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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내게만 허락하는 그 남자 (68/110)


#68화. 내게만 허락하는 그 남자
2022.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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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님, 공작 전하는 오늘도 사무가 바쁘신 듯합니다. 그만 침소에 드시지요.”

내가 아젤리아 워릭이었을 때부터 나를 보필해 온 하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프러너스의 얼굴을 본 게 언제였더라.

공작저로 들어오기 전, 그이와 밀회를 나누던 때, 오히려 그를 더 자주 본 것 같다.

알고 보니 프러너스는 며칠 외국에 다녀온 모양이었다. 외교술이 뛰어난 그가 자주 해외로 나간다는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각자 누군가의 남편이고 아내일 때, 그는 꼬박꼬박 내 선물을 사 왔으니까. 어느 나라의 특산품, 어느 나라의 세공품, 어디에서만 난다는 희귀한 보석 등.

그러나 그의 아이를 갖고 그와 한집에 사는 지금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게 되었다.

사실 그가 해외에 있든 제국에 있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어차피 그를 볼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니까.

나는 아직도 공작부인이 아니고, 배 속의 아이는 아직도 카를슈테인의 후계자가 아니었다.

그나마 나와 아이의 거처가 공작저인 것은, 레이디 앰브로시아의 충고를 듣고 무작정 저택으로 밀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어느 때부턴가 프러너스는 나를 피하고 있었다. 수많은 의문에 대해 돌아오는 대답은 늘 ‘나중에’였다.

그의 태도가 갑자기 변한 이유가 뭘까. 더 이상 내게서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된 걸까.

궁금해하던 중 레이디 앰브로시아를 만나고 그 이유를 직감했다. 변화는 그녀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그녀는 내가 알던, 그리고 세간에 알려진 카를슈테인 공작부인이 아니었다. 뭔가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아둔하고 무신경하고, 아이처럼 단순한 여자였다. 그래서 그녀가 공작부인이었을 때도 나는 그녀를 보며 우월감을 느꼈다.

무엇보다 그녀의 도도한 남편을 달아오르게 만들고 쥐락펴락하는 건 나, 아젤리아였으니까.

내가 가지지 못한 건 그저 카를슈테인이라는 이름뿐이었다.

하지만 달라진 그녀를 보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프러너스와 공작가의 모든 것에 아무런 관심도 미련도 없었다.

여러 교묘한 말로 도발해 보았지만, 그녀의 입장은 흔들림이 없었다. 도리어 나와 아이가 공작가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처음엔 내게 다행한 일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찜찜한 기분이 들었고, 나중엔 왠지 모를 굴욕감을 느꼈다.

그녀의 태도를 보면, 이혼을 당한 것은 그녀가 아니라 프러너스였다. 이혼을 미루는 쪽도 그녀가 아니라 프러너스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깨달은 걸까.

내겐 너무나 절실했던 것을, 너무나 쉽게 손에 넣고 미련 없이 팽개친 그녀가 미웠다.

내가 빼앗아 올지언정 그녀 스스로 버릴 수는 없는 것들인데!

그녀는 그런 식으로 내가 그토록 갈망해 온 것들을 무가치하게 만들어 버렸다.

남들은 내게 불륜녀니 코르티잔이니 떠들어 대지만, 나로서는 원래 내 것이었던 걸, 잔인하게 빼앗겼던 걸 되찾는 일일 뿐이었다.

사랑하는 남자를 빼앗기고 눈물로 지새운 밤이 얼마인지. 프러너스의 눈이 나를 향해 있을 때에도 그의 아내는 그녀라는 사실이 나를 괴롭히던 밤들.

내가 조금만 더 힘 있는 가문의 영애였더라면 절대로 프러너스를 빼앗기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며 그녀를 원망하던 밤들.

어느 날 황제의 부름을 받았다. 폭군으로 유명한 그 앞에 와들와들 떨면서 나갔을 때, 황제는 내게 뜻밖의 명을 내렸다.

프러너스의 아이를 잉태해 공작부인 자리를 차지하라고.

물론 내게 거부할 권리나 선택권 따위는 없었다.

황제가 마련한 은밀한 이벤트들이 이어졌다. 제국 최고의 남자를 안는 밤들은 황홀했다. 그의 아이를 잉태했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레이디 앰브로시아의 처지가 딱하긴 했지만 크게 미안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녀는 후사도 볼 수 없는 몸이라 들었고, 그녀가 먼저 가문의 힘을 내세워 프러너스를 내게서 앗아갔으니까.

그 시절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했다. 그 차가운 남자는, 나한테만은 뜨거운 남자였다.

