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제발 내 손을 놓지 마
(69/110)
69화. 제발 내 손을 놓지 마
(69/110)
#69화. 제발 내 손을 놓지 마
2022.07.29.
“나는 손을 맞잡고 있을 때가 제일 좋아. 당신이 내 손을 꼭 잡아 줄 때마다 처음처럼 떨려.”
자신과 무엇을 할 때가 가장 좋은지 묻는 진의 질문에 내가 이렇게 대답하자, 진은 실망한 표정이었다.
“왜?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들어?”
“아니, 그간의 내 노력이 허망하게 느껴져서. 수컷 공작새처럼 화려한 꽁지깃을 펼치고 온갖 구애의 기술을 선보였는데, 담백하게 손잡기라니.”
“담백한 게 좋아.”
나는 놀리듯 말했다.
솔직히 그동안 나를 위해 준비했다고 말하면서 나를 너무 괴롭혔잖아? 내 얼굴 쏙 빠진 것 좀 봐.
내가 불만을 가장할 때마다 진은 ‘3종 당신 탓’으로 돌려막으며 내게 책임을 전가했다.
‘신혼이잖아. 너무한 건 당신이지.’
‘날 이렇게 만든 건 당신이야.’
‘당신이 너무 맛있게 생긴 탓이지.’
솔직히 진이 이렇게 달라붙는 스타일일 줄은 몰랐다. 집착한 적은 있어도 집착 당한 적은 없어서 얼떨떨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물론 진이기에 그런 것이겠지만.
이렇게 진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하나하나 알아 가는 것도 결혼 생활의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그럼 잘까?”
“갑자기? 왜 그렇게 되는 건데. 뭘 하려고?”
“대화. 담백하게.”
흠, 자면서 대화란 말이지.
역시 믿을 수 없어. 한 번 속지 두 번 속나.
나는 얼른 다른 화제를 꺼냈다.
“진, 전부터 궁금했던 게 있는데.”
“뭔데?”
“플록스와는 어떤 사이인 거야? 플록스 말로는 당신한테 큰 은혜를 입었다고 하던데. 평범한 충성심이라고 보기엔 좀…… 수상하던데?”
“하, 플록스? 이 소중한 시간에 겨우 그 자식 얘기를 하자고?”
말은 저리 퉁명스레 해도 진 역시 목소리에서 남다른 감정이 묻어났다. 표정도 뭔가 착잡해졌다. 정말이지 대체 무슨 사이지?
“내가 다섯 살 때 좀 특이한 하녀가 나타났어.”
“응? 하녀?”
“그래, 황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궁 안 사정을 잘 모르는 것 같았지. 나 같은 반쪽짜리한테 다정하게 대해 줬거든.”
반쪽짜리 시더우드는 황궁의 사용인들한테도 학대의 대상이었다. 당연히 윗사람들이 그렇게 명했기 때문이었다.
일말의 양심이 있어 차마 학대에 가담할 수 없었던 이들은 못 본 척 투명인간 취급하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만약 반쪽짜리 아이들을 동정했다가는 본인들이 해코지의 대상이 될 테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거라고, 진은 그들을 이해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본 사용인들과는 전혀 다른, 그야말로 이상한 하녀가 어린 진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나한테 제대로 된 음식을 가져다주면서, 너무 마르셨어요, 앞으로 제가 각별히 신경 써야겠어요, 그러는 거야.”
처음에 진은 그 하녀가 자신의 음식에 독을 탄 게 아닌가 의심했다고 한다.
자신보다 한 살 어렸던 배다른 누이동생이 생에 처음 먹은 예쁜 케이크. 그 케이크가 그 아이가 지상에서 먹은 마지막 음식이 되었던 것처럼, 그 하녀가 자신에게 마지막 음식을 가져다주려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진은 새날을 맞았고, 비록 형편없는 것이라도 새로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하녀의 이름은 플란. 그녀는 여전히 진을 다정하게 챙겨 주었다. 진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 경험한 사람의 온기였다. 물론 플란이 진의 전속 하녀는 아니었으므로 아주 잠깐씩 마주칠 뿐이었지만.
그래도 진은 플란이 걱정됐다.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했다는 이유로 그녀가 안 좋은 일을 당하게 될까 봐.
