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어울리지 않게 꽃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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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어울리지 않게 꽃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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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어울리지 않게 꽃놀이
2022.09.26.
크고 아름다운 꽃다발을 양팔 가득 안은 나는, 풍성한 꽃송이들 옆으로 목을 빼고 눈으로 진에게 이유를 물었다.
진은 그것도 모르냐는 듯 뻣뻣하게 말했다.
“화원을 접선 장소로 빌려 썼으면 응당 사례를 해야지.”
“아, 그렇죠. 사례를 후하게 하는 편인가 봐요. 꽃이 참 많기도 하네요.”
오해 사기 쉬워 슬픈 화원 주인 서머가 다가와 물었다.
“레이디, 꽃다발은 마음에 드십니까? 제가 나름 신경 써서 솜씨를 부려 본 것인데요.”
“이렇게 예쁜 꽃다발은 처음 봐요. 감각이 좋으시네요.”
“영광입니다, 레이디.”
자기가 만든 꽃다발을 그 누구보다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던 서머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레이디의 얼굴이 꽃 더미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나 보다.
“꽃다발이 워낙 커서 배달을 해 드릴까도 생각했지만, 플로라리아 기간이어서 직접 전해 드렸는데. 불편하시면 숙소로 옮겨 놔 드릴까요?”
“서머 씨 말대로 아쉽긴 하네요. 이 환상적인 꽃다발을 거리로 들고 나가 여러 사람에게 자랑해야 하는데. 나만 보기 아깝잖아요.”
“레이디를 위한 꽃다발이니 레이디께서 만족하시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곁에서 지켜보던 진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 서머에게 맡기는 게 좋겠어. 거리로 들고 나가면 꽃다발이 혼자 걸어가는 줄 알겠어.”
꽃향기가 좋긴 했지만, 나도 앞이 안 보여 답답하던 터라 못 이기는 척 서머에게 꽃다발을 다시 넘겼다.
“서머, 조경이나 꽃꽂이 강좌 의뢰도 받나요?”
“그럼요, 꽃과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삼삼오오 둘러앉아 이야기 나누는 시간만큼 행복한 건 없지요.”
“다음에 내가 몇 사람 모아 올게요. 꽃꽂이 강좌 좀 부탁해요. 꽃다발을 보니 감각이 남다른 것 같아서요. 함께 차 마시면서 수다도 떨고요.”
서머가 선이 굵고 한쪽 뺨에 기다란 상처가 있는 얼굴로 씨익 웃으며 흔쾌히 수락했다.
“기왕 저자에 나오셨으니 두 분 축제 구경 좀 하고 오시지요. 어차피 평민 복장으로 나오시지 않았습니까?”
지금까지 신기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만 있던 플록스가 권했다. 신분을 숨기기 위해 모두 평민 복장으로 나오긴 한 터였다.
“재밌을 거 같긴 한데…….”
“무조건 재밌습니다!”
플록스가 나와 진의 등을 떠밀었다.
그렇게 해서 거리로 나오긴 했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하나?
보릿자루 두 포대처럼 서 있다 주위를 둘러보니 머리에 화관을 쓴 청춘 남녀가 많이 보였다. 플로라리아의 기본 드레스 코드가 화관인 모양이었다.
마침 길에서 화관을 파는 아이가 있기에 불러 세웠다.
“아가, 화관 두 개만 주겠니?”
“어떤 걸로 하실래요?”
“네가 골라 줄래? 우리한테 어울리는 걸로.”
아이는 나와 진을 가만히 올려다보더니 신중하게 화관 두 개를 골라 건넸다. 나는 화관을 골라 준 안목까지 포함해 값을 치렀다.
그리고 그중 하나를 진의 머리에 씌우려고 다가섰는데.
“하지 마.”
그때까지 지켜만 보던 진이 질색을 하며 물러섰다. 내가 인상을 쓰자 진도 질세라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나더러 지금 머리에 그런 꼴사나운 걸 쓰라고?”
“꼴사납다뇨? 예쁘기만 한데. 봐요, 다들 즐겁게 쓰고 다니잖아요.”
“하여튼 난 싫어. 이리 줘 봐. 당신이나 씌워 줄 테니.”
“다들 잘만 쓰고 다니는데, 웬 유난일까.”
우리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어디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가요, 정말 열심히 만든 거거든요, 훌쩍. 비록 들꽃으로 만들었지만 세상에서 제일 예쁘게 만들려고 흑, 고민을 많이 해서, 훌쩍…….”
화관을 판 아이가 작은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었다.
나는 진을 한껏 쏘아보며 소리쳤다.
