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시작의 끝, 끝의 시작 (71/110)


#71화. 시작의 끝, 끝의 시작
2022.08.05.



 


“로제트…… 로제트…….”

“흐흑…… 진…….”

“로제트? 왜 울어?”

진이 눈물범벅이 된 내 얼굴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익숙한 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찢기고 터지지도, 피로 얼룩지지도 않은 고운 얼굴.

하말린에 있는 우리의 침실임을 확인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진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나쁜 꿈을 꿨어.”

악몽의 공포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미처 다 빠져나가지 못한 울음이 간간이 내 몸 안에서 흐느꼈다. 바들바들 떨리는 내 등을 진이 가만히 도닥였다.


“울지 마, 로제트. 내가…… 자장가 불러 줄까?”

“자장가……를 알아? 자장가를 들어 본 적 있어?”

“흠, 그러고 보니 들어 본 적이 없군. 난 유모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로제트를 위해서라면 왠지 부를 수 있을 것 같아.”

“그게 가능해?”

“참 신기하지. 가진 게 없어도 줄 수 있다는 게. 정말 다행이야.”

진, 내 인생에서 가장 신기한 일은 당신을 만난 거야. 17회차를 통틀어 단연.

당신을 찾아 낸 기적에 비하면 내가 삶을 열여섯 번 되돌아온 건 그저 평범한 일에 지나지 않지.


“자장가 듣다가 눈물 날 거 같아.”

“막상 들으면 웃을걸?”

듣고 싶었다. 진이 뻣뻣한 표정으로 불러 주는 자장가를 들으며 웃고 싶었다.


“사랑해, 로제트.”

“진…… 그럼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건 알고 있어?”

“나, 지금 자장가 부르는 건데.”

“으응?”

“사랑해, 로제트. 사랑해, 로제트. 사랑해, 로제트. 사랑해애­ 로제트.”

저렇게 진지한 얼굴로 저런 노래를 참 열심히도, 부르네.


“아니, 웃음이 안 나와. 눈물 날 거 같아.”

“저런, 그럼 2절도 들어 보겠어? 2절은 또 완전히 다른 맛이지. 로제트, 사랑해. 로제트, 사랑해. 로제트으­ 사랑해.”

“흐윽.”

“……미안. 너무 못 불렀나.”

“그래, 절대로 잠은 못 잘 것 같아, 그 자장가 듣고는.”

진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너무 아름다워서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모습으로.

그렇게 영원히 바라보기만 할 것 같던 진이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로제트, 나와 한 약속 기억해? 절대 사라지지 않기로 한 약속. 그게 당신이 할 일이야.”

 

* * *



“야!”

홀로 눈을 뜬 나는 원망에 찬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야! 너나, 너나 사라지지 마, 이 나쁜…… 놈아…….”

어째서 마지막까지 나를 괴롭히는 건데? 너를 죽도록 그리워하게 만드는 건데? 어째서 꿈에서까지 너는…….

나는 슬프다 못해 화가 나서 한참을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었다.

나도 보란 듯이 확 사라져 버리자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진이 살아 있을 수도 있잖아?’

진이 마수로 변한 모텝 왕세자와 바다로 떨어지는 것만 봤지, 두 사람의 최후를 눈으로 확인한 게 아니잖아?

갑자기 어마어마한 의욕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우선 내가 있는 이곳이 어딘지 알아야 했다. 일반적인 집은 아닌 것 같고, 모양새가 호텔 같았다.


“공작부인? 괜찮으십니까? 실례하겠습니다.”

마침 호텔의 지배인인 듯 보이는 남자와 하급 귀족이거나 사무관처럼 보이는 남자가 방으로 들이닥쳤다. 내가 미친 여자처럼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온 것이리라.

그런데, 공작부인?


“여기가 어디죠?”

내 물음에 두 남자는 차례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부인. 레이놀 호텔 총지배인 그레이엄입니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공작 전하께서 명하신 대로 지내시는 동안 부족함이 없도록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이든 노턴입니다. 공작 전하의 명으로 부인을 임시 보필하게 됐습니다. 전하께서는 급한 공무를 마치시고 곧장 이곳으로 향하고 계십니다. 분부할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제게 맡겨 주십시오.”

하 씨, 뭐라는 거야?

레이놀이라면 아마 카를슈테인의 가신 중 하나인 레이놀 백작가에서 운영하는 호텔 체인이리라.


“레이놀 호텔 어느 지점이죠?”

“그리치입니다, 부인.”

지배인의 대답에 임시 보좌가 급히 덧붙였다.


