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황위보다 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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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황위보다 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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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황위보다 탐나
2022.08.29.
그녀는 곧장 내게 달려와 안기더니 내 이름을 불렀다.
“진! 흐흑, 진! 진!”
목소리가 너무 애잔해서 그녀가 원하는 사람이 되어 주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름이 로제트일 그녀를.
사실 나는 그녀를 만난 직후부터 식은땀이 날 정도로 줄곧 당황한 상태였다.
그녀가 줄줄이 들려 준 비밀 이야기 때문에? 마치 체스 게임이라도 권하는 듯 천진한 태도로 반정 같은 무시무시한 말을 입에 올려서?
짧은 시간에 인생의 비밀을 모두 알게 된 사람으로서 물론 현기증이 날 만큼 혼란스러웠지만, 더 즉각적으로 찾아온 어떤 감각이 그러한 혼란마저도 덮어 버렸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고 설명되지 않는 감각과 감정.
나는 그녀에게 욕정을 느꼈다.
할 수만 있다면 눈물범벅이 됐던 그 작은 턱을 움켜쥐고 입을 맞추고 싶었다.
나도 안다. 내가 미쳤다는 건.
어처구니없고 역겨운 그 감정을 욕정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녀에 대한 아무런 추억도, 기억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우리 사이에 어떠한 시간도, 이야기도 없는데 어디서 어떻게 이런 감정이 튀어나올 수 있는 건지.
반쪽짜리가 아닌 걸 알게 되자마자 소위 순혈들의 그 더러운 습성을 각성이라도 한 것인가. 그들이 대대로 자행해 온 짐승 같은 짓거리를 답습이라도 하시게?
인정할 수 없었다. 나는 지금껏 어떤 여자에게도 그런 욕망을 품어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한때 세상 무엇보다 소중했던, 내 삶의 유일한 빛이었던 쿠키 소녀라서?
하지만 황후를 쿠키 소녀로 알고 있던 때에도, 그래서 황후를 사랑한다고 믿었던 때조차 그녀에게 욕정을 품어 본 적은 없었다.
내 감정의 변명거리를 찾기 위해, 내가 가증스러운 욕망의 괴물이 아니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 나름 집요하고도 다양한 방식으로 그녀를 떠보았다. 나에게는 그만큼 다급한 문제였다.
하지만 로제트는 내가 자신이 찾던 그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후로 눈에 띄게 나를 밀어냈다.
솔직히 말해, 조금 자존심이 상하는 대목이었다. 어차피 기억도 못 할 전생의 일인데, 그런대로 가까운 사이였다고 말해 주면 큰일이라도 나는 건가.
지나치게 단호하게 선을 긋는 태도가 도리어 의심스러웠다.
내게도 그동안 호감을 보이며 접근해 온 영애들이 없지 않았는데. 로제트의 냉정한 태도에 전생의 진 시더우드에게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
아니면 서로 이를 갈던 원수지간이었던 걸까? 그래서 지난 생에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놓기 꺼려 하는 걸까?
설마 내가 그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나쁜 짓을 한 건 아니겠지? 그녀가 말한 복수란 실은 나를 향한 복수?
아니야, 그랬다면 이미 영혼이 된 미고가 힘들게 나를 찾아와 힌트를 주지는 않았겠지.
키스해.
미고가 쓴 몇 개 안 되는 단어는 분명 모두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 아이의 눈빛으로 미루어 장난삼아 쓰지는 않았을 터.
혹시 키스가 열쇠는 아닐까? 로제트와 키스를 하면 전생의 기억을 되찾거나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건 아닐까?
궁지에 몰려 당황하면 더욱 봉긋해지는 입술이라든지, 왼쪽 관자놀이에 있는 왠지 야스러운 자주색 점이라든지. 그녀의 비밀을 꽉 물고 있는 듯한 문을 열어 보고 싶다.
그렇지만 어떻게? 로제트에게 다짜고짜 키스를?
제길, 시기도 적절하게 발정이라도 난 건가. 알지도 못하는 여자와, 그것도 슬픔에 빠진 듯한 여자와 키스할 기회를 노리다니. 그야말로 파렴치한 구제불능이군.
여하튼 이 욕정의 이유만큼은 어떻게든 알고 싶다.
자신을 두고 이런 생각을 하는 줄은 꿈에도 모를 로제트는 말끝마다 내게 황제의 재목이라는 생뚱맞은 소리를 갖다 붙였다.
로제트는 온통 황위에만 관심이 있는 것일까.
황제라니, 우스운 소리였다. 황위나 황정보다 낯선 여자의 입술에 더 관심이 있는 방탕 황자인 것을.
