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독버섯 웨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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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독버섯 웨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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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독버섯 웨딩
2022.07.11.
이 페가수스의 인생 형님들은 자부했다. 보스와 레이디가 맺어진 데에는 자신들이 배에서 펼친 작전의 공이 컸다고.
그래서 이번에도 성공적인 예식과 초야를 위한 훈수를 어떻게 두면 좋을지 머리를 맞대고 궁리했다.
사실상 레이디 앰브로시아의 이혼 소송이 마무리되지 않았으니 따지자면 그녀는 제국법상 여전히 공작부인이었지만, 진이 서슬 퍼런 얼굴로 함구령을 내린 후로 감히 그에 대해 언급하는 이는 없었다.
외도를 하고 혼외 자식까지 만든 주제에 레이디가 합당한 이혼을 요구하는데도 뻔뻔하게 시간을 끌며 수작을 부리는 카를슈테인 공작의 철면피함을 욕할 뿐.
마침내 플록스가 드릉드릉 시동을 걸었다.
“보스, 자신 있으시지요?”
“무슨 소리야.”
“그…… 사랑받는 남편의 비결이랄까…….”
“회의 시간에 헛소리하려면 나가.”
“쑥스러워 마시고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은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십시오. 이 방면으론 보스도 은근 문외한이지 않습니까.”
“조언이라, 플록스 자네가? 나보다 나을 게 전혀 없잖아.”
“핫하, 보스도 참. 겸손한 척하니 정말로 그런 줄 아시나 봅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려면 꺼져.”
“저희는 그저 대 페가수스의 보스께서 첫날밤에 소박을 맞는 사태는 없었으면 하는 충심으로.”
“내가 어딜 봐서 소박맞게 생겼나.”
“잠깐만요, 보스. 그럼 하룻밤에 몇 번 정도가 적당한지나 아십니까!”
플록스의 다급한 물음에 직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저마다 소리 없이 손가락을 세웠다.
“어허, 밴스, 허풍 떨지 말고 손가락 두 개 이상 접어라.”
“이 비실비실한 사람들 좀 보게. 당연히 이 정도는 해야지.”
“거짓 정보로 괜히 보스 헷갈리게 하지 마. 그러다 큰일 난다.”
“죽 둘러보니 그 정도가 적당한 것 같은데?”
대충 한 가지 숫자로 의견이 좁혀진 듯했다.
“다음으로 합방 시의 순서는…….”
쾅. 결국 진이 회의실을 나가 버렸다.
하말린의 전통시장에서 로제트에게 줄 결혼 선물을 살펴보던 진은 다시 생각해도 치가 떨렸다.
부하들의 지나친 오지랖을 떠올리며 어이가 없어 미간을 찌푸리던 그때, 진의 눈에 한 남자가 포착됐다.
“저자는……!”
시장을 빠른 걸음으로 벗어나 어딘가로 향하는 그 남자는 진이 제국에서 본 적이 있는 남자였다.
진 역시 빠른 걸음으로 그의 뒤를 쫓았다.
* * *
도마뱀 정령의 전언을 듣고 조금 실망했지만,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다시 힘을 내 보기로 했다.
결혼식 축하연에 진과 나에게 의미 있는 음식인 자두 쿠키를 만들어 내놓는 건 어떨까. 결혼 선물로 진에게도 잔뜩 먹이고.
문제는 먹을 줄만 알았지, 요리라고는 해 본 적이 없다는 것.
고민하다 페가수스의 시동생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다행히 그들 중에 요리를 할 줄 아는 이가 꽤 됐다.
더욱이 내 부탁을 지나칠 정도로 반기는 게 아닌가. 쿠키를 만들자고 구호를 외치는 그들의 눈이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야수처럼 이글거려 미안하게도 조금 꺼려질 정도였다.
여하튼 직원들은 콧노래를 부르며 쿠키 반죽을 치대고, 하말린의 자두를 구해 와 퍽퍽 으깨서 설탕을 쏟아 붓고 불 위에 올려 저으며 잼을 만들었다.
우리는 빙 둘러서서 조물조물 쿠키를 만들었다. 모양을 찍어내는 것쯤은 나도 할 수 있었다. 우락부락한 시동생들은 솥뚜껑 같은 손으로 잘도 아기자기한 쿠키를 빚어냈다.
“저, 레이디, 보스를 많이 용서하고 이해해 주십시오. 저희 보스가 나쁜 사람은 아닌데 성격이 좀 지랄, 아니 까칠한 면이 있거든요.”
누군가 운을 떼자 진을 변명하는 건지 성토하는 건지 모를 말들이 이어졌다.
“예, 보스가 신경질을 팩 부릴 때가 있을 겁니다. 자기 위하는 말인지도 몰라주고. 어쨌든 보스가 레이디께 보나 마나 잘못을 많이 저지를 게 뻔하니 넓은 마음으로 감싸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흠, 내 기억 속엔 진이 나 때문에 뒷목을 잡은 기억밖에 없는데.
