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해 (83/110)


#83화.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해
2022.09.16.



16633132330812.jpg

“왜요? 독이에요? 은 스푼은 왜 안 썼어요! 아무리 본부 안이라고 해도 그렇지!”

부하가 내온 차를 마신 진이 심상치 않은 반응을 보였고, 놀란 나는 소리를 꽥 지르며 진에게 달려들었다. 해독! 해독법이?

16633132330818.jpg

“아니, 독이 아니야.”

진이 목이나 심장을 움켜잡는 대신 관자놀이를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

16633132330812.jpg

“독이 아니라고요? 괜찮아요?”

나는 진의 안색을 살폈다. 그의 잿빛 눈동자가 미묘하게 달라 보이긴 했지만, 정말로 큰 이상은 없어 보였다.

독이 아니라니 천만다행이었다. 정말이지 내가 먼저 심장마비로 19회차 갈 뻔했네.

16633132330812.jpg

“독이 아니면 차 속에 대체 뭐가 들어 있었던 거예요? 혹시 알고 있어요?”

내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대답이 없기에 눈을 들어 보니, 진이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보고 있는 게 아닌가.

16633132330812.jpg

“……왜요? 난 아무 짓도 안 했어요.”

16633132330818.jpg

“아니, 했어.”

갑자기 굳어진 분위기를 풀어 볼까 싶어 썰렁한 농담을 던졌는데, 돌아온 진의 대답이 요상했다.

16633132330818.jpg

“당신과 나는 특별한 사이였을 거야. 아니, 그런 사이였기를 원해. 그래야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들이 설명이 되지.”

16633132330812.jpg

“……?”

16633132330818.jpg

“알고 싶어. 전생에 내가 당신을 지켰는지.”

16633132330812.jpg

“왜 이래요, 진? 그보다 당신…….”

떨고 있었다. 진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16633132330818.jpg

“솔직히 두려워. 당신이 지금 여기 있는 건, 아마도 내가 당신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그런 일이 반복될까 봐 두려워 미치겠어.”

진도 두려웠구나. 자신을 믿고 따르는 수많은 사람과, 또 그 사람들에게 의지하고 있는 이들 때문에. 또다시 그들을 지키지 못할까 봐.

16633132330818.jpg

“안아 줘.”

진답지 않은 주문이었지만,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다가가 그의 머리를 꼭 안았다. 그가 무너지지 않도록, 내 마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지탱할 수 있도록.

16633132330812.jpg

“진, 당신은 나를 지켰어요. 아니, 나만 지켰어요. 그런데 나 혼자 남겨져서는 살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이번엔 부디 당신 자신도 지키겠다고 약속해요.”

16633132330818.jpg

“그렇지만 똑같은 일이 내가 아닌 당신에게 일어났다면 나 역시 살 수 없었겠지. 그러니까 내가 당신을 지킬 수 있게 해 줘.”

대체 뭘 안다고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진의 말에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저 차에 전생의 기억을 일깨우는 효능이라도 있는 걸까?

16633132330818.jpg

“로제트, 이 자주색 점에 입 맞추고 싶어.”

진이 돌연 내 왼쪽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쓸며 말했다.

애틋한 감상에 젖어 있던 나는 이 갑작스럽고 끈적한 말에 화들짝 놀라 그의 머리를 놓고 조금 물러났다.

뭐야……?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진이 한 말들이 느닷없고 오락가락한 면이 있긴 했다.

그건 그렇고, 이 점을 벌써 알고 있다고?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점을 보면서 그런 음흉한 생각까지 했다고? 지난 생의 진은 한참 동안 이 점의 존재조차 몰랐는데.

진은 다시 나를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16633132330818.jpg

“당신을 볼 때마다, 떠올릴 때마다 짐승이 되는 기분이야. 올리브색 눈, 밀밭 같은 머리칼, 당신은 맛있어 보여.”

이 와중에 식성은 변함이 없네.

16633132334583.png

 
내가 혼란에 빠진 사이, 진이 이번엔 비스듬히 눕다시피 한 자세로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시선의 각도나 눈빛이 부담스러워 나는 조금 더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16633132330812.jpg

“진, 아까부터 당신 좀 이상해요. 지금 뭐 하는 거예요?”

16633132330818.jpg

“다양한 각도에서 당신을 보고 싶어. 이렇게도 보고, 저렇게도.”

뭐라고? 이거 뭔가 상당히 잘못된 거 같은데?

16633132330818.jpg

“물론 가장 보고 싶은 각도는 침대에 누운 당신을 내려다보는, 읍!”