“당신! 뭐예요! 어린아이나 울리고!”
“…….”
결국 진은 머리 위에 앙증맞은 들꽃 화관을 얹을 수밖에 없었다.
‘잘생기니까 뭘 해도 어울리네. 꽃의 남신 같구먼. 그러게 곱게 말할 때 진작 얹을 것이지. 괜히 아이 마음에 상처만 남길 뻔했잖아.’
나는 진의 뻣뻣하게 굳은 얼굴을 올려다보며 웃음을 삼켰다.
하늘엔 어느덧 노을이 지고 있었다. 특별한 무엇이 없어도, 봄날 저녁 특유의 공기와 젊은 남녀의 웃음과 계절이 주는 묘한 설렘만으로 거리는 흥청거렸다.
점차 어둠이 내리고 거리에 내건 등에 하나둘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악단이 연주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금세 떠들썩한 춤판이 벌어졌다.
평민들의 춤은 귀족들의 춤과는 동작이고 분위기고 많이 달랐다. 훨씬 자유분방하고 생기가 넘쳤으며 관능적이었다.
춤추는 무리에 휩쓸린 진과 나는 마치 흥겨움의 파도 위를 떠다니는 것처럼 정신없이 밀리고 부딪히고 붙었다 떨어졌다.
처음엔 낯선 분위기가 신기하기도 하고 즐겁기도 했지만, 점차 힘에 부쳤다. 이들의 에너지를 더는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았다.
‘큰일 났네. 이러다 파도 아래로 가라앉겠어.’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가는데, 순간 내 몸이 둥실 떠올랐다. 뭔가가 나를 위로 쑥 뽑아 올린 느낌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춤추는 사람들의 머리가 내 눈 아래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꽤 높고 전망이 좋은 곳, 진의 오른쪽 어깨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진이 두 팔을 위로 뻗어 내 손을 잡고 내가 떨어지지 않도록 지탱하고 있었다. 꼭 목말을 탄 것과도 비슷한 민망하고 괴상한 자세였다.
“내려 주…….”
내려 달라고 하기도, 이대로 버티고 앉아 있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나 보기보다 무거울 텐데?
진이 힘들 것 같고, 자세가 민망하기도 하고, 보는 눈들도 그렇고 해서 내려가고 싶은 마음 반.
있다 보니 이보다 더 편할 수가 없고, 시야도 좋아서 모르는 척 기대고 싶은 마음 반.
그런 마음을 알아챘는지, 진이 먼저 고개를 젖히고 소리쳤다.
“불편해도 잠시만 그렇게 있어. 쥐방울만 해서 잃어버리겠잖아.”
“쥐방울이라니…….”
한참 그렇게 저벅저벅 가던 진은 사방이 고요한 곳에 이르자 나를 사뿐히 내려 주었다.
“휴, 이제 좀 살 것 같네. 정신 사나워서, 원.”
“그런대로 즐거웠어요. 내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지.”
“내가 꽃구경하기 더 좋은 곳을 아는데. 조용한 곳.”
“가 볼래요.”
진은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나도 나란히 걸었다.
어디선가 어둠을 뚫고 짙은 꽃향기가 풍겨 왔다. 라일락 같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달이 유난히 크고 둥글었다.
“어딘데요?”
“솜꽃 밭. 달빛 아래 솜꽃이 볼만하거든.”
“솜꽃이라면 솜을 만드는 재료인 그 솜꽃?”
“맞아. 하얗고 폭신한 솜뭉치같이 생긴 꽃들이 너른 벌판에 끝없이 피어 있어. 엄밀히 말하자면 열매지만 예쁜 꽃 같아 보이거든.”
“솜꽃은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하지만 상상만으로도 예쁠 것 같아요. 솜 같은 꽃이라니, 눈송이 같기도 하겠네요.”
“오늘은 달도 환해서 더 운치 있을 것 같군.”
달빛 아래 꽃밭도 궁금했지만, 진이 아껴 둔 장소라니 더욱 기대됐다.
.
.
.
솜꽃 밭이 없었다.
주변을 한참 동안 빙빙 돌아봤지만 솜꽃 밭은 없었다.
“이상하다. 분명 이 근처였는데. 오랜만이라 길을 혼동한 걸까? 내가 길눈이 어두운 편이 아닌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진은 마침 지나가던 농부에게 길을 물었다.
“이 근처에 솜꽃 밭이 있지 않았나?”
농부가 우리를 흘깃 훑어보더니 무심하게 말했다.
“그거 일전에 엎어버렸지, 아마.”
“뭐? 그럼 지금은 거기 뭐가 있나?”