“다른 건 몰라도 그 무심 병은 혼인하시기 전에 저희가 딱 고쳐 놨어야 하는데. 다 저희 불찰이니 속상하실 때마다 저희를 욕하십시오.”
“보스가 어려서 사랑을 못 받고 자라 그런지 다른 사람이랑 닿는 걸 좀 꺼리는 면이 있습니다. 결벽증 비슷한 거랄까요. 미리 말씀드리니 서운해하지 마시라고요.”
치덕치덕 잘만 달라붙던데요? 둘만 있을 때는 애교도 곧잘 부리는데. 혹시 여러분과 접촉하는 게 좀 꺼려지는 건 아닐지요.
이렇게 보스 대처법 같은 걸 한차례 늘어놓던 직원들의 조언은 어느덧 ‘우리 보스는요’ 분위기로 바뀌었다.
보스가 어떤 걸 싫어하고 어떤 걸 좋아하는지 열심히 전수해 주려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시동생이 아니라 진의 헤어진 옛 연인을 상대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레이디가 도움을 청해 주셔서 저희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서슴없이 써 주십시오.”
역시 그들은 할 일이 생겨 기뻐하고 있었던 것이다. 들어보니 마침 내가 부탁하러 오기 전에 진이 자신들의 마음도 몰라주고 팩 성질을 내며 나가 버렸다는 게 아닌가.
보스의 결혼을 앞두고 자기들도 뭔가 힘을 보태고 싶은데, 보스가 쌀쌀맞게 굴며 받아 주지 않아 서운해하던 차였다는 얘기.
부하들이 자신을 생각해서 챙겨 주면 고맙게 받아 줄 것이지. 왜 그리 까칠하게 굴었담. 언제 한번 진에게 따로 얘기를 해 두어야겠다.
든든한 시댁 식구가 생긴 것 같은 이 기분.
지난 생에 이토록 아끼고 따르던 보스가 죽음을 당한 후 이들은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여러분, 내가 진에게 잘할게요. 걱정 말아요.’
* * *
드디어 진과 나의 결혼식 날. 석양이 지기 전 우리는 단둘이서 고요의 숲으로 들어갔다.
고요의 숲은 나비 계곡 뒤편에 있는 곳으로, 수도자와 정령사, 치료사들이 마음을 정화하고 좋은 기운을 얻기 위해 찾는 신성한 숲이었다.
조용한 예식을 원한 나와 진은 과묵하고 점잖은 하객으로 이름난 버섯들을 증인 삼아 혼인 서약을 했다.
“세상의 독버섯으로 지탄받아 온 두 사람이 이제 떨어질 수 없는 하나가 되어 더 크고 아름다운 독버섯이 되려 합니다.”
“버섯들이여, 서로 다른 것을 이어주는 이능이여.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우리 두 사람의 마음이 이어지기를.”
“잠시 우리의 시간과 세상이 달라지더라도 두 사람의 마음은 변함없이 이어지기를.”
“사랑해, 로제트.”
“사랑해, 진.”
오늘따라 석양이 황금빛으로 타올라 키스를 나누는 우리의 얼굴을 금빛으로 물들였다.
서약이 끝나자 숲에는 재빠르게 어둠이 내렸다. 우리의 기원에 응답이라도 하듯, 버섯들은 어둠 속에서 하나둘 야광 빛을 발하며 우리의 앞길을 수놓았다.
고요한 숲에서 내려오자 시끌벅적한 축하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먹고 마시고 축사와 덕담을 건네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플록스는 눈에서 술을 뿜고 있어 단박에 눈에 띄었다.
“설마 플록스가 또 술을 입에 댄 건가?”
“아닙니다.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하게 했습니다.”
취한 것도 아닌데 왜 저리 눈물을 쏟는 건지. 플록스가 울어도 너무 울어서 기뻐서 우는 건지, 슬퍼서 우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장성한 자식이 짝을 찾아 둥지를 떠나는 걸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이 저럴까.
플록스가 울든 말든 연회의 흥은 점점 올라, 하객들은 저마다 장기를 선보였다.
원숭이 흉내를 내기도 하고 마술을 선보이기도 하고. 영혼의 유희라는 신기한 기예를 펼치기도 했다. 정령사들이 선보인 물과 불의 군무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신부 노래 한번 들어봅시다! 노래해! 노래해!”
마침내 결혼식 축하연에 빠지지 않는 레퍼토리, ‘신부 노래해’를 하객들이 연호하기 시작했다.
나야, 노래 부를 기회가 생기면 마다하지 않는 사람. 주저하지 않고 나가 목청을 가다듬고는 ‘미고는 내가 잡은 개구리를 좋아했지’를 부르기 시작했다.
역시나, 머나먼 타국 하말린에도 어쩔 줄 몰라 하는 어색한 정적이 찾아들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 눈치를 살피는 사람들. 이미 경험이 있는 페가수스 직원들은 ‘그 마음 내가 잘 알지’ 하는 표정이었다.
