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기왕이면 대형 쓰레기 (74/110)


#74화. 기왕이면 대형 쓰레기
2022.08.15.



 


“높이가 있는 단상과 확성 도구 같은 게 금방 준비되려나?”

나는 몰려든 기자들을 앞에 두고 어리바리한 얼굴로 두리번거렸다.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안 되는 게 어디 있니. 급한 사람이 어떻게든 구해 와야지.’

내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는데도 기자들이 알아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금세 그럴듯한 기자 회견장이 마련되었다. 요청하지 않은 의자까지 대령한 걸 보니, 결코 나를 쉽게 놓아주지 않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느껴졌다.

이 인간 착즙기들 같으니라고.

나를 붙잡고 묻고 싶은 말이 많겠지만, 기차 출발 시각이 정해져 있다고 일러두었다. 그러니 효율적인 진행 부탁해.

내가 단상 위로 올라가자 뭐라고 입을 떼기도 전에 눈앞이 번쩍거리며 파바바박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레이디, 이쪽으로도 한번 봐 주십시오!’ 하는 애절한 외침도 들렸다. 어떤 사람은 위험하게 높은 곳에 매달리기도 했다.

이 취재 열기. 나보다는 카를슈테인 공작의 명성 때문이리라. 갑자기 굴러들어 온 특종 기회에 역사 안은 혼란과 열기로 소용돌이쳤다.


“포토 타임은 따로 마련할 테니 몸싸움하지 마세요. 내가 한 바퀴 회전하면서 포즈를 취해 줄 테니 자리 선점하려고 위험하게 싸우지 않아도 돼요.”

사진 촬영 경쟁이 특히 심각해서 이렇게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무리 바빠도 살롱 드 밤비에서 머리라도 만지고 오는 건데.


“카를슈테인 공작과 이혼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누군가 외친 이 말을 시작으로 인터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네, 사실입니다. 나는 이제 공작부인이 아니라 로제트 앰브로시아예요.”

나는 답변한 후에 서명과 날인이 선명하게 빛나는 이혼 증서를 펼쳐 보였다.

이렇게 완벽한 이혼 서류를 실물로 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일 터. 다들 목을 죽 빼고 나의 빛나는 증서를 구경했다. 또 플래시가 파바바박 터졌다.


“이혼 사유가 무엇입니까?”

“복합적인 이유지만, 그래도 가장 주된 건 공작의 외도라고 할 수 있겠지요. 혼외 자식 문제도 있고요.”

나는 돌려 말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내가 기자 회견을 자청한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로 프러너스를 여전히 믿을 수 없어서였다. 지난 생의 경험을 통해 그의 실체를 알았으니까. 그는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비열하고 위험한 인간이었다.

그가 간절히 바라서 한 이혼인 데다 이혼 증서에 법원과 신전의 직인까지 찍혀 있지만,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이 모든 걸 뒤집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카를슈테인 공작의 권력은 모든 법 위에 군림하니까. 그는 황제까지도 우습게 알던 위인이었다.

그래서 나와 프러너스가 이혼했다는 사실을 최대한 시끄럽고 요란하게, 널리 널리 퍼뜨리고 싶었다. 그가 결정을 번복하려면 상당히 피곤해지도록.

대단한 대비책은 아닐지 몰라도 프러너스에게 지끈지끈 두통거리쯤은 안겨 주고 싶었다.


“실례지만 레이디, 귀족의 결혼은 대부분 정략결혼 아닙니까? 정부를 두는 문제라든가 외도나 혼외 자식 문제는 그다지 희귀한 얘기가 아니지요. 저희 신문들을 봐도 아시겠지만.”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런 치정 문제로 쉽게 이혼하지는 않습니다. 고위 귀족의 경우 정실부인 외에 첩실을 두는 것을 제국법이 허용하기도 하고요. 물론 달라진 사회 분위기로 요즘은 그와 같은 경우를 찾기 힘들어졌습니다만.”

저 질문은 당신이 선택하고 말고도 없이 사실상 내쫓긴 게 아니냐는 뜻을 담고 있었다. 남편의 불륜 상대와 암투다운 암투도 벌이지 않고, 자신의 권리도 모두 팽개친 채 맥없이 내빼느냐는 조소도 포함.


“어머나, 역시 눈치가 빠르시네. 기자분이라 그런가? 은근슬쩍 넘어가기가 쉽지 않네요.”

나는 일단 상대를 띄워 주며 푼수처럼 웃었다.


“사실 부부 사이의 일이란 게, 바깥에 말 못 할 사정이 많잖아요? 남편의 내연녀와 암투를 벌일 만큼 갈급하지 않았다고 하면 설명이 되려나? 나 역시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 좀 있어서. 여기까지만 밝히죠.”

잠시 술렁이던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 물었다.


“전남편이 어떤 인물인지는 충분히 알고 계실 테지요? 카를슈테인 가문에 대해선 더 언급하지 않아도 될 테고, 공작은 제국 최고의 남자란 별호가 따라다니는 분 아닙니까.”

