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위태로운 소원 (67/110)


#67화. 위태로운 소원
2022.07.22.



 
괴이한 소문의 진원지인 황후궁. 마침 문제의 합방 일이라 황제가 황후의 침소에 들었다.

시종과 하녀들은 오늘 밤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바깥에서 대기했다. 정말이지 끔찍한 소리가 들릴 때도 있어서 만일의 상황에 대비한 것이었다.

하지만 바깥의 긴장감과는 달리, 카이저 바카리스 황제는 그 어느 때보다 만족에 겨운 얼굴이었다.

황후도 이미 진의 결혼 소식을 들었는지 다른 날보다 더 앙칼지게 굴었지만, 꿩 대신 닭인지 적어도 자신을 침대 밖으로 밀어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공작부인을 죽이는 데 게으름을 부린 것이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고 깜찍한 계집이 예상 밖의 성과를 올릴 줄이야.

카를슈테인 공작을 견제하기 위해 아젤리아를 붙인 자신의 계획이, 생각지 못한 공작부인의 대활약으로 훨씬 더 재미있는 결과를 거두지 않았는가.

황제는 지금쯤 황후의 심경이 어떤지 떠보고 싶었다. 황후가 신경질을 부릴 때마다 황제는 만족감을 느꼈다.


“그대같이 대단한 여자가 진 시더우드를 한 번도 가진 적이 없다니, 믿기지 않는군.”

“매를 벌고 싶나 봐?”

“가만, 그럼 짐이 그대의 유일한 사내인가? 이거 황송하군.”

“징그러운 소리 작작해.”

삼나무 향도 전혀 안 나는 주제에.

황후는 일찍이 알아차렸다. 카이저가 진짜가 아니라는 걸. 그에게선 황족들만의 체향인 삼나무 향이 전혀 나지 않았다.

낮에는 향수로 감출 수 있었는지 몰라도 모든 것을 벗겨 낸 밤에는 감출 수가 없었다. 낮에도 소수의 사람은 구분할 수 있었다. 그 향은 결코 인공적으로 흉내 낼 수 있는 향이 아니기에.

진의 몸에서 풍기던 그 삼나무 향을 황후는 잊을 수 없었다. 너무나 손에 넣고 싶은 향기였지만, 그런 향을 풍기는 남자는 결코 강제로 취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에 비해 저 빌어먹을 남편 놈은 반의 반쪽도 황족의 피가 섞이지 않은 게 분명했다. 실은 생모가 선황후가 아니라 선황비 중 한 사람인 마르멜 대부인이란 건 그다지 놀라운 사실도 아니었다.

적어도 생부가 선황제라면 삼나무 비슷한 향이라도 나야 하지 않은가. 자신의 시어머니가 대체 누구랑 정을 통했는지, 황후는 가끔 궁금했다.

여하튼 가문을 위한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되어 황궁에 들어온 이후, 진은 황후에게 유일한 안식처였다.

좋은 향이 나는 새벽 숲이었고 청량한 바람이었다.

그래서 황제가 자신의 침대로 기어들어 올 때마다 황후는 참을 수 없는 울화가 치밀었다. 자기도 모르게 손발을 살짝 썼더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런데 의외로 황제도 싫지 않은 눈치였다. 역시 향기도 없는 변태 폭군 같으니라고.

나아가 황제는 어떻게 하면 황후의 속을 긁어 놓을지 연구하곤 했다. 매를 벌려는 그 모습이 황후의 눈에도 뻔히 보였다.

그러다 보니 점점 습관이 돼서. 또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만 같아서. 합방 일에 관한 흉흉한 소문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있었다.

* * *

급히 귀국한 카를슈테인 공작은 곧장 황궁으로 쳐들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황제의 목을 비틀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가짜 허수아비는 없애 버리고 차라리 본인이 황제가 될까 하는 생각도 했다.

제국의 사절단 대표로 하말린에 갔던 공작은 분노에 차서 부랴부랴 귀국한 참이었다. 수상해 보이는 전령을 잡아다 족치니 생각지 못한 황제의 서신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하말린 왕세자인 모텝 왕자를 제국이 보호하고 있다는 내용의 서신.

황제의 최측근이라 자부하던 공작도 까맣게 모르는 일이었다.

황제가 독단적으로 하말린의 왕세자를 납치한 것도 모자라, 자국의 사절단이 하말린에 머물고 있는 시점에 그 사실을 밝힌 협박 서한을 보냈다?