“타고 계셨던 배가 그리치 항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점에 관해 공작 전하께서 이미 불쾌함을 표하셨고 책임자를 엄중히 문책하실 거라고…….”

뭐라 뭐라 설명이 장황하게 이어졌지만 더 이상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됐고. 마침 여기가 그리치라니 정말 잘됐어!’

나는 속마음을 숨기고 위엄 있는 목소리로 명했다.


“미스터 노턴? 잠옷 바람으로 전하를 맞이하기는 싫군요. 드레스와 구두를 좀 준비해 줘요, 즉시.”

그렇게 나는 행동이 꽤 날랜 임시 보좌관 덕분에 그런대로 사람 꼴을 하고 호텔을 몰래 빠져나와 페가수스 본부로 향할 수 있었다.

가는 동안 진이 살아 있을 거라는 기대는 점점 확신이 되었다.

마차에서 내린 나는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건물 안으로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내달렸다.

1층에 있는 카페 겸 바에 들어서니 모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대낮에 유령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아무도 나를 선뜻 반기지도, 그렇다고 저지하지도 않았다. 내 발길을 따라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생겨나는 걸 느끼며 곧장 진의 집무실이 있던 2층으로 올라갔다.

집무실로 들어가니 말보르크 백작과 몇몇 직원들이 보였다. 갑작스런 나의 등장에 그들 역시 유령을 본 듯 석상처럼 굳어졌다.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평소 진이 다리를 올려놓고 방만한 자세로 앉아 있던 책상으로 다가갔다.

책상 위에는 두 벌의 옷이 놓여 있었다. 한눈에 진과 플록스가 입었던 옷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그 외 신발과 지녔던 물건들…… 유품이었다.

사방이 무시무시할 만큼 고요했다.

나는 멍한 눈으로 그 물건들을 내려다보다 진의 옷을 천천히 손으로 쓸었다. 얼핏 보기에도 훼손이 심했고 특히 한쪽 소매는 완전히 뜯겨 나가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 딱딱한 물체가 손끝에 걸렸다. 옷자락을 들추자 나온 것은, 빗 반쪽.

상아를 조각하고 내 눈동자 색을 닮은 페리도트와 애정을 상징하는 핑크 투르말린을 박아 넣은, 제국에 단 세 개밖에 없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이제는 두 개밖에 남지 않게 된 빗.

진, 당신은 언제부터 이 빗을 품고 다닌 걸까? 처음부터 줄곧?

나는 울고 싶지 않았다. 이미 혼자 많이 울기도 했고, 여기서 울면 진의 죽음이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 될 것만 같아서.

하지만 그 반쪽짜리 빗처럼 내 반쪽을 영원히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나는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하고 말았다.

열일곱 번째 삶에 이르러서야 저 바보 같은 남자 때문에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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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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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 모텝 왕세자의 명예를 지켜 주고 싶었을 겁니다. 마수가 된 왕세자가 더 많은 사람을 해치면 해칠수록 그와 하말린 왕가의 명예가 떨어질 테니까요. 어떤 상황이었든, 진은 결국 그런 선택을 했을 겁니다.”

한바탕 울음바다가 되었던 분위기가 진정되자 말보르크 백작이 내게 말했다.

백작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생각하는데, 그답지 않게 조금 망설이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혹시라도 자책은 마십시오.”

밤비의 연인에 대한 내 점수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별로 위안이 안 되네요.”

“레이디, 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진을 죽음으로 몰고 간 건 황제, 그리고 카를슈테인 공작입니다. 헷갈리지 말아야 해요.”

맞는 말이었다. 이건 단순한 비극이 아니었다. 치밀하게 계획된 암살이었다.


“우리는 복수할 겁니다.”

말보르크가 나지막하지만 이미 결심을 마친 목소리로 말했다. 주변의 직원들도 결연한 얼굴이었다. 이미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 듯한 느낌이었다.


“여러분 마음이야 잘 알지만, 복수하지 마세요.”

하지만 나는 이렇게 김빠지는 소리를 내뱉었다. 말보르크와 직원들이 의아한 눈초리로 말했다.


“레이디, 우리는 진과 플록스의 복수를 위해서 목숨을 걸 각오가 돼 있습니다.”

“여러분의 각오가 진심이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 황제와 공작을 상대로 복수하는 건, 미안하지만 그저 개죽음이 될 뿐입니다.”

“레이디!”

“그런 희생을 진이 바랄 리가 없어요.”