그는 평민과 다를 바 없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준남작 가문 출신인 나와 결혼까지 결심했다.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물론 그 잘난 카를슈테인 가문은 나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지만.

프러너스와 그녀의 결혼은 오로지 정략에 의한 결혼이었다. 계약과 거래의 관계일 뿐. 그가 영혼의 안식과 육체의 기쁨을 맛보는 것은 내 침대에서였다.

하지만 이제는 프러너스가 변했다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그는 예전의 프러너스가 아니었다. 차갑고 까칠했지만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는 보통의 청년이었던 그는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나만이 아는 감정의 파동을 담아 ‘아젤리아’라고 불러 주는 그의 목소리를 더 이상은 들을 수 없으리라.

물론 변한 건 프러너스만이 아니었다. 나 역시 변해 버렸다. 황제의 꼭두각시가 되었을 때부터 이미 예전의 아젤리아가 아니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었던 걸까. 카를슈테인이란 이름이 뭐 그리 대단하기에 나를 이처럼 초라하게 만들도록 허락한 것일까.

녹스 워릭에게 서신이 왔다. 내 불쌍한 전남편 워릭 백작 말이다.

카를슈테인에게 버림받고 어려움에 처한 내 형편을 알고서 그는 결혼이라는 형식을 통해 나를 구제해 주었다.

그는 잠자리든 아내의 의무든, 내게 무엇도 요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녹스 본인은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남편의 의무를 다했다.

내가 프러너스에게 가겠다고 말했을 때도 그는 아무 말 없이 보내 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미치도록 지겨웠다.

녹스의 편지에는 ‘힘들면 언제든 돌아오라’고 쓰여 있었다. 그도 나에 관한 소문을 들은 것이 분명했다. 그는 여전히 눈물 나게 지겨운 남자였다.

‘카를슈테인 공작의 첫사랑’이라는 허울뿐인 왕관을 벗을 때가 된 것 같다.

좋은 남편은 가질 자격이 없지만, 아이에게만은 좋은 아빠를 갖게 해 주고 싶었다. 나에겐 첫사랑보다는 염치없는 나쁜 년이란 이름표가 어울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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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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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멈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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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해요, 레이디!”

다급한 외침이 나를 향한 것임을 알아챘을 때는 이미 상황 종료.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페가수스 직원들도, 회심의 애정 행각을 들킨 나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알고 보니 눈이 커다래진 이유는 서로가 많이 달랐지만.

진과 페가수스 직원들의 체력 단련 시간.

배 위에 있을 때도 수영을 하며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은 이들인 만큼, 하말린에서도 단련과 대련은 빼놓을 수 없는 일과였다.

나는 뷰글라스와 시아에게 마법진 그리는 법도 배울 겸 놀러 갔다가 ‘정령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령수는 정령사들이 각종 식물에서 얻은 영험한 수액으로, 원기 충전, 피로 회복, 피부 미용, 노화 방지, 그 외에도 참 좋은데 차마 말할 수 없는 어떤 효능까지 있다는, 안 통하는 데가 없는 영약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페가수스 시동생들에게 형수님 노릇 좀 할까 하고 정령수를 인원수만큼 여러 병 구입했다.

뜨거운 날씨에 땀 흘리며 단련하다가 쉬는 시간에 죽 들이켜는 정령수 한 병! 크, 얼마나 달고 시원할 것인가.

쉬는 시간에 정령수를 들고 찾아갔더니 역시나 내 예상대로 직원들은 좋아하며 ‘형수님’과 ‘레이디’를 연호했다.

정작 진은 안 보이기에 물어보니 혼자 화원 쪽으로 걸어가는 걸 보았다며 플록스가 한 방향을 가리켰다.

플록스가 알려 준 곳으로 조금 들어가니 진의 뒷모습이 보였다. 무언가에 열중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갑자기 하고 싶은 게 떠오른 나는 발소리를 죽였다.

내가 하고 싶었던 건 장난기가 다분하면서도 낭만적인 애정 표현인, 백 허그.

살금살금 다가간 나는 뒤에서 진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기분 좋게 그의 등에 얼굴을 묻는데 갑자기 사방이 시끌시끌해지더니 다급한 목소리가 날아들다 뚝 멈췄다.

민망하게도 삼나무에 붙은 매미 같은 그 모습을 헐레벌떡 뛰어온 페가수스 직원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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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가 당황해 있는데, 정작 성질을 내며 으르렁거린 것은 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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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우리 부부가 함께 있을 때는 반경 백 미터 이내 접근 금지다!”