“파를 죽 심었지, 아마?”
농부가 일러 준 곳으로 가 보니 정말로 광활한 파밭이 펼쳐져 있었다. 진은 그 광경 앞에 망연자실 서 있다 약간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 하필이면.”
“음, 그런데 이렇게 보니 파꽃도 예쁜데요? 봐요.”
달은 파밭에도 어김없이 아름다운 자태로 떠 있었다.
“달빛 아래 빛나는 파꽃들이 꼭 작은 불꽃 같지 않아요?”
파밭엔 하얀 불꽃놀이가 한창이었다.
이렇게 봄밤의 달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지난 생에 공작저를 떠나기 전날 밤 내 방 창문 너머로 달을 올려다보던 때가 떠올랐다.
창문을 타고 넘어온 봄바람과 꽃향기가 왠지 서러웠지.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 성큼 다가온 봄이.
지금도 파밭에서 달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괜히 싱숭생숭했지만, 그때처럼 외롭지는 않았다. 내 곁에 이 사람이 있어서?
문득 내가 그때와 많이 다른 곳에 와 있다는 걸 새삼 자각했다. 신기하기도 하고 감회가 새롭기도 하고 뿌듯한 것 같기도.
그리고 그때와 또 다른 점이 있다면.
“풍경은 이쪽도 아름답지만, 파 냄새는 장난 아니네요.”
꽃향기 대신 파 냄새가 진동한다는 점.
진도 이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는지, 미안함으로 한껏 찌푸렸던 미간을 펴고 그제야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지금까지 아무것도 못 먹었네. 배고프지?”
“어, 그러네. 내가 먹는 걸 깜빡하다니! 이상하게 배가 하나도 안 고파요. 파 냄새를 너무 맡아서 뭔가 배불리 먹은 기분?”
“여기까지 끌고 와서 괜히 고생만 시켰네. 좋은 거 보여 주려고 했는데.”
“참나, 은근히 고지식하다니까. 농담이에요, 농담. 난 고마운데요? 즐거웠고요.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예요.”
빈말이 아니었다. 나한테는 진과 함께한 소소한 추억 하나가 무엇보다 소중하고 절실했다. 앞으로 그 추억들을 안고 살아가야 할 테니.
달빛 아래 빛나던 풍경보다 달빛을 머금은 당신의 옆모습을 더 열심히 눈에 담고 있었다는 걸, 당신은 모르겠지.
* * *
“밤비, 여기까지 와 주어서 고마워요.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정말로 응할 줄은 몰랐어요.”
나는 또 마담 밤비를 골치 아픈 일에 끌어들이고 말았다. 내가 가진 인맥이란 게 빤했으니까.
밤비는 원래 북부의 기사 출신이었다. 헤어 살롱을 운영하기 전에는 한 귀족 가문에 속한 기사였고, 꽤 무훈을 떨친 실력자였던 것으로 안다.
밤비는 제도 미용계에서 ‘수정 검날 손’으로 불렸다. 지금의 예술적인 가위질 솜씨는 바로 그런 특이한 이력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출신이 그렇다 보니 처음 제도에 정착할 때 텃세를 많이 겪었다.
그때 내가 밤비를 도와주었던 인연으로 지금까지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이렇듯 잘 우려먹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생활도 슬슬 지겨워지려 해서요. 옛날 생각도 나고요. 간만에 몸 좀 풀어 볼까 해서 왔어요.”
밤비는 내가 어려운 부탁을 할 때마다 흔쾌히 도와주면서도, 이처럼 생색을 내는 법이 없었다.
황위 탈환 계획을 밤비에게 밝히고 도움을 청했다. 그녀라면 밀고 같은 건 걱정할 필요 없었기에.
“아이, 설마 내가 밤비한테 직접 검을 들게 하겠어요?”
“그럼요? 재미없게 입이나 털고 후방이나 맡으라고 하면 저 그냥 갈 거예요.”
“후방이라면 후방이긴 한데, 생각보다 재미는 있을지 몰라요.”
“뭔데 이렇게 뜸을 들이실까.”
밤비가 커다란 밤색 눈으로 어서 실토하라고 나를 압박했다.
“무기 개발하는 것 좀 도와줘요.”
“네? 무기?”
“그냥 무기는 아니고 마도구. 밤비의 고향인 북부 왕국이요, 마도구가 그렇게 발달했다면서요?”
“흠, 마도구 개발은 아시다시피 돈이 많이 들 텐데요.”
“나 이혼할 때 위자료 넉넉하게 챙겼거든요. 그 돈 뒀다 뭐 하겠어요? 전남편 잡을 무기 만들어야지.”