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그 남자, 못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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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그 남자, 못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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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그 남자, 못됐다
2022.08.01.
“진, 제발!”
나는 화도 내 보고 매달려도 보고 설득도 해 보았다.
그러면서도 나 자신조차 이 행동들이 소용없으리란 걸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용이 없다고 안 할 수 있을까.
진은 자신을 따스하게 받아 준 하말린 사람들을 무척 아꼈고, 행여 자신이 그들의 평화를 깨뜨리게 될까 봐 줄곧 두려워했다.
카이저 바카리스 황제가 하말린 왕세자와 진의 맞교환을 원했다. 의심했던 대로 왕세자는 제국에 억류돼 있었고, 그 역시 황제의 계략에 의한 것임이 밝혀졌다.
그동안 수많은 반쪽짜리 시더우드들에게 그랬듯, 황제는 진에게도 반역을 모의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하말린이 진을 비호한다면 하말린 역시 반역에 가담한 것으로 몰아갈 수 있었다.
황제는 이로써 진을 제거하든 하말린을 침략하든, 적어도 둘 중 하나는 할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
그럼에도 하말린의 오쿨루스 왕은 진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결국 모든 정황을 알게 된 진은 결정을 주저하지 않았다. 왕을 고뇌하게 만든 것을 도리어 미안해하며.
내가 사랑하는 남자는 왜 저럴까. 조금만 더 이기적이고 조금만 더 뻔뻔하고 조금만 더 비겁하면 안 될까.
이 역시 불가능한 바람이라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그가 아닌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도…… 조금만 더 내가 당신 마음에 밟혔으면 좋겠어.’
나는 진의 주저 없는 결정이 서운했다. 나를 위해 조금만 더 나쁜 사람이 되어 주면 안 될까.
“플록스!”
나는 소리를 꽥 지르며 플록스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나를 쳐다보았다.
“진이, 진이!”
“무슨 일입니까, 레이디?”
“진이 죽으려고 해요!”
“예에?”
나는 플록스가 이 일의 원흉이라도 되는 양 아무렇게나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플록스는 놀라고 난처한 얼굴로 내 설명을 기다렸다. 나는 울음을 삼키며 어떻게 된 사정인지 쏟아놓았다.
자초지종을 들은 그도 내 옆에 털썩 내려앉아 양손으로 얼굴을 마구 비벼 댔다.
“혼자 가게 할 수는 없어요.”
“당연하지요!”
“어떻게 하면 되죠? 페가수스의 배를 타고 제국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데, 몰래 따라갈 방법이 있을까요?”
“갑판에 커다란 화물 상자가 꽤 있습니다. 거기 숨어들면 어떻습니까.”
“좋아요. 플록스도 함께 가 줄 건가요?”
“예? 레이디야말로 함께 가시려고요?”
결정. 우리는 진이 타고 갈 배에 몰래 잠입해 따라가기로 했다.
그렇다. 나는 결코 얌전하게 진의 약속 따위를 기다리고 있을 사람이 아니다. 플록스도.
* * *
배에는 페가수스 직원과 선원 몇 사람, 만일의 교전을 대비한 하말린 병사들이 타고 있었다.
사실 나와 플록스는 항해 첫날에 이미 숨어 있는 걸 들키고 말았다. 그 ‘말임다’ 선원에게 말이다. 하여간 그는 숨은 사람을 한눈에 찾아내는 재주가 있었다.
하지만 그도 우리 사정을 이해하고는 눈감아 주었다. 그리고 이것저것 도움까지 주었다.
사실 흥분한 나머지 너무 대비 없이 배에 올랐다. 시간이 지나자 점점 견디기 힘든 것들이 생겨났다. 플록스는 내가 힘들어할까 봐 노심초사했다.
어느 날 밤에는 갑판 위를 서성이는 진을 볼 수 있었다. 진은 난간에 기대 바다에 뜬 달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달빛을 받은 진의 모습이 아름답고 높고 쓸쓸해 보였다.
진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눈물을 참고 있는데 옆에서 플록스가 훌쩍이며 선수를 쳤다. 덕분에 나는 울지도 못하고 그를 달래 주어야 했다.
널빤지를 이어 만든 커다란 화물 상자 안에서 하루하루 거지꼴이 되어 가던 어느 날, 배가 바다 위에서 돌연 멈춰 섰다.
무슨 일인가 싶어 널빤지 틈으로 주위를 살피니, 또 다른 배 한 척이 다가왔다. 돛대 위에 제국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선상 교환?”