진이 소중한 백 허그를 망쳐 놓은 것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자 직원들도 질세라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자신들이야말로 큰일 나는 줄 알고 놀라서 달려온 거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아무 일 없는 걸 보고 더 놀랐다며 수군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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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보스, 그 병증은 어떻게 고친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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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병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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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시치미 떼시는 거 봐. 보스 등 뒤로 다가가는 건 저세상 가는 지름길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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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누가 보스를 등 뒤에서 껴안는 게 가능한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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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가 아무 탈 없이 보스 뒤에 딱 붙어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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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레이디가 껴안는 순간 보스의 표정 봤냐? 아주 녹더라, 녹아. 순간 보스가 어디 고장 났나 했다니까. 정말이지 소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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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소름이네. 어구 무서워.”

직원들의 영문 모를 호들갑에 내 얼굴만 달아올랐다.

알고 보니 진의 등 뒤로 다가가는 것은 금기 중에서도 금기 사항이었던 것.

어려서부터 암살 위협에 시달렸던 진은 누군가 등 뒤에서 다가오는 것에 심한 공포증을 가지고 있었다.

극도의 공포심은 폭력성으로 바뀌었다. 진의 등 뒤로 다가온 이는 누구든지 무사하기 힘들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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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기억하십니까, 레이디? 페가수스의 장제소에서 말 뒤로 다가갔다가 큰일 날 뻔하신 걸 보스가 구해 주신 일이요. 방금 그와 비슷한 행동을 하신 겁니다.”

플록스가 살벌한 추억과 함께 상황을 일깨워 주었다.

하긴, 진은 뒤에서 다가가는 것뿐 아니라 잠잘 때 건드리는 것도 극도로 싫어했지. 그 역시 어려서부터 괴롭힘과 위협에 시달려 온 탓이리라.

사연을 듣다 보니 아찔하면서도 안타깝고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진의 공포증이 나한테만 예외라는 사실이 철없이 기쁘기도 했다.

나는 세상에서 진의 등 뒤로 다가가고도 무사한 유일한 사람. 나만 할 수 있어, 백 허그!

누군가의 예외가 된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이었다니. 어쩌면 사랑이란 자신의 높고 견고한 성벽에 예외라는 개구멍을 하나둘 만들어 가는 일이 아닐까.

나만이 아는 개구멍으로 비밀스럽게 들락날락하는 일은 무척이나 두근거리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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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더 소름 끼치는 일이 있잖아……. 보스 손에 들린 거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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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저건 설마…… 꽃다발이라는 겁니까, 보스?”

진이 화원으로 간 것도, 내가 등 뒤에서 살금살금 다가갈 때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던 것도 모두 꽃다발 때문이었다.

꽃다발에는 나도 놀랐다. 심지어 꽃의 조합이나 배치가 훌륭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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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 약한 모습 실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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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마, 실망이긴. 저렇게라도 해야 레이디께서 참고 살아 주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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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보스가 말보르크 백작이나 할 법한 간지러운 일을 벌이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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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리 정교하고 아름다운 꽃다발이니 오다 주웠다고 우기기도 힘들겠네. 솔직히 내 누이가 만든 것보다 훨씬 예쁘다.”

부하들이 한마디씩 돌아가면서 놀리는 것을 듣던 진이 나직하지만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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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져.”

진이 저렇게 낮은 목소리로 말할 때야말로 조용히 물러가야 할 때임을 잘 알고 있는 부하들은 삽시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진이 이번엔 내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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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님? 우린 하던 일이나 계속할까? 저 빌어먹을 놈들 때문에 방해받은 그 일 말이야.”

진이 새로 뚫은 개구멍을 가리키며 말했다.

* * *

우쿨루스 왕은 참담한 기분이었다. 하말린의 성인이자 영혼의 지도자로서 의연하게 걸어 온 삶과 평범한 아버지의 심정 사이에서 고민했다.

아니, 자신이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왕을 괴롭혔다.

하말린 왕은 제국의 황제로부터 흉포한 통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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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자의 신변은 제국의 보호 하에 있다. 짐은 하말린 왕가에서 제국의 반역자이자 죄인인 진 시더우드를 비호하고 있다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보고받았다. 제국의 군대가 하말린으로 곧장 진격해도 충분한 사안이지만, 짐은 평화로운 해결을 추구하기에 왕세자와 진 시더우드의 맞교환을 원한다. 제국에 협조한다면 왕세자의 신변도, 하말린 왕가의 앞날도 황제의 이름으로 보장하겠다. 제국의 호의에 응하지 않는다면 양국 간 전쟁은 피할 수 없으리라. 언제나 평화로운 공존과 교류를 원하는 제국의 의지를 하말린의 왕이 훼손하지 않기를 바라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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