나는 진의 자존심과 체면을 보호하기 위해 손으로 그의 입을 황급히 막았다.

계속 떠들도록 내버려 두면 둘 다 후회할 일이 생길 것 같았다.

16633132330812.jpg

“대체 저 차에 뭐가 든 거야?”

아무래도 속마음을 여과 없이 말하도록 사람을 조종하는 성분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니지, 그럼 저 말이 진심이긴 한 게 되잖아.

마음에도 없는 아무 말이나 지껄이게 만드는 차인가. 그게 아니면 이번 생의 진이 저런 말을 할 리가 없잖아?

한참 혼란에 빠져 있던 나는, 진이 잠잠해졌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진을 보았더니 양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양쪽 귀가 빨개져 있었다.

잠시 후 진이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16633132330818.jpg

“나가 줘, 로제트. 나중에 얘기해.”

진의 심정을 너무나 알 것 같아서 나는 찍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방을 나왔다.

* * *

히포의 매 발톱.

히포 지역에서 나는 매 발톱 모양의 약초에 주술을 입힌 것으로, 주로 신전에서 순결한 서약을 할 때 입에 물거나 그것을 우린 차 등으로 입을 헹군다.

천연의 약초에 약한 신성력을 불어넣어 만들 수 있는데, 서약자가 거짓을 고하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쓰였다.

여기까지는 나도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공작부인 시절 신전의 명예 성녀직인 ‘세인트 안젤라’를 오랫동안 맡아 왔으니까.

하지만 고고한 세인트 안젤라가 모르는 뒷이야기도 있었다.

은퇴한 신관들이 생계를 위해 히포의 매 발톱을 만들어 암암리에 파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많은 수요가 발생하는 곳이 뒷골목이었던 것.

정보 길드나 암살 길드처럼 폐쇄적인 조직에서 조직원을 검증하는 데 이 약초가 널리 쓰인 것이다.

이 히포의 매 발톱은 거짓을 말하지 못하도록 방지하는 것은 물론, 나아가 상대방을 향한 욕망을 드러내도록 복용자를 일시적으로 조종했다.

페가수스에서도 새로운 길드원을 영입할 때 히포의 매 발톱을 이용한 검증 의식을 거쳤다. 첩자나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접근한 자들을 걸러 내기 위한 조치였다.

주로 술에 우려서 지원자와 보스인 진이 공평하게 마셨다.

입단이나 거래를 위한 관계가 대부분이었고 다소 경직된 자리였으니, 지금까지 특별한 사고가 일어난 적은 없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사내들끼리의 일이니 대뜸 첫눈에 반했다거나, 이상형이라고 마음을 고백하는 황당한 일 같은 건 있을 리 만무…… 딱 한 번밖에 없었다고 한다.

진과 나의 차에 히포의 매 발톱을 넣자는 의견을 낸 건 말보르크 백작이었다.

16633132346131.jpg

「새로운 인물이 조직에 들어올 때 반드시 거치던 절차 아닌가. 더구나 지금처럼 거사를 앞둔 삼엄한 시기에는 더욱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지. 레이디 M도 예외가 아니야. 아니, 전략과 관계된 일을 하니 누구보다 더 확실한 검증이 필요하지.」

원래는 조직원들 앞에서 검증 의식을 거쳐야 했지만, 그건 플록스가 기를 쓰고 만류했다고 한다. 그 바람에 그저 진과 내가 함께 있는 방 안에 찻상을 넣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고.

플록스는 자신이 알고 있는 나와 보스의 비밀이 이 의식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될까 봐 그랬을 것이다.

비밀을 지켜 달라고 한 내 부탁을 저버리지 않고 애써 준 그가 고마웠다.

말보르크는 내 입장에서는 좀 얄미웠지만 ― 나중에 마담 밤비랑 연애하는 데 확 재 뿌릴까? ― 어쩌면 그야말로 진의 충실한 친우인지도 몰랐다.

어차피 레이디 M의 진짜 정체를 진이 알아채게 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을 테니, 말보르크는 플록스의 말을 못 이기는 척 들어주었겠지.

진은 이미 숱하게 히포의 매 발톱을 맛보았을 테니, 차를 들이켜는 순간 상황을 알아챌 것이고.

결과적으로 진의 충실한 친우 말보르크의 꾀는 내가 아닌 진에게 흑역사를 안기고 말았지만.

의문스러운 것은 왜 진이 내가 차 마시는 것을 막았느냐는 점이었다. 진은 마시자마자 차의 정체를 알았을 테고, 안 그래도 내게 궁금한 것이 많았는데 말이다.

