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너를 잃은 내가 어떻게
(62/110)
62화. 너를 잃은 내가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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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너를 잃은 내가 어떻게
2022.07.04.
어린 로제트가 느꼈던 공포와 고통이 기억을 타고 건너온 걸까. 나는 기억의 분실물 취급소에서 왕궁으로 돌아오자마자 앓아눕고 말았다.
덕분에 내가 몰래 최면술사를 만나고 온 일이 진에게도 전해졌고, 화가 난 그가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내 방에 막 들어선 참이었다.
진은 무슨 일이 있어도 태연하고 무심한 태도로 일관하던 사람인데, 지금은 그답지 않게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는 씩씩거리기까지 했다.
“자신을 소중히 하라고, 그렇게 부탁했는데!”
하지만 나는 미안하게도 진이 화내는 것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만난 진이 눈물 나게 반가워서, 노발대발하고 있는 진의 목을 다짜고짜 끌어안았다.
“진, 보고 싶었어!”
“하…….”
어이가 없어 허탈한 웃음만 흘리던 진은 이내 나를 세게 끌어안았다.
진이 커다란 손으로 내 등과 뒷머리를 감싸자 내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는 마음껏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기억을 되찾길 잘했어.’
생각해 보면 내게는 꽤 흉흉한 기억이었는데도, 내 삶을 망가뜨린 자들에 대한 감정의 앙금이 크지 않았다.
내가 당한 일에 대한 억울함이나 분노, 괴로움이 벌써 희미해진 듯해 스스로도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런 것에 연연하기에는 진을 되찾은 기쁨이 너무도 컸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 준다는 하말린의 최면 시술소. 그곳에서 나는 어린 시절 흑마술로 봉인당한 기억을 전부 되찾았다.
카를슈테인 가문은 자신들의 추악한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한 사람의 삶을 철저히 짓밟았다.
아니, 한 사람의 인생만이 아니었다. 여러 사람의, 심지어 자기 자신의 인생조차 저당 잡혔다. 그 희생자들 중에 진도 있었다.
놀랍게도, 내가 잃었던 기억은 모두 진과 이어져 있었다. 내가 잃어버린 기억은 곧 그가 잃어버린 시간과 같았다.
하마터면 진을 영영 잃은 채 살아갈 뻔했다고 생각하니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를 찾은 것만으로도 그간의 고통과 방황이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비록 고통스런 기억이지만 되찾길 잘했다고 몇 번이나 되뇌었다. 잘했어, 정말 잘했어, 로제트.
이제 남은 문제는 이 모든 사실을 진에게 전하는 일인데. 그의 모든 것이 걸린 이야기라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가능한 한 그가 상처도, 혼란도 덜 겪도록 돕고 싶은데…….
“진, 우리가 나눌 이야기가 무척 많아.”
진의 품에서 삼나무 향 체취를 맡던 얼굴을 들고 서두를 떼자, 진이 내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이야기가 아무리 급해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게 먼저지.”
이젠 시도 때도 없이.
골든 레인의 효과가 꽤 오래간다는 사실도 추가로 확인되었다.
.
.
.
“어떻게 그런 짓을.”
진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방금 전 흥분했을 때보다 훨씬 더 분노하고 있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되찾은 몇 가지 기억 중에서도 진의 출생에 관한 비밀과 황위를 둘러싼 음모에 관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래도 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그것일 테니까.
예상대로 진은 괴로운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간 진이 살아온 외롭고 험난한 삶을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었다.
빼앗긴 황위, 빼앗긴 권리, 빼앗긴 행복.
“나쁜 놈들.”
“맞아.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는지.”
“죄 없는 어린아이에게 어떻게 그런.”
“그래, 어쩜 그리 가혹하게 굴었을까. 어렸을 적 당신 모습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너무 아파.”
지금도 그때의 진을 꼭 안아 주고 싶었다. 오죽했으면 내가 그 아이를 잊지 못하고 몇 번씩 삶을 되돌아왔을까. 막상 돌아온 후에는 기억을 못 한 것이 문제지만.
하지만 내 말에 진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내 얘기가 아니라 당신 얘기잖아.”
“응?”
“그들이 당신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
“아, 나는 뭐, 괜찮아.”
“조금도 안 괜찮아. 그때의 당신이라면 딱 미고 같았겠지. 미고가 그런 일을 당하는 모습을 떠올리기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아.”
“아…….”
“그들을 결코 용서할 수 없어. 로제트, 당신이 허락한다면 내 영혼을 갈아 넣어서라도 복수하고 싶어.”