진은 무고한 희생을 막기 위해 자신을 내던졌다. 그런데 페가수스의 동료들이 자신 때문에 헛된 죽음을 당한다면 무척 슬퍼하지 않을까.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말보르크와 직원들에게 말했다.


“당신이 죽으면 밤비는 어쩌고요? 여러분의 가족이나 연인은요? 나쁜 남자는 진 한 사람으로 족해요.”

다소 감상적인 설득이었지만, 나는 그들이 복수를 포기하기를 바랐다. 최종 선택은 그들의 몫이겠지만.


“여러분이 진을 위해 목숨을 걸 기회는 다시 올 거예요. 이번엔 내게 맡겨 주면 좋겠어요.”

비록 이번 생은 아니겠지만, 그때야말로 여러분이 진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 주었으면 해요.


“레이디, 어쩌시려고요?”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을 피하지 않으려고요. 말보르크 백작, 궁금한 게 있어요.”

나는 마수 부활과 사육에 대해 페가수스에서 알아 낸 사실들을 물었다. 특히 마수 사육장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마수와 관련된 일들은 모두 표면적으로는 ‘애견 육성 사업’으로 지칭됩니다. 애견이란 곧 그들이 조종하는 마수를 뜻하는 것이죠. 사육장은 생각보다 제도와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에인절스 딤플.”

잡았다! 에인절스 딤플이라면 카를슈테인 가문의 페트룸 광산이 있던 곳. 지금은 폐광이 된 그곳에서 천사가 아닌 마수를 키우고 있었다니.

그때 직원 한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와 전했다.


“카를슈테인 공작이 기사단을 이끌고 왔습니다!”

“뭐?”

아, 맞다. 그 임시 보좌관이 말했지. 프러너스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일단 프러너스와 함께 공작저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남은 시간을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야 페가수스에도 피해가 가지 않을 테니.


“말보르크 백작, 우선 이곳을 떠나야 할 것 같아요. 혹시 나중에 어떤 소식을 듣더라도 놀라거나 동요하지 말아요. 난 결코 사라질 수 없는 사람이니까.”

 

* * *

나는 이번 이야기가 시작된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야기를 마무리하기에 나쁘지 않은 곳이었다. 긴 여행을 떠났다 돌아온 것처럼 감회가 새로웠다.

내가 쓰던 방에 딸린 발코니로 나가 정원을 바라보았다. 아름답고 화창한 날이었다.

사실 오는 길에 로비에서 아젤리아와 마주쳤다. 마침 프러너스는 가신 회의에 얼굴만 잠깐 비치고 오겠다며 곁을 비운 참이었다.

아젤리아의 차림이 어째 저택을 떠나는 사람 같아서 물었다.


「혹시 외출하는 건가요?」

「주인이 돌아오셨으니, 저는 이만 나가 드려야지요.」

「그럴 필요 없어요, 아젤리아. 난 곧 떠나요. 당신과 아이의 삶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을 테니 걱정 말아요.」

「미안해요, 레이디. 제가 솔직하지 않았어요. 실은 당신과는 상관없이 떠나려는 거예요.」

「왜요?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고 참아야죠.」

「무엇보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 결정한 일이에요. 이 아이는 오로지 내 아입니다. 아이에게 어떤 아빠가 좋을지, 신중하게 골라 보려고요.」

아젤리아의 삶이 바뀌는 걸까?


「당신의 선택이 당신과 아이를 행복한 곳으로 이끌기를 바랄게요.」

이상하게도 나는 그녀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게 됐다.


“로제트, 고생 많았어. 이제 다시는 우리 집을 떠나지 마.”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어 있는데, 프러너스가 등 뒤로 다가서며 말했다. 프러너스는 아젤리아가 떠난 걸 알고 있을까?


“걱정 마. 당신 잘못은 하나도 없어. 그자가 당신을 속이고 이용한 거야. 처음부터 반역을 위해 당신에게 접근한 거지. 황제의 최측근인 나의 아내에게. 비겁한 놈.”

프러너스가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일말의 미안함도 가질 필요 없다는 생각에 도리어 마음이 편안했다. 나는 오늘의 날씨처럼 환하게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당신은 진도, 진을 사랑한 나도, 전혀 알지 못하는구나. 하긴 몇 번을 죽었다 깨도 저밖에는 아무도 몰랐지.”

프러너스는 방금 내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그야말로 알아듣지 못하는 듯했다. 차가운 두 눈 사이가 불쾌한 듯 구겨졌다.


“불쌍한 인간.”

나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프러너스가 보는 앞에서 발코니 밖으로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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