왠지 달콤한 맛일 것 같아.”
“우린 신의 오줌이라고 부르는데. 이상한 냄새 나는 거 같지 않아?”
“…….”
여하튼 분위기 깨는 덴 선수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입에 채웠던 자물쇠는 이제 풀기로 했나? 화난 얼굴로 며칠 동안 한 마디도 안 하더니.
“이제 나랑 다시 말하기로 한 거야?”
이 말을 신호로 진은 다시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화난 얼굴까지는 아니었다.
한동안 둘 다 말없이 황금빛 속에 잠긴 세상을 바라보았다. 잘 빚은 술같이 농후하고 향기로운 이 금빛 순간에 진과 나도 녹아들어 있었다.
“이제 와 묵은 악의를 들추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실은 두려웠다. 내가 모르는 음모가 있다는 걸 알고서 진실을 밝히겠다며 호언장담하던 처음의 용기는 어느새 옅어지고, 나는 겁먹고 주저하고 있었다.
내 의문에 대한 답은 들리지 않고, 더욱 거세진 빗소리만이 주변을 가득 채웠다.
하긴, 나 자신 말고는 누구도 대답해 줄 수 없는 질문이었다. 저 빗줄기에 내 고민과 방황도 시원하게 씻겨 내려가면 좋으련만.
“로제트.”
진의 입에서 나온 내 이름이 낯설게 들렸다. 내가 이름을 허락한 후에도 그는 나를 ‘레이디 앰브로시아’라고 부르는 걸 더 편하게 여기는 듯했으니까.
“며칠 동안 화가 나서 어찌할 바를 몰랐어.”
진은 시선을 여전히 정원 쪽에 둔 채 말했다.
“나에겐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인데, 손 닿는 것조차 주저될 만큼 아끼는 사람인데. 그 사람에게 함부로 군 자들을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견딜 수 없었어.”
진의 시선이 마침내 내게로 향했다. 그는 손을 뻗어 내 한쪽 뺨을 쓸었다.
“다시는 누구에게도 그런 취급 받지 마.”
나는 진의 말을 착각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진, 당신은 보기보다 정이 많아 탈이야. 당신이 처한 현실을 생각하면 좀 더 냉정해져야 할 텐데.”
“다른 일엔 얼마든지 냉정해.”
“알아, 당신이 자기 사람들을 특별히 아끼는 거. 그 속상한 마음 어떤 건지 나도 알 것 같아.”
진이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손으로 자기 머리칼을 마구 흐트러뜨리며 웃었다. 웃음소리가 허탈하게 들리기도 하고 왠지 열 받은 것 같기도?
“당신은 몰라. 장담하지.”
“나도, 나도 알아. 미고 때문에 속상한 적도 있었고, 또…….”
책임 1, 2, 3호 때문에 화가 나서 오지랖을 떤 경험이 줄줄이 있으니까.
당신은 새끼 고양이 한 마리도 여태 잊지 못했잖아. 불쌍한 사람을 보면 눈빛부터 달라지는 거 뻔히 보인다고.
하지만 진은 내 말을 단호하게 부정했다.
“당신이 모르는 것도 당연해. 내가 제대로 표현한 적이 없으니까.”
이렇게 말한 진은 말릴 틈도 없이 정자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사이 더 굵어진 빗줄기에 진의 머리칼과 옷이 순식간에 흠뻑 젖었다.
진짜 삼나무라도 된 것처럼 진은 빗속에 서서 꼼짝 않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진, 그만 들어와. 그러다 탈 나겠어.”
“로제트.”
“그래, 말로 하자. 어서 이리로 올라와.”
내 걱정에도 진은 보란 듯이 팔을 벌리고 고개를 젖히더니 빗물까지 받아 마셨다.
이 비 신의 오줌이라며? 난 당신 때문에 맛도 못 봤는데.
진은 빗물이 흐르는 얼굴로 황당해하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비가 꿀 비면, 나도 이 비를 마시면 달달해지나?”
그렇게 묻는 진은 웃고 있었지만 그 얼굴이 이상하게 슬퍼 보였다.
“난 마음이란 게 어려웠어. 내가 누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을 가져도 되는 건지. 아무도 내게 가르쳐 주지 않았어.”
“진…… 당연히 당신에겐 처음부터 있었어.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이.”
“그래, 이젠 나도 알게 됐어. 내게도 누군가에게 줄 마음이 있다는 걸.”
마침내 진이 다시 정자 위로 한 걸음, 한 걸음 올라왔다. 머리카락에서 황금빛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그는 내 앞에 섰다.
“나는 품위도, 마음을 표현하는 법도 배우지 못했어, 젠장.”
여느 때처럼 미간을 잔뜩 좁힌 진이 내뱉었다.
“이런 나를 조금이라도 불쌍하게 생각한다면, 당신이 찾아 줘. 내 안에도 달콤한 것이 있는지.”
진은 젖은 옷이 닿지 않게 하려고 조심조심하면서 손으로 내 얼굴을 감쌌다. 연기 연습을 할 때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진의 입술이 내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진에게서 떨어진 빗방울이 내 얼굴 위로 미끄러졌다.
좀 돌아서 오긴 했지만, 나는 결국 골든 레인을 맛보았다.
꿀 비가 맞았다.
이 비를 마신 것은 과일이든 채소든 사람이든, 혀가 꼬부라질 정도로 달아진다는 것도 모두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