「플란, 나한테 잘해 주면 안 돼.」
애늙은이 같은 경고를 하는 어린 황자를 향해 플란은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제겐 딱 황자님 나이의 남동생이 있어요. 불경한 말씀인지 몰라도 황자님을 보면 그 아이가 생각나서요.」
플란은 그 후로도 가끔 남동생 이야기를 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형편이 안 좋아져서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고아원에 맡겨 두었어요.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아 그 아이와 함께 사는 게 제 꿈이에요.」
플란은 진뿐만 아니라 불우한 시기를 보내고 있던 반쪽짜리 시더우드들을 못 본 척하지 않았다. 결국은 그 때문에 윗사람의 눈 밖에 나게 되었고 억울한 매질을 당했다.
그녀는 장독으로 앓다가 제대로 된 치료 한번 받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남동생과 함께 사는 소박한 꿈을 이야기하며 반짝이던 그 눈은 이처럼 어이없게 빛을 잃고 말았다.
“플란이 죽고 난 후로 나를, 반쪽짜리 시더우드를 동정하는 사용인은 완전히 사라지게 됐지.”
진은 고아원에서 누나를 기다리고 있을 플란의 남동생이 잊히지 않았다고 했다. 그 아이는 곧 데리러 오겠다던 누나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있을 터였다.
황궁에서 독립하자마자 진이 한 일은 플란의 남동생을 찾는 일이었다. 어렵게 찾아낸 그는 술에 취해 사람을 다섯이나 살해하고 처형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고아원의 어린 동생들이 불법 노예상에게 팔려 가게 된 것을 알고 저지른 일이었다. 엄밀히 말해 술에 취해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살인을 저지르기 위해 술에 취한 것이었다.
진은 플란의 남동생을 어렵게 감옥에서 빼냈고, 노예상에 팔려 간 아이들도 구해 주었다.
「진 보스가 노예상에 팔려 간 제 동생들 일을 수습해 주셨기에,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살아 있는 겁니다. 그러니 제 목숨은 보스의 것이지요.」
지난번 감금방에 갇혔을 때 플록스가 한 말이었다.
휴우,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자 진이 내가 좋아하는 그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한숨 쉬지 마. 더군다나 플록스 그 주정뱅이 자식을 위해서.”
바보. 플록스도, 플록스의 누나 플란도 모두 안타까웠지만, 내가 한숨을 내쉰 건 진 때문이었다.
진은 어떻게 지금껏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내가 진이었다면 세상과 인간에 대한 불신과 혐오로 매우 메마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아니, 지난 생에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되찾은 기억 속의 진은 아름답지만 매우 연약해 보이는 소년이었다. 그 작고 연약한 존재에 어떻게 그런 힘이 깃들 수 있는 걸까.
원래 우리 안에는 저마다 신이 부여한 고유의 강인함이 숨어 있는 걸까. 어쩌면 어른이 되면서 오히려 그 강인함을 잃거나 잊거나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저 연약해 빠진 폭군보다는, 진이 훨씬 황제의 자리에 합당한 재목이었다. 진이 황제가 되었어야 했다.
나는 한숨을 쉬는 대신 진의 품에 와락 달려들었다. 그의 목을 끌어안고 고백했다.
“당신이 너무 좋아.”
잠시 굳어졌던 진은 이내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이제야 내 부인님께서 내게 손 말고도 멋진 구석이 많다는 걸 눈치채셨나 보군.”
* * *
오랜만에 페가수스 본부와 장거리 통신이 이루어졌다.
직원들과 나도 함께 참석해 제국의 소식을 들었다. 애증 어린 곳이긴 해도 모국이라고, 오랜만에 듣는 제국의 소식에 다들 반갑고 들뜬 분위기였다.
저편에서는 주로 말보르크 백작이 말을 전했다. 직원들은 가족이나 애인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나는 앤의 진학 문제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했다. 버섯 그림 전시가 채 끝나기도 전에 급하게 제국을 떠나오느라, 뒷일을 마담 밤비와 페가수스에 부탁한 터였다.
다행히 앤은 귀족들에게 받은 서명 덕에 입학 자격시험을 치를 기회를 얻었고, 평민 출신으로는 이례적으로 장학금까지 받으며 칼리지에 입학했다는 희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아이가 어찌나 영리한지 입학을 도왔던 살롱 드 밤비와 저희 페가수스 양쪽 모두에서 앤을 탐내고 있습니다.”