“싫어!”
나 때문에 쓸데없이 괴로워하는 진 때문에 역시 괴로워진 나는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선 괜한 오해를 살까 봐 얼른 덧붙였다.
“내 남은 시간을 그 쓰레기들에게 한 순간도 낭비하고 싶지 않아. 그보다는 당신이 행복한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볼 수 있으면 좋겠어.”
“로제트.”
진은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여전히 괴로워했다.
어쩌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진 역시 자신에게 일어난 일보다 내가 겪은 불행에 더 마음 아파하고 있었다.
기껏 힘들게 당신의 비밀을 알아 왔더니만. 진실을 알게 돼 좋은 점은 하나도 없는 거야?
나 때문에 아파해 주는 건 물론 고맙고 찡했지만, 조금 힘 빠지는 반응이었다. 복수를 하고 싶거든 당신 자신을 위해서 하라고!
“진,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돼서 기쁘지 않아? 잘하면 빼앗긴 당신 몫의 권리를 되찾을 수도 있잖아.”
내 목소리에서 서운함을 읽었는지, 진이 고개를 들고 내 눈을 마주보았다.
“있지, 기쁜 점도.”
“그렇지? 어떤 점이 기쁜데?”
“내 어머니가 누구인지 알게 된 거.”
그거야…… 생각해 보면 기쁘고도 남을 일이긴 한데. 솔직히 미처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나는 늘 내 어머니가 어떤 분인지 궁금했어. 그저 천한 신분이고 이미 돌아가셨다고만 했지, 제대로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어. 미친 듯이 어머니를 찾고 싶었던 때도 있었지. 그걸 알면 내 삶이 달라질 것만 같았거든.”
이번엔 내가 진을 꼭 안아 주었다. 그는 덩치 큰 아기처럼 순순히 내게 몸을 기댔다.
“한때 나란 인간은 사랑받은 기억이 없어서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없을 거라 생각했어. 그런데 꼭 그런 것도 아니더군.”
진이 내 왼쪽 관자놀이에 있는 자주색 점에 입을 맞췄다.
“당신 덕분에 어머니가 어떤 분인지 알게 돼 기뻐. 내가 어디서 나오게 됐는지 알게 되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든든한 일이군. 그렇다고 나라는 사람이 바뀐 것도 아닐 텐데, 왠지 조금쯤 바뀐 것 같은 착각이 들어.”
“나도 당신이 달라 보이는 걸? 당신이 누군가의 아들이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거든. 그 눈, 코, 입이 어디서 왔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설렌다.”
“물론 어머니의 신분은 전혀 중요하지 않아. 어머니가 황후가 아닌 빈민가의 여인이었다 해도 나는 어머니를 사랑했을 거야.”
“알아.”
“하지만 방금 당신 말을 듣고 어머니가 황후여서 좋은 점 한 가지는 발견했어. 원한다면 어머니가 어떻게 생긴 분인지 알 수 있다는 거.”
“벌써부터 가슴이 막 뛴다.”
진이 어머니를 충분히 그리워할 시간을 준 뒤, 나는 다음 진실의 문을 열기로 했다.
“진, 당신이 알아야 할 진실이 하나 더 있는데…….”
내 말에 진이 긴장하는 게 보였다.
“어렸을 때 황궁 후원에서 자두 쿠키를 준다고 했던 그 소녀 말이야, 그거 나야.”
진의 눈이 평소보다 커졌지만 아주 놀란 것 같지는 않았다.
“역시 당신이었네.”
“뭐야, 안 놀라?”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언제부턴가 쿠키 소녀 얼굴에 당신 얼굴이 겹쳐 보였어.”
“그것참…… 신기하네. 음, 어쨌든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해.”
“이렇게 약속을 지키러 왔잖아.”
“늦어도 너무 늦었지.”
“괜찮아, 이제라도 날 찾아내 줘서 고마워. 그 쿠키 소녀가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어서 너무나 기뻐. 오늘 들은 이야기 중에 그 사실이 가장 기쁘군.”
그러면서 진은 또 아무렇지 않게 내 입술을 노렸다. 어디 키스로 스리슬쩍 넘어가려고?
“잠깐. 기뻐만 하고 넘어갈 일이 아닌데?”
“으음?”
“나는 기억을 잃었지만 당신은 기억을 잃은 것도 아닌데, 어째서 나와 황후를 착각한 거야? 누가 봐도 외모나 분위기나 조금도 비슷한 구석이 없는데. 일부러 헷갈리기도 힘들 것 같은데 말이야.”
