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향기 없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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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향기 없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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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향기 없는 아이
2022.08.19.
“미쳤군, 미쳤어. 완전히 미친 여자였어.”
내 말에 슈발럼이 넋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카를슈테인 공작부인 자리를 박차고 나올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가십지 기자들을 피해 다녀도 모자랄 판에 스스로 불러 모아 떠들어 댈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행여 제 옷에 진흙이라도 튈까 안달복달하는 슈발럼이었다. 이미 오물투성이 쓰레기인 걸, 괜한 걱정을 하네.
나는 서로의 입장이 뒤바뀐 것이 재미있어 웃었다. 더욱 미친 여자처럼 보이도록.
“하긴, 내가 당한 일을 생각하면 미쳐도 이상할 게 하나 없지. 하지만 그거 알아? 카를슈테인 공작이나 황제에 비하면 한참 못 미친다는 거? 자존심 상하게.”
“이 여자가 정말. 난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거든.”
“좀 미친 게 아닌 이들을 상대하자니 나도 그만큼은 미칠 수밖에. 남작 당신도 이런 거 좋아하지 않아? 제정신인 건 재미없잖아?”
물론 슈발럼은 사람을 봐 가면서 건드리는 비겁한 종자이므로, 어쩌면 그 자신은 누구보다 제정신을 꽉 붙들고서 사는지도 몰랐다.
괴물. 괴물을 물리치려는 이는 스스로 괴물이 되어야 했다. 지난 생엔 그들과 똑같은 괴물이 되는 게 싫어서, 내가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을 싹 잊고 새롭게 시작한 삶을 행복하게 살면, 그것이 진정한 복수가 아니겠느냐고.
하지만 그 괴물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집어삼켰으니, 나는 이제 괴물이 되어서라도 그런 비극을 막아야 했다. 이번 생에 나는 행복을 포기하고 괴물이 되기로 했다.
나 외에 괴물이 되어도 손색이 없을 만한 길동무로 슈발럼을 낙점했건만, 저리 사색이 되어 벌벌 떨기는. 내가 그를 너무 과대평가했나?
그가 사색이 된 이유는 무엇보다 내가 한 이 말 때문이었다.
「황제의 몸에서 향기가 전혀 나지 않는다면?」
이곳 로센보르 제국의 황족에게선 삼나무 향이 난다. 건국 설화에는 그들이 신성한 삼나무에서 잉태된 혈통이라서 그렇다고 전해진다. 황족의 성이 시더우드인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러므로 황제에게서 삼나무 향이 나지 않는다는 건, 단순히 그의 어머니가 황후냐 황비냐, 혹은 정체 모를 어떤 여인이냐를 문제 삼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황제의 아버지도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얘기.
즉 제국 황족의 혈통이 바뀌었다는 뜻이었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그런 말을 입에 담는 것 자체가 목을 내놓는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그러니 저 비겁한 종자가 잔뜩 몸을 사릴 수밖에.
사실 황족의 혈통이 바뀌든 말든, 나야말로 이전이라면 관심도 없을 얘기였다. 아마 진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어도 나와 비슷한 반응이지 않을까.
하지만 현 황제에게 두려움을 품고 있는 귀족들이나 폭정에 시달리는 제국민들이 진실을 알게 된다면? 우리처럼 덤덤하게 넘어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황제의 약점을 잡으려고 벼르는 정적들이 이미 적지 않았다. 그건 카를슈테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터. 눈이 있고 귀가 있다면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황제의 비밀을 알게 된 것 역시 하말린에서 되찾은 기억 덕분이었다.
당시엔 무슨 뜻인지 몰라 대수롭지 않게 넘긴 말이었다.
「몸에서 향기 한 점 나지 않는 아이를 기껏 황태자로 만들어 줬더니.」
「삼나무 향 비슷한 냄새라도 풍기게 하려고 연금술사들에게 돈을 얼마나 먹였는데, 우리 카를슈테인을 그런 식으로 박대해?」
선대 카를슈테인 공작이 그 약재 창고에서 지껄인 말 중 하나였다.
로안나 황후의 초상화를 제작하느라 황족 연감과 황실 역사서까지 뒤지던 나는, 불현듯 그때 들은 말을 떠올렸다. 그제야 그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 얼마나 소름이 돋았는지.
이 모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적시에 터뜨려 줘야 할 이가 바로 슈발럼인데, 저리 몸을 사리고 있으니.