미래의 인재인 앤을 안목 좋은 두 곳에서 눈독을 들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괜히 내 어깨가 다 으쓱해질 정도로 뿌듯한 소식이었다.
그와 더불어 전혀 생각지 못한 깜짝 소식도 있었다. 전시와 앤의 입학 문제로 최근 접촉이 잦았던 마담 밤비와 말보르크 백작이 연인 사이가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밤비를 훨씬 더 아끼는 나는 그녀의 연인으로 버터 삼킨 백상아리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차마 내색할 수 없었다.
말보르크가 보기보다 좋은 남자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친구인 진의 반만 되어도 좋을 텐데 말이다.
나는 문득 토버마리의 소식도 궁금해졌다. 플럼 하우스의 집사 프랭클린과 요리사 한스, 하녀장 마델이 잘 지내는지도 궁금하고, 소작 농가들에는 별일이 없는지도 궁금했다.
갑자기 하말린으로 오는 바람에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제도에서 산 선물도 전하지 못했다.
그런데 내 물음에 돌아온 것은 뜻밖의 비보였다.
토버마리에서는 좀 거리가 있는 지역이긴 했지만, 앰브로시아 영지 내 산간 지역에 마수가 출현해 적지 않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는 소식이었다.
제국에서는 백 년 전에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마수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제국민 사이에 공포심이 전염병처럼 번져 나가고 있었다. 이에 황제는 성기사단을 재건해 마수를 퇴치하고 제국민을 보호하겠다고 공표했다.
웃기지도 않은 자작극이었다.
지금은 나도 황제와 프러너스가 손잡고 흑마술과 정령의 돌을 이용해 마수를 부활시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드디어 두 악당의 터무니없는 계략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일까.
하필이면 그 첫 대상이 앰브로시아 영지라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욕심을 채울 수 있다면 영지든 영지민이든 얼마든지 희생시킬 수 있는 영주가 있는 곳.
프러너스는 그런 곳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었을 테고, 어마어마한 대가를 챙긴 루이가 주저 없이 영지를 내어 주고 영지민의 희생을 눈감아 주었을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망할 루이.
“지금부터 말보르크와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모두 자리를 좀 비워 주면 고맙겠어.”
진의 이 말로 오랜만에 제국의 소식을 듣는 자리가 마무리됐다.
마수 출몰 소식에 마음이 뒤숭숭해진 나는 정원을 좀 걷겠다고 진에게 말해 두고 밖으로 나왔다.
“로제트, 괜찮으면 잠시 얘기 좀 할래요?”
뜻밖에 모얌 왕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하녀를 통해 나를 자기 궁으로 불렀을 텐데.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신호였다.
* * *
진은 어두워져서야 침실로 돌아왔다.
“로제트? 왜 불도 켜지 않고 있는 거야?”
진의 말대로 나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어두컴컴한 방 안에 홀로 앉아 있었다.
내 마음속에 짙은 어둠이 넘쳐 바깥세상이 어두워진 줄도 몰랐다.
불을 켠 진은 내 얼굴을 보고 놀랐다.
나는 얼굴이 엉망이 된 채 울고 있었다.
“로제트, 무슨 일이야?”
“진,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이 말만으로 그는 모든 것을 알아차린 듯 굳어졌다.
“로제트, 날 믿어.”
“믿어라 어쩌라 그런 말 하지 말고 그냥 가지 마.”
진은 나 몰래 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제국에 억류된 하말린의 왕세자를 고국으로 돌려보내는 조건으로.
“걱정하지 마, 로제트. 말보르크와 페가수스의 부하들이 나를 무사히 탈출시킬 거야.”
아까 모두 내보내고 말보르크와 긴히 나눈 얘기가 저것이었구나.
“황제가 약속을 지킬 거라고 생각해? 당신만 희생될 수도 있어. 아니, 오직 당신을 제거하기 위해 꾸민 짓이 분명해.”
“금방 돌아올게, 로제트. 약속해.”
진은 내 볼에 흐르는 눈물을 길고 메마른 손가락으로 훔치며 말했다.
진은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지 않고서는 살 수 없을 사람이니까.
그래서 하말린의 왕조차 황제의 협박 편지를 진에게 숨겼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진은 스스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왕은 결코 자신에게 부탁하지 않을 것이므로.
“제발, 제발! 내가 애원해도 당신은 끝끝내 갈 거야?”
내가 진을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들이 진을 사지로 데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