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제정신인 자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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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제정신인 자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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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제정신인 자가 없다
2022.09.02.
“다녀오셨습니까, 보스.”
본부를 나간 지 닷새 만에 돌아온 진을 맞이하며 플록스가 재빨리 눈치를 살폈다.
“수뇌부와 중간 관리자까지 전부 모아. 매우 중요한 논의가 있을 테니.”
진은 돌아오자마자 이런 지시를 툭 던졌다.
“예? 알겠습니다.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플록스가 의아한 눈초리로 조심스레 물었다.
이렇게 많은 길드원이 한자리에 모이는 건 예사롭지 않은 일이었다. 매우 나쁜 일이나 매우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뜻.
혹시? 혼인 사실을 드디어 길드원들에게 공표하시려는 것? 플록스는 기대에 부풀었다. 더 미루셨으면 서운할 뻔했습니다, 보스.
“말보르크와 자네에겐 먼저 의논할 거니까, 버터 삼킨 백상아리가 돌아오거든 내 방으로 모여.”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보스…… 자리를 비우셨을 때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플록스는 자신이 희소식을 이미 알고 있다는 걸 넌지시 내비치기로 했다. 자신의 기대가 맞는지 조금이라도 일찍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은근히 부끄러움이 많은 보스가 괜히 까칠하게 나올 수 있으니, 최대한 별일 아닌 것처럼 운을 떼기로 했다.
“그, 혼인하셨다면서요. 뭐, 보스 나이에 혼인은 특별한 일도 아닙니다만. 그냥 하루 세끼 먹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 아니겠습니까?”
“무슨 헛소리야? 자넨 밥 먹듯이 혼인하나 보지?”
“아, 제가 또 주접을. 그만큼 당연한 일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래도 시큼털털한 부하들한테 말 꺼내기 쑥스럽다 하시면 제가 분위기를 좀 다져 놓겠습니다. 함부로 입방아들 찧지 못하게요.”
진이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플록스가 진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직은 저밖에 모릅니다.”
플록스의 은밀한 속삭임에 진이 미간을 찡그렸다.
“입단속은 자네부터 필요하겠군. 중대한 일을 앞두고 보좌관의 상태가 이 모양이면 곤란한데.”
진의 까칠한 반응에 플록스는 예상했다는 듯 헛기침을 한 번 한 뒤, 다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게는 편히 말씀하셔도 된다고요. 도움이 필요하시면 얼마든지 저를 부리십시오.”
“흠…… 그러니까 자네의 주장은, 내가 누군가와 혼인을 했다? 누구랑?”
“보스, 자꾸 이러시면 저 정말 서운합니다. 물론 그분도 제게 비밀로 해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셨습니다만.”
“그분이라니. 누가 여기 찾아왔단 말인가?”
“예, 새 신부 되시는 그분 말입니다.”
진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플록스를 건너다보았다.
“이봐, 플록스. 갑자기 뭐에라도 홀린 건가? 지금껏 나와 혼인한 사이라며 찾아왔던 여자가 한둘이야? 심지어 애도 데리고 온 적이 있었지. 그런데 새삼 순진하게 구는 이유가 뭐야? 아마추어같이.”
“예? 이번에도 아니라고요?”
“내가 혼인한 기억이 없으니 이번에도 아니겠지.”
“이번엔 정말로, 정말인 것 같았는데.”
“고단수를 만났나 보군.”
플록스는 다정한 눈으로 웃으며 자신의 팔을 반갑게 흔들어 대던 레이디가 가짜라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친누나의 이름이나 자신의 주사쯤이야 작정하면 알아 낼 수도 있겠지만, 그 눈빛과 미소는 결코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는데.
자랑은 아니지만, 자신도 명색이 쟁쟁한 사기꾼 조직의 일원인 데다, 사기꾼들을 상대하는 일엔 잔뼈가 굵었다고 자부하는데 말이다.
정말로 그 레이디가 가짜라면 꽤나 충격이었다. 차라리 보스가 진실을 딱 잡아떼고 있는 거라고 믿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래, 보스가 인정머리 없는 사람인 게 낫지.
‘정신이 조금 불안정해 보이긴 했지. 그래도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는데.’
이미 마음속 형수님 자리에 그녀를 앉히고 정을 듬뿍 줘 버린 플록스로서는 쉽게 포기가 안 됐다. 햇살같이 반짝반짝하던 모습이 보스와 참 잘 어울리는 레이디였는데.
“쓸데없는 소리 작작 하고, 자리 비운 사이 다른 일은 없었나?”
“아, 카를슈테인 공작 측에서 일을 하나 의뢰해 왔습니다.”
“뭐? 카를슈테인?”