“우리가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지, 이 정도면 당신도 알아챘겠지?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신 말고 몇 사람 더 물색해 두었으니.”
슈발럼은 관심 없다는 듯 황급히 자리를 뜨며 말했다.
“이 자리에서 나온 말들은 못 들은 걸로 하지.”
당신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당신이 이런 특종을 다른 사람에게 순순히 넘길 수 있을까? 아마 잠이 안 올 텐데?
그가 반드시 다시 접근해 올 것이라고, 나는 확신했다.
관심받고 인정받고 거드름 피울 절호의 기회를 슈발럼 같은 자가 놓칠 리 없지.
슈발럼까지 떠나고 나니, 이제 정말로 진을 만난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설레기도 하고 심란하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는 건 두려운 것이 많아지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어떤 두려움도 감내하게 만드는 힘 또한 그를 사랑하는 데서 나왔다. 이처럼 사랑은 늘 나를 이중적인 감정에 빠뜨렸다.
내 눈은 자꾸만 열차 객실의 짐 선반을 살폈다. 하지만 내가 기다리는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급기야 나는 짐 선반 위로 올라가 누웠다. 기차가 흔들리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며 그를 향한 그리움에 젖었다.
* * *
그리치 역에서 내린 나는 곧장 페가수스 본부로 향했다. 그리치 해변에서 열리는 불꽃 축제 ‘그리치 비치 파이어 파티’는 내일 밤부터 시작이었지만, 행여 일이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마음이 급했다.
너무나 익숙한 카페 겸 바의 문을 주저 없이 열고 들어서니, 손님들과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쏟아졌다.
의문과 호기심 가득한 시선들을 뚫고 나는 곧장 바텐더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킹핀을 만나러 왔어요.”
뺀질이 바텐더 힉스마저 다시 보니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약속을 하고 오셨나요?”
내 미소에 바텐더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껌뻑이며 물었다.
“아니요, 하지만 긴급하고 중요한 용건으로 왔으니 보스가 출타 중이란 말은 하지 마세요.”
“죄송합니다만, 보스는 진짜 출타 중이신데요.”
“지금 당장 만나야 한다니까요. 나와 보스는 매우 가까운 사이예요.”
“이거 참, 곤란하군요. 그러고 보니 레이디의 얼굴이 눈에 익기는 합니다. 전에 뵌 적이 있던가요?”
“아마 여러 번 봤을 걸요? 기억력이 별로 안 좋으신가 보다.”
“아닙니다, 기억납니다. 그때…… 그분이잖아요?”
“맞아요, 그때 그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얼른 보스와 만나게 해 줘요.”
“이거 어쩐다. 그럼, 보좌관인 플록스 경을 대신 불러 드리죠.”
바텐더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를 비웠다.
플록스! 늘 나의 아군이었던 그.
내가 그를 책임지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정작 그가 언제나 나를 돌봐 주고 지켜 주었지. 마지막 순간까지…….
“레이디? 보스를 만나러 오셨다고요?”
등 뒤에서 들려 온 친절한 목소리에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안녕하세요, 플록스 경?”
나는 솟아오르는 감정을 가까스로 누르며 그에게 인사했다.
하지만 플록스의 얼굴을 보는 순간, 역시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일부러 그의 손을 덥석 잡고 요란하게 흔들어 댔다.
“만나서 반가워요. 정말, 정말 반가워요.”
낯선 여자에게 손을 강탈당한 플록스는 위아래로 마구 흔들리는 자신의 팔을 당황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 물었다.
“실례지만, 만나 뵌 적이 있던가요?”
“진이 당신 얘길 많이 했거든요. 실제로 보니 너무 반가워서요.”
“보스가 제 얘기를요?”
플록스의 눈에 의심의 빛이 더해졌다.
“음, 진은 플란과 당신에게 늘 고마워했어요. 부끄러워서 표현은 잘 못 했겠지만.”
내 입에서 친누나의 이름까지 나오자 플록스는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아…… 그렇습니까? 안타깝게도 보스는 한 시간 전쯤에 출타하셨습니다.”
“어디로 갔는데요?”
“그게, 아무 말씀도 없이 급히 나가셔서……. 마치 혼이 나간 분처럼 허둥거리는 모습이 보스답지 않아 저도 마음에 걸리던 차였습니다.”
“아아, 안 돼. 짐작 가는 데도 없어요?”
플록스가 고민하는 듯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진을 어서 그리치 밖으로 데리고 나가야 하는데!