나는 일단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반론을 펼쳤다.


“여기 기혼자도, 미혼자도 있겠지만, 부부 관계는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랍니다. 아무리 카를슈테인 공작이라도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은 있더군요.”

“죄송하지만 레이디의 말씀은 쉽게 믿기 힘들군요. 이혼도 불사할 만큼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 있다니. 이번 스캔들을 보면 공무나 사업만이 아니라 다른 데서도 정력적인 분인 것 같습니다만.”

다시 한번 여기저기서 큭큭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살포시 웃었다.


“글쎄요, 취향의 문제도 있겠고, 내가 만족을 모르는 오만한 여자라 그런 걸 수도 있겠네요. 그의 내연녀처럼 그 정도로 감지덕지, 아니 만족할 수도 있고. 어쨌든 난 영 성에 차지 않아서. 이런, 또 저런, 면들이…….”

나는 생각 없는 척 술술 불다 일부러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이며 다급히 손으로 내 입을 막았다.


“어머, 나도 참 품위 없게.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건지. 방금 건 정말이지 실수예요. 여러분, 제발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기사로 쓰시면 절대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안 돼요, 돼요, 돼요, 돼요.

알지? 방금 내가 한 말이 이 특종 기사의 핵심이라는 거. 상상력을 잘 발휘해서 최대한 원색적으로 뽑아 보라고. 악의적으로 왜곡하고 살을 붙이는 건 당신들 특기잖아.


“어떤 조건으로 이혼하셨는지요? 위자료라든지?”

“아시잖아요? 카를슈테인 공작가가 얼마나 대단한 가문인지. 그 명성만큼 받았습니다.”

나는 위자료 금액과 세세한 내역까지 하나하나 찬찬히 밝혔다.

내가 기자 회견을 자청한 두 번째 이유. 제국에 이혼에 관한 강렬한 선례를 남기고 싶었다.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여성들이 불편하면 불편하다, 불쾌하면 불쾌하다, 불만족스러우면 불만족스럽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했다.

그런 감정들이 한가하다, 배가 불렀다, 가소롭다는 식으로 무시당하지 않기를 바랐다.

물론 불합리를 견뎌 가며 이혼하지 않는 선택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모르는 각자의 사정이 있을 터.

하지만 이혼을 선택하더라도 당장 삶이 끝장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이 펼쳐진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마치 가문이나 남편의 그늘을 벗어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곧 죽을 인간인 것처럼 스스로 느낀다면, 그건 악랄한 세뇌의 결과일 뿐이라고.

당신은 생각보다 할 수 있는 것도, 바꿀 수 있는 것도 많다고.

그리고 기왕이면 똑똑하게 이혼해서 지난 생의 나처럼 생고생을 하지 않았으면 했다.


“혹시 선험자의 상담이나 조언이 필요한 레이디가 있다면 내게 연락해도 좋아요.”

이 말을 하면서 나는 특히 한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나의 유일한 귀부인 친구였던 올랜도 웰츠.

그녀가 내 기사를 읽고 조금이라도 다르게 생각해 볼 기회를 가졌으면 했다. 나아가 윌로우와 이혼까지 한다면 좋겠지만, 내가 할 몫은 여기까지.

더 이상 그녀의 삶에 주제넘게 관여할 생각은 없다.

기차 출발 시각이 가까워졌음을 확인한 나는, 좌중을 향해 선언했다.


“나, 로제트 앰브로시아는 카를슈테인 공작과 분명하게 이혼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나를 공작부인이라 칭하지 말아 주세요.”

자자, 여러분이 내 이혼의 증인입니다. 어서 이 사실을 널리 퍼뜨려 달라고.

그리고 정말로 마지막 임무까지 성의를 다했다.


“아, 사진? 자, 포즈 취합니다.”

 


* * *

번갯불 기자 회견을 마친 나는, 내 기차표에 명시된 열차의 객실에 실수 없이 안착했다.

아름다운 창밖 풍경은 지난 생과 똑같았다. 한동안 바라보고 있으니, 기다리던 그분이 어김없이 내 특실 문을 노크했다.


‘역시, 안 올 리가 없지.’

내가 기자 회견을 자청한 세 번째 이유. 이 하이에나에게 미끼를 던지기 위해서였다.

이번 생에 또 나를 처음 만난 그는 판에 박힌 친근한 웃음을 흘리며 인사했다.


“레이디, 인사를 드리고 싶어 결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실은 제가 앰브로시아 출신이거든요.”

또 사기 치고 있네. 넌 제도 토박이잖아. 어째 레퍼토리가 바뀌지 않니.

가십지 〈팩트〉의 기자 척 슈발럼. 쓰레기계의 대부, 그가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리치로 가시겠군요? 거기서부터는 마차로 움직이십니까? 후작가에서 마중을 나옵니까?”