차를 마시기 직전에도 내가 전생의 일, 그중에서도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것을 모두 말하지 않고 숨기고 있다고 의심하지 않았는가.

오히려 자신의 의문을 풀 좋은 기회였을 텐데 말이다.

그 일이 있은 후, 사흘 만에 겨우 진을 만났을 때 나는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참고로, 히포의 매 발톱을 섭취한 사람은 술에 취하거나 최면에 걸린 사람과 달리, 주술에 걸렸을 때 자신이 한 말이나 행동을 모두 기억했다.

진, 지금 참 힘들겠다.

진은 내 물음에 화가 가시지 않은 듯한 얼굴로 무뚝뚝하게 말했다.

16633132330818.jpg

“기다리겠다고 했잖아. 당신이 말할 때까지. 그런 식으로 당신의 비밀을 듣게 되는 건 나도 탐탁지 않아.”

나는 여전히 딴 곳에 시선을 둔 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16633132330812.jpg

“진, 고마워요. 그날 당신이 한 말은 잊을게요. 못 들은 걸로 할게요.”

16633132330818.jpg

“이미 들은 걸 어떻게 못 들은 걸로 해? 그냥 들은 걸로 해. 난 욕정에 헐떡이는 쓰레기야.”

16633132330812.jpg

“무슨! 난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16633132330818.jpg

“고맙네.”

진은 아마도 수치심 때문이겠지만, 계속해서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투덜거렸다.

휴, 정말 다행이지. 내가 그 차를 마셨으면 큰일 날 뻔했다.

내가 입을 열었으면, 진이 한 말들은 귀엽게 느껴질 정도였겠지. 수위를 한참 넘었을 매운 발언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찔했다.

그리고 조금, 아니 조금보다 좀 많이 흐뭇했다. 진이 이번 생에도 내게 그런 감정을 품었다는 것이. 앞일이야 어떻게 되든, 기분이 좋은 건 좋은 거였다.

이래서 사람 사이의 관계는 0에서 시작되는 게 아닌가 보다. 진은 지난 생을 기억하지 못해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 생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게 분명했다.

진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가 이 세상으로 넘어올 때 그의 마음과 감정이 나비처럼 나를 따라 함께 넘어온 걸까.

우리는 어떻게 될까. 어떻게 돼야 할까.

* * *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의 귀족 사회를 흔드는 사건이 터졌다.

황제가 몽펠리 후작가에 반역죄를 물은 것이다.

현 후작과 가문의 후계자뿐만 아니라 몽펠리 가문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이들은 누구도 화를 피할 수 없었다. 마르멜 대부인을 포함해서.

제국에서 가장 잘나가던 권세가가 한순간에 잔혹하게 멸문당하는 것을 목격한 귀족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얼마 전 은밀히 전해 듣고서 우습게 여겼던 어떤 정보를 떠올리며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이 상상하기도 힘든 사태를 미리 예고한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도도 아닌 동부의 도시 그리치를 근거지로 삼고 있는 정보 길드, 페가수스에서 흘러나온 얘기였다. 방탕 황자로 유명한 진 시더우드가 이끄는 조직이었다.

안 그래도 성정이 난폭하고 잔인한 황제를 두려워하던 귀족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더욱 겁을 집어먹게 되었다.

몽펠리와 함께 살생부에 오른 가문이 더 있다는 소문까지 돌자 더욱 불안에 빠졌다.

16633132346131.jpg

‘황제의 폭정을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어야 합니까? 백성들도 한계에 달한 것 같습니다. 전하의 영지에서 봉기라도 일어나면 어쩌실 셈입니까.’

정보원들은 넌지시 이런 말도 흘렸다.

16633132330812.jpg

“물론 이 정도로 귀족들이 쉽게 움직이지는 않을 겁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레이디 M이 후속 작전 회의에서 말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조직원들의 눈빛은 처음과는 많이 바뀌어 있었다.

16633132330812.jpg

“이 여세를 몰아 다음엔 제국민들을 공략할 겁니다. 제국민의 분노는 비겁한 귀족들에게도 황위 교체의 정당성과 명분을 제공할 겁니다.”

마수에 관한 황제와 카를슈테인 공작의 음모를 제국민들에게 폭로할 계획이었다.

이 작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면 필요한 것이 하나 있는데.

마침 울린 탈라리아 메신저를 보고 레이디 M은 활짝 웃었다.

16633132330812.jpg

“왔네요. 썩은 걸 보면 달려들지 않고는 못 배기는 하이에나가.”

 

16633132351954.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