아니지, 추잡함을 다투어 황위에 오르는 거라면, 지금 나는 누구보다 황위에 어울리는 사람인지도 모르지.
* * *
뭔가 잘못된 것 같다.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걸까? 연기가 너무 어설펐나?
진이 자꾸만 내 뒤를 밟는 것 같다. 어둑한 곳에 몸에 숨긴 채 나를 노려보는 듯하다. 뭔가 섬뜩한 기분이 들어 주위를 곁눈질해 보면, 어느 틈엔가 따라붙은 그의 시선.
불만 있으면 대놓고 말할 것이지, 왜 저러는 걸까?
하긴, 수상하기도 할 것이다. 갑자기 나타나서는 느닷없이 현 황제를 몰아내고 황위를 되찾으라니. 황위가 무슨 어린애 자두 쿠키도 아니고. 내 저의가 의심스럽기도 하겠지.
진은 고민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당연한 얘기였다. 낯선 여자나 소녀 유령의 갑작스런 등장에 덜컥 결정해 버릴 만큼 가벼운 문제가 아니니까.
그랬으면 고민을 해야지. 왜 자꾸 나를 쫓아다니며 적의를 불태우냔 말이지. 감시하는 건가?
생각해 보니 아무리 이혼한 사이라 해도, 나는 황제의 최측근인 카를슈테인 공작의 전 부인. 의심받고 모함당하기 딱 좋은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진이 결단을 내려 내가 그의 보좌진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가능한 한 신분을 숨겨야겠다는 생각을 이제야 했다.
지금까지는 마냥 반가운 마음에 페가수스 직원들을 편하게만 생각했는데.
내 뒤를 따라다니는 저 한 쌍의 이글대는 눈을 보니, 이제야 살벌한 전쟁터 한가운데 떨어진 실감이 났다.
저지르긴 저질렀는데,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복잡할 땐, 버섯이지.
나는 지난 생처럼 화구와 간단한 도시락을 챙겨서 ‘에디의 숲’으로 향했다.
바람의 정령 에디가 종종 장난을 치는 그 숲 말이다. 지난 생에 자주 찾았던 버섯 골짜기에서 이번에도 버섯 그림을 그릴 생각이었다.
다양한 빛깔과 모양의 갓과 정연한 주름을 그리다 보면 머릿속이 깨끗해지고 시간도 잘 가니까.
다만 지난 생과 다른 점이라면, 조금 더 이른 계절이라 봄이라도 숲속은 아직 쌀쌀한 기운이 남아 있다는 것. 그리고 처음부터 나를 뒤쫓아 온 남자가 있다는 것.
‘후, 끈질기네.’
하긴 지난 생에도 괜히 와서는 별말도 없이 누워 있다 가곤 했지. 그때 정말 귀여웠는데.
진, 이번에도 버섯 그리는 레이디 실컷 구경하십시오. 단단히 대비를 해 두어서 지난번처럼 그림이 사방팔방 날아갈 일도 없을 테니.
나는 진을 못 본 척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역시 위안이 되는구나, 버섯 그리기는. 이번 생엔 한가하게 버섯을 그릴 시간이 많지 않겠지만.
그리다 보니 또 염료 욕심이 났지만 어쩔 수 없지. 참, 소녀 해결사 앤은 일찌감치 칼리지에 입학시켰다. 지난번에 고생했던 것이 생각나서 아직 공작부인일 때 손을 써 두었다.
밤비에게 신세를 져 가며 버섯 그림 전시회까지 열었던 지난 생에 비하면 너무나 싱겁게, 말 한마디로 입학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덕분에 염료든 뭐든 뚝딱 해결해 주던 똘똘한 소녀 해결사를 잃었지만.
‘숲에 오래 있었더니 약간 쌀쌀하네. 따끈한 차와 간식을 먹어 볼까.’
한스와 마델이 정성스레 챙겨 준 도시락 바구니에서 차가 들어 있는 보온병과 찻잔, 티 푸드를 꺼내 평평한 그루터기 위에 펼쳐 놓고 소리쳤다.
“진, 이리 와서 따끈한 차라도 한잔해요.”
그렇게 숨어 있는 진을 티타임에 초대했다.
“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레이디 혼자 숲에 있도록 내버려 둘 순 없지. 위험하잖아.”
눈물 나는 배려 고맙습니다. 그보다는 결단이나 빨리 내려 줬으면 좋겠는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나 보지?”
진은 약속된 티타임에 초대받은 손님처럼 조금도 사양 않고 은 스푼을 꺼내 찻잔 안을 휘저었다.
