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그 결투, 받아들이죠
(63/110)
63화. 그 결투, 받아들이죠
(63/110)
#63화. 그 결투, 받아들이죠
2022.07.08.
사랑이 면죄의 이유는 될 수 없을 것이다.
내 사랑이 아무리 소중해도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할 권리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더욱이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사랑이라는 흉기에 난도질당했던 내가, 어떻게 그런 염치없는 짓을 답습할 수 있겠는가.
진의 청혼을 받고 정신을 차려 보니 넘어야 할 큰 산이 있었다.
진과 결혼하는 것이 물론 죄는 아니지만, 이런 입장에 놓여 본 것은 처음이기에 마음이 무겁고 불편했다.
모얌 왕녀가 진을 향한 마음을 그렇게나 숨김없이 내게 털어놓고 도와달라고 부탁까지 했는데, 어떻게 아무 일 없다는 듯 굴 수 있겠는가.
왕녀는 나를 철석같이 믿고 그렇게 했을 텐데.
게다가 왕녀가 나를 얼마나 살뜰히 챙겨 주었는가. 프러너스의 외도로 상처 입은 나를 치유해 주려고 그녀는 아닌 척하면서 갖은 애를 썼다.
겉보기엔 조금 일방적이고 제멋대로인 것 같지만, 실은 매우 속 깊은 사람이었다.
생각해 보면 기억을 되찾고 진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도 최면술사를 소개해 준 왕녀의 공이 컸다. 그녀에겐 미안한 일인지 모르지만.
나는 인생 17회차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간의 다양한 감정에 눈뜨기 시작한 느낌이다.
사랑도 사랑이지만, 우정이라는 감정에 나는 새삼 심취해 있었다. 사랑만큼 강렬하진 않지만 사랑보다 더 감동적인 면이 있었다.
나는 우정에 대해 모얌 왕녀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내가 그녀에게 우정을 바라는 건, 사랑도 우정도 놓치기 싫은 이기적인 심보일까.
이런저런 상념들 사이를 오가던 나는 어느덧 왕녀궁에 다다랐다. 모얌 왕녀에게 알현을 청하고 찾아가는 길이었다.
어찌 됐든 내가 넘어야 할 산이었다. 우리의 결혼 소식을 다른 사람을 통해 듣게 하는 것보다 내가 직접 전하는 것이 왕녀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다.
“왕녀님, 그렇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모얌 왕녀에게 진과의 사이를 밝힌 이 순간에도 염치없이 기대하고 있었다.
화통한 왕녀가 아무렇지 않게 깔깔 웃으며 괜찮다고, 축하한다고 말해 줄 것을.
하지만 나와 진의 결혼 소식을 들은 왕녀의 얼굴은 이내 차갑게 굳었다. 왕녀에게서 그런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흡사 다른 사람 같았다.
‘역시 내가 너무 터무니없는 기대를 했지.’
완전히 의기소침해진 내게 왕녀의 냉랭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말로만 마음이 불편하다 어떻다 늘어놓으면 다 해결되는 건가? 이러려고 하말린어를 배웠나 보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날 선 왕녀의 반응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왕녀가 진심으로 진을 좋아했구나. 진을 좋아했던 만큼 내게 느끼는 배신감과 원망이 크겠지.
“이런 경우 하말린에선 어떻게 하는지 아나요?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결투를 벌여서 마땅한 자격을 인정받아야 하죠. 사랑은 이곳에서 그만큼 중대한 문제예요. 시시한 장난이 아니라고요.”
무슨 말씀인 건지. 그래서 지금 결투라도 하자는 말씀?
“이건 명예가 달린 문제예요. 나는 당신 때문에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어요. 내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로제트 앰브로시아, 당신에게 결투를 신청합니다.”
“네에?”
결혼 소식을 전하러 왔다 갑작스런 결투 신청을 받게 된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농담이냐고 물었다가는 결투도 하기 전에 칼을 맞고 쓰러질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 왕녀의 분위기가 살기등등했다.
‘17회차 만에 겨우 진을 만났는데, 사랑다운 사랑을 해 보기도 전에 죽게 생겼잖아.’
나는 속으로 오들오들 떨면서 물었다.
“왕녀님, 제가 왕녀님을 위해서 해 드릴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나요?”
왕녀가 나를 가만히 노려보다 말했다.
“왜, 겁나요? 겁이 나면 도망가도 좋아요. 당신은 이방인이니 진과 함께 떠나 버리면 그만이죠. 나는 영영 불명예를 안고 살게 되겠지만.”
하말린 사람들은 정말로 사랑에 진심이구나.
불명예는 나같이 여기저기서 얻어터지는 데 인이 박인 사람이나 감당할 수 있는 말이지, 모얌 왕녀처럼 늘 당당하고 자신 있게 살아온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날벼락 같은 제안이었지만 왠지 왕녀를 위해 들어주고 싶었다. 또 어리석은 짓을 벌이는 건지는 몰라도 그녀를 위해 그냥 그렇게 해 주고 싶었다.