나는 이번에도 떨떠름한 얼굴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는데, 실은 웃음을 꾹 참고 있었다. 아, 어쩌나. 이번 생엔 슈발럼마저 반가우니.


“이런 제가 너무 조급했습니다. 레이디는 워낙 유명인사시라, 더욱이 앰브로시아 출신인 제겐 친근한 분이라 실수를 했습니다.”

그가 내 눈치를 살피더니 이렇게 둘러댔다.

어디, 계속 들어 볼까?


“척 슈발럼 남작입니다. 실은 오라버니 되시는 루이 앰브로시아 후작 각하와도 만난 적이 있지요.”

“…….”

“그리치는 대도시라 레이디 혼자 다니시기에 매우 위험합니다. 괜찮으시면 제가 가시는 곳까지 에스코트해 드려도 될지요?”

지난 생에 했던 말과 너무 똑같으니까 지루하네. 안 되겠다. 여기까지만 듣기로.


“그래요? 거기 출신이면 진 시더우드와 그의 정보 길드 페가수스도 잘 알겠네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웃으며 말하자 슈발럼의 눈빛이 금세 변했다.

유들유들한 웃음을 흘리던 눈은 원래의 독사 같은 눈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 났다는 걸 금세 눈치 채고는,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좌석에 아무렇게나 털썩 앉았다.


“허접한 준남작 가문 출신 계집한테 남편이고 공작부인 자리고 고스란히 쥐여 주고 어디 가서 뭐 하나 했더니. 이번엔 방탕 황자라, 그가 당신한테서 돈 냄새라도 맡았나?”

하여간 말본새하고는.

사실 슈발럼은 진 시더우드란 이름만 들어도 왠지 오금이 저릴 것이다.

이번 생과 지난 생이 단절돼 있을 것 같지만, 몇 차례 경험해 보고 나니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난생처음 만난 사람이 왠지 반갑고 끌린다거나, 반대로 싫고 꺼려진다면 바로 지난 생의 영향인 것.

즉, 사람 사이의 관계란 결코 0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란 뜻이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할 뿐.

지난 생에 진에게 혼꾸멍이 난 적 있는 슈발럼은 그가 왠지 모르게 두려울 것이다.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는 직감이 스멀스멀 밀려오겠지.

내 앞에서는 센 척하지만, 실은 바짝 졸아 있는 슈발럼에게 물었다.


“슈발럼 남작은 불후의 특종과 목숨을 맞바꿀 각오가 되어 있나요?”

기왕이면 역사에 길이 남을 대형 쓰레기가 되어 보는 건 어때?

내 뜬금없는 말에 슈발럼이 경계심을 세우며 나를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무슨 수작이야? 내가 누군지 알고.”

누구긴 인정과 관심에 목마른 기생충이지. 타인의 권력이나 인기, 불행이나 몰락을 양분 삼아 살아가는. 숙주를 향한 관심과 주목이 제 것인 양 착각하며.


“피곤하니까 짧게 말할게. 굉장한 일을 하나 계획하고 있는데, 손발을 맞출 기자가 필요해서. 내키지 않는다면 다른 기자에게 제안하고.”

“목숨까지 운운할 만큼 대단한 일인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위험한 만큼 대가가 유혹적이지.”

수상쩍어 하는 슈발럼에게 나는 그림 한 장을 내밀었다.

이혼 수속으로 바쁜 중에도 가장 공을 들인 일의 결과물.


“뭐야…… 이 초상화는?”

눈치 빠른 슈발럼은 벌써 뭔가 알아챈 듯 목소리를 낮췄다.


“선황후의 초상화인데, 한눈에 봐도 당신이 아는 누구랑 매우 닮았지?”

나도 처음 이 초상화를 보고 깜짝 놀랐으니까.

열일곱 번째로 돌아오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이 바로 로안나 선황후의 초상화를 찾아 모사본을 제작하는 일이었다.

이 초상화 한 점이면 진에게 모든 진실을 한 방에 설명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진에게 좋은 선물이 될 테고.

진이 이 초상화를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저려 왔다. 아아, 또 진이 보고 싶어 죽겠잖아!

슈발럼이 짐짓 별거 아닌 듯 느긋함을 가장해 말했다.


“그래서 뭐? 황제나 황태자의 출생의 비밀? 그건 어느 대에나 있는 소문이지. 사실 황위 다툼이란 게 원래 그런 거 아닌가? 온갖 암투와 권모술수의 향연.”

“뭐, 그래. 황제가 폭정만 하지 않았다면 누가 황제가 되든 무슨 상관이람.”

“거, 목소리 좀 낮추지. 괜히 나까지 불똥 맞기 싫으니.”

슈발럼이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사실 황제가 선황후의 핏줄이든 선황비의 핏줄이든 상관없잖아. 그건 황실 스캔들 거리도 못 돼. 이제 와서 황태자 자격이라도 따질 건가?”

나는 슈발럼이 원한 대로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럼 이건 어때? 황제의 몸에서 향기가 전혀 나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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