“더 정확하게는 버섯 관찰하는 걸 좋아해요.”
“흠, 방탕 황자와 버섯 부인이면 합이 맞는군.”
푸, 하마터면 마시던 차를 진의 면상에 뿜을 뻔했다. 버섯 부인이란 별호를 이번 생에도 듣게 될 줄이야.
“콜록콜록, 그런 재미없는 농담 말고 이 케이크랑 푸딩도 좀 들어 봐요. 한스가 솜씨를 발휘한 우리 집 명물이라고요.”
진이 미동도 않기에 독이 없다는 걸 보여 줄 겸 내가 먼저 케이크를 크게 떠서 입에 넣었다.
‘음, 역시 이 맛이야’와 ‘아차차’가 거의 동시에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사이 내 얼굴은 이미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었다.
느닷없는 윙크 세례를 받은 진은 팔짱을 낀 채 벌레 씹은 표정으로 굳어 있었다.
“오해하지 말아요. 내가 다 설명할 수 있어요.”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어 남은 윙크를 털어 낸 후, 다급하게 말했다.
“우리 집 이름이 플럼 하우스잖아요. 뒷마당에 있는 자두나무 때문인데, 그 나무에서 나는 자두에는 독특한 신맛이 있어서 먹으면 윙크가 절로 나온단 말이죠. 매년 그 윙크 자두로 잼이나 술을 만드는데, 그 잼을 넣은 디저트가 우리 집 명물이라고요.”
속사포처럼 쏟아 놓던 나는 진이 여전히 못 믿는 눈치여서 얼른 덧붙였다.
“아, 어린 시절 당신한테 가져다준다고 약속했던 쿠키가 바로 이 윙크 자두로 만든 쿠키였다고요. 여러 말 필요 없이 한번 먹어 보면 되겠네요. 윙크가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두 번의 생에 걸쳐 같은 설명을 하고 있자니, 좀 귀찮다는 생각도 들었다. 왜 이렇게까지 열심히 변명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윙크가 무슨 중죄도 아니고.
하지만 나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은 손으로 이마를 탁 짚더니 화가 난 듯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미치겠군.”
지난 생에도 그랬지만, 진은 유독 윙크에 엄격하게 구는 면이 있었다. 윙크에 무슨 트라우마라도 있나.
이 씨,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혼순남이면 다야?
진의 과민한 반응에 나는 입술을 댓 발 내밀었다. 그러자 진도 내 불만 가득한 입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윙크 자두라, 키스 자두는 없나?”
“……?”
“물론…… 이번 것도 재미없는 농담이야.”
화난 게 아니었나? 어쨌든 이번 것도 재미없긴 하네.
“키스 자두는 몰라도 키스를 부르는 비가 있다는 얘긴 들어 봤어요. 당신도 알죠? 하말린에만 내린다는 그 골든 레인. 그 비를 맞으면 사람도 막 달달해져서 꿀 키스를 퍼붓게 된다나.”
“골든 레인에 그런 효과가 있다고? 금시초문이군.”
“희한하게도 그렇게 됐다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신기하군.”
이렇게 시답잖은 얘기를 늘어놓던 끝에 진이 돌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디, 사람을 잘못 봤어. 나는 황제가 될 만한 사람이 아니야. 그저 그런 놈팡이에 불과하지.”
“그렇지 않다는 걸 나도 알고, 당신도 알잖아요.”
“나는 그 빌어먹을 혈통에 대해 기대도 신뢰도 없어. 그걸 내세우고 싶지도 않고.”
“혈통 때문에 황제가 되라는 게 아니에요. 통치에 대해선 나도 모르지만, 황제의 손에 수많은 삶이 달려 있다는 건 알아요. 당신은 적어도 누군가의 삶이나 꿈을 거리낌 없이 마수의 먹이로 던져 줄 냉혈한은 아니잖아요?”
“겨우 그런 이유로 황제가 될 수 있을까?”
“겨우 그런 것에 삶 전체가 좌지우지되는 사람들의 심정은 어떻고요.”
“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그래서 적임자라는 거예요. 대단한 사람은 대단하지 않은 사람의 마음을 모르죠.”
다시 숙고의 시간을 가진 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도와줄 거지?”
“그럼요, 당연히요.”
“그리고…… 당신이 등 떠민 거니까, 성공하거든 내 소원 하나 들어줘.”
“여부가 있겠습니까, 폐하.”
“어떤 소원인 줄 알고?”
“뭐라도 다 들어드릴게요.”
“그저 하는 데까지 해 보자는 생각이었는데, 그렇다면 꼭 성공해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