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그 남자의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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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그 남자의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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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그 남자의 부탁
2022.09.23.
“황제에 대해 내게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나?”
저렇게까지 심각할 필요가 있을까 싶게 심각한 얼굴로 진이 물었다.
사정상 진에게 말하지 못한 사실이 몇 가지 있긴 했지만, 황제에 대한 것만은 숨길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 대해서는 나도 아는 바가 거의 없으니까.
진과 그의 출생에 얽힌 비밀을 알고 있긴 하지만, 그걸 내가 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산 시간이 더 길었다.
17회차에야 미고와 모얌의 억지와 닦달 덕분에 겨우 알게 되었을까.
내가 황제의 비밀을 안다는 사실을 카를슈테인 공작가에서 전략적으로 철저히 숨겼을 테니, 황제도 몰랐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지금까지 그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었으니.
“그런 거 없어요. 황제와 직접적으로 얽힌 적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나도 모르는 사실이 더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혹시 빠뜨린 것이 있나 찬찬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황제에 관해 내가 미미하게나마 알고 있는 것도 모두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것에 불과했다.
황제를 만나고 온 프러너스가 투덜거리는 소리나 사교계에 떠도는 소문을 통해 그가 매우 난폭하고 잔인하며 저급한 성정을 지녔음을 파악한 정도?
그가 진이나 다른 형제들에게 해 온 짓들을 봐도, 지난 생에 하말린 왕세자를 납치한 것이나 자신의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백성들을 아무렇지 않게 마수의 아가리에 던져 넣으려 한 걸 봐도, 통치자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최악이라는 것?
그렇지만 나와 직접적인 연관성은 찾기 힘든데……. 아, 황제의 흔적을 진이 감지한 적이 한 번 있었지.
“하나 생각났어요. 전생에 하말린으로 피신했거든요. 나를 해치려는 자들이 내 뒤에 줄줄이 붙었다고 해서.”
“뭐?”
“그때 당신이 그랬어요. 누군가의 의뢰를 받은 암살 길드의 자객에 황제의 자객, 황후의 자객까지 붙었다고.”
황당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던 진이 물었다.
“당신, 대체 전생에 뭘 하고 다닌 거야? 자객의 규모만 보면 나보다 더 거물인데? 거기다 황후의 자객? 황후도 건드렸다는 건가?”
“내가 황후를 건드린 게 아니라, 가만있는 나를 황후가 건드린 거라고요!”
누구 때문에 내가 그런 수모를 당했는데? 다시 생각해도 짜증이 울컥 솟아서 눈을 희번덕거리며 받아쳤다.
지난 생에 진이 결혼 선물로 미스터 N의 뒤태, 아니 무대를 보여 주었기에 이제 여한은 없다만.
“미안. 아마도 그랬겠지. 당신이 걱정돼서 한 말이었어.”
이번 생에도 사과는 빠르군.
진은 내가 한 말을 토대로 추리해 보려는 건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다 입을 열었다.
“정말로 당신도 모르는 뭔가가 있을지 모르지. 가령 황제가 당신을 남몰래 좋아했다거나. 그래서 황후가 당신에게 자객을 붙인…….”
“집어치워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추리는. 요즘은 좋아하는 여자한테 자객을 붙이나 보죠?”
“워낙 변태 같은 인간이니…….”
“흥, 황후가 왜 나를 거슬려 했는지 정말 몰라서 그래요? 어디 낱낱이 얘기해 봐요?”
나와 플록스가 둘을 갈라놓으려고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데. 몹쓸 상상이나 하고.
“해 봐.”
응? 걸리는 게 있을 테니 눈을 피하거나 말을 돌리거나, 아니면 또 순순히 미안하다고 할 줄 알았는데. 해 보라니.
게다가 이렇게 얼굴까지 바짝 디밀고, 눈까지 빛내면서. 얼굴 함부로 쓰지 말란 말이야!
뭐, 자기는 결백하고 당당하니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여유인가? 열차에서 밤새 애타게 황후의 이름을 불렀던 일을 확 폭로해? 그래도 과연 지금처럼 여유가 넘치실지.
“아냐, 안 할래요.”
“왜? 해 보자니까?”
“기분만 나빠질 것 같아서. 좋지도 않은 과거를 곱씹을 필요 없잖아요.”
진은 왠지 아쉬운 표정이었다. 마침 황제에 관한 기억이 하나 더 떠올랐기에 나는 그쪽으로 말을 돌렸다.
“아, 그리고 하나 더. 합방일마다 손찌검을 당하는 쪽은 황후가 아니라 황제라면서요? 매 맞는 황제라니.”