공작으로서는 황제가 일부러 자신을 물 먹이려고 벌인 짓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이 근본도 없는 멍청한 X자식이.’

분노로 눈이 뒤집힌 공작은 곧장 사절단을 수습해 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공작이 인사도 없이 거칠고 무례하게 집무실에 들이닥쳤지만, 황제는 태연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꽁지에 불붙은 수탉처럼 일찍도 쫓아 왔군, 그래.


“무슨 짓입니까. 하말린 왕세자는 대체 언제 납치했고!”

공작이 평소 같지 않게 흥분해서 언성을 높이는 모습을 황제는 즐거운 마음으로 감상했다. 심장깨나 쫄깃거렸던 모양이야.


“카를슈테인은 몽펠리와는 다르다는 걸 알아두셨으면 합니다, 폐하. 마르멜 대부인은 당신의 생모이고 몽펠리 후작은 당신의 외조부이니 그토록 순순히 멸문당해 준 것이지요.”

공작의 거침없는 폭로에 황제가 짐짓 슬픈 표정을 지었다.


“아침부터 내 불쌍한 생모 이야기를 꺼내니 짐의 마음이 좋지 않군. 제 배로 낳은 자식을 지옥에 밀어 넣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꼬? 그런 것도 어미라고.”

황제는 자신의 출생과 관련한 비밀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 공작부인의 산달이 가까워지지 않았나? 참, 아직 공작부인이 아니라고 했던가? 후계자의 입지를 위해서라도 그 어미를 얼른 정실부인 자리에 앉혀야지. 짐이 옆에서 보기에도 영 안됐지 뭔가.”

소름 끼치는 걱정이었다.

몽펠리 가문은 황제와 친혈육이라는 것을 믿고 그 어느 가문보다 기고만장하여 마음을 놓고 있었다.

다른 가문은 몰라도 최후의 최후까지 몽펠리만은 안전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황제는 완전히 똑같은 이유로 몽펠리를 가장 먼저 멸문시켰다.

선대들이 모의해 세운 가짜 황태자는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폭군 재질이었던 것이다.

피로 얼룩진 잔혹한 이야기를 마치 콧노래라도 부르듯 하는 황제의 모습에 공작은 냉정을 되찾았다. 흥분해서는 결코 이길 수 없는 미친놈이 황제라는 사실을 다시금 환기했다.


“어쨌든 카를슈테인과 척을 지셔서는 폐하께도 좋은 일이 없을 겁니다. 우리는 폐하께 구걸하려는 것이 아니라 깔끔하게 거래를 하자는 것이니까요. 우리의 실력을 탐내는 이는 많습니다.”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걸 보니 뭔가 단단히 대비를 했나 보군, 공작?”

황제는 공작의 은근한 협박에도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대비했다면 나라고 대비를 안 했을까?”

황제의 말에 공작은 꺼림칙해졌다. 왕세자를 납치한 일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괜한 수작을 부리는 건가?

공작이 심각한 얼굴로 굳어져 있자, 황제는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친근한 어투로 말했다.


“긴장 풀게. 공작은 유머 감각이 없는 게 흠이라니까. 한동안은 공작이 여전히 내 최측근일 테니까. 자네 같은 괴물을 또 어디서 찾겠나. 우리는 같은 족속이잖아.”

황제는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다른 자들은 우리 같은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지. 일일이 설명하고 이해시키려면 피곤해서 말이야.”

괴물 같은 선대에게서 나온 더 괴물 같은 후대. 두 사람이 이 지점에서 서로에게 약간의 동질감을 느끼는 건 사실이었다.

추악한 욕심을 대물림하기 위해 후계를 만드는 선대와, 선대의 모습에서 환멸을 느끼지만 결국 그보다 더한 괴물이 되어 버리는 후대. 그들의 이야기였다.


“하말린 왕세자는 어찌하실 겁니까?”

“아, 공작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듯해서, 짐이 도움을 좀 줄까 한 건데. 오히려 그 때문에 화가 난 것 같군?”

“납치한 왕세자를 겨우 정령의 돌을 얻어 내는 데 쓰기는 아깝지요.”

“하말린 쪽에 벌써 전령을 보내 버렸는데?”

“그 전령이라면 없애 버렸습니다.”

“감히 황제의 전령을 마음대로 없애? 정말이지, 겁을 상실했군. 역시 괴물이야.”