진이 서늘한 기색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예, 다른 거래처가 있을 텐데, 좀 뜬금없긴 합니다만. 의뢰 내용도 좀 구질구질한 게…….”
“거절해.”
“네?”
카를슈테인 공작은 황제의 측근이니 진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 해도 좀 과격한 반응이었다. 플록스가 보기에 뭐에 홀린 건 자신이 아니라 보스 같았다.
“의뢰 내용도 안 들어 보시고요?”
“뭔데?”
“공작이 최근에 이혼한 건 아십니까? 희한하게도 이미 이혼 수속을 마친 전 공작부인을 감시하고 뒷조사해 달라는 의뢰입니다.”
“더러운 새끼.”
점점? 또 지나치게 감정 이입한 듯한 이 반응, 뭔가 있는 게 분명한데? 플록스는 수상쩍게 생각하며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그 새끼가 더럽고 치사한 새끼가 맞긴 합니다만, 의뢰를 즉각적으로 거절하는 건 괜한 의심을 사는 행동이 아닐까요.”
진이 생각하기에도 플록스의 말이 타당했다.
거사를 앞두고 있지만 않다면 그깟 의심이야 하든 말든 알 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괜한 빌미를 만들지 않는 것이 안전할 터. 굳이 그 여우 같은 놈의 주의를 끌 필요는 없겠지.
다시 생각해 보니 로제트의 신변 보호를 위해서라도 그 일이 다른 조직이 아닌 자신들에게 떨어진 게 다행한 일이었다.
“자네 말이 맞아, 플록스. 의뢰를 받아들인 척하고 의례적으로 대응해. 정말로 부인을 감시할 필요는 없고. 또 우리 말고 어느 조직에서 부인의 감시를 맡았는지 알아봐. 분명 더 있을 거야.”
“예, 알겠습니다. 부인을 감시하려는 자들을 감시하는 일이 되겠군요.”
“아직 살아 있군, 플록스. 그러고 보니 프러너스 그 자식도 이중 감시의 목적이 있겠군. 굳이 우리한테 일을 맡긴 걸 보면.”
“그럴 가능성이 높겠군요. 걱정 마십시오, 보스. 우리가 꼬고 또 꼬는 데 정평이 난 트위스트 킹 아닙니까.”
“듣도 보도 못한 말이군. 어쨌든…… 고마워, 플록스. 날 말려 줘서.”
진답지 않은 말랑한 인사에 잠시 소름이 돋았던 플록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혼인하신 게 분명해. 남자는 사랑에 빠지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잖아.’
보스의 달콤한 신혼 생활에 대한 미련을 여전히 놓지 못하는 플록스였다.
* * *
복귀한 말보르크 백작과 플록스를 앞에 두고 진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반역자가 될까 해.”
이 말만으로 다 이해했다는 듯, 세 사람 사이에 무서운 침묵이 흘렀다.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건 말보르크였다.
“찬성. 어차피 자넨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반역자로 낙인찍혔잖아. 오히려 그에 걸맞은 행동이 너무 늦은 셈이지. 하여간 게으르기는.”
플록스도 눈을 빛내며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저도 찬성, 대찬성입니다! 아니, 전 보스가 결단을 내리시기만을 기다려 왔습니다. 우리가 뭐가 아쉬워서 피하고 도망 다니고 웅크리고 있어야 하는지, 전 그게 늘 불만이었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기왕에 미운털이 박혔다면 그에 맞는 미운 짓을 해 줘야 도리지.”
두 사람의 반응에 진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것 봐, 철들 좀 들어. 이게 무슨 뒷골목 패싸움인 줄 알아? 나랑 같이 죽자는 얘기다, 이 자식들아. 어째 말리는 녀석이 하나 없어?”
“같이 죽자니, 왠지 흥분되는군. 후후, 그거 사랑 고백인가?”
“저도, 보스를 위해 이 한목숨 바칠 수 있다면 더없는 영광이겠습니다!”
“하여간, 바보 같은 놈들.”
이 바보 놈들과 같이 죽기 싫어서라도 꼭 황위를 손에 넣어야겠다고 진은 결심했다.
“수뇌부를 모아 의견을 들어 볼 거야. 중요한 건, 원치 않는 사람에겐 절대 강요하지 않는다는 거다. 목숨이 걸린 문제인 만큼. 게다가 본인의 목숨만 걸린 게 아니란 건 알고 있겠지.”
반역자에 대한 처단은 잔혹하고 철저했다. 노인부터 갓난아기까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절멸. 황위 쟁탈전이 일어나는 동안은 물론, 끝난 이후로도 한동안 대량 학살이 이어지곤 했다.