세 번째 소절을 부르는데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진이었다. 유려한 중저음에 웃음기 쫙 뺀 무대 매너가 관객들의 웃음보를 더욱 옥죄어 왔다.
뒤이어 페가수스 직원들까지 합세해 노래를 반복해 불렀다. 독창이 중창이 되고, 중창이 합창이 되었다.
“미고는 사랑한다고 말했지, 나를? 아니면 개구리를? 오늘 밤 나는 내가 잡은 개구리를 질투하네에에에.”
미고는 알까. 낯선 타국 하말린의 밤하늘에 자기 이름이 이토록 우렁차게 울려 퍼지고 있는 걸.
혹시나 미고와 그 친구들이 하객으로 오진 않았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나는 살짝 눈물을 훔쳤다.
축하연도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오늘의 신랑 진이 사람들 앞에 나섰다. 나를 위해 결혼 선물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내 신부를 위해 준비한 이 선물은 어둠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석양 무렵 예식을 하고 어두워진 후 축하연을 시작했다는 게 아닌가.
진이 손짓을 하자 광장 한쪽이 환하게 밝아졌다. 조명 아래 드러난 것은 연극을 위한 무대?
연극광인 나를 위해 진이 연극을 준비한 걸까?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감격해서 눈물이 나올 뻔했지만, 곧 무대 위를 걸어 나오는 배우를 보고서는 놀라서 심장이 튀어나올 뻔했다.
나는 양손으로 입을 막은 채 진을 쳐다보았다. 진은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까딱했다.
* * *
진이 시장에서부터 뒤쫓아 간 남자는 심령사, 정령사, 수도자가 많이 모여 사는 나비 계곡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중 한 오두막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진은 잠시 기척을 살피다 오두막의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문을 열고 나온 이 역시 아는 얼굴이 아닌가.
“이게 누구십니까. 진 시더우드 전하?”
토버마리에서 만난 적 있는 심령사 부부였다.
“반갑군. 나는…….”
뜻밖의 재회에 진이 머뭇거리자 뷰글라스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레이디와 결혼하신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아, 알고 있었나? 실은 부탁이 있어 누군가의 뒤를 쫓아 여기까지 오게 됐소.”
“예? 부탁이요?”
“방금 한 남자가 이 집으로 들어가는 걸 봤는데. 그에게 긴히 부탁할 게 있어서.”
진이 얼굴을 알아보고 쫓아온 이는 제국의 유명한 배우였다. 로제트가 황후 때문에 그의 무대를 놓치고 속상해하던 일이 떠올라 무작정 그를 쫓아온 것이다.
원래 연극 배우였던 뷰글라스는 한때 제도 변두리 연기 학원에서 강사로 일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당시 배우 지망생이던 그를 가르쳤고, 그 인연으로 지금도 왕래를 이어오고 있었다.
진은 그 배우를 붙잡고 다짜고짜 사정했다.
“내 결혼 선물이 되어 주시오.”
* * *
아름다운 한 마리 야수처럼 무대 위에 등장한 배우.
그는 내가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어 했던 전설의 배우, 이상하고 아름다운 미스터 N이었다!
진이 나를 위해 준비한 결혼 선물은 지난날 황후의 방해로 눈앞에서 놓치고 만 통한의 무대, ‘장화 신은 야수’의 3막 공연이었다.
나는 그 유명한 3막의 클라이맥스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너무 감격하고 흥분한 나머지 머리가 핑글핑글 돌더니 급기야 코피를 쏟고 말았다.
덕분에 내 드레스는 물론, 놀라서 달려든 진의 예복마저 엉망으로 만들고 말았다.
1인극으로 각색한 연극에 푹 빠진 관객들.
마침내 일명 ‘관객 졸도’ 신으로 유명한 이 연극의 클라이맥스, 과감한 노출신에 이르자 광장은 열광의 도가니로 바뀌었다.
나는 졸도하는 대신 아까부터 진의 품에 안긴 채 그 명장면을 바라보았다.
환호하는 관객들 중에서도 가장 격한 반응을 보인 건 역시나 모얌 왕녀. 이때부터 왕녀의 뜨거운 관심과 애정은 전설의 배우에게 몽땅 옮겨 가게 되었다나.
그리고 한바탕 축제가 휩쓸고 간 지금, 고요가 깃든 시간. 나는 예식의 또 다른 클라이맥스를 앞두고 어색하게 침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아까 본 연극보다 더 과감한 노출신이 기다리고 있잖아!
혼전순결남이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로제트, 사랑해.”
“응? 나도 사랑해, 진.”
“그러니까 내가 지금부터 무슨 짓을 하더라도 놀라지 마.”
“뭘…… 하려고?”
“그걸 모르겠어. 내가 지금부터 무슨 짓을 할지 도무지 모르겠어.”
진이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더니 엄지손가락으로 내 눈썹을 다정하게 쓸었다.
두렵고도 기대되는 다음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