플록스가 자신의 이마를 치며 한탄했다.
아마 진이 선상에서 인질을 교환하는 방식을 제안했을 거라는 게 플록스의 추측이었다.
황제가 순순히 약속을 지킬지, 정말로 모텝 왕세자를 아무 탈 없이 돌려보내 줄지, 모두가 의심하는 상황이었으니 중간 지역인 해상에서 배를 갈아타는 것이 안전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또 배에 타고 있는 직원과 선원들, 하말린 병사들의 안전도 고려했으리라.
그렇게 진은 바다 한가운데서 홀로 적의 배로 옮겨 가려는 것이었다.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었지만, 나와 플록스에겐 날벼락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대로 진을 보내고 배에 실려서 하말린으로 돌아가게 될 판이었다.
‘어떡하지!’
나와 플록스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예상대로 선상 교환이 시작되었다.
진이 제국 쪽 배로 건너가고 모텝 왕세자가 이쪽 배로 건너왔다. 두 사람은 중간에서 잠깐 만났다 헤어졌다.
순간 진이 왕세자를 돌아보았다. 진의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왠지 그런 느낌이 전해졌다.
진과 왕세자의 교환이 끝나자 두 배는 속절없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나와 플록스는 점점 멀어지는 진을 눈으로만 따라갈 수 있을 뿐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망연자실하고 있을 그때.
갑판에서 이상한 괴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왕세자의 몸이 이상한 형태로 뒤틀리고 있었다.
근육이 불거지고 덩치가 부풀어 오르고, 눈빛이 소름 끼치게 변했다. 급기야 입고 있던 옷이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원래 모텝 왕세자의 생김새는 누이인 모얌 왕녀와 너무나 닮아서 한눈에도 오누이 사이인 걸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덩치가 산만 한 괴물이 갑판에서 독기를 내뿜고 있었다.
‘마수가 됐구나!’
나는 벼락같이 깨달았다.
황제와 프러너스는 왕세자를 멀쩡하게 내어 줄 인간들이 아니었다. 마수를 부활시키고 사육하는 데 사용한 흑마술로 모텝 왕세자를 마수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생각해 보면 지극히 그자들다운 짓이었다.
갑판 위의 저 남자는 이제 흑마술의 조종을 받는 마수였다.
하지만 어떻게 변했든 왕세자였던 그를 하말린 병사들이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병사들의 지휘관은 어떠한 명령도 내리지 못한 채 고민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병사들과 대치한 채 거친 숨을 내뱉던 왕세자는 마치 냄새를 맡는 듯 킁킁거리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치 나와 플록스를 목표로 삼은 것처럼 우리가 숨어 있는 화물 상자를 향해 똑바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설마 아닐 거야,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잖아?
우리는 애써 부정했지만, 우려는 곧 현실이 되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왕세자는 솥뚜껑 같은 손으로 우리가 숨어 있던 상자를 가차 없이 내리쳤다.
꽝 하는 굉음과 함께 널빤지로 만든 화물 상자가 산산조각 났다. 엄청난 괴력 앞에 나와 플록스는 입을 벌린 채 돌처럼 굳어졌다.
다음으로 그 무자비한 손이 날아든 곳은 우리 머리 위였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플록스가 내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마수의 주먹이 아슬아슬하게 비켜 갔다.
덩치가 저렇게나 큰 괴수가 달리는 속도는 또 어찌나 빠른지, 우리의 도주는 금세 맥없이 가로막힐 위기에 놓였다.
그제야 하말린 병사들도 나서 왕세자를 저지했지만 소용없었다. 그의 괴력에 병사들은 제대로 된 공격 한번 해 보지 못하고 갑판 위에 퍽퍽 쓰러졌다.
결국 나와 플록스는 막다른 곳까지 몰렸다. 대체 왜 이 마수는 우리만 노리고 쫓아오는 걸까?
그때 문득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있었다. 정령의 돌! 내가 온몸이 쑤신다고 하소연하자 시아가 몸에 지니고 다니라며 준 작은 덩이버섯.
통증을 먹는 초록 해마의 기운을 담았다는 그 조그마한 정령의 돌을 나는 몸에 지니고 있었다.
정령의 돌로 마기를 충전하는 마수이니 그 냄새를 맡고 내게 달려든 것이리라. 그렇다면 왕세자가 노리는 건 우리가 아니라 나였다.
