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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믿음이라는 도박 (82/110)


#82화. 믿음이라는 도박
2022.09.12.



 
반역자들의 황제로 추대되는 건 세상에서 가장 위태로운 표적이 되는 일이었다. 현 황제도 가만있지는 않을 테니. 더욱이 잔혹하기로 이름난 카이저 바카리스라면.

아무런 야망도 없는 척, 방탕 황자 행세를 할 때도 진 시더우드는 늘 목숨을 위협받았고, 지난 생에 그는 결국 몇 차례나 암살당했다.

카이저 바카리스와 그 측근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진 시더우드의 약점을 찾으려 할 것이다.

애석하게도 진에게는 그들이 공략할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가족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무엇도, 하다못해 아끼던 고양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흩어져 버린 지 오래였다.

그런 그에게 연인이나 아내가 있다는 사실이 적에게 발각된다면?

플록스는 뒷일을 상상하기도 싫었다. 자신도 그러한데, 보스 본인은 오죽하겠는가.

그런 이유로 보스는 결코 실토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성혼했음을. 목숨보다 소중한 존재가 생겼음을.


“그것이 참사랑이 아니면 뭐겠습니까.”

“알았으니까 걸핏하면 울먹이지 좀 말게.”

플록스의 닭살 돋는 해석에 말보르크가 진저리를 치다 의문을 표했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사람을 전장 한복판으로 불러내나? 오늘 작전 회의 있는 거 알지? 레이디 M이 주재하는.”

“그거야 바로 곁에서 지켜 주고 싶은 마음 아니겠습니까. 서로가 서로를 말이죠.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전까지는 그래도 여기가 가장 안전한 곳이기도 할 테고요.”

“내 눈엔 어디까지나 전략적인 동지로 보이는데 말이지.”

“그게 바로 보스가 의도하신 바죠!”

레이디 M이란 여자, 알고 보면 사이비 종교의 교주 같은 거 아니야? 눈 뜬 플록스 코 베어 가는?

말보르크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확신에 차 늘어놓는 플록스를 보며, 그녀가 전략적 동지조차 아닌 사기꾼일 거라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하필 사기꾼을 등쳐먹는 사기꾼이라니. 상도덕도 없이.

버섯 정령과 통하는 신비주의 책사? 설정부터가 이렇게 허무맹랑한데, 그걸 또 덥석 받아들이는 인간들하고는. 진이고 플록스고 뭔가에 씐 게 분명하지.


‘이게 다 여자 경험이 부족한 탓이야. 둘 다 어리숙해서는.’

두 숙맥을 대신해 자신이라도 정신 바짝 차리고 레이디 M을 잘 감시해야겠다고, 간만에 건실한 생각을 하는 말보르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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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곧 몽펠리를 칠 겁니다.”

봐라. 믿을 만한 소리를 해야 믿지.

레이디 M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말보르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 보니 사기꾼조차도 못 되었다.

말보르크뿐만이 아니었다. 작전 회의에 모인 대부분의 참석자가 황당한 표정이었다.

이곳은 페가수스의 전략 회의장. 모의가 사전에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수뇌부 중에서도 극수소의 인원만 참석한 자리였다.

심리전과 여론전을 돕기 위해 영입됐다는 레이디 M. 그녀가 오늘 중요한 작전을 발표한다더니, 서두가 저러했다.

몽펠리 후작가라면 황제의 측근 중에서도 최측근, 황제파의 핵심인 가문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지닌 이 가문을 아예 황제의 외척이라 부르기도 했다.

선황비 중 한 사람인 마르멜 대부인은 현 황제를 친아들처럼 키운 인물인데, 대부인의 친정이 바로 몽펠리였다.

몽펠리 후작 또한 황태자 시절부터 황제를 비호했던 인물이고.

그뿐 아니라 아예 황제의 친모가 실은 마르멜 대부인이라는 소문도 공공연하게 퍼져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몽펠리를 황제가 제거할 거라고? 모친과 외조부 같은 이들을?’

그야말로 제국의 권력 구도도, 정치 상황도 모르는 무지한 발언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무슨 죄목으로요? 후작의 가르마 모양이 황제의 마음에 안 들었답니까?”

침묵을 깨고 누군가 물었다. 물론 비꼬는 말이었다.


“반역죄로 멸문시킵니다.”

레이디 M의 담담한 대답에 다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한숨을 쉬거나 뒤통수만 긁어 댔다.