발을 동동 구르던 나는 문득 어떤 직감에 사로잡혔다. 그곳에 진이 있을 것 같았다.
“플록스 경, 부탁 좀 할게요. 토버마리로 가는 장거리 마차를 좀 불러 주겠어요?”
마차를 부른 플록스가 늘 그랬듯 칸막이와 주렴이 있는 자리로 나를 안내했다.
“마차가 올 때까지 잠시 여기서 쉬다 가십시오.”
“저, 플록스, 할 말이 있어요.”
플록스에겐 털어놓고 싶었다. 그가 그토록 애태우며 바라던 일이 이루어졌다고. 선물을 미리 주고 싶었다.
방음이 전혀 안 되는 사정을 고려해 나는 목소리를 한껏 낮춰 말했다.
“실은, 보스와 나는 혼인했어요.”
“예?”
플록스는 다시 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기쁘지 않아요? 당신이 무척 바랐던 일이잖아요.”
“기……쁘지요. 기쁘고말고요. 그런데 레이디, 이게 몇 개로 보이십니까? 여기는 어디고요? 이 제국과 현 황후의 이름은?”
“세 개, 정보 길드인 페가수스 본부, 로센보르 제국, 망할 황후의 이름은 알펜시아 바카리스. 처녀 적 이름은 아리스타타죠.”
나는 세 개의 손가락을 세운 플록스의 손을 탁 쳐내며 대답했다.
“정말로 보스와 혼인하셨습니까? 대체 언제요?”
“좀 됐어요. 진이 비밀로 했나 보네요.”
“사실이라면 정말 배신감이 큽니다. 어떻게 아무런 말씀도 없이 몰래 결혼하시지? 아니, 우리가 그렇게 부끄러우셨나?”
“설마요. 어떤…… 사정이 있었을 거예요. 그보다 내가 플록스 경에게 이 얘길 하는 이유는, 이제 황후 문제는 해결됐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뜻에서예요.”
“예에?”
“괜히 지나가는 아무 여자나 붙잡고 술 마시고 그러지 말라고요. 진과 한 금주 약속은 꼭 지키세요.”
플록스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얼음이 됐다. 비밀을 너무 한꺼번에 말했나?
마침 토버마리행 마차가 당도했다는 기별이 왔기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플록스에게 부탁했다.
“진과 내가 혼인했다는 건 당분간 다른 사람에겐 비밀로 해 주세요. 신변의 안전이 달린 문제라서, 알죠?”
플록스가 여전히 홀린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렴을 걷고 나오니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역시 말이 조금 새어 나갔는지, 카페에 있던 직원들이 의문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찬찬히 둘러보니 여러 차례 모험을 함께한 우직한 휴고와 제도행에 합류했던 막스도 보였다.
반가운 얼굴들. 내가 다시 개구리 노래를 불러 주면, 그때도 다들 지난 생처럼 좋아해 줄까.
“여러분, 또 봐요.”
나는 바람을 담은 간단한 인사를 남기고 토버마리행 마차에 급히 올랐다. 서두르느라 플록스가 허겁지겁 따라 나와 묻는 말에 미처 답하지 못하고 출발해 버렸다.
그의 마지막 질문은 아마 이것이었을 것이다.
“레이디, 당신의 이름은?”
* * *
토버마리까지 가는 시간이 천년은 되는 듯 더디게 느껴졌다.
마차 안에서 나는 열두 번도 더 죽었다 살아났다.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마침내 플럼 하우스에 당도한 나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잠시 심호흡을 했다. 대문 앞에 기적처럼 진이 서 있었다.
‘역시 이리로 왔구나.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꿈에 그리던 모습 그대로, 진은 플럼 하우스의 대문 앞에 서서 저택과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 그저 발이 움직이는 대로 내달렸다. 그리고 곧장 진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서러운 울음을 토해 냈다.
그리운 삼나무 향이 훌쩍이는 콧속을 파고들었다.
“진! 흐흑, 진! 진!”
오직 그의 이름밖에 말할 수 없었다.
진은 갑작스런 상황에 놀랐는지 잠시 석상처럼 굳어 있다, 흐느끼는 내 등을 천천히 손으로 도닥였다.
언제나처럼 단단하면서도 따뜻한 손길. 하지만 무언가 빠져 있었다.
나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아는 고운 얼굴 그대로였지만, 난처함이 가득 고인 눈에는 나에 대한 기억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아!”
나는 예견된 절망에 절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