“실패하는 순간, 우리 자신과 우리와 관련된 모든 것이 이 세상에서 깨끗하게 사라지게 될 거다.”
길드원들이 모인 날, 진은 그들 앞에서도 똑같은 말을 했다.
“가족이나 연인이 걱정되는 사람은 눈치 볼 것 없이 떠나도 좋다. 여러분의 선택에 그들의 미래가 달려 있으니 심사숙고하도록. 적에게 밀고하는 등 적극적인 배신행위에는 적절한 응징을 가하겠지만.”
역시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진에게도 긴장된 순간이었다.
솔직히 진 본인조차도 무엇이 옳은 것인지 확신할 수 없던 그때, 걸걸한 목소리들이 앞다투어 생각을 털어놓았다.
“보스도 참, 우리 같은 놈들에게 다른 가족이 어디 있습니까. 찝찝하긴 해도 여기 있는 저 시커먼 놈들이 내 가족이요.”
“너나 없지, 이놈아. 난 가족이 있어서 되레 그 반정인지 반역인지를 해야겠소.”
“구린 귀족들 뒤나 닦는 일도 지겹습니다. 한 번 사는 인생, 폼 나는 짓 좀 해 봅시다.”
“난 생각 같은 거 하기 딱 귀찮은 사람이오. 보스가 하라면 그냥 하겠소. 보스가 하자는 덴 다 이유가 있겠지.”
“나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보스의 골상이 딱 황제가 될 상이거든.”
“좋은 정보 고맙네. 그럼, 나도 보스에게 걸지.”
“아직도 걸 게 남았냐, 이 도박꾼아?”
“아니, 오히려 좀 솎아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명색이 황제가 되실 분의 근위대나 기사단 역할인데. 저 무식한 놈은 빼 버리시오!”
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이 많은 사람 중에 안 된다고 말리는, 정신 똑바로 박힌 자가 한 명도 없다니.”
* * *
드디어 진의 보좌진에 합류하게 됐다. 첫인사를 나누는 날,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안녕하세요, 레이디 M이에요. 진 황자 전하가 황위를 되찾는 그날까지 저도 힘껏 돕겠습니다.”
인사가 끝났는데도 페가수스 직원들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특히 플록스는 나를 보고 흠칫 놀라더니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려 댔다.
나는 은밀히 플록스에게 눈을 찡긋거리며 신호를 보냈다.
‘비밀 지켜 주는 거죠? 알다시피 위험한 상황이라.’
내 눈짓에 플록스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뭔가 큰 깨달음을 얻은 듯 나를 향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순간적으로 눈시울이 붉어진 듯 보였는데, 뭔가 또 착각하고 혼자 감동받은 것 같았다.
「부하들을 속이는 건 내키지 않아.」
진은 끝까지 이런 연극을 벌이는 걸 탐탁지 않아 했다.
「그럼 어떡하라고요. 내가 전 카를슈테인 공작부인이라고 밝혀요? 지금 같은 예민한 시기에 조직원들이 날 어떤 눈으로 보겠어요. 그렇다고 내가 전생을 기억한다고 말할 수도 없잖아요.」
나는 또 과장되게 두려움에 떠는 시늉을 하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카를슈테인에서 내가 당신과 함께 있는 걸 알아 봐요. 단번에 이상한 낌새를 채겠죠. 아마 날 당장 잡아다 가둘 거야.」
그렇게 박박 우겨서 나는 버섯의 정령과 통하는 신비주의 책사 ‘레이디 M’이 되었다. 애정하는 제국 최고의 배우 ‘이상하고 아름다운 미스터 N’을 따라 한 것임은 물론이다.
“레이디 M은 주로 심리전이나 여론전에 도움을 줄 거다.”
진이 어색한 말투로 소개했다.
“그런데 두 분은 어떻게 알게 되신 겁니까? 버섯 정령과 통하는 신비주의 책사요? 그런 것도 있습니까? 머리털 나고 처음 들어보는 얘깁니다.”
눈치 없고 똑똑한 직원 하나가 의문을 표하자, 나나 진보다도 플록스가 먼저 과도하게 눈을 부라리며 나섰다.
“스탠리, 그보다 맡긴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 보고가 더 시급한 일 아닙니까, 지금!”
“예? 그냥 적당히 파악만 하면 된다고…… 아, 알겠습니다.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잠깐의 호기심을 품은 죄로 플록스에게 괜한 구박을 당한 그는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스콜피온스 놈들이 레이디 앰브로시아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는데, 레이디는 토버마리에 있는 컨트리 하우스와 영지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는 일 없이 평범하게 지낸다고 합니다. 오늘 오전, 방금까지도 정원에서 화초를 관찰하고 야외 식탁에서 식사를 한 게 전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