“그건…….”
진이 갑자기 미간을 좁히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시에 나는 갖은 학대와 음독 후유증으로 시력과 인지 능력이 심각하게 떨어진 상태였어. 그 또래 여자 아이들은 전부 리본과 레이스에 둘둘 말린 똑같은 솜뭉치로밖에 안 보였다고.”
심각한 얼굴로 변명을 늘어놓는 모습이 재밌어서 일부러 아무 대꾸 없이 굳은 얼굴로 진을 쳐다보았다. 진이 계속해서 변명을 늘어놓았다.
“어쩐지, 한참 만에 나타난 소녀에게 약속한 쿠키를 달라고 했더니, 내 얼굴을 빤히 보다 쿠키가 아닌 캐러멜을 주더라니. 어쨌든 나 혼자 당신을 기다리며 얼마나 슬프고 외로웠는지…….”
“앞으로 조심해.”
“옙. 그래도 그 쿠키 소녀가 당신이어서 기쁘다는 건 진심이야. 이제 그때 한 약속 지킬 거지? 책임도 지고.”
“응?”
“미고가 그랬지. 내가 당신에게 구원받았다고. 그리고 한 번 더 구원받을 거라고. 이제야 확실히 알게 됐어. 그 말의 의미를. 그리고 한 번 더 구원받을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것도.”
그러고 보니 진짜 해답은 하말린에 있다는 것 말고도 미고가 내게 남긴 말이 또 있었지. 진에게 자두 쿠키를 주라던 말.
“성대한 예식은 약속할 수 없어. 하지만 언제나 내 삶의 가장 중요한 곳에 로제트 당신 자리를 둘게.”
훅 들어온 청혼의 말에 내 가슴이 주책없이 두근거렸다. 정체불명의 희미한 자국 하나 보여 주고 책임지라고 우기면 다야?
내가 진을 사랑하는 것은 의심할 나위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결혼할 수 있을까?
솔직히 결혼이라면 지긋지긋하기도 했고, 결혼 후 시간이 흐르면 진의 마음도 변할지 몰랐다.
“진, 사랑과 결혼은 좀 다른 문제인 것 같아.”
“나한텐 같은 문제야.”
“내가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건 당신도 알지? 당신은 후사도 이어야 할 테고…….”
진이 기가 찬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내 말을 막았다.
“설마 내가 나와 똑같이 불행한 아이를 이 세상에 또 만들고 싶을 거 같아? 후사 따위 이을 생각 없어. 난 세상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사라질 계획이야.”
진, 당신의 아이는 결코 불행하지 않을 거야. 당신이 어머니께 물려받은 그 아름다운 눈, 코, 입을 다음 세대에도 물려주어야지.
더욱이 진에게는 황위를 이을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그 망나니 같은 폭군보다는 훨씬 더.
“진, 황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거야? 당신에게도 자격이 있잖아?”
내 말에 진의 눈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어째서 갑자기 없던 자격이 생긴 거지? 내가 지금껏 끔찍하게 증오해 온 것이 개뼈다귀 같은 혈통인데, 이제 와 그 혈통을 내세워 진흙탕 싸움에 뛰어들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
역시, 진은 저렇게 나오는구나.
예상했던 단호한 반응에 또 어떤 다른 핑계를 댈 수 있을까 궁리하는데, 진이 뭔가 주저하는 기색이더니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황후가 되고 싶은 건가?”
으응?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질문에 당황했다. 진을 보니 질문을 던져 놓고 고심하는 얼굴이었다. 그 쓸데없이 진지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장난기가 발동했다.
“되고 싶으면? 내가 황후가 되고 싶다고 하면 당신이 황제가 될 거야?”
내가 농담처럼 던진 물음에 진이 난감한 얼굴로 깊이 고민하는 게 아닌가.
아니, 방금 그렇게 단호하게 소신을 말해 놓고선? 대체 그런 어이없는 걸로 왜 고민하고 있냐고요!
나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진을 또 와락 끌어안고 말았다.
“내 취향은 황제가 아니라 껄렁하고 요망한 방탕 황자야.”
그제야 진은 당했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붉혔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았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을 다른 여자에게 보내는 건 절대로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던 거지.
“그럼, 난 뭘 하면 돼? 나도 성대한 예식은 약속 못 하는데?”
내 말에 그제야 진의 입꼬리가 시원스레 올라갔다.
“당신은 하나만 약속해.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고. 늘 거기 있어 줘. 그게 당신이 할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