공작은 형식적인 변명이나 사죄 한마디 없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하말린엔 지금 우리 모두가 유감을 가지고 있는 자가 하나 있지요.”

“하, 이래서 짐이 공작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니까.”

길게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동족이었다.


“그 눈엣가시를 제거하는 데 왕세자를 이용하시지요. 잘하면 하말린 왕가와 그자를 이간질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자만 처치한다면 하말린으로 밀고 들어가 정령의 돌을 취하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지요.”

공작의 눈이 음험하게 빛났다.

진 시더우드, 감히 제국 밖으로 달아나 제국의 법을 비웃었으니 그 법이 닿는 곳으로 네 놈을 끌고 오는 수밖에.


 

* * *



“로제트.”

진이 낮게 잠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이때의 진의 음성을 나는 좋아했다.


“응?”

“눈이 많이 부었네.”

“왜, 밝은 날 보니 못난이야?”

“예뻐.”

진이 내 부은 눈에 입을 맞췄다.


“당신은 맛있게 생겼다고 했잖아. 또 배고파지려고 하네.”

어젯밤에도 진은 나를 완전히 포식했다. 진이 나를 먹어치운 만큼 내 몸은 오백 에크라쯤 사라졌을 것이다.

대신 다른 것으로 나를 그득 채워 주었지만.

겉으로는 크게 변한 게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나를 구성하는 성분이 꽤나 바뀌었을 터였다.

우리는 서로에게 앙큼하게 섞여 들어갔다.

알고 보니 진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애교 많은 남자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낯 간지러운 소리도 잘했다.

오히려 내가 상대적으로 무뚝뚝한 성격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페가수스 시동생들에게 진의 이런 숨은 면모를 알려주면 얼마나 기뻐들 할지.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걸 겨우 참았다.

진은 나와 함께 해 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이렇게도 해 보고 싶고, 저렇게도 해 보고 싶어.”

이런 말을 하며 눈을 빛낼 때면 나는 주술에 걸린 사람처럼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됐다. 진이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진이 어디서 빗을 구해 왔다.


“그때 내가 부러뜨린 것과 비슷한 걸 구해 오고 싶었는데. 여긴 그런 빗이 없나 봐.”

음, 그 빗은 말이죠, 여기 아니라 제국에서도 구하기 힘든 빗이랍니다. 하지만 이제 나에겐 빗의 모양이나 장식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요.

진은 빗을 쥐고 내 머리를 조심조심 빗기기 시작했다. 나는 온몸이 간질간질해져서 어깨를 움찔거렸다.

한참을 집중해서 빗질을 하던 진은 내 머리칼에 여러 번 입을 맞췄다. 아마도 나의 밀색 머리카락이 또 맛있어 보였던 모양이다.

이번엔 내 차례. 빗을 건네받은 나는 신기한 버섯을 보듯 진의 정수리를 들여다보다 심호흡을 하고 빗질을 시작했다.

지난번엔 진의 머리를 빗기다 빗을 부러뜨렸지. 이번에도 그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다른 사람이 내 머리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빗기는 느낌도 온몸의 세포가 수런거리고 심장이 두근댈 정도로 신기했지만, 누군가의 머리를 빗기는 느낌 또한 그 못지않게 환상적이었다.

빗질을 할 때에도 진에게선 삼나무 향이 풍겼다. 그러다 보니 진의 흑발이 싱싱한 숲 같아 보이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너무 가까이 묻다시피 하고 킁킁거렸나 보다.


“너무 노골적인 애정 표현이군.”

“아, 미안. 당신한테선 언제나 좋은 향이 나. 그래서 밤에도 잠이 잘 온다니까.”

“그거 곤란한데? 나는 당신 잠재울 생각이 그다지 없는데.”

“안 재우면?”

“이렇게도 하고 싶고…….”

진의 입술이 내 몸 위,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 닿았다.


“저렇게도 하고 싶지.”

진과 함께 있으면 특별히 뭘 하지 않아도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일까 생각해 보니, 그저 그가 나를 사랑하기에 내가 그 사랑을 느끼는 거라는, 너무나 당연한 해답을 얻었다.

이렇게 따뜻한 대우는 처음이었다.

이처럼 특별할 것 없이 특별한 날들이 계속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진과 함께하는 날들의 따스함에 취해 불행이 코끝까지 다가온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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