그도 그럴 것이, 제국의 모든 가문이 반역을 한다 해도 끝까지 반역하지 않을 최후의 가문이 몽펠리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불신 가득한 분위기를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던 레이디 M이 이윽고 설명에 들어갔다.


“여러분, 믿기 힘드실 겁니다. 도무지 납득이 안 가는 전개일 거고요. 납득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황제의 사고방식은 보통 사람과는 완전히 다르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몽펠리를 치는 게 황제에게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상식적으로 접근해서는 결코 황제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황제의 출생에 관한 소문은 다들 암암리에 알고 있지요? 핏줄이라는 이유로 몽펠리가는 방심할 테고, 황제는 가장 먼저 없애고 싶어 할 겁니다.”

사람들이 다시 웅성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는 반응이었다.


“황제의 그런 성향이 우리로선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지지 귀족을 얼마나 확보하느냐에 이번 거사의 성패가 달려 있는 만큼, 황제의 폭군 기질을 지지자를 늘리는 데 십분 이용할 거니까요.”

레이디 M의 올리브색 눈동자가 기묘한 빛을 발했다.


“페가수스의 인맥을 총동원해 귀족들에게 정보를 흘리십시오. 황제가 곧 몽펠리 후작가를 멸문할 것이라고.”

모두가 눈동자만 굴리는 가운데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결국 말보르크 백작이 나섰다.


“죄송합니다만 레이디, 우리도 믿기 힘든 얘기를 다른 곳에 퍼뜨릴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솔직히, 황제의 미치광이 기질을 납득할 수 없는 것은 둘째 치고, 레이디의 주장을 어떻게 신뢰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해가 가고도 남는 말이었다.

이 예언에 가까운 정보를 성공적으로 귀족 사회에 퍼뜨리고, 그 예측이 실현되는 모습을 널리 보여 주는 것. 거사의 첫 단추이자 반드시 넘어야 할 중대한 시험대였다.

페가수스의 정보력이 귀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도, 레이디 M이 조직원들의 신뢰를 얻는 데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지난 생에 이미 일어난 사건임을 알고 있는 로제트야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무모하기만 한 모험으로 보일 터였다.


“사람들은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고, 예측 가능한 미래에 신뢰와 안정감을 느끼죠. 우린 은밀하면서도 정확한 정보를 쥐고 있는 이미지로 귀족 사회에 파고들고 우리의 영향력도 과시할 겁니다.”

레이디 M의 작전은 이러했다.

먼저 언뜻 믿기지 않는 정보를 귀족들에게 흘리고 제거할 가문 명단, 즉 살생부가 황제의 손에 있다는 소문을 퍼뜨려 불안감을 조장한다.

정말로 황제가 몽펠리가를 한 방에 날리는 사태가 벌어지면, 혼비백산한 귀족들에게 ‘다음은 아마도 당신 차례일지 모르겠다’는 암시를 준다.

똥줄이 탄 귀족들이 방탕 황자에게 줄을 대려고 접근하면 요령껏 구워삶는다.

이런 회유 작전이 가능한 것은 이미 귀족들이 황제의 폭정과 기행에 대해 두려움과 불만을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 오랜 시간 권력과 이권을 독점해 온 세 가문, 몽펠리, 카를슈테인, 페리에를 향한 불만과 시기도 깊은 터였다.

물론 이건 그야말로 첫 미끼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귀족은 그 사건 하나로 쉽게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다. 양쪽에 줄을 대고 끝까지 간을 볼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은 살 만하니까.

미치광이 황제와 그 측근들이 불편하고 못마땅하지만, 그렇다고 지금껏 누려 온 부와 권력을 팽개치고 가문의 존폐까지 내걸 만큼 삶이 버거운 것은 아니니까.

물론 그런 귀족들의 등을 떠밀 다음 작전이 준비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당장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부터 설득하는 것이 급선무인데.


“대체 황제가 몽펠리를 칠 거라 주장하시는 근거가 뭡니까?”

바로 저 질문에 답변할 말이 궁색하다는 게 문제. 전생에 봤다고 말할 수도 없고.


“제가 버섯의 정령과 통하는 신비주의 책사 아닙니까. 버섯 정령과 영적인 교류를 나누다 알게 됐습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버섯이 제 눈과 귀가 되어 주지요.”

“버섯…… 정령이요?”

“예, 제아무리 황제라도 주변에 버섯 몇 개는 있는 법이죠.”

망했다. 레이디 M은 자신을 바라보는 의심 가득한 눈들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나라도 안 믿겠네.