진은 그야말로 충격받은 얼굴로 눈을 껌뻑였다. 말하고 보니 느닷없이 고수위인 것 같아 얼른 덧붙였다.
“당신이 해 준 얘기예요.”
“내가 당신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니. 정말 궁금하군. 대체 어떤 상황에서 그런 소릴 한 건지.”
“…….”
하말린에 제국의 외교사절로 온 프러너스가 굳이 우리 부부를 찾아와 헛소리를 떠벌렸던 상황에서요.
당신이 황후 때문에 마음이 좋지 않은 것 같아 위로했더니, 황후는 무서워해야 할 사람이지 걱정할 사람이 아니라며 저 얘길 해 줬잖아!
그러고 보니 진은 그때도 프러너스가 여전히 내게 마음이 있는 것 같다며 불쾌해했지. 은근히 질투 많은 남자란 말이지. 그때도 참 귀여웠는데.
아무리 그래도 황제와 엮는 건 엉뚱한 데로 가도 너무 갔네요.
이번 생에 황제가 모습을 드러낸 진짜 이유는 뭘까. 내 머릿속에 자신의 비밀이 봉인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걸까.
하지만 그 이야기야 공공연한 비밀 아니었던가. 나라는 패는 카를슈테인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용하려 들 때 의미가 생기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프러너스는 애초에 가문을 위한 방패막이가 필요해 나와 결혼한 것인데, 내가 아무리 싫다 한들 그 쓸모가 사라진 것은 아닐 텐데 왜 이혼하려 한 걸까.
지난 생에도 비슷한 의문을 가졌지만, 그의 이유가 무엇이든 별로 중요하지 않았기에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이혼을 바라다가 갑자기 철회해서 짜증이 났었지.
처음엔 아젤리아를 진심으로 사랑해서라고 이해했지만, 이제 와 생각하면 그건 프러너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유였다.
나를 대체할 패를 마련했기 때문일까. 예를 들면 마수 부활 같은. 아니면 혹시…… 자진해서 나를 황제에게 넘겨주고 안위를 보장받은 것은…….
“그건 아닐 거야.”
내 추리에 이번엔 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랬으면 당신에게 굳이 감시를 붙이진 않았겠지. 더욱이 정보 길드를 두 곳이나 접촉해서.”
“그런가……. 하긴 덕분에 뷰글라스가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분명한 건, 당신이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야.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어. 사전 작업 지휘가 끝나는 대로 당신은 이 일에서 손 떼. 피신할 곳을 알아볼게.”
“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이유는 서로 다르지만.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한 후엔 진에게서 멀리멀리 달아날 계획이었으니.
“미안해. 당신을 또 위험에 빠뜨린 것 같아서.”
“진, 잊었어요? 이 일은 내가 먼저 제안한 거예요. 그러니 이 정도 위험을 감수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그보다 당신을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겠다는 조직원들이나 잘 챙겨요.”
이번 생에 내린 새로운 결정으로 지난 생에 희생당한 몇몇 사람을 구할 수 있을 테지만, 반면에 새로운 희생자가 생겨날 수 있겠지.
착잡한 심정으로 진을 보았더니 진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로제트, 난 소중한 것들이 사라지는 일에 익숙해. 당신이 들려준 내 출생의 이야기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빼앗긴 것도 있고, 눈앞에서 보란 듯이 빼앗긴 것도 있지.”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걸까. 진의 눈빛이 애잔했다. 더 들으면 그를 떠나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워질 정도로.
“그래서 아예 소중한 것을 만들지 않기로 결심했어. 괜히 나 때문에 날개가 꺾이게 될 것들을.”
“가해자와 피해자를 혼동하지 말아요, 진.”
“그래, 맞는 말이야. 청승을 떠는 건 이쯤에서 그만둬야 할 텐데. 그런데 지금도 소중한 것을 놓치고 있는 듯한 느낌이 자꾸만 들어.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
“오히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길인걸요.”
“나 지금 실수하는 거 아닐까? 내가 후회하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줘.”
“……후회가 내 전문이라 쉽진 않겠지만, 그래요, 나도 노력해 볼게요.”
대답은 이렇게 했지만 진의 말은 오히려 내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꼭 내 선택을 꿰뚫어 보고 하는 말 같아서. 그럴 리는 없는데도.
* * *
로제트가 황제의 표적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렇게 심장이 내려앉을 수 있는 걸까. 뒷골목의 주인인 나, 진 시더우드가.
가짜 레이디 앰브로시아가 습격을 당했다는 보고를 듣고 스스로도 과하다 싶게 동요했고, 그렇게 동요한 것에 혼란스러웠다.