“왕녀님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정말로 그것이라면 받아들이겠습니다, 결투.”
나는 나름 결연한 얼굴로 왕녀의 결투 신청을 받아들였다.
왕녀가 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옆으로 휙 돌리더니 물었다.
“검으로 할래요, 총으로 할래요? 아니면 다른 걸로?”
“다른 것도 가능한가요?”
“얘기해 봐요. 가능하면 맞춰 보도록 하죠.”
“음, 저…… 노래 같은 것도 되나요?”
“노래?”
“역시 그건 좀 그렇죠?”
왕녀가 인상을 팍 구기기에 뱉은 말을 얼른 도로 집어넣었다. 진이 내 노래를 두고 강력한 무기라고 했는데. 그렇다고 버섯 이름 대기를 겨루자고 할 수도 없고.
내가 검과 총을 피할 방법을 쥐어짜며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데, 별안간 왕녀가 허물어지듯 쓰러지더니 흐느끼는 게 아닌가.
나는 깜짝 놀라서 왕녀를 바라보았다. 어?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눈가에 눈물까지 맺힌 채 어깨를 들썩이는 왕녀는 울고 있는 게 아니라 어째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꺄아, 더는 못 참겠네. 정말이지 못 말린다니까, 로제트는!”
결국 왕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뿜었다.
“아하하하, 어쩜 이런 엉성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수가 있어? 게다가 결연한 얼굴로 뭐, 노래? 아, 배 아파.”
배를 잡고 웃는 왕녀를 보며 내 얼굴은 터질 듯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모두 장난이었다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정말로 나랑 결투할 셈이었어? 응?”
“결투 얘기도 전부 지어 낸 거예요? 적어도 하말린에 그런 전통이 있는 건 사실인 줄 알았는데.”
“푸흑, 그런 전통이 어디 있어? 더욱이 하말린 사람들과 결투라니, 안 어울려도 한참 안 어울리지. 우린 그렇게 악착같은 사람들 아니라고요.”
“…….”
“하아하아, 그래도 결투를 받아들이다니 감동이었어.”
왕녀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냈다. 이제는 내 눈가에 눈물이 맺힐 차례였다. 너무나 분하고 부끄러워서.
“왕녀님, 정말 너무 짓궂으세요. 진을 좋아하신 거 아니에요?”
“엄청 좋아했죠. 그래서 금방 알아차렸죠. 진이 당신을 좋아한다는 걸. 하말린에 온 첫날, 그 항구에서 바로 알아차렸다니까.”
“네? 어떻게요?”
“하말린 정보 왕의 촉을 우습게 보지 말아요. 그날 내가 진에게 새 여자를 달고 나타났다고 타박했잖아요. 그거 농담 아니었다니까. 둘이서 우차 타고 갈 때 진을 엄청 떠봤죠.”
하말린에 도착한 첫날, 그때 그 요란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러다 둘 사이를 확신한 건, 당신이 내가 소개한 미남 치료사를 만나러 갔다 부작용으로 쓰러졌을 때예요. 그때 허겁지겁 병실로 달려온 진의 얼굴을 봤어요? 당신을 향한 진의 눈빛을 보고 모든 걸 알았어요. 둘 사이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는 것도.”
진이 그때 그랬구나…….
“모얌, 속여서 미안해요. 저도 진을 좋아하고 있었지만 제 마음을 숨길 수밖에 없었어요. 진에게조차도.”
나는 왕녀에게 사과했다.
“아니, 나야말로 미안해요, 로제트. 둘 사이를 눈치채고도 짓궂게 굴어서. 결투하는 전통은 없어도 자신의 감정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 하말린 사람들이 삶을 대하는 자세랍니다.”
왕녀는 말릴 틈도 없이 내게 깊이 허리를 숙였다.
“내 마음에 최선을 다한다는 핑계이자, 약간의 질투와 장난이 섞인 시험이었어요. 나의 무례에 용서를 구합니다.”
“이러지 말아요, 모얌.”
“두 사람의 결혼과 함께할 앞날을 축복합니다.”
왕녀는 축하의 말도 잊지 않았다. 그녀의 말에 나는 비로소 진과의 결혼을 온전히 기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나저나 제국인들은 겉과 속이 다르고 음흉하다고 들었는데, 로제트와 진은 어쩌면 그렇게 하는 짓이 귀여운 거예요? 아주 그냥 귀염둥이 커플이네.”
왕녀는 다시 깔깔거렸다.
“이제 매력덩어리 진 대신 누굴 좋아한다? 아이, 이런. 진은 이제 당신의 남편이 될 사람이니 내가 말을 조심해야 하는데. 하지만 걱정 말아요, 자유분방한 나지만 유부남은 절대 사절이니까.”