나는 그 사실을 깨닫고 옆에 있던 플록스를 힘껏 밀어냈다. 마수로 변한 왕세자의 무지막지한 손이 곧장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나는 늘 죽고 싶었다. 영원한 죽음을 기꺼이 맞이하고 싶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죽음 앞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진과 함께한 추억들이, 우리가 쌓아올린 시간들이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슬프고 아까웠다.
퍽! 쿵!
둔탁하면서도 끔찍한 소리가 갑판을 흔들었다.
아무런 충격이 느껴지지 않아 꼭 감았던 눈을 떠 보니 플록스가 저편까지 날아가 바닥에 처박혀 있었다.
바보 같은 플록스는 그 부실한 몸을 던져 나를 향해 달려드는 마수를 막아섰다가 그 처지가 되었다.
플록스에게서 흘러나온 검붉은 피가 바닥에 번져 갔다. 나는 그의 숨이 이미 끊어졌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플록스…….”
이럴 줄 알았으면 플록스를 이곳에 끌고 오지 말 것을. 나는 뒤늦게 후회하며 흐느꼈다.
이제 마수의 발광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모든 것을 체념한 채 눈앞이 흐려지는 걸 느끼는데 환청인 듯 귓가에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제트!”
진이 맞았다. 진이 안간힘을 다해 마수의 팔을 뒤에서 붙잡고 있었다.
“진! 왜 왔어!”
진이 반가우면서도 반갑지 않았다. 아무리 진이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다 해도, 이 마수의 힘은 인간이 당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또 불현듯 깨달았다. 진이 제국의 배를 용케 탈출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일부러 진을 놓아 주었다는 것을. 멀어졌다고 생각한 제국의 배가 어느덧 바로 눈앞까지 와 있었다.
“가! 가! 제발 가!”
나는 눈물로 호소했다. 가지 말라고 그토록 애원했을 때는 기어코 가더니, 이제는 왜 가지 않는 거니!
아니나 다를까 마수는 곧 진을 떨쳐 냈다. 플록스와는 달리 각종 무술과 검술로 단련된 진은 허망하게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보통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힘의 간극이 있었다.
진은 왕세자에게 엉겨 붙었다 날아가고, 엉겨 붙었다 날아가기를 반복했다. 무의미한 반격이 이어졌지만, 진은 포기하지 않았다.
또 진은 몸싸움을 벌이는 와중에도 왕세자와 대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했다. 그는 그냥 마수가 아니라 오쿨루스 왕의 아들이자 모얌 왕녀의 오빠였고, 하말린 백성들이 사랑하던 미래의 지도자였다.
하지만 진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텝 왕세자의 영혼은 완전히 망가져 돌이키기 힘든 상태가 된 듯했다. 이제 저 마수 안에는 더 이상 왕세자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왕과 왕녀가 저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슬퍼할지. 나는 공포에 떨며 진을 걱정하면서도, 마수로 변한 왕세자 때문에 마음 한구석이 아팠다.
그렇게 여러 차례 내동댕이쳐지던 진은 문득 바닥에 흩어져 있던 길고 굵은 쇠사슬을 집어 들었다. 그 끝에는 무거워 보이는 갈고리가 달려 있었다.
진의 행동을 지켜보던 마수는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깟 쇠사슬쯤 바로 깨부숴 버리겠다는 듯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쇠사슬을 든 진은 돌연 난간 근처에 서 있던 마수를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뒤늦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진을 비웃으며 자신만만하던 마수의 눈에도 점차 의아함과 당혹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여기저기 터져 피투성이가 된 진은 엄청난 속도로 돌진해 마수를 들이받고는 필사적으로 그를 끌어안았다. 그와 동시에 휘두른 쇠사슬과 그 끝에 달린 갈고리가 무시무시한 가속을 얻어 둘을 하나로 묶었다.
진은 마수가 된 왕세자를 끌어안고 그대로 깊은 바다 속으로 추락했다.
“아…… 진?”
지독하게도 진은 끝까지 나를 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마지막 순간에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나는 알 도리가 없었다.
웃었을까? 미간을 찌푸렸을까?
“비뚤어진 고집쟁이. 정말 못됐어!”
잔인할 정도로 순식간에, 아무런 표정도 의미도 남기지 않고 진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겨우 나 같은 인간의 목숨 따위를 살리기 위해 진의 시간이 예정보다 조금 더 늘어난 거라고? 겨우 내가 며칠 더 알량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토록 어렵게 진을 찾아 낸 거라고?
아니잖아. 아니잖아요!
나는 신인지 악마인지 모를 대상을 향해 원망하고 울부짖다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