물론 황제의 표적이 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잔인함을 안다는 이유만으로 그토록 당황해서 그녀가 있는 곳으로 한달음에 달려온 걸까.
전생에 로제트와 나는 아마, 부부였을 것이다. 못해도 부부 같은 연인이었을 것이다.
내가 혼전 순결에 관한 말을 했다는 건, 그런 뜻이기 때문이다.
전생에 그녀는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나는 청혼하기 위해 그 말을 꺼냈겠지. 그 말의 용도는 그런 것이니까.
문제는 로제트가 그 일을 밝히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일까. 그녀가 왜 나와의 일을 지우려는 걸까.
나를 싫어하거나 미워한다면, 나를 모른 척하거나 멀리하면 됐을 텐데. 그랬다 해도 어차피 나는 아무것도 모를 테니.
무엇보다 처음 토버마리에서 로제트와 맞닥뜨렸을 때, 그녀의 눈빛에서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나와 닮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그래서? 전생의 나와 특별한 관계였던 여자니까 이번 생에도 특별한 감정을 품는 게 당연한 거라고?
모르겠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진짜 내 감정인지, 그 자식의 감정인지.
말이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마치 이런 느낌이다.
전생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그녀를 부탁하는 것 같은 느낌.
그러게 그때 잘하지, 이 자식아.
전생의 진 시더우드는 황제보다 로제트의 남편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했고, 그 일을 후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황제가 되려고 이 고생인 거겠지. 정말이지 짐스러운 자식.
* * *
보스와 레이디 M을 비밀 방에 남겨 두고 눈치껏 빠져나온 플록스는 시간도 때울 겸 화원 주인 서머에게 말을 걸었다.
“요즘 장사는 잘됩니까?”
“요즘만 같으면 살 만하지요. 플로라리아 기간 아닙니까.”
“아, 그렇군요. 지금이 플로라리아였군요. 어쩐지 길에 꽃다발을 안고 가는 아가씨들이 여럿 눈에 띄더라니.”
“저희 같은 꽃가게 주인한테는 가장 중요한 대목이지요.”
서머가 콧노래를 부르며 말했다. 함께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플록스는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서머를 재촉했다.
“제일 아름답고 귀한 꽃들로 꽃다발을 만들어 주십시오. 아주 화려하고 커다란 걸로. 지금 당장 부탁합니다.”
플록스의 갑작스런 부탁에 서머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말했다.
“드디어 플록스 경도 생긴 겁니까, 애인이? 보스를 보좌하느라 늘 바쁜 것 같았는데, 그래도 할 건 다 하고 사십니다.”
“그게 아닙니다.”
“아, 장사가 잘되는 건 좋은데, 이거 외로워서 살겠습니까. 나만 빼고 다 연애라니. 어쨌든 축하드립니다, 플록스 경.”
“그게 아니라…… 보스가 쓰실 꽃다발입니다.”
“예?”
“저 비밀 방 안에 계신 두 분,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두 분이 잘 이어지셨으면 하는 게 제 바람이라서요.”
특수한 상황 때문에 신혼 생활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보스 부부에게 플록스는 소소한 선물을 드리고 싶었다.
플로라리아는 꽃의 여신 플로라를 기리는 축제로, 젊은 남녀가 화관을 쓰고서 함께 춤추거나 봄밤 데이트를 즐기곤 했다.
마음이 있는 이성에게 꽃다발을 선물하는 것도 유행이었다.
보스 성격에, 더욱이 지금처럼 정신없는 시기에 플로라리아를 챙겼을 리는 없을 테고.
‘보스, 이런 걸 잘 챙기셔야 뒤탈이 없습니다. 유부남 길드원들이 기념일을 잊었다가 두고두고 구박받는 걸 지겹도록 봤거든요.’
보스의 가정을 지켰다는 사실에 플록스 홀로 뿌듯함을 느끼고 있는데, 서머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야, 보좌관님은 보스의 꽃다발까지 챙기십니까?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이를 어쩝니까. 보스의 꽃다발은 어제 보스가 직접 주문하셨는데요.”
“네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크고 비싼 꽃다발을 준비하라고 이르셔서 저쪽에 준비해 두었습니다.”
“…….”
이럴 수가. 보스가, 그 보스가 정말로 꽃다발을!
플록스는 또다시 눈시울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은 충격이고 조금은 감격이었다.
‘네, 그렇지요, 그래야 가정에 뒤탈이 없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할 건 다 하고 사십니다, 보스. 정말 잘하셨습니다, 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