당연히 그러셔야죠. 앞으로 말도 조심해 주시고요.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이곳의 풍속이 그래요. 미혼의 연애에 대해선 관대하지만 기혼자의 외도에는 엄격하답니다. 왕부터 백성까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철저한 일처일부제인 건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러니 결혼 전에 부지런히 사귀어야지.”
“제국과는 많이 다르네요.”
“로제트와 진은 제국인이지만 결혼은 여기서 하니 이곳 풍속을 따라야죠. 풍속을 어지럽힐 시 내가 사지 관절을 오독오독…….”
“시간이 흐르면 진의 마음도 변할까요?”
“응? 무슨 소리예요? 로제트 당신한테 경고한 거예요. 참한 남자를 데려가 놓고 한눈만 팔아 봐. 조심하도록 해요. 지켜보고 있다.”
사지 관절이 오독오독 꺾일 사람이 나였군요.
모얌 왕녀와 나는 마주 보고 또 한바탕 요란하게 웃었다.
* * *
둘만의 조촐하고 소박한 결혼식을 원했지만, 이역만리 타국인 하말린에도 우리의 결혼을 축하하려고 잔뜩 벼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함께 온 페가수스의 직원들은 고대하던 결혼식을 간단히 치르는 것에 대해 매우 서운해했다.
그래서 축하연을 조금 시끌벅적하게 준비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시동생 시집살이가 따로 없었다.
진과 함께 결혼 소식을 알릴 사람들을 정리했다. 페가수스 본부의 동료와 부하들, 하말린 왕실에는 진이 소식을 전하기로 했다.
내가 소식을 전할 사람은 플럼 하우스의 사용인들과 소작인들, 마담 밤비가 전부였다. 명단이 참 짧기도 하네.
그리고 결혼 소식을 전한다는 핑계로 나는 뷰글라스와 시아 부부를 또 만나러 왔다. 혹시 진이 함께 가자고 할까 봐 진에겐 비밀로 하고.
이들의 오두막을 방문한 건 결혼 소식을 전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실은 다른 부탁이 있어서였다. 결혼 전에 꼭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결국 그때 그 신사분과 맺어지게 되셨군요. 누구보다 미고 아가씨가 무척 기뻐하시겠어요.”
“고마워요. 두 분도 내 상태를 알겠지만, 혹시라도 아기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해서요. 조그만 희망이라도 있는지 알고 싶어요.”
뷰글라스와 시아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기들의 수호신인 도마뱀 정령에게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혹시 레이디께 아기와의 인연이 감지되는지 말입니다.”
신기한 대답이었다.
나는 이렇게 아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혹시 모를 기적을 찾아 이곳에 왔다.
후사에 관심이 없다는 진의 말은 진심일 것이다. 또 그의 마음이 쉽게 변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보다는 내가 원하게 될 것 같았다. 진을 닮은 아이를 너무나 보고 싶고 안고 싶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조그마한 가능성이라도 있는지, 혹시라도 방법이 있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도마뱀 정령을 만나고 온 부부는 고개를 조용히 가로저었다. 내게서 아기와의 인연은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진정한 짝을 만난 것으로 만족하라는 전언이었다.
나는 더 이상의 욕심을 버리고 내 몫의 행복에 감사하고 만족하기로 마음먹었다.
* * *
뷰글라스와 시아는 로제트에게 전하지 못한 것과 잘못 전한 것이 있었다.
사실 도마뱀 정령이 전한 예언 중에는 로제트와 진의 앞날이 순탄치 않음을 안타까워하는 말들도 있었다.
험난한 길을 돌고 돌아 이제 겨우 진을 만나 행복을 맛보려는 로제트에게 부부는 그런 말까지 차마 전할 수가 없었다.
고의는 아니지만 실수로 빼먹은 것도 있었다. 그렇다고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아기와의 인연을 묻는 질문에 도마뱀 정령이 한 말은, 정확히는 ‘이번 생엔 없다’였다.
인간은 보통, 더욱이 같은 몸으로는 단 한 번의 생을 부여받기에, 심령사 부부가 보기에 ‘이번 생’이란 그저 별 뜻 없는 수식어쯤으로 여겨졌다. 생략해도 좋을 말이었다.
결혼을 앞두고 비밀리에 움직인 건 로제트만이 아니었다. 진도 로제트 몰래 하말린의 전통시장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로제트에게 의미 있는 결혼 선물을 하고 싶어 쓸 만한 물건이 있는지 살펴보러 나온 것이기도 했지만, 부하들의 어처구니없는 오지랖을 피해 달아난 것이기도 했다.
로제트와의 결혼 소식을 전하자, 부하들은 모두 자기 일처럼 흥분하고 기뻐했다. 여기까지 하면 딱 좋았다.
하지만 진의 부하들은 이상한 의무감에 불타 꼭 몇 발자국 더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