“나도 같이 들었어. 버섯 정령의 전언.”

그때 진이 선뜻 나섰다.

자네까지? 말보르크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지만, 진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진지하게 강조했다.


“똑똑히 들었네. 그러니 레이디 M의 말을 믿어 주게.”

조직의 보스가 저렇게까지 말하자 조직원으로선 계속해서 의구심을 표할 수도 없었다.

뒷골목 사기꾼에 건달인 그들을 지금껏 하나로 묶어 놓은 것은 보스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렇다고 저 여자까지 무턱대고 믿어야 하나? 버섯 요정같이 깜찍한 용모를 지니긴 했지만, 저렇게 요상한 소리를 늘어놓는데?

게다가 보스의 태도도 뭔가 평소와는 달랐다. 역시 버섯 요정처럼 깜찍한 외모 때문에?

말보르크를 비롯한 참석자들은 걱정 반, 불만 반이 되어 속으로 투덜거렸다.

동종업계 사기꾼이거나 스파이일지도 모르잖아?

더군다나 거사를 앞둔 중차대한 시점에 제대로 된 검증도 없이 저렇게 막중한 임무를 수상한 외부인에게 맡기는 건 너무 위험천만한 일이지!

가만, 검증? 그러고 보니 우리에겐 훌륭한 검증 절차가 있잖아?

부하들의 혼란과 동요를 알면서도, 로제트의 사정 역시 아는 진은 조금 무리하게 밀어붙였다.


“레이디 M의 작전대로 진행해 보는 걸로 하지. 어차피 금방 결과가 드러날 테니. 실없는 무리가 될지, 실세가 될지 곧 알 수 있겠지.”

 

 

* * *



“레이디 M, 잠시 좀 볼까?”

회의가 끝나고 진이 나를 따로 불렀다. 아마도 방금 회의에서 보인 어설픈 처신 때문이겠지?

이번엔 어쩔 수 없이 진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 일을 제대로 증명해 내기만 하면 앞으로는 좀 수월해질 거라 생각한다.


“연기력이 뛰어나던데요? 부하들에게 거짓말하기 싫다더니.”

진 덕분에 이번 고비를 넘겨 고마웠으면서, 괜히 민망해진 나는 농담하듯 말했다.


“드디어 시작됐군.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당신 말이 틀리기를 조금은 바라고 있어. 정말로 이게 최선인가?”

“어쩌면…… 당신에겐 최선이 아닐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분명한 건 당신 주변의 사람들, 당신이 아끼고 지키고 싶을 사람들에겐 최선이라는 거예요. 해야겠죠?”

“해야겠군.”

진이 장난스럽게 장단을 맞춰 주는가 싶더니 할 말이 있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왜요?”

“당신은 아직 숨기고 싶은 게 많은 것 같군. 전생에 있었던 일들을 선별적으로 털어놓는 느낌이랄까.”

“…….”

“말하기 싫은 게 있는 것 같아. 예를 들면 나와의 관계 같은 것도.”

“……그래요, 사실 밝히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어요.”

“또한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기다리지. 당신이 말하고 싶을 때까지.”

진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지만, 다 알고 있는 것만 같은 눈빛이었다.

순간적으로 그 눈빛에 흔들려 혼자 고민하고 결정하고 짊어지려던 결심을 내던지고 응석받이가 되고 싶어질 정도였다.

똑똑. 마침 누군가 우리가 있던 방의 문을 노크한 덕분에 자제심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차와 과자를 좀 가지고 왔습니다. 원래 이런 것을 준비해 두는 곳이 아니라서 레이디 눈에 부족함이 많겠지만 널리 이해해 주십시오.”

험상궂게 생긴 직원 하나가 억지로 웃느라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솥뚜껑 같은 손으로 가지고 온 다과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빈말이 아닌지 진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웬일이야? 우리 이런 거 안 하잖아.”

“어휴, 레이디와 저희가 같습니까. 구색만 겨우 갖췄습죠.”

직원이 물러가자 진은 미간을 좁힌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일이군.”

“내가 특별한 대우를 받는 건가 봐요?”

이 말엔 대꾸도 없이 진은 미심쩍은 얼굴로 먼저 찻잔에 손을 뻗어 차를 몇 모금 마셨다.

진의 목울대가 움직이며 미간이 몇 차례 좁아졌다 펴졌다 하더니, 그가 돌연 나를 향해 황급히 손을 들었다.


“로제트, 그 차 손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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